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일 답사 첫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남원을 출발하여 인월을 거쳐 실상사가 있는 산내면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실상사로 가다가 보면 일성콘도 입구 못 미쳐, 냇가 옆에 정자가 서 있다. ‘퇴수정(退修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525에 소재한 퇴수정의 앞으로는 만수천의 맑은 물이 흐른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5호인 퇴수정은 조선 후기에 벼슬을 지낸 박치기가 1870년에 세운 정자이다. 박치기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벼슬에서 물러나 수양을 하기 위한 정자라는 뜻으로, ‘퇴수정’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정자는 단청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단아한 모습 그대로 앞으로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고 있다.


1870년 박치기가 심신 단련을 위헤 세웠다는 퇴수정.
 
사각형 주추를 놓은 정자

퇴수정은 만난 처음부터 마음에 든 정자이기도 하다. 정자를 찾아 내려가는 길에는 ‘개인소유의 땅이니 출입을 금지한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러니 어찌하랴, 길을 돌아 냇가로 내려가는 수밖에. 앞으로는 암석을 타고 넘으며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에는 몇 그루의 노송이 가지를 내리고 있다.

12월 초겨울에도 이렇게 운치가 있는 곳이라면, 한 여름 이곳을 찾았다면 아마 감탄이 절로 나왔을 것만 같다. 장대석 기단을 쌓고 한편으로 정자로 오르는 계단도, 장대석 돌로 놓은 것도 특이하다. 정자 가까이 가서보니 주춧돌이 모두 사각형이다. 이런 것 하나에도 많은 공을 들여서 지은 정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장대석 돌로 계단을 놓고, 네모난 주추를 사용했다.

돌계단을 밟고 정자에 오르니, 측면과 뒤편으로는 커다란 암벽이 둘러있고, 만수천을 흐르는 물은 소리가 맑기만 하다. 정자는 누마루를 깔고 중앙 뒤편으로 판자로 두른 방을 한 칸 마련하였다. 원래 문이 없었는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절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슴 가득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다. 정자 앞을 가로지른 노송의 가지는 금방이라도 냇물로 들어설 것만 같다.


정자 앞을 흐르는 만수천과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수많은 편액이 정자의 운치를 더해

정자에는 여기저기 벽면마다 수많은 편액이 걸려있다. 아마 어느 정자를 가보아도 이렇게 많은 편액이 걸린 곳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만큼 퇴수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 이 12월의 초겨울. 글이라도 좀 쓸 줄을 알았다면, 나라도 한 두 어자 적고 가지 않았을까?

정자 안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찬바람이 옷깃 안으로 파고들지만, 그 바람이 대수랴. 이렇게 아름다운 운치를 더하는 정자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다본다. 저 맑은 물에 세상에 찌든 마음을 훌훌 털어내어 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청정한 마음을 갖고 돌아갈 것인가? 그렇게 할 수 없음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누마루를 깔고 뒤편에 판자방을 들였다. 수많은 편액들이 벽에 걸려있다.

갈 길이 멀어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 이럴 때는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저 이곳에 몇 시간이고 서서 흐르는 물에 마음을 적시고 싶다. ‘그래 오늘은 돌아가자. 하지만 내년 꽃피는 시절에는 반드시 이곳을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가는 발길을 붙잡는 여울진 곳으로 흘러드는 물소리가, 유난히 높게만 들린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청아한 젓대의 소리같이.


앞으로는 남원 시내를 가로지르는 요천이 흐르고, 뒤로는 금암봉이 솟아 있다. ‘금수정(錦水亭)’은 그렇게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요천을 바라보면서 금암봉을 오르는 중턱에 자리한 정자 금수정. 말 그대로 물 맑고 산세가 수려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이다.

남원 광한루원에서 요천을 가로지르는 승사교를 건너면, 금암봉을 오르는 나무 계단이 끝나는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금수정이 있다. 금수정은 1936년에 이현순, 조광엽, 서봉선 등이 주축이 되어, 시를 읊고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세월이야 그렇게 물 흐르듯 7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지만, 새롭게 단청을 한 정자는 갓 조성을 한 것처럼 보인다.



남원 요천 가에 서 있는 금수정과 정자 안에 걸린 퍈액

비안정은 사라지고 금수정이 자리 잡아

금암봉이란 이름은 요천의 물가에 커다란 반석에 붙인 이름이다. 족히 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인데, 주변 경관이 빼어나 많은 사람들이 천렵을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용성 팔경 중에는 ‘금암어화(金岩漁火)’라고 하여, 밤에 고기를 잡는 불빛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것을 알려주고 있다.

비안정은 요천가 금암봉 아래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현재의 금수정 인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금암봉의 부근에는 비안정, 혹은 비오정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이름이 정자 명칭에서 비롯한 것이란 생각이다. 옛 시구에는 이 비안정에 대한 글이 보인다.


금암봉을 오르는 나무계단과 정자 앞으로 흐르는 요천

사방 십리에는 저녁 안개 피어나고
소나무 대밭 속에 작은 정자 하나.
필마로 찾아오니 날은 이미 저물고
외로운 여정 속에 새벽에야 닿는구나.
오작교 가로질러 광한루에 당도하니
교룡산을 둘러싼 옛 산성이 보이네.
이곳에서 그대와 노년을 마칠까
늙어 요천가에 낚시나 드리우세.

광해군 1년에 공조참판을 지낸 현곡 조위한의 시이다. 조위한은 글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주생면 제천리에 도산정을 건립하였다. 이렇듯 요천가에 서 있었던 비안정은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에 빠짐이 없었나 보다.



아름다운 조각과 단청

금수정은 민족정신이 깃든 정자

금수정이란 현판의 글씨는 1935년에 조정훈이 썼다. 조정훈은 남원 광한루의 ‘호남제일루’의 현판을 쓰기도 했다. 금수정을 지을 때는 일제의 우리문화 말살정책이 한창 펼쳐졌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금암봉 정상에는 남원의 신사가 세워졌는데,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이곳에 정자를 새웠다고도 전한다. 즉 이곳에 금수정을 짓고 신사참배를 하러 간다고 오르다가, 이곳에서 멈추었다는 것이다.

정자는 주심포계로 배흘림기둥을 놓았다. 연등 천정에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밖으로 내어돌렸다. 당시의 정자치고는 상당히 화려하게 지은 건축물이다. 아마 신사보다 더 잘 짖겠다는 마음이 정자에 배어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정자에 올라 내려다보는 요천과 교룡산성, 그리고 광한루원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금수정 현판과 벼랑 위에 선 금수정

가파른 절벽에 앞으로 기둥을 내어 정자를 내어지었다. 이 정자에 올라 시 한수 읊으며, 나라 잃은 슬픔을 가신 것은 아니었을까? 요천 물가에 한 다리를 들고 서있는 새 한 마리가, 무엇인가를 잡았나보다. 큰 날개를 퍼덕이며 멀리 날아간다. 그 새 등에 마음을 실어 따라갈 수만 있다면. 아마 그런 마음들이 금수정을 이곳에 지었나보다.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49-1에 소재한 상림숲 안에는 ‘함화루’라는 누각이 서있다. 경남유형문화재 제258호인 함화루는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다. 원래 누각의 이름은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는 뜻으로 망악루라 했으나, 1932년에 상림숲 안으로 자리로 옮기면서 함화루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함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이다. 팔작지붕인 함화루는 이층 내부는 단청으로 칠했으며 난간을 둘렀고, 나무로 된 계단을 설치해 일층으로 통하게 만들었다. 일층에는 기둥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읍성의 남문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 상림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함양 상림은, 함양읍의 서쪽에 있는 위천 강가에 있는 숲이다. 이 숲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으로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 선생이 함양읍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대관림’이라고 불렀으며 이 숲의 가운데 부분이 홍수로 무너짐에 따라 상림과 하림으로 구분이 되었다.




현재는 상림만이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함양상림을 구성하고 있는 식물들로는 갈참나무, 졸참나무 등 참나무 종류와 개서어나무류가 주를 이룬다. 1993년 조사에서는 상림 숲 안에 116종의 식물이 조사되었으며, 현재 20,0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굳게 닫힌 함화루의 계단 위 문

본래 함양읍성에는 동쪽에 제운루, 서쪽에 청상루, 남쪽에 망악루 등 삼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남문이었던 이 건물만이 상림숲 안에 자리를 하고 있다. 일제는 이 망악루를 도시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총독부에서 강제로 철거하려고 하자, 1932년에 함양고적 보존회의 대표 노덕영이 사재를 털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상림 안에 자리한 함화루. 옛 정취를 느껴보려고 이층으로 올라가려고 계단을 올려다보니 문이 있다. 그리고 굳게 잠겨있다. 왜 이렇게 잠가놓았을까? 꼭 그래야만 보존이 된다고 생각을 한 것일까? 보물로 지정이 된 누각들도 사람들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했는데, 가는 곳마다 잠긴 누각이 안타깝다. 영남의 대유학자인 김종직은 망악루를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작년 내 발자취가 멧부리 더럽혔거니
망악루 올라서 다시 보니 무안하구나.
산신령도 내가 다시 더럽힐까 두려워하여
흰구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망악루 위에서 바라다보는 지리산의 풍광이 아름다웠나 보다. 지리산은 아니라고 해도 상림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오르려 했던 함화루. 그러나 굳게 닫힌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종직은 구름이 문을 닫았다고 했지만. 나는 오늘 함양군의 관계자들이 굳게 닫아버린 문이, 정말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덕암리 도로변에 커다란 노송 숲이 있다. 그 안에 자리를 하고 있는 낮은 담이 둘러쳐진 고풍스런 정자 하나. 고려 말기의 문신인 덕곡 조승숙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태조 7년인 1398년에 세운 교수정이다. 처음 이곳에 정자를 세운지가 벌써 600년이 지난 정자이다.

조승숙(1357~1427)은 고려 말 우왕 7년인 138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향인 함양으로 내려와 이곳에 교수정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두문동 72현의 한분인 조승숙 선생의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배어있는 정자 교수정. 그곳에는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소나무 숲속에 선 교수정

교수정은 주변이 소나무 숲이다. 지나는 길에도 눈이 띠는 것은, 고목으로 변한 소나무들 때문이다. 낮은 담장을 둘러친 교수정은 정면 삼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정자는 그리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안에 정자를 지은 이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지금이야 도로변이지만, 아마 이 정자를 처음 지었을 때는 주변이 숲이었을 것이다.

정자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뒤편에 있는 작은 능선을 생각한다면, 이 정자의 처음 모습이 떠오른다.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있는 산 밑, 냇가 곁에 이 정자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의 아이들이 글을 배우러 오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선생은 일어서 미소를 띠우며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을 것이다.





성종이 내린 사제문

교수정을 바라보면 좌측 뒤편에 방을 드렸다. 정자에 방을 놓을 때는 중앙에 놓거나, 아니면 뒤편 중앙에 놓는다. 그러나 교수정의 방은 뒤편 한 편으로 몰아놓았다. 정면으로 두 칸, 측면에 한 칸 방을 놓고 이곳에서 기거라도 했던 것일까? 방 앞에서 마을을 바라다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들녘이 시원하다.

여기저기 걸린 편액에서 이 정자의 모습을 본다. 밖으로 나와 냇가에 보니 비가 한 기 서 있다. 비에는 음각을 하고 붉게 칠을 한 글이 적혀있다.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이란 글이 있다. 이 글은 그의 행적이 알려지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이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는데, 그 중에서 뽑은 글귀라는 것이다.



비는 정자의 담 밖, 냇가 바위 위에 서 있다. 자연 암반 위에 세운 비를 보려고 내려가다가 발을 헛딛고 말았다. 그래도 겨우 비문을 찍고 돌아선다. 그런데 이 비 앞에서 보는 정자의 운치가 남다르다. 그래서 이곳에 비를 세운 것일까? 넘어지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또 다른 정자의 멋. 그래서 세상은 ‘새옹지마’리고 한 것일까?

정자를 한 바퀴 더 돌아본다. 참으로 작지만 풍취가 있다. 화려하진 않아도 무엇인가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있다. 노송과 어우러진 작은 정자 하나.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일까? 잘 정리가 된 주변이 돌아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일각문을 나서면서 뒤돌아보니, 선생의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정자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감흥이다.

 

석탄정. 남들은 석탄정이라고 하면 먼저 옛 노랫말을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석탄정을 본다면 그런 노랫말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입부터 벌릴 것이다. 마을을 들어가는 길 한편에 보이는 거목들이 우거진 숲.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작은 정자 하나. 그것이 바로 석탄정이 운치있게 자리한 모습이다.


석탄정을 찾아가 제일먼저 느낀 것은 쉬고 싶다는 생각이다. 아주 편안하게 두 다리를 뻗고, 그저 세월을 막아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정자 안에 걸린 수많은 편액들. 이 석탄정이 왜 그토록 발을 쉬고 싶었는지, 바로 이해가 간다.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들려 편안하게 발을 뻗고 세월의 흐름을 잊은 것일까?




석탄 류운선생이 건립한 정자 


석탄정은 고창군 고창읍 율계리에 자리한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다. 바로 석탄정이 그런 곳 중 하나이다. 주소를 잘못 찾는 바람에 만나게 된 정자. 석탄정을 찾아들어 슬그머니 남모르는 미소를 짓는다. 열심히 답사를 하다가보니, 이렇게 좋은 곳으로 안내를 했는가 보다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소득이기 때문이다.


선조 14년인 1581년에 지은 정자이니, 벌써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자이다. 류운 선생은 성격이 고매하고 학식이 높아, 청암찰방이라는 직책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곳에 이 정자를 지었다. 동서로는 상풍루와 영월헌을 세우고, 정자 앞에는 조대를 세웠다고 한다. 주변에는 나무를 심어 풍취를 돋우었다고 하니, 주변에 있는 나무들의 수명이 그러하단 것을 말한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뿌리가 드러나 보일 정도이다. 다 드러난 맨살을 보이고 있는 고목에서, 석탄정의 역사를 알수 있다. 이렇게 멋진 정자를 만나기도 쉽지가 않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는 가운데 방을 들였다. 그래서 주변을 마음대로 돌아볼 수 있도록 꾸몄다. 정자의 앞으로는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들였다.


풍취를 자아내게 하는 정자


그 높임마루 하나가 정자의 모습을 바꾼다. 이 높임마루가 아니더라도 방을 둘러쌓고 있는 마루에 앉으면 세상 시름을 잊을 것만 같다. 덤벙 주초위에 원형의 기둥을 놓고, 팔작지붕으로 꾸민 정자는 그렇게 옛 풍취를 자랑이라도 하는 것일까? 사방을 둘러 걸린 편액들이 편안한 다리를 뻗은 나그네를 긴장케한다.





무엇인가 이 석탄정에서는 글 하나라도 짓지 않는다면, 댓돌 밑으로 내려가지 못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한바퀴 빙 둘러 걸린 수많은 편액들이 이곳을 자랑하고 있다. 석탄 류운선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쌓은 것일까? 이곳을 둘러보면서 스스로를 나무란다. 과연 난 선생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간직할 수는 있는 것일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좋아할 수는 있는 것일까? 


마음을 읽을줄 모르는 새 한 마리가 고목의 가지에 앉아 요란하게 울어댄다. 아마 저 새도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아끼지 못한 나를 탓하는가 보다. 오늘 이 석탄정에 올라 시름 하나를 내려놓고 간다. 그리고 숱한 답사길에 쌓인 피로도 내려놓고 가련다. 그것이 석탄 선생이 기다리는 바가 아닐런지. 석탄정에는 수많은 나그네들의 피로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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