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선교장. 우리 전통가옥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고택이다. 선교장은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에 소재한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효령대군의 11대 손인 가선대부 이내번이, 전주에서 이곳으로 이주를 해와 1703년에 건립한 집이다. 벌써 300년이 지난 고택이다.

조선조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평가받고 있는 선교장은, 안채, 열화당, 행랑채, 서별당, 동별당, 곳간채와 솟을 문 앞에 따로 떨어져 선교장의 품위를 높이는 정자인 ‘활래정’으로 꾸며졌다. 10대에 걸쳐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전통가옥으로 유명한 선교장. 그 앞에 서 있는 활래정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정자일까?


100년이 지난 뒤에 건립한 활래정

활래정은 선교장을 짓고 난 뒤 100여년이 지난 1816년에 건립이 되었다. 선교장 안에 있는 사랑채인 열화당으로서는 아마도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에는 부족했었는가 보다. 앞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선교장의 멋을 한층 더 높게 만들고자 했던 마음이 그대로 반영이 된 정자이다.

서쪽 태장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 그 물을 그대로 경포호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웠는지도 모른다. 선교장의 동별당보다 아래편에 연못을 파고, 그 물을 가둔 것이 오늘 날 활래정이 있게 만들었다. 태장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활래정에 잠시 머물다가, 경포호로 빠져 나간다. 결국 활래정은 항상 맑은 물이 고인 것이 아니라, 흐르고 있다고 표현을 해야 맞을 것이다.



손님을 맞는 다실도 겸해

활래정이 딴 정자보다 운치가 있다는 것은, 그 안에 다실을 두었다는 점이다. 물론 어느 정자나 그 안에서 차 한 잔 마시거나, 술 한 잔을 마시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활래정은 다르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정자이다. 석축으로 쌓은 연못의 한편에 세 칸을 걸쳐 놓고, 한편은 물 위에 뜬 듯이 장초석을 받쳐 띄워놓았다.

ㄱ 자 형의 정자는 팔작지붕으로 하고, 사방을 창호를 달았다. 사방 어느 곳에서나 주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자 밖으로는 좁은 툇마루를 놓고, 모두 난간으로 둘러 멋을 내었다. 그리고 연못에는 갖은 수초들을 심었다. 계절마다 연못 속에 있는 수생식물들이 피우는 꽃들이 활래정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활래정은 축대 위에 걸친 부분에는 두 개의 연결된 방과 한 칸의 누마루방을 드렸다. 그리고 꺾인 부분의 연못 위에 장초석을 받친 방은 큰 누마루를 깐 방이다. 겨울에는 따듯한 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여름이면 누마루방에서 시원한 경포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태장봉에서 흘러드는 맑은 물에 시 한수를 띄워 보낼 수 있도록 꾸민 정자이다.

정자의 조건을 두루 갖추다

그런 아름다운 정자에서 괜한 술로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웠는지, 그저 차방을 만들고 차 한 잔에 온갖 정담이 오고갔을 것만 같다. 이번 1월 30일 답사 때와 2007년 2월 6일의 답사 사진을 비교해 본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연못 안에 수위뿐이다. 그 때는 장초석의 일부가 물이 차 가려져 있었다.



해가 지나도 옛 모습 그대로를 지키고 있는 선교장과 활래정. 그래서 이 집이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선정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것을 지켜내는 후손들의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언제 날이 풀려 활래정의 연못에 꽃이 가득한 날, 활래정에 올라 향이 가득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은 것은, 바로 옛 모습 속에서 우리의 선조들을 기억해 내보고 싶어서이다.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열미리 산 174번지는 곤지암천을 끼고 있는 곳이다. 98번 도로를 따라 곤지암에서 여주군 산북면 쪽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에 '백인대(百仞臺)'라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백인대가 무엇인지 궁금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안에는 축산물등급판정소가 있다. 그 앞을 지나면 곤지암천이 흐른다. 그곳에서 아래쪽으로 보니 건너편에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작은 정자가 하나 서 있다. 바로 백인대이다.

백인대를 바라보면서 밑으로 내려가니 소의 분뇨를 버린 듯 냄새가 코를 짜른다. 아직은 눈이 녹지를 않고 설 연휴에 며칠간 날이 푹하다 보니, 개울에 얼었던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른다. 건너갈 곳이 마땅치가 않다. 그렇다고 포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할 수 없이 돌을 집어 물에 던져 넣었다. 수십 개의 돌을 큰 돌 중간에 던져놓고, 그 돌을 밟고 기우뚱거리며 겨우 내를 건넜다.



송시열이 제자와 강학을 논하던 곳

물을 겨우 건너고 보니 이번에는 녹은 얼음으로 인해 발이 빠진다. 겨우 벗어나니 눈길이다. 그래도 저 앞에 보이는 백인대를 올라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눈에 미끄러지면서 겨우 벼랑 아래에 도착을 한다. 계단은 절벽에 돌을 쌓아 놓았는데, 눈과 낙엽이 가득 쌓여 있다. 눈을 헤치고 낙엽을 밀어내며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경사가 급해 자칫 한발만 실수를 하면 저 밑 곤지암천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바위를 잡으며 겨우 오른 백인대. 백인대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송시열이 충청도에서 상경할 때는 반드시 들렸던 곳이라고 한다. 송시열은 이곳에서 광주 출신의 제자인 구문찬과 더불어 경학을 강론하고 시를 지었다. 백인대는 곤지암천이 흐르는 절벽 위에 지었는데, 물이 많아지면 배를 타고 건너고, 물이 마를 때에는 걸어서 건넜다고 한다.




아슬아슬한 계단을 올라 백인대 가까이 다가가 본다. 밑으로는 곤지암천이 휘감아 흐른다. 이곳에서 대학자인 송시열과 강론을 한 구문찬. 1937년에 구문찬의 후손들이 이곳에 육각형의 정자를 지었다고 하나, 훼손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백인대는 시멘트로 지었으며, 1996년에 신축한 것이다. 백인대는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렇게 위험한 답사는 정말 × 같아요'

백인대를 돌아보고 내려오려는데 난감하다. 도저히 미끄럽기도 하고 가팔라서 내려갈 길이 막막하다. 할 수 없이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 쌓인 낙엽과 눈을 치운다. 그래도 서서 내려가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듯하다. 할 수없이 엉덩이를 계단에 붙이고, 한발씩 자리를 잡으면서 엉금엉금 내려오는 수밖에.



그렇게 한참이나 고생을 한 끝에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동행을 한 일행은 건너편에서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절벽을 기어오르듯 올라간 것도 위험한데,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손에 땀이라도 날 정도였다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답사를 하는지 알아주나요?"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정말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이렇게 × 같은 경우를 당하는 것인지 몰랐네요."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닌데 멀 그리 야단이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정말 이런 답사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팔자가 그러려니 하고 웃고 말아야지.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그렇게 편안하리란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젠 '× 같은 답사'라는 소리까지 듣다니. 글쎄다. 앞으로는 편한 글을 쓸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백인대의 기억은 아마 두고두고 남을 듯하다.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위천 가에는 용암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위천을 지나다가 만난 용암정을 찾아 들어가는 길은, 좁은 다리를 지나 농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만 한다. 얼핏 보면 길이 없는 듯 보이지만, 빙 돌아 들어가는 길이 있다. 처음에는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해, 그냥 지나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자가 냇가에 서 있고, 분위기 역시 괜찮다. 저런 정자라면 십중팔구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정자이다. 지나던 길을 되돌려 안으로 들어가니, 용암정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경남문화재자료 제253호라고 한다. 용암정은 순조 1년인 1801년에 용암 임석형이 위천 가에 처음으로 지었으니, 올해로 210년이 된 정자이다.



사방을 돌아보면 다른 정자가

1864년에 보수 공사를 했다는 용암정은 고색이 찬연한 정자이다. 정자 위에는 방을 한 칸 들이고, 아궁이를 두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정자에는 용암정, 반선헌, 청원문, 황학란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있다. 아마도 풍류를 아는 용암 선생이 사방을 둘러 걸 맞는 이름을 지은 듯하다.

이 정자는 지붕의 끝이 날렵하게 치켜 올려져, 마치 한 마리 새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듯하다. 누마루 아래의 기둥은 둥근 기둥을 썼으며, 누마루 위에 세운 기둥은 원형으로 다듬어 놓고, 마루방의 기둥은 사각으로 조성하였다. 난간은 간단하게 나무를 듬성듬성 대어, 시원한 느낌이 들게 조성을 하였다.



위천을 보고 시심을 불러일으키다

정자의 뒤편으로는 기암과 어우러진 위천 맑은 물이 흐른다. 누마루 한편에 마련한 한 칸의 방을 중앙에 두고 문을 내었다. 정자 안에 또 하나의 정자가 자리를 잡은 듯한 느낌이다. 격자문으로 짠 문틀 안에 작은 문짝을 달아, 방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을 높인 것도 이 정자의 색다른 멋이다.

정자에는 몇 개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정자의 이름을 적은 편액이다. 나무 판에 커다란 글씨로 양각을 한 용암정과, 반선헌 등의 글씨가 제각각 달라 글을 쓴 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용암정에 오른 뭇 사람들이 이렇게 편액의 글씨를 적어 기념을 하였나 보다.




사방에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을 내어 처마 끝을 받치고 있는데, 이는 정자가 지어진 한참 뒤에 세운 듯하다. 이 용암정도 정자를 오르는 계단을 통나무로 찍어내어, 발을 디딜 수 있게 만들었다. 투박한 그 모습에 호화롭지 않은 정자의 모습이, 오히려 기품을 잊지 않은 선비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선생이 용암정에 오른 사연

용암 임석형 선생은 출사를 하지 않았다. 은진사람으로 자는 원경, 호는 용암이다. 함안에 살았으며, 영조 27년인 1751년에 태어나, 순조 16년인 18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용암정을 짓고 나서 16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16년이란 세월을 용암 선생은 이 용암정에 머물며, 이곳을 찾는 많은 시인묵객들과 교류를 한 것이다.



31책의 용암유집이 전하며, 그의 묘갈은 유만식이 찬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공의 초연한 취미와 락()은 만년의 용암정에서 볼 수 있다. 영호남 선비들이 여기를 지나면서 모두가 원학주인이라 그를 칭송하였다. 탁월한 기량과 의민한 재주를 갖고도 출사하지 못했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정자의 주인인 용암 임석형 선생. 위천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이곳에 시심을 띠워 보냈던 것일까? 1211일의 찬바람이 용암정으로 몰려온다. 위천 맑은 물이 잔 파문을 일으킨다. 선생이 계셨더라면 시 한 편을 지필묵을 갈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지 않았을까? 그 모습이 그리운 용암정이다.


자락정(自樂亭),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는 정자라는 뜻인가? 자락정 앞을 흐르는 노평천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로 감흥이 일어날 것만 같다.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앞 도로를 지나는데, 자락정의 안내판이 보인다. 정자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논개의 생가지를 찾아가는 갈이고, 날은 이미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지만 길을 돌렸다.

이정표가 가르치는 곳으로 들어갔으나, 정자가 보이지를 않는다. 한참이나 지나 올라간 듯하여 돌아내려오는 길에 저만큼 정자가 하나 보인다. 옆에는 큰 나무 두어 그루가 서 있는 것이 영락없는 옛 정자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9호인 자락정은 그렇게 노평천의 기암 위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전북 문화재자료 제129호인 장수 장계의 자락정

530년 세월을 지낸 고정(古亭)

자락정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조선 성종 10년인 1479년이었으니, 벌써 530년이나 지났다. 당시 박수기(1429~1510)가 처 조부인 김영호가 살던 장수로 내려와, 지은 것으로 전한다. 박수기는 충청도 유성사람으로 결혼을 계기로 장수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심신을 수양하여 보냈다고 전한다.

처음에 세운 정자는 부서지고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고종 20년인 1883년 박수기의 후손들이 김영호의 후손들과 함께 힘을 합쳐 유허비를 세웠다. 현재의 정자는 옛 정자가 있던 터에, 1924년에 세운 것이다. 스스로 즐긴다는 뜻의 자락정은 노평천을 바라보며, 자연과 함께 벗 삼아 살아가고자 했던 박수기의 심성이 그대로 배어있는 정자이다.



자연을 그대로 닮았다는 자락정. 스스로 즐거움을 찾는다는 자락정은 노평천가에 자리한다. 통나무로 만든 계단과 자연 암석을 그대로 이용햔 주춧돌
 
겨울철에 만난 자락정은 또 다른 감흥이

뒤편으로는 커다란 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앞으로는 노평천이 흐르고, 정자의 주변에는 기암이 정자를 받치고 있다. 지금이야 주변으로 도로가 나고 조금은 정신이 사납기도 하지만, 처음 이곳에 정자를 지었을 때를 생각하면 나름 절경이었을 것이다. 이곳에 정자를 지은 박수기의 마음은 자연 그대로를 닮았을 것만 같다.

12월 29일 겨울, 정자 뒤편의 나무들은 앙상하니 가지만 남았다. 하지만 주변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쌓여 있어, 조금은 허전한 마음을 가시게 한다. 넓은 암석 위에 세운 자락정은 주춧돌이 없다. 투박한 나무 그대로를 이용하여, 정자 밑의 기둥을 삼아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정자로 오르는 세단의 나무계단은, 통나무를 찍어 홈을 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이다.


정자 안에 걸린 편액들과 후손들이 세운 유허비

퇴색되어가는 자락정의 즐거움

통나무 계단을 밟고 자락정 위로 오른다. 초겨울의 시원한 바람이 사방이 트인 자락정 안으로 몰려든다. 여기저기 줄지어 붙은 편액들이 가득하다. 그저 자연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을까? 단청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나무가 오랜 세월 속에 거무티티한 자연색을 보이고 있다. 그것이 오히려 더 기쁨이었을까? 난간도 간단하다. 그저 멋이라고는 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주인의 심성을 그대로 보이는 정자이다.

자리를 뜨려고 하니 마루바닥에 무엇인가 한 무더기가 쏟아져 있다. 부서진 난간이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는 것이다. 주인을 잃은 자락정은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는 것일까? 이렇게 부수어진 모습으로 객을 맞이하다니. 갑자기 정자로 몰려오는 바람이 춥게만 느껴진다. 보수라도 좀 해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부수어진 채 방치되고 있는 난간

주인이 자연 속으로 돌아가니, 자락정도 자연으로 돌아가려나? 두 번 째의 아픔을 당하고 있는 자락정의 모습이 눈물겹다.


경남 거칭군 거창읍 상림리 황강 가에 자리한 건계정. 중국 송에서 귀화한 거창 장씨의 시조인 충헌공 장종행의 후손들이 선조를 기리기 위해 1905년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 앞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온통 암반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런 절경에 정자를 지은 후손들은 왜 '건계정'이란 쉽지 않은 명칭을 붙인 것일까?


현재 경남 문화재자료 제45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건계정은 중국의 주돈이와 주자 두 선생의 염계와 자양을 본 딴 것이다. 시조인 장종행의 고향이 중국 건주였으므로, 후손이 선조의 고향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면우 곽종석이 붙인 이름이다. 정자 주변은 온통 암반이 자리를 하고 있다. 건계정은 그 암반을 주추로 삼아 자연스럽게 기둥을 세운 정자이다.




뒤편에만 판자벽을 둔 건계정

건계정은 앞으로 보이는 절경을 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그래서 사방을 모두 개방을 하고, 뒤편 중앙에만 판자벽으로 낮게 막아놓았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구성된 건계정은 주심포계 겹처마 합각지붕이다. 정자의 밑 부분에 놓인 암반 위에 그대로 정자를 세웠는데, 암반 자체가 주추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누각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의 길이가 다 다르다.

기단과 초석이 없이 암반위에 세운 건계정. 기둥은 모두 원기둥으로 마련을 하였으며, 누각 위는 기둥에 의해 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중앙에 기둥을 생략하였다. 누각의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사면을 모두 널빤지 두 장 정도를 덧내어 마루를 외부로 넓혀놓았다. 정자 안에는 1906년 양산 조정희가 지은 '건계정기'를 비롯한 많은 판상시 등의 편액이 걸려있어, 정자의 운치를 더한다.




최고의 흥취를 자랑하는 정자 건계정

선일등정흥미란 계산여차거장안
위관점각풍류갑 재야영협예수관
제조천림당주석 유어취란상음란
면군노력전도진 구인전공일궤난

날을 골라 정자에 오르니 흥취가 안 끝나
산과 강이 이 같으니 이제 어디로 가나?
벼슬을 하려니 점점 풍류가 없어짐을 알겠고
들에 있다고 어찌 만나는 인사를 싫어하랴?
새소리 숲을 지나 술자리에 들리고
물결일자 고기는 물속 난간을 헤엄친다.
그대 힘써 노력하여 앞길로 나아가게
높은 산 온전한 공부는 쉽게 무너지기 어려우이.

군수 이응익이 지은 시이다. 건계정의 풍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정자의 벽면 가득 차있는 많은 편액들. 많은 사람들이 선조의 공을 칭송하고, 주변 경치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지은 글들이다. 이런 절경에 정자를 짓고 앞으로 흐르는 황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은 것일까?



초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오른 건계정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은, 이런 풍취를 알아가고 있어서일까? 못내 바쁜 답사 일정이 마음에 걸리지만,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다. 어느 때 또 이곳을 찾아 저 맑은 물속에 노니는 고기들을 볼 수가 있을까? 아마 이응익 선생의 마음이 지금의 나 같았을까? 바람을 따라 건계정을 나서며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바람 한 점이 누마루를 따라 마른 낙엽을 굴린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