남사당은 1900년대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집단으로 흔히 유랑집단(流浪集團)의 한 류파로 본다. 남사당이란 소리와 술, 몸을 팔던 여자들의 집단인 사당패에 비교하여 꼭두쇠(우두머리) 밑으로 연희자 십 수 명이 있는 유랑예인집단으로, 일정한 거소가 없는 독신 남자들만의 남색사회이다. 간혹 여자 1∼2명이 낀 적도 있으나 이것은 남사당패 말기에 들어와서야 있었던 일이다.

 

남사당패들은 풍물․버나․살판․어름․덧뵈기․덜미 등 6가지 놀이로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안성의 남사당패는 서운면 청룡리 인근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하였다. 안성남사당패가 유명해 진 것은 〈바우덕이〉라는 여자꼭두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성남사당패의 꼭두쇠인 바우덕이는 사내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미모와 옹골찬 소리가락, 줄타기 재주가 당내 최고의 경지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당대 최고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최고 스타였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예인 바우덕이

 

남사당 최고인 꼭두쇠 바우덕이(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암덕(岩德)이기 때문에 岩을 바위로 풀어 바우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는 남사당패의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로 안성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염불, 소고춤, 풍물, 줄타기 등 온갖 남사당 기예를 익혔으며, 뛰어난 기량으로 세상에 나가 판놀음을 걸판지게 떨쳐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였다.

 

타고난 천부적 재능과 미색을 겸비한 총기로 남사당패의 꼭두쇠로 추앙받은 바우덕이는 꼭두쇠로 활동하며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여 남사당패의 전성기를 이루어냈다. 남사당패의 구성은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동짐꾼 등 40~50여명으로 구성되어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의 놀이를 행하였다.

 

남사당패의 조직

 

꼭두쇠는 패거리에서 대내외적으로 책임을 지는 우두머리로서, 그의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다. 조직된 패거리는 획일적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일사불란하고 엄격하였다. 50명 안팎의 인원을 필요로 하는 그들은 그 충원방법으로 고아나 가출아 등을 받아들였고 빈곤한 농가의 어린이를 부모의 승낙을 얻어 받아들이거나 유괴하는 경우도 있었다.

 

곰뱅이쇠는 꼭두쇠를 보좌했는데, 곰뱅이란 남사당패 은어로 <허가>란 뜻으로 어느 마을에 갔을 때 놀이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사전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 보았다. 뜬쇠는 각 연회분야의 선임자로서 그들이 노는 놀이의 규모에 따라 해당놀이의 예능을 익힌 몇 사람씩의 가열을 두게 되며,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두게 된다. 삐리는 뜬쇠들의 판별에 의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연회에 배속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해 1가지씩 기예를 익힌 뒤에 가열이 되는데 이들은 가열이 되기 전까지는 여장(女裝)을 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남사당패는 숫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조직을 이루고 있었는데, 예외도 있었지만 숫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한마당의 놀이판을 벌이는 데는 일정한 보수는 없으며,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놀고는 다음날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주는 노자와 이밖에 머슴이나 한량들에게 자기 몫의 암동모를 빌려주고 해우채를 받는 것이 수입의 전부였다.

 

 

안성 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기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해 김복만 - 원육덕 - 이원보 - 김기복으로 이어졌고 해체와 결성을 거듭하면서 끈질긴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본래 남사당패의 풍물놀이란 웃다리가락을 주축으로 하여 진풀이, 무동, 벅구놀이, 채상놀이, 선소리 등의 몸재주와 묘기에 소리(산타령, 새타령, 모찌는 소리, 논매는 소리등)까지 곁들이니 훌륭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풍물이란 우리나라 특유의 민중 음악이며, 남사당패에 의하여 떠돌이 판굿 모임에 맞게 놀이판이 풍부하게 짜인 것이다. 안성의 남사당 풍물놀이는 남도 농악에 비해 무동의 수가 많고 5무동을 비롯한 3무동, 4무동, 단무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펼쳐지며 최고의 기량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7무동이 있어 뛰어난 기량을 떨치고는 했다. 현재 안성의 남사당은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단장/김기복)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남사당의 연희종목

 

남사당 놀이판에는 놀이 전에 줄타기의 줄을 매고 꼭두각시놀음의 포장막과 마당 한가운데에 버나․살판․덧뵈기 등을 연희할 멍석을 5∼6장 깐다. 여기서 벌어지는 <남사당놀이> 6종목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⑴ 풍물 : 첫 번째 놀이인 풍물은 웃다리가락을 주축으로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무동(새미)․채상(열두발 상모) 등을 가미하여 연희적 요소를 더하였다. 인사굿부터 시작하여 돌림벅구․선소리터․당산벌림․양상치기․허튼상치기․오방(五方)감기․오방풀기․무동놀림․네줄백이 등의 판굿을 놀고, 판굿이 끝난 다음에는 상쇠놀이․징놀이․북놀이․장구놀이․시나위․새미받기․채상놀이 등을 한다.

 

 

⑵ 버나 : 버나는 쳇바퀴·대접․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를 말하는데, 단순히 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사람인 버나잽이와 받는 소리꾼인 매호씨(어릿광대)가 서로 주고받는 재담과 소리가 있어 극성(劇性)이 짙었다. 돌리는 물체에 따라서 대접버나․칼버나․자새버나․쳇바퀴버나 등으로 분류된다.

 

 

⑶ 살판 : 오늘날의 덤블링을 연상케 하는 살판은 앞곤두․뒷곤두․번개곤두․자반뒤지기․팔걸음․외팔걸음․외팔곤두․앉은뱅이․팔걸음․수세미트리․앉은뱅이․모말되기․숭어뜀 등의 순서로 논다. 살판쇠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잽이의 장단에 맞춰 정해진 차례대로 곤두질을 치는 것이다. 살판이란 말은 곤두박질을 할 때 불을 가득 담은 화로를 안고 재주를 넘다가 죽는 수도 있어 ‘살판이냐, 죽을판이냐’를 가늠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전한다.

 

 

⑷ 어름 : 어름이란 줄타기를 말하는데, 남사당패의 어름놀이는 초청에 의해 관가나 양반집에 불려 다닌 <광댓줄>과는 달리 일정한 보수 없이 서민을 상대로 순연했기 때문에 민중 취향으로 짜였다. 어름산이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줄 위에서 가창(歌唱)하고 잽이의 장단에 맞춰 진행되는 것으로 버나․살판의 경우와 같다.

 

 

⑸ 덧뵈기 : 덧뵈기는 다른 지역 탈놀음에 비해 의식성(儀式性)이나 행사성(行事性)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지역민의 갈구와 흥취에 영합하였다. 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의 4마당으로 짜여 있는데, 먼저 첫째마당에서 놀이판을 확보하고, 둘째마당에서 외세(外勢)를 잡고, 셋째마당에서는 내부 모순을 불식하고, 끝마당에서 외래문화를 배격하는 내용이다.

 

 

⑹ 덜미  :맨 마지막 순서이며, 한국에서 유일하게 전하는 전통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을 남사당패들은 <덜미>라 부르고 있다. 이는 <목덜미를 쥐고> <몽둥이를 쥐고> 놀린다는 장두인형(杖頭人形)을 뜻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지배층의 지배구조와 그 횡포에 대한 저항,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통해 외래종교의 비판, 서민들의 우직한 염원(念願) 등을 희화화(戱畵化)한 것으로 40여 개의 인형과 10여 개의 소도구에 의하여 각기 독립적으로 연관된 2마당 7거리를 놀았다. 2마당 7거리는 박첨지마당(박첨지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평안감사마당(매사냥거리․상여거리․절 짓고 하는 거리) 등인데, 채록 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다람쥐들은 우리나라 숲 속 전역에 걸쳐서 살아간다. 그러나 청설모가 있는 곳에서는 다람쥐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청설모의 공격을 받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람쥐는 일반적으로 쥐목(―目 Rodentia) 다람쥐과(―科 Sciuridae)에 속하는 설치류를 가리키는 말로, 다람쥐라는 이름은 때때로 꼬리에 털이 많고 나무에 사는, 사람에게 친숙한 종들에 한정되기도 한다.

 

다람쥐는 전 세계 각지에서 숲이나 사막·초원·툰드라 등 다양한 서식지에 살고 있다. 약 50속 260종이 있으며, 이들 가운데는 땅다람쥐와 마못쥐, 줄무늬다람 등이 있다. 나무에 사는 다람쥐들은 민첩하며, 나무에 뚫린 구멍 또는 잎이나 나뭇가지로 지은 둥지에 살며 대개 1년 내내 활동한다. 땅에 사는 다람쥐들은 굴에 살며 대부분 겨울잠이나 여름잠을 잔다. 다람쥐는 주로 채식을 하며 씨앗이나 견과(堅果)를 좋아한다. 몇몇 종은 곤충을 먹거나, 동물성 단백질을 곁들여 먹는다. 암컷은 1년에 한 번 또는 여러 번 새끼를 배며, 한배에 1~15마리를 낳는다. 회임기는 22~45일이다.(다음 백과사전 인용)

 

 

사과를 먹는 다람쥐

 

아마도 이 다람쥐 한 마리를 찍어 놓은 것이 꽤 시간이 흐른 듯하다. 이 녀석 배가 고팠는지 절집 마당에 까지 내려왔다. 먹을 것이 없으면 가끔 절집 공양간 근처를 배회하기도 한다. 일부러 사과를 한 알 놓아두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선뜩 덤벼들지를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리를 옮겨 놓은 사과를 찾아다니면서 먹기 시작한다. 다람쥐 한 마리를 구경하는 즐거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제격인 듯하다.

 

국보 제198호는 단양 적성비다. 중앙고속도로 단양 휴게소에서 보면 뒤편에 성곽이 보인다. 신라 때 쌓은 단양적성이다. 그 성곽 위편 산봉우리 쪽으로 올라가면 적성비각이 있고, 그 안에 국보 제198호인 적성비가 있다. 그리 크지 않은 위편이 떨어져 나간 돌에는, 촘촘히 글이 새겨져 있다.

 

적성비에는 신라가 삼국시대에 죽령을 넘어 고구려 영토였던 적성을 빼앗은 후, 이곳의 백성들을 선무한 표적으로 세운 것이다. 선무란 자국의 국민이나 점령지 백성들에게 본국의 시책을 이해시키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을 말한다.

 

 

점령지역을 선무한 비석

 

당시 진흥왕이 명하여 신라의 척정(국경 개척)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사람 야이치의 공훈을 표창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이와 같이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하겠다는 정책의 포고 내용이다.

 

이 적성비에는 국왕의 명령을 받은 고관들 10명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 진흥왕 때 많은 공을 세운 이사부, 비차부, 무력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비는 신라 진흥왕 5~11년인 545~550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알지 못하면 참 답답하다. 그 동안 이 적성비를 보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먹었다. 비를 찾아가려고 단양군 단성면으로 들어가니 비탈길이 장난이 아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아예 올라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런데 찾아갈 때마다 비가오거나 눈이 날린다. 결국엔 몇 번을 찾아갔지만 허탕을 치고 말았는데, 이번에 오르고 보니 고속도로 휴게소에 나가는 통로가 있다. 왜 진작 몰랐을까?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참 무지는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이게 국보야, 무슨 국보가 머 이래”

 

돌로 된 길을 따라 오르려니 발가락에 통증이 심하다. 날마다 무리를 해서 걷고 또 걸었기 때문인가 보다. 적성 안내판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저만큼 적성비가 보인다. 비각 안에 있는 적성비. 방학이라 부모를 따라 온 아이들이 적성비를 들여다보고 있다.

 

한 아이가 “에게 이게 국보야? 무슨 국보가 이래“ 아이는 국보라고 하니 대단한 것인 줄 알았나보다. 곁에서 보던 부모들은 할 말이 없는지 당황한 눈치다. 국보를 보자고 데리고 올라왔는데, 아이가 보기에는 작은 돌 하나에 글씨만 있으니 실망도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이 어디 문화재의 가치 등에 대해 알려주고는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문화재의 현실에 가슴이 미어진다. 

 

“국보는 크다고 지정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볼품이 없어도, 그 가치가 중요하면 국보로 지정을 하는 것이지”

 

좁은 식견이나마 아이에게 이해를 시켜주고 싶었다. 아이를 붙들고 그늘에 앉아 찬찬히 설명을 해주었다. 어느새 부모님들도 곁에 와 앉았다. 아이에게 적성비가 왜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문화재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하나하나 설명을 하다가 보니 아이도 깨닫는 바가 있는 모양이다.

 

 

말을 마치고 적성을 돌아보려고 내려오려니 부모님들이 고맙다고 한다. 아이에게 문화재를 보여주려고 올라왔는데, 막상 설명을 하려고 하니, 아는 바가 없더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다. 전문가가 아니고, 우리 것에 대해 애착이 없다면 그저 구경만 하고 돌아선다. 그것이 당연하니까 말이다.

 

적성을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신라인들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다. 잠시 돌아본 듯한 시간이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돌아갈 길이 바쁘다. 이번 겨울에는 눈 쌓인 적성을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 아주 편한 길로 말이다.

계룡산 구룡사지 탐방기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389번지 외 4필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39호 공주구룡사지(公州九龍寺址)로 지정이 되어 있다. 구룡사지가 있는 상신리는 계룡산의 북으로 뻗은 중턱에 절터가 있으며 이 지역을 법당골, 부도골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에는 많은 석조물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주변에서 〈구룡사〉 라고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구룡사터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의 안쪽 절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는 당간지주가 서 있으며, 주춧돌과 장대석, 부도의 받침돌이 남아 있었는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는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로 보아 백제 후기나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계룡산 북쪽의 절 구룡사

 

구룡사지는 계룡산의 사방에 있는 사찰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에는 동학사, 서에는 갑사, 남에는 신원사, 그리고 북에는 구룡사가 있다. 구룡사를 제외한 나머지 절집들은 난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건재하고 구룡사만 사라진 셈이다.

 

구룡사가 있던 공주시 상신리는 계룡산 자락 골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대전 유성에서 공주 공암 쪽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다. 이곳을 박정자 고개라고 부르는데 조금 더 가면 온천리에서 좌측으로 계룡산 쪽으로 난 길이 있다. 먼저 나오는 곳이 하신리 마을이고 그 곳을 지나면 상신리 마을이 나온다. 대전, 공주를 가는 길에서 상신리 까지는 6km 정도가 된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대전에서 방송일을 할 때 취재를 하려고 몇 번 들렸던 상신리마을은 참 운치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안길은 흙길에 돌이 듬성듬성 박혀있고, 마을의 담장은 돌로 쌓아 놓아서 그 위로 담장이가 타고 오르는 것이 퍽이나 시골스럽고 인상적이었던 곳으로 기억이 난다.

 

바위 위 덩그마니 앉은 소나무 한 그루

 

상신리는 찾아 들었을 때 처음 만나는 것은 바로 개울 곁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솟아있는 한 그루 소나무 때문이었다. 그 소나무가 어찌나 그리도 생명력이 있고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이번 길에도 그 소나무는 그렇게 한 결 같이 바위 위에 뿌리를 박고 서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그 싱싱하던 푸름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바위에는 깊게 무엇인가를 적어 놓은 듯한 흔적들도 희미하다. 아마 장수를 위해 이름이라도 적어 놓은 것은 아닐까?

 

바위를 지나면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 산자락에는 천하대장군이 좌측 개울가에는 지하대장군이 솟대와 함께 서 있다. 상신리는 산제(山祭)도 함께 지내는데 이 마을은 산제를 정성들여 지내지 않아서 염병이 돌았다고도 하고, 마을의 장승터에서 나무를 자른 사람이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그래서 정월 열나흩날이 되기 전에 미리 장승이 있는 곳에 금줄을 치면 그날부터 외지인은 상신리로 들어갈 수가 없다.

 

마을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제관을 선출하면 그날부터 금기를 지키게 된다. 우리 풍속에는 제를 지내는 제관들의 금기는 통례적으로 부부가 합방을 금지하고, 비린것과 날것을 먹지 않으며, 매일 냉수에 목욕을 하고, 출타를 금하는 등 까다롭게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상신리의 장승은 양편에 2기씩 서 있는데 눈을 치켜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복판에는 각각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이라고 묵서를 해 놓았다. 장승을 지나면 마을 첫 집이 식당이다. 그 모서리에는 금줄을 매어 놓은 선돌이 보인다.

 

 

옛 절터를 알리는 당간지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차를 돌릴 수 있는 공터가 보이는데 그 앞에 당간지주가 있다. 한편에는 돌담 위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그래도 옛 정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돌담은 그대로인데 집들이 많이 변했다. 하기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세월이었으니, 어찌 옛 모습 그대로이길 바랄쏘냐?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을 공동 우물은 덮개를 덮어 놓았고 그 맑은 물이 흐르던 물길은 메말라버렸다. 마을 안길이 예전에는 흙길에 돌을 박아 놓아 걷는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발라버려 삭막한 기분마저 든다. 어즈버 세월이 이리도 변하게 만들었을까? 마을을 돌고 보니 무엇인가 섭섭한 기분이 든다. 그대로 있기를 바란 내가 잘못이긴 하지만.

 

 

과거에 구룡사가 어느 정도의 절집이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의 규모로 볼 때, 아마 그 정도의 절집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계룡산 북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구룡사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 윗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여러 쪽의 석재를 이용한 기단 위에 서 있다. 기단면에는 장방형으로 구획된 내구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고 지주 사이에는 원형의 철통을 세웠던 주좌가 남아 있다.

 

오랜 시간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했을 구룡사지 당간지주. 바람도 없는 날인데, 갑자기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날리는 흙먼지가 눈을 맵게 만든다. 세월이 지났으니 모든 것이 변해야하겠지만, 변화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늘 또 마음의 아름다움을 하나 상신리에 버려두고 길을 떠난다.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소재한 벽계강당. 벽계강당은 앞으로 흐르는 벽계천을 바라보고 있다. 벽계천은 용문산에서 발원을 한 물줄기가 50여 리를 서북간으로 흘러, 수입리 나루터에서 북한강과 합수가 되는데, 이 시냇물을 벽계천이라 부른다. 벽계강당은 벽계천 중간에 위치한 마을인 벽계에 소재한다.

 

화서 생전의 설계대로 지어진 벽계강당

 

지금의 벽계강당은 생전에 화서 이항로(1792~1868)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에 지은 강당이다. 이항로의 후손들과 후학, 그리고 관이 함께 힘을 모아 1999년에 이항로의 설계대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곳에 벽계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양헌수, 최익현, 김형묵, 유인석 등이 이곳에서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면암 최익현(崔益鉉)은 1833년에 태어난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양헌수는 조선 말기의 무신으로 조선 순조 16년인 1816년에 태어났다.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활쏘기에 능했다. 의암 유인석은 헌종 8년인 1842년에 태어난 의병장이다. 성리학자인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전통적 유교질서인 '정(正)에 대비하여, 서양문명의 수용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한 위정척사론자이다.

 

이러한 당대의 명사들이 모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배웠으며, 그 장소가 바로 벽계강당이라고 한다. 그럼 점으로 보면 벽계강당은 지금의 모습 이전에 다른 모습으로 이미 이 자리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벽계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앞을 트고 주변을 방으로 둘렀다. 장대석의 기단을 높게 세우고, 그 위에 둥근 주추를 놓았다.

 

강당은 장대석으로 올린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축조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정면 3칸은 마루를 깔았다.


독립가옥으로의 가치를 지닌 대문채

 

벽계강당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은 솟을대문이다. 중앙에는 높다랗게 문을 올리고, 양편에 방을 들였다. 양편의 방은 같은 크기로 했으며, 강당쪽과 바깥쪽을 향해 문을 양편에 냈다. 굳이 대문을 열지 않는다고 해도, 벽계천 쪽으로 낸 방문만 열어도 시원한 바람이 들어올 듯하다. 창은 벽면 위편에 조그맣게 냈으며, 밑으로는 거북이를 닮은 굴뚝을 만들었다. 이항로의 설계대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화서 선생은 설계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벽계강당의 대문채는 돌립가옥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건물이다.

목이 들어간 거북이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대문채의 굴뚝이 앙증맞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이다. 사진을 찍는데도 손가락이 잘 펴지지를 않는다. 더구나 양평은 청정지역으로 주변의 지역보다 한결 춥다. 겨울이 되면 으레 주변보다 2~3도가 기온이 낮은 곳이다. 거기다가 벽계천에서 부는 바람까지 옷 속으로 파고든다. 눈이 가득한 마당을 들어서 대문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벽계천 쪽으로 난 방문을 열어보니 길 아래 펼쳐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지금이야 눈이 쌓여 볼 수가 없지만, 그 아름답다는 노산팔경이 저 아래 벽계천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다. 그것을 못 보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다음을 또 기약할 수 있으니 그 어찌 서글프다 하리오. 또 한 번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반갑기만 하다.

 

대문채의 양편에 있는 방에 낸 창문. 건물의 크기에 비해 창문이 작다

 
대문채 양편에 1칸의 방을 드렸다. 방문은 벽계천쪽과 강당 쪽에 마주하고 내었다.

 

참으로 좋소, 이 강당이

 

장대석 기단위에 올린 벽계강당. 눈이 쌓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본다. 벽계강당은 중앙을 마루를 놓고, 삼면을 돌려 방을 들였다. 양편의 끝 방은 작게, 그리고 양편 안쪽의 방은 크게 들였다. 강당 마루 뒤편에 마련한 세 개의 방은 모두 같은 크기다. 아마 후학들이 이 강당에 마련된 방에 들어가, 나름대로의 배움을 익히고는 했을 것이다. 방의 뒤편으로는 모두 아궁이를 내었다. 한 겨울에도 뜨듯하게 불을 때고, 학문에 게을리 하지 말라는 화서 선생의 배려였을 것이다.

 

벽계강당의 마루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지는 경관이 시원하다. 화서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강당의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강학을 하고, 경계를 즐긴 곳이 있다. 지금은 쌓인 눈으로 인해 들어갈 수가 없지만, 봄이 되면 이곳을 돌면서 평소의 선생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다.

 

벽계강당의 마루 안편에 자리한 방. 마루정면에는 한 칸의 방 세개가 있다.

강당의 양편에 마련한 2칸짜리 큰 방은 문을 모두 걷어올리도록 하였다.

 강당의 뒤편과 옆에는 아궁이를 내었다. 한 겨울에도 운치가 있다.

 

조그마한 구름이라도 보내서

맑은 빛을 얼룩지게 하지 말라

지극히 순수하고 또 명랑하여

태양의 짝이 되게 하라

 

노산팔경 중 제일경이라는 제월대에 정자로 22자의 명(銘)을 새겼다고 한다. 이렇게 여덟 곳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 바로 벽계강당이다. 강당 양편에 큰 방은 문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마루를 더 넓게 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막힌 것도 넓게 보라는, 선생의 가르침이 배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눈이 쌓인 벽계강당 마루에 올라 찬바람을 맞으며, 한 없이 깊은 상념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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