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곳의 절을 돌며 머리를 조아린 사연 이루어지겠지

 

불자(佛子)들은 삼사순례라는 의식을 치른다. 한 번 길을 나서 절 세 곳을 돌아오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삼사순례란 그저 절집 세 곳을 들려오는 것은 아니다. 아마 간절한 바람이 있기 때문에 세 곳을 절을 들려 자신이 간구하는 바를 구구절절이 머리를 조아려 이루어질 수 있게 청원을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우리 풍속에 삼사순례는 윤달을 맞이하여 말 그대로 세 곳의 사찰을 돌며 삼독(三毒 =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를 없애고 부처님과의 인연을 두텁게 하고자 하는 불교 수행의 한 과정이라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윤달에는 달이 다 가도록 불탑을 돌며 불공을 드린다. 이렇게 하면 극락에 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꼭 극락을 가기 위한방법으로 삼사순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윤달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간절히 염원하는 바가 있다면 삼사순례를 하면서 기원하는 바를 정성껏 서원하다보면 하늘인들 감응하지 않을까? 그런 감응을 받기 위한 것이 삼사순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날이 무덥긴 하지만 주말과 휴일(25~26)을 맞아 강원도에 있는 절 세 곳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3대기도처라는 낙산사 홍련암을 찾아가다.

 

정성은 아무 생각없이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서원할 바를 정확하게 알고 어디를 돌아올 것인가는 미리 마음속에 정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정한 바를 정성스럽게 돌아오는 것이 치성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종교를 떠나 산천초목에 기원을 하든, 명산대천에 기원을 하든 본인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주말인 25일 아침 7시 반에 길을 나섰다. 가장 먼저 기도를 하기 위한 장소를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홍련암으로 결정을 하고, 첫날 두 곳과 둘째 날 한 곳을 돌아보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주말이라 강원도로 가는 차들이 도로를 메우고 있다. 막힌 길을 이리저리 돌아 낙산사 주차장에 도착 한 것이 1230. 걸음을 재촉해 홍련암으로 향한다.

 

개인적으로 낙산사와는 인연이 남다른 곳이다. 20054월 강원도 일대를 집어삼킨 화재사고 때 난 낙산사 곁을 지나고 있었다. 그날 TV 중계를 통해 당시 보물 제479호인 낙산사 동종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는지 모른다. 그리고 200747일 낙산사 동종이 다시 복원이 되어 종을 다시 울리는 날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낙산사 화재가 일어나고 난후 찾아갔던 낙산사의 아픔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낙산사이기 때문에 가급적 찾아가는 것을 자제하고는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간절히 기원할 것이 있으니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간구를 하는 홍련암을 찾아갈 수밖에. 주말이라 그런지 이른 시간인데도 낙산사 홍련암에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 그리고 서원하는 바를 간구한다.

 

날이 무덥지만 바닷바람이 불어 땀을 식힌다. 그런 바람이 고마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연신 들락거리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저 내 마음속에 간직한 서원을 들어달라고 간구를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땀범벅이 되어 홍련암 문을 나선다. 피곤함과 허기짐으로 인해 지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미단에 좌정하고 계신 부처님의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본다. 간구에 대한 무슨 답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간구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간구하는 바를 모른 체 하실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긴다. 다리가 천근이지만 걸음을 옮겨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해수관음 앞으로 다가선다. 반사된 햇볕으로 인해 해수관음의 안면이 빛이 난다. 저 빛이 간구에 대한 답변은 아닐까? 멋쩍은 생각을 하면서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땀을 식힌다.

 

 

 

금강산 건봉사에서 두 번째 간구를 하다

 

낙산사를 떠나 고성 화진포를 잠시 들려 찾아간 곳은 부처님의 치아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는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에 소재한 금강산 건봉사이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 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시작이었다.

 

염불만일회에는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다. 염불만일회를 시작한 지 30년이 지난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살아있는 채로 극락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한다. 건봉사 뒤편 산등성이에 자리한 등공대가 그러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

 

건봉사는 고려 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으며,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다.

 

 

 

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였고, 1605년에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 와서 이 절에 봉안하였다.

 

187843일에 산불이 일어나 건물 3,183칸이 모두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등을 중건하였으며 지금까지도 건봉사 경내에는 수많은 석물들이 널려있어 과거 이곳이 얼마나 큰 사찰이었나를 가늠할 수 있다.

 

건봉사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사리 3과를 사리탑에 모셔놓고 있는 곳이다. 사리를 모신 곳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사리탑이 보이도록 유리로 벽면을 조성한다. 이미 몸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서원을 게을리 할 수가 없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른다. 그저 일어섰다 엎드리기를 반복할 뿐이다.

 

 

 

26일 세 번째 절 금강산 화암사를 찾아가다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첫 번째로 손꼽히는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에 위치한 화암사(禾巖寺). 신라 혜공왕 5년인 769년에 진표율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인조 11년인 1633년 택당 이식(李植, 1584~1647)선생이 간성군수로 있을 때 썼다는 간성지 화암사조에 의하면,

천후산 미시파령(天吼山 彌時坡嶺=미시령) 밑에 화암(禾岩)이란 바위가 바른편에 있기 때문에 절 이름을 화암사라 했다. 이절은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어 가까이는 영랑호, 멀리는 창해에 임해있고 양양, 간성의 모든 산과 평원심곡이 눈 아래 보이고 넓고 아름다운 경치는 절이 토해 놓은 것 같다. 절 뒤에는 반석과 폭포가 특수한 모양을 하고 있어 가히 볼만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광해군 14넌인 1622년에 절이 불에 타버렸으며, 옛날에는 크고 우아한 문루가 있었는데 망가졌다. 문루에서 바라보는 창해에서 해 뜨는 모습은 강호를 찾는데 있어 이곳보다 나은 곳이 없건만 옛사람들을 찾아와 돌아보지 못했으며 지방사람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또 관동지방에는 이름난 곳이 많아 과객들이 이곳까지 올 겨를이 없었으므로 절 이름이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화암사는 창건 이래 고종 원년까지 1096년간 화재가 5번이나 났는데 이것은 화암이란 이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개칭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는 했다. 5년 만에 다시 들린 화암사는 그동안 많은 불사가 이루어져 딴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런 달라진 모습에 눈을 돌린 여유도 없이 바로 삼성각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한다.

 

 

화암사 앞에는 쌀바위라는 거대한 바위가 자리를 하고 있고 휴일을 맞아 수많은 등산객들이 화암사 경내로 몰려든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신 사람들은 본격적인 산행준비를 하기 위해 소란을 피우지만 그런 소란과 무관하게 조용한 삼성각에서 난 내 마음속의 간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음을 대해 고개를 땅에 붙인다.

 

이름은 ○○○, 나이는 21. 음력 ○○○○일생. 남자아이입니다. 수술을 하면 수술 덕을 입게 하시고 부처님의 가피로 밝은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그저 어린아이의 눈이 세상만물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사 하는 간구입니다.”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 좌복(예불을 드릴 때 깔고 앉는 방석)을 두 장이나 겹쳐놓았지만 무릎에 전해오는 통증이 심해진다. 머리가 닿는 부분은 흐르는 땀으로 인해 흥건하게 젖었다. 이런 것이 정성일까? 꼭 이렇게 몸을 고통스럽게 해야 서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화암사를 나와 미시령을 넘다가 전망대에서 바라본 울산비위. 얼마나 오래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울산바위를 바라보면서 마지막 서원을 속으로 이야기한다. 물질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마음 하나만으로 천지의 기운을 움직여보겠다는 생각이다.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시간을 내어 삼사순례를 할 생각이다. 이루어질 때까지 노력하면 언젠가는 서원하는 바가 하늘을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한 젊은이를 위해 스스로 고통스럽다는 삼사순례를 시작한 지 두 번째. 이런 고행이 얼마나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면식도 없는 젊은이를 위해 이 절집 순례를 남들은 미쳤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조건도 없이 다만 젊은이 하나를 강건하게 만들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원을 갖고 시작한 절집순례가 이제 30년 가까이 답사를 계속해 온 문화재를 만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것도 내가 짊어 질 업보일까?

 

 

어린이들에게 장학금 전달을 위한 희망나눔 찻집

 

오늘 한 장에 1만원을 하는 티켓이 천 장 넘게 팔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일찻집을 찾아오신 분들도 수원시 도태호 제2부시장을 비롯해 팔달구 김영진 국회의원, 팔달구 배민한 청장과 도의원과 시의원, 중부경찰서 서장님을 비롯한 여러분과 각 학교 교장선생님들 많은 분들이 찾아와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장학기금 마련을 위한 희망, 나눔의 일일찻집행사를 마친 수원중부녹색어머니연합회 김송숙 회장은 지친 몸을 지탱하면서 질문에 충실한 답을 해준다. 수원중부녹색어머니연합회는 중부지역 34개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모인 연합회이다. 현재 회원은 모두 11672명이나 되는 거대한 어머니들의 조직이다.

 

저희가 이렇게 일 년에 한 번 일일찻집을 열어 모은 기금은 저희 관내 34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2311시경, 팔달구 화서동 436-3번지에 소재한 농민회관 별관 1층을 찾았다. 1층 웨딩팰리스에는 많은 어머니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300석 가까운 자리는 빈틈이 없이 들어차 있고 상마다 음식이 차려져 있다. 한편에서는 분주하게 연이어 들어오는 어머니들을 맞이하기에 바쁘고 조리실에는 많은 어머니들이 갖가지 음식을 담아내고 있다.

 

티켓은 1천장 정도 마련하지만 모이는 기금은 그보다 더 많다고 이야기를 하는 한 어머니는 취재차 오셨으니 과일과 떡이라도 좀 들고 가라고 권한다. 하지만 밀려드는 손님들보다 자리가 턱 없이 부족한 것을 알면서 어떻게 그 자리에 앉아 편하게 음식을 먹을 수가 있을까? 손 사례를 치고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수원의 각종 행사장에서 봉사하는 어머니들 만날 수 있어

 

그동안 몇 차례 수원시의 행사장에서 녹색어머니연합회 회원들이 봉사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어머니연합회의 명함을 보면 그 뒷면에 누가해도 할 일이면 내가 하자. 언제해도 할 일이면 지금 하자. 이왕 하는 일이라면 더 잘하자. 녹색어머니회는 실천의 상징이며 사랑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항상 보고 느끼는 것이지만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봉사를 하는 것만 같다. 김송숙 회장은 어머니연합회 회원들이 봉사를 하는 것을 보고 그분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아름다워요. 마치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야말로 빛이 나죠라고 표현을 한다. 그만큼 녹색어머니연합회 회원들이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건널목을 건널 때 신호를 보고 있다가 안전하게 잘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고는 하죠. 아이들을 만나면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넬 때 흐뭇합니다. 그리고 봉사를 하다가도 도로에서 문제가 생긴 차들이나 운전자들에게 도움을 주고나면 정말 봉사를 하는 재미에 빠져들게 되죠. 그런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를 합니다.”

 

 

녹색어머니연합회 회원들은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등, 하교 길을 지켜야 하고, 사회단체들의 행사장에 나가 안내를 보기도 한다. 그 밖에 장애인들을 위한 도움도 주고 있으며 행사장도 찾아가 안내를 맡기도 한다. 녹색어머니연합회가 찾아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 봉사를 하면서도 일일찻집을 열어 장학기금까지 마련한다.

 

저희 녹색어머니연합회는 아이를 둔 어머니들로 구성된 봉사단체예요. 언제나 저희들이 도울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세요. 저희들은 저희 아이들을 보살피듯 무슨 일이던지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일일찻집을 빠져나오다가 제목을 입고 안내를 하는 한 어머니에게 봉사를 자주 다니느냐고 묻자 하는 말이다. 늘 봉사를 하면서 아이들까지 돌보고 있는 녹색어머니연합회. 그녀들이 정성을 다해 마련한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웃을 위해 사랑을 펼치고 있는 녹색어머니연합회에 큰 박수를 보낸다.

 

 

제비들의 천국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 한나루로

 

강원도 고성군 한 마을이 온통 제비들의 천국이 되었다. 도로변 집집마다 처마가 있는 곳이면 으레 제비집들이 하나 둘씩은 보인다. 그 중에는 4~5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집도 있다. 동해안 바닷가 시골마을 한적한 거리에 제비들의 소리가 무더위를 녹이고 있다. 더운 날에 제비들의 소리마저 없었다면 이거리가 얼마나 을씨년스러울까?

 

거리는 흡사 50~60년대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18일 찾아간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 한나루로 일대. 한 낮의 거리는 가끔 차들이 움직일 뿐 정적에 쌓여있다. 그런 고요함을 깨는 것이 바로 제비집에 들어앉아 있는 새끼제비들이다. 쉴 새 없이 날라 오는 어미의 먹이를 서로 받아먹으려고 아우성을 치는 제비들을 촬영하려고 하자 어미 제비가 자만큼 날아가 앉는다.

 

물론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새끼가 없는 전깃줄이나 인근 빈 제비집쪽으로 유인을 하는 것이다. 그런 제비들을 보면서 미물도 자신의 자식을 보호하고자 저렇게 노력하는데 인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제비집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 둥지를 보니 세 마리의 새끼제비들이 입을 있는 대로 크게 벌리고 난리들을 친다.

 

 

 

이곳에 제비집들이 많이 있네요

, 이 거리에만 이렇게 많이 집들을 짓고 살아요

언제부터 이렇게 집들을 짓고 살았나요?”

벌써 몇 해 되었죠. 그런데 제비들이 이곳부터 저기 보이는 거리 끝 까지만 집을 지어요. 그 전에도 짓지 않고 그 거리를 지나면 또 제비집이 없어요

 

제비집을 촬영하다가 만난 마을 어른 한 분이 설명을 한다. 한나루로 전체에 제비가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일부 지역만 이렇게 많은 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었지만 잘 모르겠다고 한다.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 대진1리 현근영 이장과 연결이 되었다.

 

 

 

제비가 오면 좋은 소식이 있다는데

 

현내면 대진1리 현근영 이장은 강원도 철원이 고향이다. 이곳 현내면 대진리에 와서 정착한지 올해로 51년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수복 후 처음으로 정착을 했을 때는 현내면 대진리 인구만 9천명에 가깝고 대진초등학교 학생들도 많을 때는 16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수가 100여명 정도라는 것이다.

 

제비가 언제부터 날아오기 시작했나요?”

예전에는 배가 붉은 귀제비가 날아왔어요.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8년이 되었는데 동굴처럼 집을 지어놓으면 허물어 버리고는 하셨죠. 그런 제비가 집을 지으면 안된다고요

지금 이장님댁에는 제비집이 있나요?”

, 4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새끼들이 있는 것 같네요

제비가 날아오면 좋은 일이 많다는데 좋은 소식이 있나요?”

요즘 워낙 힘들어요.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데 요즈음은 매출도 줄고 사람들도 예전처럼 찾아오지도 않고요. 힘들기만 하네요

 

현근영 이장은 제비기 날아와도 좋은 소식이 없다고 하면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계절이 왔으면 좋겠다면서 웃는다. 대진리 거리를 돌아보아도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날이 워낙 뜨겁다고 해도 이곳은 바닷가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 어느 집이나 있는 에어컨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곳이다.

 

 

 

제비집을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요즈음은 무엇하나를 잘 이용하면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 대진리는 최북단 등대인 대진등대와 초도항, 대진항 등 볼거리가 있는 곳이다. 거기다가 거리에 즐비하게 집을 지은 제비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거리전체에는 수많은 제비들이 집을 짓고 있어 그것을 잘 이용만 해도 구경거리가 될 수 있다.

 

제비는 길조라고 하는데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죠. 길조라고 하는 제비가 온 마을에 집을 짓고 있으니 좋은 일이 있겠죠

제비들이 매년 집을 짓나요?”

아닙니다. 새로 짓는 것들도 있고 작년에 사용했던 집을 보수하기도 하고요

 

 

처마 밑에 다닥다닥 지어 놓은 제비집. 가지각색의 제비집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이 제비집을 활용하여 좋은 명칭을 붙여 문화콘텐츠로 활용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수많은 제비집을 돌아보면서 방법이 전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소식을 알린다는 길조인 제비. 앞으로 이 현내면 대진리 한나루로 거리에 제비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북적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벽 4시에 전기공사를 해준 분들께 감사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동네가 옛 동네다보니 모든 것이 새로 조성된 아파트 등과는 많이 다르다. 한 마디로 구도심이기 때문에 건물들도 그렇고 모든 것이 옛 것에 가깝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전기문제이다. 길을 걷다보면 눈이 아플 정도로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전선을 보아도 이 마을이 얼마나 오래된 곳인지 알 수 있다.

 

예전에야 전기가 없어도 호롱불이나 촛불만 켜도 고맙게 생각하고 살았겠지만 지금 시대는 전기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 아닌가? 우선 TV며 컴퓨터 등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냉장고며 에어컨, 선풍기 등 모든 것이 전기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 전기가 없다면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잠을 자고 있는데 방 안이 몹시 더운 듯하다. 창문을 열고 자는데도 불구하고 더워도 너무 덥다. 머리맡에 놓고 자는 휴대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더니 막 새벽 4시가 지났다. 왜 이렇게 방안이 더울까 싶어 TV리모컨을 눌러보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이 새벽 시간에 정전이 된 것이다. 어제 밤에 비가오고 바람이 불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

 

휴대폰을 이용해 전기 스위치가 있는 곳을 확인해보니 차단기가 그대로 있다. 그렇다면 집 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벽시간이지만 할 수 없이 한전에 연락을 취하고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밖에서 소리가 난다. 새벽 415분이다. 연락을 한 지 10분 만에 한전에서 차가나와 전신주 가까이 사다리차를 댄다.

 

 

새벽시간에도 친절한 한전 직원들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고장신고를 받고 현장을 나온 한전직원들. 그 시간에 고가사다리차로 전신주 가까이 올라 조사를 하더니 퓨즈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때부터 집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전압이 중간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전신주에서 집으로 연결 된 전선 중 한 곳에 이상이 있다고 한다.

 

집으로 들어오는 전기줄을 보니 육안으로도 선 하나가 끊어져 있는 상태가 확인된다. 살고 있는 곳이 경사가 심한 비탈길이라 사다리차를 놓고 작업을 하기가 수월치 않다. 그런데도 집 가까이에 사다리차를 붙여놓고 끊어진 전기선을 잇는 작업을 한다. 밑에서 보기에도 얽히고설킨 전깃줄 사이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 위험해 보인다.

 

작업을 하고 있던 중에 찻소리 소음에 한집씩 불이 켜지더니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새벽녘에 단잠을 깨운 것 같아 미안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작업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선을 잇고 나니 불이 들어온다. 현장에 도착해서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단지 퓨즈가 나갔다면 10분이면 마쳤을 공사를 한 시간이나 한 것이다.

 

 

그렇게 새벽시간에 나와서 공사를 하면서도 불편한 내색을 내지 않는다. 그 시간이면 아무리 대기 중이라고 해도 잠을 자다 나왔을 텐데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사소한 불편 하나가 이웃사람들에게 많은 불편을 주고 말았다. 끊어진 선을 잇고 나서 한전 기술자가 안전하게 내려왔다.

 

왜 선이 끊어졌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전기를 많이 쓰다보면 과열이 되어서 선이 끊어지기도 하고요. 바람에 선이 쓸려 선을 감싼 외피가 까지면서 끊어지기도 해요. 오늘은 임시로 조치를 해놓았으니까요. 낮에 시간을 잡아 다시 한 번 방문해 이런 일이 없도록 해드릴께요

 

물론 직업이긴 하다. 하지만 새벽 4시에 신고를 받고 나와 한 시간 동안 공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담당자들. 이렇게 자신이 맡은 일에 소임을 다하고 있는 분들이 있어 우리가 편한 것은 아닐까? 책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닫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맡은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다할 때 우리사회가 밝아지지 않겠는가? 새벽을 밝힌 한전 직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스님 짜장밥 1천여 명에게 무료급식 봉사

 

남원 선원사 주지인 운천스님을 사람들은 ‘짜장스님’이라고 부른다. 운천스님이라는 법호보다 오히려 짜장스님으로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운천스님은 5년 째 전국을 돌면서 불우한 이웃들에게 짜장면을 만들어 공양을 한다. 군부대, 고아원, 장애인들이 있는 곳, 노인복지관 등 다니지 않는 곳이 없다.

 

운천스님이 이렇게 일 년이면 50여 회가 넘는 날들을 전국을 다니면서 스님짜장으로 봉사를 하는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스님이 절에서 예불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주변에 헐벗고 굶주린 채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나누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운천스님은 전국을 돌아다닌다. 어려운 이웃들이 있다고 하면 거리를 상관하지 않고 달려간다. 운천스님이 만드는 스님짜장은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는다. 그 대신 10여 가지의 야채로 육수를 끓이고 그 육수를 이용해 짜장을 볶는다. 그래서 스님의 짜장은 담백한 맛이 있어 좋다고들 한다.

 

 

 

행궁 광장에서 짜장밥 봉사

 

10일 오후 5시. 화성 행궁 광장 한편이 시끌벅적하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고 한편에선 무엇인가를 맛있게 먹는다. 짜장스님이 행궁 광장에서 1천명의 사람들에게 짜장밥을 봉사한다는 것이다. 줄을 서서 밥과 떡을 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를 찾아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어요’를 외친다.

 

“오늘 남원 선원사에서 봉사단장과 함께 올라왔어요, 봉사를 하시는 분들은 수원과 성남에서 모이셨고요. 1천멍에게 짜장밥과 떡을 봉사해 드리려고 준비했어요. 6시부터 행사(브랜드대전)가 시작된다고 해서 한 시간 먼저 배식을 시작했는데 모두들 오셔서 드셨으면 좋겠어요.”

 

운천스님은 몇 해 동안 수원에서 봉사를 하셨다. 복지관은 물론 장애인 시설과 경로당, 군부대, 교도소 등에도 마다않고 다니신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부르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그래서 늘 짜장을 볶고 먼 길을 달려 봉사를 하러 다닌다. ‘짜장스님’은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불우한 이웃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운천스님은 천년고찰 남원 선원사 주지소임을 맡고 있다. 고향이 수원이기 때문에 수원은 남다른 곳이라고 한다. 운천스님의 봉사행보는 끝이 없다. 벌써 5년째 많을 때는 한 달에 10여 번을 차를 몰고 전국을 다닌다. 어려운 사람들, 아픈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스님이 직접 몰고 다니는 차 안에는 밀가루며 반죽기, 면 뽑는 기계와 짜장면에 들어갈 각종 야채들로 가득하다.

 

스님은 늘 이렇게 이웃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거리에 관계없이 찾아간다. 비록 짜장 한 그릇이지만 그 안에는 정이 가득하다. 그동안 수원에서는 이목동 바다의 별, 우만사회복지관, 지동 못골 경로당 등 봉사를 한 짜장만 해도 만여 그릇에 가깝다. 지금까지 봉사를 한 수십만 그릇의 짜장면에는 비길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참 맛 있어요. 스님이 만드신 음식이라 그런지 색다른 듯도 하고요. 스님께서 그렇게 많은 봉사를 하시는 분이신 줄 몰랐는데 오늘 보니 대단하시네요. 그동안 그 많은 짜장면을 만들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니 오늘 이 짜방밥이 새삼 귀하게 느껴지네요.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앞으로 수원에서 또 다른 일을 시작하겠다고 하는 운천 짜장스님. 수원의 또 다른 일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많은 계획을 세워놓았을 것만 같다. 기대를 하는 마음이 큰 것도 스님의 그런 봉사정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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