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시 춘궁동 이성산 남쪽 고골저수지 옆으로, 나지막한 야산에 자리한 고려 초기의 대규모 절터가 있다. 이곳을 동사지라고 하는데, 발굴 당시 명문에서 ‘동사(桐寺)’라 적힌 기와가 발견이 되었기 때문이다. 발굴 당시 금당지의 초석이 발굴이 되었는데, 이 초석의 넓이로 보아, 신라시대 경주 황룡사의 금당에 버금가는 크기였다는 것이다.

 

이 고려 때의 절인 동사는 10세기경에 새롭게 지어진 절로, 현재 동사지 안에는 보물 제1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춘궁동 삼층석탑과, 보물 제12호인 춘궁동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2011년 첫 번째 답사일인 1월 3일에 눈길을 미끄러지면서 찾아간 춘궁리 동사지. 그 한편에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삼층석탑

 

춘궁리 삼층석탑은 보물 제13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동사지 안에 남동향으로 서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이층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세웠다. 아래층 기단부의 밑 부분은 눈이 쌓여 있어 자세히는 볼 수가 없다. 상륜부는 사라져 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당당하다.

 

하층 기단은 조각이 나 있기는 하지만, 아래층 기단부에 눈 모양을 한 안상이 한 면에 3구씩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은 판석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양편에 모서리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버팀기둥인 탱주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탑 몸돌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인 우주만을 새겨 넣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계승하다

 

 

 

이 탑을 보면 신라 석탑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일 수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의 지붕인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서 약간 위로 치켜져 있다. 이층 이상의 몸돌이 일층에 비해 급격히 낮아지고 있는 형태나, 지붕돌의 형태 등에서 신라 탑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탑은 여기저기 상당한 부분이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당당함은 고려 초기의 석탑에서 보이는 국권의 상징처럼 보인다. 이렇게 석재로 조성을 한 석탑 하나에서도 국권을 회복하고, 북벌을 하여 옛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고려의 열망이 보인다.

 

 

경기도에서 보기 힘든 춘궁동 오층석탑

 

삼층석탑 옆에는 보물 제12호로 지정된 춘궁동 오층석탑이 서 있다. 남동향으로 서 있는 이 오층석탑은 높이가 7.5m에 이르는 탑으로, 경기도에서는 이렇게 큰 탑을 보기가 힘들다. 이 탑은 이층의 기단 위에 오층의 탑신을 쌓아 올렸는데,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석탑을 조성하였다.

 

사각형의 석재를 여러 장을 이용해 조성한 춘궁동 오층석탑.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겨 넣고, 일층 탑신은 상하 2단으로 탑신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탑의 형태는 딴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 오층석탑 역시 고려 초기에 조성을 하였으나,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층마다 석재를 사용한 것이 달라

 

이 오층석탑은 층마다 사용한 지붕돌의 석재의 숫자가 다르다는 것이다. 오층은 1장, 사층은 2장, 3층 이하는 4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지붕돌을 조성하였다. 또한 일층 탑신의 하단은 4장의 방형 석재를 시용하였으며, 상단은 1장의 석재로 만들었는데, 이곳에도 모서리 기둥인 우주가 마련되어 있다.

 

춘궁동 오층석탑의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면 반전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석만이 남아있다. 동사지에 남아있는 춘궁동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을 돌아보면, 이 동사지의 규모가 짐작이 간다. 아마도 이렇게 공을 들여 석탑을 조성한 이유도, 고려의 국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찾아간 동사지에서, 옛 고려의 강성하고자 했던 기운을 느낀다.

백제탑의 우아하고 선이 아름다운 점과, 신라탑의 장중하고 무게가 있는 이점만을 골라 탑을 조성하였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고찰 무량사에 소재한 오층석탑이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문성왕(서기 839~856)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무량사는 고려 초기에 대중창을 하여 30여동의 요사와 12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전소가 된 것을, 조선 인조(서기 1623~1649) 때 진묵대사께서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절이다. 무량사를 찾은 날은, 절 경내에 하얀 눈이 꽤 많이 쌓여있다. 경내에는 사람들이 다닐만한 길만 치워놓았을 정도이고, 탑 주변에도 눈이 하얗게 쌓여있다.

 

오랜 기억에 남아있는 무량사

 

무량사는 인연이 깊은 절이다. 벌써 20여 년 전부터 이곳을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1993년이었으니, 올 해로 20년 째 이곳을 몇 번이고 찾아왔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명창이신 고 박동진 선생님과 동행을 했었다. 판소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서 들린 곳이었기에, 남다른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때도 무량사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기억이 난다. 다만 김창진 명창이 10년 세월을 득음을 위해 독공을 했다는 삼성각 앞에, 또 한 채의 요사가 자리를 하고 있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무량사는 늘 정겨운 곳이다. 전국의 사찰을 문화재답사를 위해 찾아다니지만, 가끔은 너무나 많은 변화로 인해 당황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려전기의 균형 잡힌 오층석탑

 

무량사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보물인 석등과 오층석탑, 그리고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전이 일렬로 서 있다. 맨 앞에는 보물 제233호인 석등이 서 있고, 그 뒤편에 보물 제18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그 뒤편에는 외부를 중층으로 지어진 보물인 극락전의 웅장한 자태를 볼 수가 있다.

 

눈이 쌓인 한 겨울의 오층석탑. 이 무량사 오층석탑은 고려 전기에 조성한 탑이다. 이 탑은 백제탑의 아름다움과, 신라탑의 장중함을 이어받아 조성한 것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기단은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을 했다. 기단부에 조성한 석재의 면을 둥글게 깎아내어,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한 마디로 균형이 잘 잡혀있다. 그런 점이 안정감이 보이기도 한다. 몸돌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덮개석인 지붕돌과 몸돌의 줄어드는 비례가 알맞아,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지붕돌의 넓이가 몸돌에 비해 넓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이 탑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낮은 몸돌을 지붕돌이 무게감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탑, 어디한 곳 흠잡을 데가 없어

 

무량사 오층석탑을 보고 있노라면, 백제와 신라의 문물이 합쳐 낸 문화의 극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두 고대국가의 서로 다른 문화가 이곳에서 만나, 석조문화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무량사 오층석탑은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만든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마저도 추운 줄을 모르니 말이다.

 

기단부 상단에는 우주와 탱주를 서로 다른 돌을 이용해 표현을 했다. 그리고 아래지석과 위 덮개석의 면을 둥글게 깎아, 석재가 주는 딱딱함을 없앴다. 그 위에 몸돌은 층이 올라 갈수록 줄어들면서, 적당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아랫면을 홈을 내어, 몸돌이 겉돌지 않게 조성을 하였다. 몇 장의 돌을 이용해 지붕돌을 조성하였다는 것도 특이하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아있다. 몸돌이 이층부터 차츰 줄어든다가나, 받침돌의 면을 둥글게 조성한 것들이 그러하다. 아마도 이 오층석탑을 조성한 장인이 백제와 신라의 많은 탑을 돌아본 후, 이 탑을 조성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무량사 오층석탑의 아름다운 선의 정점은, 바로 지붕돌의 처마 끝에서 보인다.

 

 

한 장의 돌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양편의 처마 끝이 날아오르듯 위로 적당히 솟아있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선을 표현할 수가 있었을까? 많이 치솟지도 않고, 그렇다고 처지지도 않게 솟아오른 처마 끝. 그저 석탑 하나에도 이렇게 아름다움을 표현 할 수 있었던 선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언제나 이런 감탄이 끝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발길이 닿는 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려는지.

전라북도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이 마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인 탑동 삼층석탑이 마을 뒤편에 서 있다. 이 탑 뒤로는 건장산으로 오르는 산책길이 나 있고, 옆에는 최근에 지은 절인 듯 대웅전이 보인다. 이 탑동마을에 있는 삼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에 소재한 국보인 탑과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탑동마을이라는 이름은 마을의 상징인 삼층 석탑에서 연유가 된 명칭이다. 탑동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으로, 백제탑의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때 조성된 탑이다. 이 탑에는 전설이 있는데, 그 하나는 탑동에 사는 여자장사와 장자골에 사는 남자장사가 서로 내기를 하여, 탑동마을 여자장사가 이기는 바람에 탑동 삼층석탑만 남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한다.

 

이 탑에 얽힌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한다. 백제가 도읍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난 후, 익산 금마지역에 미륵사지가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에 왕궁이 지어지던 시절 서로 연모하던 총각장군과 처녀장군의 정이 두터웠으며, 장난삼아 탑 쌓기 내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처녀장군은 탑골 삼층석탑을 쌓고 총각장군은 익산의 왕궁 탑을 쌓았는데, 처녀장군이 먼저 쌓았다고 한다. 그렇게 내기를 한 후 처녀장군이 보니, 총각장군의 탑을 쌓는 실력이 어설펐다는 것이다. 처녀장군은 총각장군에게 실망을 하여, 총각장군에게 인연을 끊겠다고 말을 했다. 총각장군과 결별을 한 처녀장군은 수절을 하며, 삼층석탑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은 이 탑을 ‘여장군탑’이라고 불렀다.

 

 

미륵사지 탑이 무너진 것도 이유가 있었다.

 

전설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살이 붙게 마련이다. 여자장사가 시합에 이긴 연후에 노모가 심한 피부병을 앓아, 전국을 다니면서 약을 구하려다 건장산 약수를 먹고 나았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효(孝)’를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이 남장군과 여장군의 이야기는 그와는 사뭇 다르다.

 

여장군이 삼층석탑의 수호신이 된 후 남장군도 미륵사지 5층 석탑의 수호신이 되었는데, 이 두 탑이 서로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씨름에서 또 여장군이 이기자, 남장군탑은 부끄러움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설의 재미가 발견이 된다. 남장군은 미륵사지 오층석탑을 쌓았는데, 그 탑이 부끄러움에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다. 한 가지 이야기는 이렇게 꼬리를 물고 반전을 계속한다.

 

 

탑동마을의 탑은 경사가 있으면 탑신이 열린다.

 

탑동 삼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 석탑과 같은 유형이다. 많은 석재를 이용하여 탑을 쌓았다. 그런데 이 탑동 삼층석탑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일층의 탑신은 여러 조각을 합하여 몸체를 만들었는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이 탑신이 열린다는 것이다. 가로로 길게 조성을 한 몸돌의 틈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8,15 광복절에 이 탑의 몸돌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 또 이탑이 열릴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삼층석탑을 돌아보다가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바로 기단부의 받침돌 한편에 맷돌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기 이 삼층석탑의 기단석에 맷돌을 만든 것일까? 단층 기단에 삼층석탑, 그리고 상륜부 일부가 남아있는 탑동 삼층석탑. 그 기단부 초석에 새겨진 맷돌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이곳에서 맷돌을 갈아 음식을 해먹으면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8,15 광복에 이곳에서 떡이라도 한 것일까? 많은 탑을 다니면서 이렇게 기단부에 맷돌처럼 조형을 한 것은 처음으로 본다. 지나가는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아도 정확한 것을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이래저래 탑동 삼층석탑은 사람에게 궁금증만 한 아름 안겨주었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번지에 소재한 실상사. 지리산 청왕봉을 마주하고 있는 실상사는 신라 말 교학보다 참선을 중시한 선종의 여러 종파가 전국에 절을 세울 때 그 중 한 곳이다. 실상사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에 전소가 된 것을, 조선 숙종 때 전각 36동을 새로 지었으나, 고종 때 화재를 당해 다시 불탄 것을 일부 복구하였다.

 

실상사는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하여 한국 선불교의 위상을 높인 절이다. 경내에는 부속암자인 백장암의 삼층석탑을 비롯해 보물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있어, 이 절의 역사적 의의와 픔격을 말해준다. 경내에 소재한 보물 제37호인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탑이다. 이 동 서 탑은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다.

 

문화재의 보고 실상사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에 홍척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이곳 실상사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국보 제10인 백장암 삼층석탑, 보물 제33호인 수철화상 능가보월탑과 제34호인 탑비도 자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보물 제35호인 실상사 석등과 제36호인 부도, 보물 제38호인 증각대사 응료탑과 제39호인 탑비, 제40호인 백장암 석등, 제41호인 철조여래좌상, 보물 제420호인 청동은입사향로와 제421호인 약수암 목조탱화, 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인 석장승 등 그야말로 문화재의 보고라 아니할 수 없다.

 

실상사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면, 천왕봉을 중심으로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반선계곡의 맑은 물이 흘러, 속세의 모든 번뇌를 씻어줄 것만 같은 절집이다. 넓지 않은 경내를 돌아보면, 곳곳에 남아있는 선조들의 예혼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상륜부가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석탑

 

실상사의 동, 서 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인 우주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탱주가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신라시대의 탑 중에서도 아름다운 선을 자랑하고 있는 탑이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말 실상사를 처음 창건할 때 함께 조성한 탑으로 보인다. 높이 5.4m의 이 동서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쌍탑 중 동탑의 상륜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가 모두 있으나, 서탑은 수연이 없어졌다. 아름다운 탑은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진다. 벌써 1200년 가까운 세월을 한 자리에서 오롯이 역사의 흐름을 지켜보았을 실상사 동서탑. 그 탑이 있어 실상사가 그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소재한 보원사지. 보원사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그 중 보물 제104호인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보원사라는 절이 어느 시기에 세워졌는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수많은 문화재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상당히 번창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층석탑은 보원사지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추정하고 있으나, 보원사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근 용현리에서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무게감을 더하고 있는 오층석탑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탑 중 하나이다.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조성한 오층석탑은,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겼다. 하지만 오랜 세월 풍화로 인해 사장상의 모습은 정확히 식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윗기단은 양편에 양우주를 돋을새김하고 가운데는 탱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옆면에는 팔부중상을 2구씩 각 면에 새겼는데, 조각은 세심하지는 않지만 힘이 있어 보인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무장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팔부신장은 인도의 고대불교 이전부터 있던 신격이불교에 수용된 신들이다.

 

불국토를 수호하는 팔부중상

 

팔부신장은 흔히 ‘명중팔부’ ‘천룡팔부’ 등으로도 불린다· 불국토를 수호하는 팔부신장은 경전의 내용에 따라 여러 설이 있다. 경전상으로도 여래팔부중과 사천왕에 소속된 팔부중으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중생을 의미하는 여래팔부중을 말한다.

 

 

 

 

즉 천과 용, 야차와 건달바, 아수라와 가루라, 그리고 긴나라와 마후라가를 가리킨다. 그러나 사천왕에 소속된 팔부중은 건달바, 비사사, 구반다, 벽협다를 비롯해 용과 부단나, 야차와 나찰 등을 말한다. 석탑의 기단부나 불화 등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팔부신장은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에 조각된 팔부중상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백제계 양식을 모방한 고려석탑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양우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이며 귀퉁이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의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이 지역은 옛 백제지역이기 때문에, 그 지역의 석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탑의 상륜부에는 머리장식받침인 네모난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 듯 하지만, 장중하고 기단과 몸돌의 균형이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장 행복한 것은,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만날 때이다. 문화재 하나를 소개하기 위해서 먼 길을 걸어야하는 나로서는, 보원사지와 같은 곳이 정말 즐거울 수밖에 없다. 오층석탑 주변에 즐비하게 널려진 보물들과 석재들.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힘들게 걸어 온 길의 피로를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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