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에 있는 노동저수지를 끼고 돌아 호도마을 쪽으로 100m쯤 가면, 수백 년 된 노송과 거목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숲에 정자가 보인다. 고창읍 화산리에 속하는 곳에 자리한 취석정의 ‘취석(醉石)’이란 말은, 옛날 중국의 도연명이 한가로이 세상을 살 때 술이 취하면 집 앞 돌 위에 잠들기도 했다는 설에서 비롯한 것으로, 사람이 욕심 없이 한가롭게 생활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취석정, 말로만 들어도 운치가 있을 것만 같아, 해질녘인데도 발길을 재촉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멋을 풍기고 서 있는 취석정. 노계 김경희(1515∼1575)가 명종 1년인 1546년에 처음으로 세운 정자라고 하니, 벌써 460년을 넘긴 고정(古亭)이다. 김경희는 을사사회로 인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죽음 이만영, 규암 송인수, 둔옹 심광언 등 제현과 더불어 정자에 올라 시를 읊고 문의를 강론하였으며, 그때의 시집 노계집 1권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지석묘군과 함께 어우러진 취석정

흙담을 두른 취석정, 고창군내의 문화재에는 문을 담가놓지 않아 어디든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일각문을 열고 들어가니 담장 안에는 7기의 작은 지석묘군이 자리하고 있다. 밖에도 3기의 지석묘가 자리하고 있어, 총 10기의 지석묘가 이 곳 정자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고풍스런 정자와 함께 선사유적을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정자를 찾은 나그네의 홍복이 아니던가.

1871년에 중건된 취석정 한 옆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목조 와가인 취석정은 부재가 건실한 것이 그 오랜 세월을 튼실하게 버티고 있다. 건물의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담장 안에 있는 지석묘 한 기에는 ‘취석정’이란 글씨를 음각해 놓았다. 담장 안팎으로는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와 고목이 된 버드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어, 정자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는 덤벙주초를 놓았으며, 댓돌도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했다. 주변 경관을 해하지 않고, 스스로 자연 속에 파묻힌 듯한 느낌이다. 이 정자의 특징은 정자 한 가운데 온돌방을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방 모두를 분합문을 내었으며, 전 후면에는 머름대를 시설해 두 짝의 분합문을 달고 나머지는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이런 구성은 밖의 경치를 시원하게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은 겸손함

취석정은 자연을 이기지 않는다. 그저 자연 속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뒤로는 누렇게 익은 벼들이 가득한 논이다. 그 주변에 커다란 나무들이 서 있는데, 밑에 웅크리고 있다. 행여 누군가의 눈에라도 뜨일까봐 걱정을 하는, 새색시 같은 마음이다. 적어도 처음 취석정을 본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누마루 위로 올라본다. 문을 열어 천정에 붙들어 맨 창호들이 한껏 마음을 연 듯한 모습이다. 방은 온돌로 처리했다고 하나 지금은 그저 흙을 쌓아 방을 돋은 것 같아 보인다. 앞 내 건너편에 있는 고목이 된 버드나무에서 취석정의 세월을 읽어낸다. 그렇게 오랜 세월 이 정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정자와 지석묘가 어우러진 곳. 커다란 나무들이 정자를 감싸고 있는 곳. 그리고 앞으로 흐르는 내가, 절대로 물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취석정에 해가 넘어가고 있다. 좀 더 일찍 이곳을 찾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돌리는 발길 머리에 긴 그림자 하나가 끌려온다.

대전 유성에서 1번 국도로 따라 조치원을 향하다가 보면, 금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작은 정자가 보인다. 연기군 남면 나성리 101번지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충남 문화재자료 제264호인 ‘독락정(獨樂亭)’이 자리한다. 독락정이란 말 그대로 혼자 낙낙하는 정자란 뜻이다. 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이 정자는 고려 말의 무신인 전서 벼슬을 지낸 임난수 장군을 위한 정자이다. 임난수 장군은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정벌을 했던 무장이다. 장군은 고려가 망하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금강 월봉 아래서 16년간을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끝까지 섬기던 임금에 대한 충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금강가에 외롭게 서 있는 독락정

장군의 아들 임목이 지은 독락정

독락정은 조선조 세종 19년인 1437년 임난수 장군의 아들인 임목이 부친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그 후 여러 번 고쳐지었으며, 주변에는 낙락장송이 우거져 있다.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굽어보고 서 있는 독락정. 지금은 길 위에 홀로 외롭게 서 있는 이 정자는, 임난수 장군의 마음을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다.

정자는 크지가 않다. 처음부터 이런 형태로 지어졌는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 서 있는 소나무에서 그 역사를 짐작할 수가 있다. 낮은 담으로 둘러친 정자는 금강 쪽은 담을 낮게 해 마루 위에서 강을 바라다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정자의 특징은 주춧돌이다. 팔각의 장주추를 써서 기둥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형태의 건축물이라 그런지 작아도 무게가 있어 보인다.



정자는 낮은 담으로 둘러쌓다(위) 주추는 팔각의 장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가운데)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금강(아래)

정면 3칸, 측면 2칸인 독락정은 마루 중앙 뒤편으로 방을 놓았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방을 드릴 때는 온돌을 놓지만, 독락정은 그대로 마루로 연결하고 사방을 문으로 마감을 하였다. 아마도 이곳에서 흐르는 금강을 내려다보면서 취흥에 젖고는 했을 것이다. 정자로 오르니 벽에는 편액이 걸려있다. 독락정기와 독락정시의 두 편의 편액이 벼슬을 떠난 임난수 장군의 쓸쓸함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담장 밖에서 사진을 찍다가 성이 차지 않아 월담이라도 해야 하나를 고민한다. 정자 뒤에 난 일각문을 보니 잠을 통이 그냥 걸려있다.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정자에 올라 금강을 내려다본다. 저만큼 무슨 공사라도 하는 것인지, 물이 탁하게 흐른다. 예전 정자를 짓기 전에 이곳에 올랐을 장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자에는 독락정기와 독락정시의 두 편의 편액이 걸려있다

아마 망해버린 고려에 대한 아쉬움이 남달랐을 것이다.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면서 스스로 벼슬을 마다하고 이곳에 와서 여생을 끝낸 임난수 장군. 그 자손들에게도 나라를 위한 충심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선친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독락정은 가을의 햇볕만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정자에 오를까? 난 늘 그 정자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정자를 세운 뜻을 조금이라도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백사람이 모두 생각이 다르다고 하니, 어찌 그 뜻을 감당할 것인가? 오늘 독락정에 올라 장군의 마음을 헤아려보지만, 무심히 흐르는 저 금강처럼 나도 무심히 떠나는가보다.


가운데 뒤편으로 마루방을 들이고(위) 주변에는 고목이 된 소나무들이 서 있다. 

대전 동구 가양동 65번지에는 우암사적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사적공원 안에는 우암 송시열과 관계되는 건물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서, 조선시대 건축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사적공원의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작은 솟을대문이 보인다. 이 솟을대문 안에는 기국정과 남간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남간정사는 낮은 야산 기슭의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남간정사 앞으로는 남간사가 자리하고, 뒤편으로는 작은 연못을 파 놓았다.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1607 ~ 1689) 선생이 후학들에게 강학을 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우암 선생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사계 김장생은 율곡의 첫째가는 제자이다.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호인 남간정사

우리나라 정원사에 멋스러움을 이룩한 남간정사

우암 선생은 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선생이 동구 소제에 살고 있는 동안 흥농촌에 서재를 세워 능인암이라 하였고. 그 아래에 남간정사를 지었다. 남간정사는 선생이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 곳이기도 하지만, 선생의 학문을 완성시킨 곳으로 치기도 한다.

이 남간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작지붕이다. 남간정사는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편은 앞뒤 통 칸의 온돌방을 들였다. 남간정사는 계곡의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청 밑을 통하여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조경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간정사는 마루 밑으로 물을 흘려 연못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지금은 물길을 막아버리고 구멍만 남았다.
 
용과 닮은 괴이한 나무 한 그루

남간정사를 찾아갔으나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안을 기웃거려 보지만, 들어갈 방도가 없다. 정사 밑으로 난 물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으려나 했지만, 물구멍만 남겨놓고 축대로 막아버렸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밖에서만 빙빙 돌 수밖에. 돌다가보니 대문 앞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누워있는 형상이 보인다.

수령이 꽤 되었을 것만 같은 나무 한 그루. 대문을 막아서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무를 찍으려고 나무 옆으로 돌아갔는데, 이게 웬일인가? 흡사 한 마리 용이 비천을 하려고 날아오를 듯한 모습이다.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이렇게 불편하게 자라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 불편함이 오히려 남간정사를 지키고 있는 용과 같아 보인다.

뒤편에서 보면 꼭 용과 같이 생겼다.


남간정사 출입문 앞에있는 나무는 한 마리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다.
 
나무줄기에 돌출된 옹이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 끼어있고. 누워있는 나무줄기의 한편이 뒤에서 보면 마치 용틀임을 하면서 승천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남간정사도 우리 정원의 조경에 독특한 구성이지만, 이 나무로 인해 남간정사의 멋스러움이 한결 더해진 듯하다. 답사를 하면서 많은 정자와 가옥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집과 나무가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은 처음인 것만 같다. 이 나무 한 그루로 인해 답사 길이 즐겁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가 154, 중앙공원 안에는 '망선루'라 이름을 붙인 누각이 서 있다. 아래는 둥근기둥을 세워 사람들이 밑으로 통행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계단을 올라 이층 누각으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망선루는 고려시대 청주관청의 하나로,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인 객사 동쪽에 있던 '취경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망선루는 청주지역에 남아있는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망선루에 대한 기록은 고려 공민왕 10년인 1361년에 보인다.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청주에 머문 기념으로, 청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취경루에 방을 써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조선조 세조 7년인 1461년에 목사 이백상이 중수하고, 한명회가 누각의 명칭을 ‘망선루’라 하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친 망선루는 근세에까지 유지되다가, 일제 때에는 무덕관의 건축으로 철거되기도 했다.  


청주 중앙공원 안에 자리한 망선루
 
역사의 중심에서 수난을 당한 망선루
 
망선루는 1923년에는 남문로 제일교회 뒤편으로 이건되어, 교육 및 집회장소로 활용이 되었다. 그 뒤 기둥이 심하게 부패가 되어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2000년 12월 중앙공원으로 복원을 하여 옮겨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마련된 목조 이층 팔작중층 누각인 망선루는, 그렇게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그 중심에 서 있던 건물이다.
   
청주 중앙공원은 늘 많은 사람들로 시끌하다. 한편에서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고, 정신없이 노름 삼매경에 빠진 어르신들도 있다. 윷놀이를 하느라 소리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무료하게 소일하는 것이 생활인양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재미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중앙공원 바로 옆이 청주 젊은이들의 거리라고 한다면, 이곳은 연세가 드신분들의 천국이다.




하수도 뚜껑이 되었던 척화비

망선루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굳게 판자문으로 닫혀있다. 이렇게 닫혀진 문화재를 볼 때마다 짜증을 내던 나이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원내에 술에 취한 많은 사람들이 문을 열어놓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망선루를 돌아본 후 한편을 보니 작은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이 된 '청주척화비'이다.

고종 8년인 1871년에 세워진 대원군의 척화비. 위가 잘려나간 이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12자가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우리의 만대자손들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라 적었다. 이 척화비는 고종 8년인 1866년 프랑스함대의 침략인 병인양요와, 동년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을 한 신미양요를 거친 후 전국에 세워진 척화비 중 하나이다.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 척화비

이 척화비는 일본 공사의 요구로 철거가 되어, 석교동 하수도의 뚜껑으로 사용하던 것을 197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높이 108cm, 너비 47cm 크기의 이 비석 하나가 역사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지만. 이 비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보이지를 않는다. 망선루와 척화비, 역사의 흔적인 두 가지의 문화재가 서 있는 중앙공원.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이, 그저 즐기면서 하루 해를 보내고 있다. 문화재라는 것에 관심이 없는, 요즈음 세상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명승 제33호인 남원 광한루원. 이곳에는 광한루가 있고, 오작교와 삼신산인 봉래, 방장, 그리고 영주섬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합하여, 바로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으로 손꼽히는 곳이 되었다. 이 광한루 건너편에는 또 하나의 누정이 있다. 바로 완월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정자이다. 완월정은 연못 안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작은 월천교를 놓아 누정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완월정은 광한루가 천상의 정자를 본딴 것에 비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달을 보기 위해 만든 정자이다. 하기에 말 그대로라면, 완월정은 달맞이를 하는 정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가 된다. 이 완월정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오방집으로 꾸민, 조선식의 대표적 누각으로 명성을 얻은 정자 중 하나이다.   


아름다운 정자 완월정

광한루가 천상의 정자로 남성적인 웅장함이 있다고 하면, 완월정은 지상의 정자로 여성적인 섬세함이 있다. 하기에 마주하고 있는 광한루와 완월정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무엇인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완월정이 있어 광한루가 더욱 그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마치 내조를 잘하는 여인과 같은 자태로 광한루를 바라보고 있는 완월정이다.

완월정은 양편으로 난 계단을 통해 정자로 오를 수 있다. 완월정의 특징은 바로 정자 중앙부분을 뒤로 물려놓은 부분이다. 마루바닥을 한단 높여, 마치 정자 안에 또 다른 정자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정자는 연못 안에 자리를 하고 있어서, 주변을 바라보면 더욱 아름다운 정경을 바라볼 수가 있다.



  
완월정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가족끼리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정한 연인끼리 이곳이 찾아 오기도 한다. 흡사 그 오래전 춘향이와 이도령이 이곳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완월정에서는 춘향제가 열리기도 하는데, 완월정을 찾은 날은 '신관사또행차' 시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구경을 하러 온 처녀 한 명이 춘향이를 대신해 붙잡혀, 의자에 묶여 장을 맞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사람들은 연신 춘향이를 닥달하는 변사또편을 들어준다. 이 또한 남원 광한루원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모습이다. 완월정 난간에 몸을 기댄체 주변을 둘러본다. 연못에는 커다란 물고기들이 형형색색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영을 하고 있고, 사또부임행차 시연은 점점 고조가 되고 있다.

(아니리)
"여봐라!"
"예이~"
"네가 그렇게 기생점고를 허다가는 장장춘일이라도 못다 불러들일테니 자주자주 불러들여라!"
"예이" 그제는 호장이 넉자화두로 불러 들이것다.

(중중모리)
"조운모우 양대선, 우선옥이 춘홍이, 사군불견 반월이, 독좌유황의 금선이, 어주돈수 홍도가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팔월부용 군자용, 만당추수의 홍연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사창의 비치여, 섬섬연약 초월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오동복판의 거문고 시르렁 둥당 탄금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만경대 구름 속 높이 놀던 학선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만화방창의 봄바람 부귀할 손 모란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바람아 둥땡 부지마라 낙락장송의 취향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단산오동의 그늘 속에 문왕어르든 채봉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장삼 소매를 떨쳐입고 지정거리든 무선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이산명옥이 차산명옥이 양명옥이 다 나왔느냐?"
"예 등대나오." (만정 김소희 선생의 창)




참으로 많은 기생들이 점고를 받는다. 물론 그 점고를 받은 곳은 바로 광한루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완월정에서도 아마 밤 시간에 또 다른 기생점고가 있지는 않았을까? 달맞이를 하는데도 오히려 운치가 있는 이 완월정에서도, 달빛에 치마폭을 거머주고 버선코를 살며시 들어 잰 걸음으로 점고를 받은 기생들이 들어왔을 것이다. 마루바닥에 스치는 그 치마자락의 소리는 또 어떠했을까?

정자는 전국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남원 광한루원 안에 있는 완월정은 그 의미로 인해 남다른 멋을 지니고 있다. 하기에 정자는 늘 그 자리에 있어야 빛이나고, 그렇게 아름다움을 자랑할만한 곳에 정자를 짓는다. 언제가 되려는지, 보름날 휘영청 달밝은 밤에 완월정에 올라 달맞이를 해보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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