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정월의 우리민속 ‘두레싸움’
두레조직이 만나 상대방 기 꿩장목 뺏어
서구화된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조선조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의 강압적인 ‘우리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해 수없이 사라져간 우리의 풍속들. 그 안에는 상원일이라고 하는 정월 대보름의 놀이들이 있었다. 공동체를 창출하고 마을과 마을 간의 단합을 일구어 낸 수많은 놀이들이 단지 옛것이나 미신이라는 폄하로 인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실 정월 초사흘부터 대보름인 상원일까지 수많은 놀이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다 소실되고 몇몇 가지가 겨우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대보름은 우리민족에게는 4대 명절 증 하나였다. 설날, 추석, 동지와 함께 정월대보름을 큰 명절로 꼽은 것이다. 이렇게 정월 대보름을 큰 명절로 잡은 이유는 정월 초사흘부터 시작한 각종 공동체놀이들이가 정월 대보름을 기해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정월 초하루에 설을 쇤 사람들은 초이틀은 ‘귀신 날’이라고 해서 근신을 하다가, 하늘에서 평신(平神)이 하강한다는 초사흘부터 지신밟기 등 각종 놀이를 즐기기 시작한다.
음력 초3일되면 각 마을마다 두레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한다. 지신밟기는 마을마다 한 집도 빠짐없이 다니면서 ‘고사덕담(告祀德談)’인 축원을 해주는데 문굿서 부터 시작을 해 우물, 마구간, 부엌, 장독대 등을 돈 후 대청에 마련해 놓은 고사상 앞에서 덕담을 한다.
고사덕담은 그 집이 일 년 동안 안과태평하기를 바라는 축원굿으로 일 년 간의 액을 막아내는 홍수풀이부터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농사풀이 등 창자의 능력을 따라 다양한 소리를 한다. 지신밟기를 마치면 대청에 마련한 술과 떡을 나누고 난 뒤 고사상에 올려 진 쌀과 돈을 갖고 다음 집으로 향한다. 그 쌀과 돈은 마을의 기금으로 사용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먼저 지신밟기를 하기 위해 풍물패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고 하니 우리민족은 정월에 하는 놀이가 풍농과 안과태평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마을을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던 두레패들이 길에서 만나게 되면 상대방에게 먼저 기를 숙여 인사를 하라고 소리를 친다. 그러다가 급기야 상대 두레기의 상단에 꽂힌 꿩장목을 뽑게 되는데 이것이 정월에 열리는 '두레싸움'이다.
두례싸움에서 먼저 꿩 장목을 빼앗긴 마을은 상대방의 마을을 '형님마을'로 일 년간 대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긴 마을에서는 빼앗은 꿩장목을 기에 함께 달고 다니기도 했다. 진 마을에서는 일 년 동안 장목이 없는 두레기를 들고 다녀야 했으며 다음해 다시 두레싸움을 벌여야 찾아오거나 장목을 빼앗아간 상대마을을 푸짐하게 차려먹인 후 장목을 찾아오곤 했다.
원래 기싸움이란 마을마다 <두레기>가 있어, 그 두레기들이 농사일을 하러 길을 나가다가 서로 꿩장목을 빼앗는데서 유래를 한 것이다. 예전에 마을에는 농사를 지을 때 품앗이를 하던 두레조직이 있었다. 이 두레조직에는 두레를 상징하는 기(旗)인 '두레기'가 있었다. 공동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두레패들이 길을 가다보면 이웃의 두레패들과 길에서 서로 마주치게 된다.
길에서 마주친 두레패들은 서로가 자신들이 '형님'이라며 상대방에서 먼저 기수를 숙이거니 길을 비켜서라고 난리들을 친다. 그러다가 기싸움을 벌이게 된다. 기싸움은 상대방의 두레기 위에 꽂힌 꿩장목을 먼저 빼앗는 마을이 형님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놀이, 그 많던 음력 정월의 놀이가 이제는 거의 사라지고 남아있지 않다. 공동체를 창출하고 서로간의 화합과 결속을 다지던 놀이가 사라지면서 우리는 이웃을 잃어버리고,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적인 사람들로 변했다. 작금에 들어 우리 전통민속을 다시금 찾아가려는 운동이 번지고는 있지만 허울뿐인 전통, 내실이 사라진 민속을 버젓이 연희하면서 전통을 지켜간다는 낯간지러운 말들을 한다. 우리민속은 겉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사고가 더 중요한 것인데 말이다.
‘작은설’로 부르던 ‘동지’에는 왜 붉은 음식을 먹었을까?
재액을 방지하기 위해 붉은색인 팥죽과 수수팥떡 먹어야
올해는 12월 22일이 절기로 ‘동지(冬至)’이다 일반적으로 동지는 대설이 지난 후 15일이 지나는 날이다. 동지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동지추위’라는 것이 몰려온다고 한다. 아마도 이 추위가 겨울 중 가장 매서운 추위일 것이라고 어른들은 이야기 한다. 동지란 말 그대로 풀이하면 겨울에 이른다는 것이다.
동지에는 태양이 가장 남쪽으로 기울어져 밤의 길이가 일 년 중 가장 긴 날이다. 동지가 지나면 낮의 길이가 하루에 1분 정도씩 길어진다고 한다. 옛 풍습에는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여 동지를 설날로 삼기도 했었다. 지금도 우리의 속설에는 설날과 정월 대보름, 추석과 동지를 4대 명절로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흔히 동지가 되면 농촌에서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 동지 때가 되면 집안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한다. 우선 동지 때 아녀자들은 겨울 찬거리를 준비한다. 김장은 이미 해 놓았다고 해도 이것저것 밑반찬 거리를 만든다. 채소 등을 자르고 말려 일 년 찬거리를 준비하는 것이다. 남자들이라고 빈둥거리는 것은 아니다. 밭으로 나가 보리를 밟기도 하고 다음해에 사용할 새끼 꼬기도 해야 한다. 집안에서 하는 일이 동지를 전후 해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애동지엔 팥죽 대신 수수팥떡 만들어 먹어
동지에 팥죽을 먹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오래전 설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신라 때 어느 가난한 선비의 집에 나그네가 찾아들었다. 그 나그네는 선비에게 부자가 되는 이런저런 방법을 알려 주었다. 선비는 나그네의 말대로 따라했더니 정말 가세가 부흥되고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돈은 많아졌으나 선비는 날마다 말라만 가고 있었다. 하루는 지나던 스님이 선비에게 이르기를 “그 나그네는 도깨비다. 도깨비를 퇴치하지 않으면 당신이 죽는다”고 하면서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말을 잡아 그 붉은 피를 사방에 뿌리라는 것이었다. 말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선비는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사방에 뿌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설화 속 팥죽의 유래이다.
이와는 달리 6세기경 중국 양나라의 ‘종름’이 쓴 연중 세시기인 『형초세시기』에는 또 다른 유래가 전하고 있다. 공공씨의 망나니 아들이 죽어 역질을 퍼트리는 귀신이 되었는데, 생전에 붉은 팥을 무서워 해 팥죽을 쑤어 역질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동짓날이 되면 집집마다 팥죽을 쑨다. 동지 팥죽은 먼저 사당에 올린 다음 집안의 대문, 장독대, 측간, 부엌, 뒤뜰, 마구간 등에 한 그릇씩 갖다 놓는다. 그런 다음 집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구석구석에 골고루 팥죽을 뿌린다. 이는 잡귀들이 붉은 색을 싫어해서이다. 하지만 중동지나 노동지에는 팥죽을 쑤지만 애동지에는 팥죽을 쓰지 않고 수수팥떡을 만들어 먹는다. 이는 수수도 붉은색을 띠기 때문이다.
올해는 음력 동짓달 10일안에 동지가 들어 ‘애동지’이다. 애동지에는 팥죽 대신 수수팥떡을 해 먹는다. 이는 애동지는 아이들을 상징하는 동지라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습속에는 아이를 낳으면 열 살이 되는 해까지 수수팥떡을 해서 먹었다. 수수로 떡을 해 먹는 것도 역시 사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수수도 붉은 색이기 때문이다.
수수는 생태적 조건이 불리한 지역에서도 잘 자란다. 습지대와 바람이 많은 곳, 또한 가뭄에도 잘 견디는 농작물이기 때문에 그만큼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아이가 탈 없이 잘 자라기를 바란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붉은 수수와 붉은 팥을 이용한 수수팥떡을 만들어 아이와 집안에 드는 모든 사악한 액을 막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민간에서는 동짓날 부적으로 악귀를 쫓고, 뱀 ‘사(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여 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또 동짓날 일기가 온화하면 다음해에 질병이 많아 사람이 죽는다고 하며,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는 속설도 있다. 다행히 올해는 22일인 동짓날 날이 쌀쌀해 내년에 풍년이 들 징조라는 생각이다.
우리 경기도 전역에서 연희가 되던 거북놀이에서 거북이와 질라래비의 옷을 수숫잎으로 만들었다. 이도 역시 축귀를 상징하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애동지라고 하는 22일. 수수팥떡을 만들어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동자에 관한 깊은 뜻을 학습하는 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시적으로 내를 가로질러 놓는 섶다리
섶다리는 조선조 세종 10년인 1428년,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덕리 보광산에 위치한 청송심씨 시조묘에 사계절 전사일에 용전천 강물이 불으면 유사 관원과 자손들이 건너지 못할 것을 걱정해 섶나무(잎나무와 풋나무 등)를 엮어 만들었다는 전설이 시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섶다리란 한시적으로 내를 건널 수 있는 구조물로 조성하는데 Y자로 생긴 굵은 나뭇가지를 잘라 받침으로 사용하고, 그 위를 적당한 굵기의 나무로 덮은 후 소나무가지 등으로 엮은 후 흙을 펴 조성한다. 한시적으로 사용하는 섶다리는 내에 물이 불어나면 자연적으로 떠내려가게 만든다.
섶다리가 물이 불어 떠내려가다 걸리면 자연스럽게 냇물에 살고 있는 물고기 등의 산란처가 되기도 하고, 섶다리에 서생하고 있는 많은 미생물들이 적당한 영양가가 있는 먹이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환경에도 득을 주는 이로운 구조물이다. 현재는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판운마을 섶다리 등이 남아있다
‘문안비’를 아세요? 공동체놀이 없는 놀이판 아쉬워
우리 옛 풍습을 다시 찾아야 정체성을 찾는다
우리의 옛 풍습을 잃어버리고 난 뒤 우리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스럽다. 길을 걷다보면 거리에는 도대체 알 수 없는 간판이 줄지어 서 있고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나다는 우리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국적불명의 합성어나 의성어로 된 간판들이 줄 지어 서있는 거리, 가끔은 이것이 과연 우리나라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우리 전통풍습은 뛰어난 내적 사고를 지닌다. 그 풍속 안에 충효가 있고 나라사랑과 이웃사랑이 있으며 예의범절과 삼강오륜의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의 미풍양속은 한낱 옛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요즈음 사람들의 의식 때문에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많은 우리의 풍속을 지켜 온 우리민족은 어려운 난관을 이겨내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모두가 하나되어 슬기롭게 어려움을 이겨내고는 했다. 오랜 세월동안 전해진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이 결코 구시대의 것이 아닌 지금도 우리가 그 안에 내재된 사고를 지켜갈 수만 있다면 물질의 변화만이 아니고 지금을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정신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문안비(問安婢)’는 단순히 옛 풍속일까?
예전에 정월 초하룻날부터 여자들은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가리는 것이 많던 우리민족은 여자들이 정초에 나들이를 하거나 이웃에 찾아가는 것조차 꺼려했기 때문이다. 하기에 그 시대 여인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문안비(問安婢)’라는 제도였다. 지금이야 정초부터 여자들이 자유롭게 나들이를 하기 때문에 굳이 이런 풍습이 필요하지 않지만 말이다.
정월 초3일부터 보름까지 주인마님 대신 이웃을 찾아다니는 문안비란 주인마님의 안부를 대신해 전하는 계집종을 말한다. 사대부가나 중류층 이상의 가정에서는 계집종을 곱게 단장시켜 일가친척이나 어른들이 있는 이웃의 집, 혹은 관계가 있는 집 등에 보내 과세문안을 드린다. 문안비가 인사를 가면 인사를 받은 집에서는 반드시 세배상을 차려주고 얼마간의 세뱃돈도 주게 된다.
한 마디로 문안비는 단순한 계집종이 아니라 문안비를 보내 상대방 집의 주인마님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홀히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안비의 인사를 받은 집에서도 계집종을 단장시켜 상대방의 집에 정초 인사를 보내게 된다. 조선조의 시인 이광려(李匡呂)는 ‘誰家問安婢 問安入誰家(뉘 집 문안비가 문안하려고 뉘 집으로 들어가는고?’라는 시구로 문안비의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선시대 문안비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원일조에 ‘사돈집에서는 부인네들이 잘 차려 입은 어린 하녀를 서로 보내어 새해 평안함을 물었다’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즉 조선조까지만 해도 정월 초하룻날 여인들은 요즈음처럼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켜져야 할 전통, 일깨워야 할 내적사고
문안비를 이 시대에 다시 찾자는 뜻이 아니다. 과거 우리네 세시풍속은 그 시대에 맞게 변화를 거치면서 아름다운 풍속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명절 연휴기간 전통문화관에는 사람들이 모여 북새통 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옛 풍습이 자꾸만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북새통 한마당이라고 하는데 제기차기, 투호 등 그 많은 놀이 가운데 정작 세시적으로 정초에 가장 많이 즐기던 널뛰기, 그네타기 등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놀이들은 그 안에 다 의미를 갖고 있는 놀이였다.
물론 준비를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결국 우리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명절이 되었으니 보여주기식 행사로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전통문화관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하다. 가장 많은 놀이, 그리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정월의 놀이문화 대신 사계절 언제나 할 수 있는 놀이마당을 펼쳤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굳이 문안비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 우리 풍속 안에는 계절마다 많은 내적사고를 지닌 놀이문화가 있었다. 그런 많은 놀이를 계절별로 즐기면서 어린 마음에서부터 스스로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익혔던 것인데 그런 공동체를 배울 수 있는 놀이는 배제된 체 어디서나 즐길 수 있고 언제나 즐길 수 있는 놀이판을 준비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앞으로 세시적인 풍속을 즐기는 놀이판을 개설할 때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고 소박한 ‘봉돈 우체통’을 아시나요?
화성박물관 앞에 조형한 봉돈 우체통
‘우체통(郵遞筒)’이란 서간을 수집하는 통이다. 우체국에서 지정된 시간에 우체통의 서간을 수거하여 배달 주소지에 배달한다. 우체통이란 길가나 건물 밖 등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파트 등 각호에 마련한 우편물을 넣을 수 있는 것은 우체통이 아닌 우편함이다. 우체통은 발신을 목적으로 하는 통을 말한다.
대한민국의 우체통은 1884년 우정총국이 처음 출범하면서 설치되었다. 1993년에는 대한민국에 5만7천여 개의 우체통이 있었지만 이후 점점 줄어들어 2006년 말에는 전국에 27,317개의 우체통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후 인터넷과 휴대폰 등의 발달로 인해 우체통은 점점 그 성능이 축소되어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우체통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 동쪽 해안에 자리하고 있는 간절곶의 소망우체통이다. 높이 5m에 무게가 7톤이나 되는 간절곶 소망우체통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엽서 한 장을 써서 넣어보았을 것이다. 이 간절곳 소망우체통은 매일 오후 1시에 집배원이 와서 서간을 걷어간다.
화성박물관 앞에 자리한 봉돈 우체통
팔달구청을 찾아갔다가 들린 화성박물관. 문을 나서는데 외국인 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사진을 찍어댄다. 무심코 바라보았더니 작은 봉돈 모형이 하나 서 있다. 언제 세운 것일까?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을 리가 없다.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화성박물관이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봉돈 모형의 우체통이라는 점이다.
봉돈 모형의 가운데는 붉은 판을 부쳤는데 그곳에 우체통이라고 써 놓았다. 우편물을 거두어가는 시간이 매일 평일 오후 2시라고 한다. 토요일과 휴일에는 <거두어가지 않음>이라고 적혀있다. 작은 봉돈 모형의 우체통 하나가 작은 즐거움을 준다. 왜 그동안 이 우체통을 보지 못했을까?
“우체통이 참 예쁘죠. 수원 화성을 상징하는 봉돈으로 우체통을 만들아 놓아 사람들이 이곳에 오면 많이들 카메라로 담아가고는 해요. 저도 늘 이곳에 와서 책을 보지만 저 우체통에 꼭 편지 한 장 써서 넣어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죠. 가까운 친구들에게 엽서라도 한 장 보내야겠어요”
화성박물관 앞 나무그늘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한 분이 사람들이 이 봉돈 우체통을 많이 촬영을 한다고 일러준다. 아마 이런 우체통을 보면 누구라도 편지 한 장을 써 집어넣고 싶지 않을까? 작은 봉돈 모형의 우체통에서 눈을 쉽게 떼지 못한다. 글자 한자마저 다 읽어야 할 것 같아서이다.
봉돈 모형이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우체통
우체통에는 거두어가는 시간 이후에 투함된 우편물은 다음 근무일에 수거하며 금요일에 투함된 우편물은 토요일과 휴일에 거두어가지 않으므로 배달이 늦어질 수도 있다고 적어놓았다. 우편물의 기본요금은 300원이며 규격봉투가 아닌 경우 크기나 중량 등에 의해 요금이 추가된다는 설명도 있다.
“이 우체통을 보면 우리 수원의 우체통을 이렇게 모두 교체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체통이 꼭 일률적으로 같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수원화성을 상징하는 이런 우체통이 거리에 놓여도 보기 좋을 듯해서요. 수원은 세계문화유산 화성이 있는 곳이니 이런 우체통이 거리에 놓여있다면 화성 홍보도 저절로 될 것이고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작은 우체통에 지나지 않지만 거리에 이렇게 아름다운 봉돈 모형의 우체통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 의미가 상당히 깊을 것 같다. 우편물을 배송하는 기능도 하면서 수원화성의 홍보에도 일조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화성박물관 앞에서 만난 수원화성 봉돈 모형의 작은 우체통 하나. 그 우체통만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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