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월대(邀月臺), 달을 맞이한다는 누각이란 뜻이다. 전주 한벽당 옆에 조그맣게 자리한 이 정자는 흡사 한벽당의 부속건물처럼 나란히 서 있다. 이 요월대를 보면 문득 세상사가 생각이 난다. 잘난 사람 곁에서 늘 숨죽이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이렇고 작고 보잘것없는 요월대가 있기에, 한벽당이 더 돋보이는 것이다.

한낮의 기온이 32도를 훌쩍 넘겼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흐르는데, 요월대의 여름 경치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한옥마을 이목대 길을 한 바퀴 돌아 전주천으로 접어들어 찾아간 한벽당. 한벽당에는 사람들이 무더위를 피해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바닥을 윤이 나게 닦아 반들거린다.


겸손을 일러주는 요월대

그 옆에 요월대는 흙발로 돌아다녔는지, 흙이 마루바닥에 그득하다. 한벽당을 치울 때 같이 좀 치워주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이 요월대를 돌아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남들보다 잘난 사람들이 거드름을 피워서는 안될 것이란 생각 말이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요월대가 있어, 한벽당이 더욱 돋보일 수 있었다. 그렇듯 사람들도 못난 사람이 있어야 상대적으로 잘난 것을 알 수가 있다.

어찌 보면 세상살이가 그렇다.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조금 뒤처지고 부족한 듯해도, 그 사람들을 나무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로 인해 잘난 사람을 구별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세상 사람이 잘날 수는 없지 않은가?




전라북도 유형문호재 제15호인 한벽당(맨 위)과 사방 한 칸으로 지어진 요월대.
굴다리쪽에서 본 요월대와 한벽당 쪽으로 드나들 수 있는 요월대.
 

이런 점을 보면 난 항시 한벽당보다 그 옆에 요월대가 더 소중한다는 생각을 한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한벽당과는 달리, 요월대는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정말 작은 정자이다. 그러나 누구랴 알았으랴, 왜 한벽당이 있는데, 굳이 그 옆에 작은 정자를 짓고 달을 맞이했겠는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라고 깨우치는 요월대

밖으로 나가 다리를 건너 요월대를 바라다본다. 전주천 맑은 물에 그림자를 내리 놓는 한벽당과는 달리, 요월대는 나뭇가지 속에 가려 보이자가 않는다. 요월대에서 맞이하는 달은 어떠할까? 저 멀리 동고산성의 동고사가 보인다. 그 밑으로 흐르는 전주천은 한벽당 앞을 지난다. 한벽당은 조선조 태정 4년인 1404년에 최담이 지은 정자로, 그 역사가 600년이나 되었다.




반향으로 본 요월대(맨 위), 한벽당과 달리 흙먼지가 가득한 요월대,
현판과 요월대에서 바라본 한벽당(맨 아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한벽당에 올라 시를 읊었다. 하지만 그 옆에 그저 있는 듯 마는 듯, 숨죽이고 있는 요월대에는 누가 다녀갔을까? 그러나 그 작은 정자에서 맞이하는 달오름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따로 요월대란 이름을 붙인 것일까? 멀리서 보아도 숨어잇는 요월대. 한벽당을 올라야 들어갈 수 있는 요월대. 요월대는 우리에게 고개를 들지 말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요월대 앞 바위에 음각한 글씨와 다리 건너편에서 본 요월대. 한벽당과 달리 밖에서는 잘 보이지가 않는다.

스스로 감춰버린 정자 요월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한벽당 보다 이곳에서 달맞이를 더 즐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보여주지 않는 구중궁궐의 규수와 같은 자태로 숨어있다. 그래서 오늘 요월대가 더 소중해 보인다.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 147-2에 소재한 수북정. 한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이곳을 찾았다. 시원한 백마강 줄기가 앞을 흐르는 이 수북정은 원래는 백제 때에 있던 누각이라고 한다. 백마강에 내려다보고 있는 수북정은 부소산의 남서쪽 자온대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충남문화재자료 제10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수북정(水北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정자이다. 조선조 광해군 때 김흥국이 세운 것으로 정자 이름을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수북정과 백제 때에 있었다는 수북정과는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일까? 정자 명칭을 보아서는 백마강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절경에 자리 잡은 수북정이 이렇게 소란해


수북정은 절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자 한편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강가에는 기암괴석이 솟아 나있다. 그런데 공사를 하느라고 백마강의 물은 흙탕물로 변하고, 부여와 규암을 연결하는 다리가 앞으로 생겨, 연신 찻소리가 귀를 찢는다. 이곳이 이렇게 변할 것을 누가 알았으랴. 다만 고목을 주변에 두고 서 있는 수북정만이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이젠 예전의 그 정취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잘 조경이 된 계단을 따라 수북정 위로 오른다. 주초를 약간 높게 놓고, 그 위에 입구를 뺀 주위를 난간으로 두른 정자이다. 긴 처마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사방에 기둥을 받친 모습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앞쪽으로는 수백 년은 묵었을 커다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수북정은 그렇게 말없이 백마강을 굽어보고


수북정을 건립한 김흥국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경인(景仁)이요 호는 수북정(水北亭)이다. 선조 22년인 1589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홍문관 정자·정언·북평사를 거쳐,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영변, 회양, 한산, 양주 등의 방백을 지내기도 했으며, 광해군 말년에는 김유 등에게서 반정을 도모하자는 권유를 받기도 하였으나, 이미 광해군의 녹을 먹었기 때문에 그리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 후 고향에 낙향하여 수북정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현으로 천거되어 부제학을 지냈으며, 독학을 하고 시문을 좋아하여, 당시의 거장 김장생, 신흠 등과 교분을 쌓았다.



수북정 안에 걸린 편액과 벌겋게 변한 백마강(아래)

『수북정집』이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한 김흥국. 그의 생각에는 이 수북정이 남다른 정자였을지도 모른다. 정자 옆으로 길게 늘어선 백제교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무더운 여름 날 귓가에 울려 짜증스럽다. 이곳에서 고향으로 은거를 하여 후학을 지도하고, 마음이 맞는 지인들과 교분을 쌓고 싶어 하던 수북정. 아마 그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지는 않았을 것을. 비로 인해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비통에 잠겨서일까? 벌겋게 변한 백마강 물이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와 정자 안을 헤집고 다니면서 소란을 피운다. 그렇지 않아도 짜증스러운 날인데, 지나친 소음으로 버틸 수가 없다. 길을 돌아내려오면서 고개를 돌려 수북정을 올려다본다.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자태를 잃지 않은 정자, 수북정. 그 모습이 바로 정자의 주인의 심성을 닮아 있는 것만 같다.

백제의 성이었던 공주 공산성 안에 보면 성안의 딴 건물들과는 다른 누각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왕들의 연희장소였던 임류각(臨流閣)이다. 임류각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2년 조에 의하면 궁궐의 임류각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높이가 5장(약 15m 정도)이나 되는 건물이었다고 한다.

임류각은 서기 500년인 동성왕 22년에 지은 건물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공산성을 정비하던 1980년에 임류각 터를 발견하고 1993년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 및 현실의 벽돌에 있는 무늬를 많이 활용하였다.


동성왕은 왜 이렇게 화려한 누각을 지었을까?

복원을 한 임류각은 상당히 호화롭다. 물론 단청이나 문양 등이 그 당시에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무령왕릉의 밝혀진 문양과 채색을 사용하였다면,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마루를 올렸으며, 양편에 계단을 만들어 누각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임류각은 정면 6칸에 측면 2칸 정도로 지어졌다. 누각 위에 오르면 금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백제의 왕은 이곳에서 어떤 연희를 베풀었을까? 누각 위에도 양편에 기둥이 서 있어 이 누각은 색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견고하게 지어진 누각이다. 많은 신하를 거느린 백제의 왕들은 이곳의 주인으로 당당한 세력을 과시했을 것이다.



백제의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는 임류각. 누각 위의 기둥과 누각을 받치고 있는 기둥(중) 그리고 지붕

임류각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문제는 이 자리가 과연 예전에 임류각이 서 있었던 자리일까 하는 점이다. 백제본기에 보면 임류각은 궁궐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성 안에 궁궐이 있던 자리는 쌍수정을 오르는 길목 앞이다. 궁궐터에서 보면 이 임류각이 있는 자리가 동편에 해당한다. 그러나 혹자는 임류각이 중국 산동성에 있었고, 임류각을 지은 동성왕도 산동성에 또 다른 궁궐과 호화로운 임류각을 지었다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임류각은 정자에 해당하는 누각이다. 그리고 궁궐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백제본기에 기록하고 있듯 임류각은 궁궐의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기에 현재의 임류각의 자리는 서기 500년 당시 동성왕이 지었던 임류각이 맞을 것이란 생각이다.



임류각의 현판과 단청(중) 그리고 무렬왕릉의 문양을 본뜬 천정의 문양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은 동성왕 3년인 491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동성왕 6년인 484년에 중국 남조의 유송에게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적 수완도 뛰어났던 왕으로 가록이 되고 있다.

동성왕은 왜 이렇게 호화로운 임류각을 지은 것일까? 아마 고구려와 말갈 등의 침공 등을 막아내고, 백제의 위상을 한결 높였다. 그리고 함께 동맹을 한 신라와 가야 등에게도 백제의 강성함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신하들에게 자신의 큰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임류각을 짓게 한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누각에 올라 금강을 내려다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누각에서 연희를 베푼 동성왕. 이 임류각을 짓고 난 다음 해인 501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호화로운 임류각을 남겨 놓은 채. 그런 사실을 알고 나면 세상은 더욱 무상한 것이 아닌지.

 

문경시에서 59번 도로를 따라 김룡사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라는 마을을 만나게 된다. 고갯길을 넘어서 내려가다가 보니 다리를 건너 삼거리가 나오고, 그 전 좌측에 정자가 서 있다. 주변은 숲이 울창하고 정자의 앞과 옆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지금은 도로가 발달하는 바람에 이 정자의 운치가 감소되었겠지만, 예전에는 나름대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차에서 내려 내를 건너 정자 가까이 다가갔다. 정자 앞면에 붙인 현판에는 <석문정(石門亭)>이라고 적혀있다.



구곡원림에 서 있는 정자

문경의 구곡원림 가운데 하나인 ‘석문구곡’은 아름다운 경치를 지니고 있는 곳을 말한다. 그 중에서 가장 마지막인 제9곡은 도화동을 뜻하며 석문구곡의 옛 지명은 ‘문경 대도촌 아천 상류’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이 아천 상류가 바로 현재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 일원이라는 것이다.


내를 건너 석문정으로 돌아가는 길에 커다란 석비 한기가 서 있다. <이곡마을 숲>이라고 적힌 석비 앞으로는 맑은 냇물이 소리를 내고 흐르고 있다. 숲과 암벽이 어우러진 냇가는 일품이다. 정자로 올라가니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정자는 규모는 크지 않으나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정자는 비탈진 경사면에 지어 앞쪽으로는 밑기둥을 세워 올려놓았다. 높은 난간을 두르고 두 칸의 방을 마련했다. 방 앞과 옆면에는 누마루를 깔았으며, 팔작지붕으로 멋을 더했다. 정자 안에는 중수기를 비롯해 두어 개의 게판이 걸려있다.


길손 잃은 정자

방은 온돌을 놓을 것을 보니 정자는 사시사철 주인에 의해 이용이 되었을 것이다. 주변 경관으로 보나 정자의 형태로 보나 꽤 세월이 흐른 것 같은데, 아무런 설명을 한 간판이 서 있지 않다. 문경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찾아보아도 자료가 나오지를 않는다. 결국은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해 이렇게 방치를 한 것이려니 생각하니, 조금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시 한수라도 읊었을만한 곳이다. 그런데 주인 잃은 정자 석문정은 찾아드는 길손도 없는 것일까? 정자 한 동을 지으려면 많은 예산이 들어야 하거늘, 이렇게 좋은 풍광에 자리한 정자가 점점 퇴락되어 간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처음 이 정자의 주인은 석문정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을까? 단청도 되지 않은 정자는 그 나름대로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건만, 이제는 시인도 나그네도 찾아들지 않는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은 문화재로 지정이 된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는 이러한 정자 하나쯤은 반드시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한 많은 정자와 누각들이 망가져 가고 있는 현실이 마음이 아프다. 오늘 석문정은 그렇게 길손마저 끊긴 채 외로이 서 있다.

공주 공산성 안에 들어가면 '쌍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사방에 모두 훤히 트여 주변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개방형 정자이다. 이 곳 주변에는 유난히 큰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 쌍수정이란 정자의 명칭도, 주변에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붙여진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쌍수정은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정자는 영조 10년인 1734년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인조 2년인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인조가 공산성에 머물르고 있을 때,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 밑에서 반란의 진압소식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있던 자리에 세운 정자

'이괄의 난'이 평정이 되고 인조가 난 후, 인조는 이 나무에 정삼품인 통훈대부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아마 답답한 마음을 함께 풀어준 나무가 고맙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의 이름도 쌍수성이라고 부를 것을 명하였다. 영조 때에 관찰사 이수항이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정자를 지어 '삼가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정자가 바로 지금의 쌍수정이라고 한다.

이 쌍수정과 공주에는 재미난 설화가 전한다. 바로 인절미에 관한 이야기다. 인절미는 찹쌀떡에 고물을 묻힌 떡이다. 네모나게 만든 인절미는 차지기 때문에, 몇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이 인절미가 인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공주를 '인절미의 고장'이라 부르는 것은 왜일까?




인조의 배를 불려준 인절미

인조 2년인 162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인 이괄이 난을 일으켜, 당시 한양까지 밀고 내려왔다. 인조는 피난 길에 올라 공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황급히 떠난 피난 길에 먹을 것이 제대로 준비될 리가 없다. 피난 길에 공주 우성면 목천리 근방을 지나게 될 때, 근처의 임씨 댁에서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왕에게 진상을 하였다.

시장기가 돌았던 왕이 보자기를 열고보니, 콩고물을 가득 묻힌 떡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인조는 이 떡을 한 입 베어물었다. 배가 고픈차에 먹었으니 그 맛이 얼마나 좋았으랴. 몇 개를 먹고 난 인조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떡 이름이 무엇이냐. 참 맛이 있구나"
"...."
"아니 이 떡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단 말이냐. 그럼 이 떡을 누가 가져왔느냐"
"예! 임씨댁에서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 이 절미의 떡을 임씨댁에서 만들어왔단 말이지. 그럼 이 떡을 오늘부터 임절미라고 불러라"

임씨댁에서 만든 맛있떡이라 하여 '임절미'라고 부르던 것이 후에 인절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쌍수정을 오르는 계단 앞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있다. 공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노라면 시장끼도 드는데, 이럴 때 인절미라도 파는 곳이 있다면, 더욱 인절미에 대한 추억이 남다를 텐데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쌍수정 위에 올라 더운 날씨에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앉아있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찾아든다. 문화해설사가 인솔을 해수정에 오른 아이들은 연신 설명을 들으면서 무엇인가를 적고 있다. 현장학습이라도 나온 것일까? 저렇게 우리 문화재에 대한 열심인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화재를 찾아 다닌지가 벌써 25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그 많은 문화재가 다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훼손이 된 문화재가 마음을 아프게도 하다. 하지만 저 아이들을 보니 괜한 우려였나보다. 저런 마음을 가진 아이들은 우리 문화에 대해서 남다른 마음을 갖고 있을 테니.



인절미도 그 엣날 인조대왕이 애절하게 소식을 기다리던 커다란 나무도 사라졌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남아 전해지고 있는 쌍수정. 그래서 나그네의 발길은 또 다른 길을 찾아 떠나는가 보다. 문화와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 기다리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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