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402-1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3호인 용운사지삼층석탑(龍雲寺址三層石塔)이 자리하고 있다. 용운사지로 명명된 이곳에는 삼층석탑과 함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2호인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1기가 자리한다. 이 삼층석탑 주변에서 용운사라 새긴 기와의 명문이 발견되어 절 이름을 알게 되었다.

 

용운사 터로 알려진 이 절은 고려시대의 절로 삼층석탑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삼층석탑은 비로자나불상과 함께 고려 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용운사 역시 고려 전기에 창건한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역사나 절이 훼손된 이유 등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고려 석탑의 특징 잘 나타나

 

용운사지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이중으로 된 기단은 각각 탱주가 하나씩 표현된 전형적인 신라말기 석탑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형태이다. 상대 갑석의 맨 윗돌 위에는, 연꽃을 두른 두툼한 괴임돌을 두었다. 이렇게 연화무늬를 조각한 괴임돌이 탑신의 1층 몸돌을 받치도록 하는 것도 고려 초기부터 유행한 독특한 조형 양식이다.

 

 

이 삼층석탑의 연화무늬는 곁에 있는 비로자나불 좌상의 대좌와 동일하다. 이로 보아 이 삼층석탑과 비로자나불 좌상은 동 시대에 조형한 것으로 보이며, 이때 용운사가 창건 혹은 중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상륜부가 남아있는 삼층석탑

 

모두 삼층으로 구성된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3층으로 구성하 탑신과 지붕돌인 옥개석은 신라 말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2, 3층 탑신의 급격한 체감과, 지붕돌의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는 것은 고려 초기 석탑의 특징이기도 하다. 옥개석 낙수면의 경사는 느리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 위로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상륜부가 차례로 남아있는 삼층석탑은 흔치 않은 예이다. 이곳은 깊은 골짜기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손을 타지 않은 듯하다.

 

원래 이 삼층석탑과 비로자나불이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용곡의 용운사터에서 발견이 된 것을 현 위치로 옮겨 온 것이다. 원주시 호저면 가장 깊숙한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용운사지 삼층석탑. 천년 세월을 그렇게 비로자나불과 함께 절터를 지켜오고 있었다.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가끔 볼멘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기야 내가 문화재 담당자가 아니니, 그런 소릴 들었다고 무엇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일이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소중한 가를 이야기하다가 보면, 실실 울화가 치밀 때도 있다. 막무가내로 돌덩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열을 올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681번지에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인 장남리 삼층석탑이 소재한다. 인제에서 홍천으로 오다가 보면 군계를 벗어난 고개에서 조금 내려와, 삼층석탑의 사진을 곁들인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안내판을 보고 찾아들어간 장남리 삼층석탑. 그러나 몇 번을 이리저리 돌아서 겨우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땅 꼭 그렇게 차지하고 있어야 하나요?”

 

장남리로 들어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물어본다. 어디로 이렇게 가면 있다는 삼층석탑. 길에서 보인다고 하는데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몇 번을 그 앞으로 지나쳤으면서도 볼 수가 없었다. 탑은 작고 그 앞에 나무 한 그루가 풍성하니 탑을 막고 있어, 길에서 보인다는 탑은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한 사람이 곁으로 와 이야기를 한다.

 

저 탑을 치울 수 없어요?”

탑을 치우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탑이냐고 어디 탑 같지도 않은데 땅만 잔뜩 차지하고 있잖아요.”

, 그래도 소중한 우리 문화재이니까요

그래도 꼭 그렇게 넓은 땅을 사용도 못하게 만들어야만 하나요?”

아마도 이곳이 옛날 절터라 보존을 해야 하나 보네요. 그리고 문화재는 보물이 되었건,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탑이 되었건 다 소중한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보호철책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면서도 영 기분이 찝찝하다. 물론 땅 주인이야 문화재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땅을 넓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다.

 

나 그래도 문화재야

 

전국을 다니면서 국보와 보물 등으로 지정이 된 수많은 석탑들을 보았다. 그 중에는 정말로 그 아름다움에 눈물이라도 날 것만 같은 것들도 보았다. 그런가하면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도, 이런 문화재도 있구나 할 정도로 초라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화재는 다 그 나름대로 그 시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남리 삼층석탑은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탑의 각 부재들을 수습하여 쌓아 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탑의 높이는 전체가 1.3m 정도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맨땅 위에 막돌과 기다란 돌 2개를 깔아 바닥돌을 삼고, 그 위에 아래층 기단, 위층 기단, 탑신의 1층 몸돌과 지붕돌 3개를 차례로 올려놓았다.

 

기단부 이하의 석재들도 제짝이 맞지를 않아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을 새겼으며, 일층 몸돌에는 양편에 양우주를 조각하였다. 두툼한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위로 치켜져 올라갔으며, 지붕돌의 밑면에는 2단의 받침을 두었다. 고려시대 후기 석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장남리 삼층석탑. 비록 특별한 것도 없고, 제대로 부재가 맞지를 않아 볼품없는 모습이긴 하지만, 그래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석탑이다.

 

 

문화재를 답사할 때마다 종종 마음이 아픈 것은, 이런 문화재라고 하여서 푸대접을 받는 일이다. 그러나 장남리 삼층석탑은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고, 넓은 대지에 보호철책을 만들어 놓아 그나마 위안이 된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온전히 제대로의 대접을 받으려는지.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등을 답사하다가 보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바로 자연을 사랑하는 선조들의 마음이다. 깊은 산속에 지어진 절을 보면, 늘 선조들의 마음을 읽어내고는 감탄을 할 때가 많다. 꽤 많은 전각들이 절의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좋게 절의 앞까지 길을 내고는 하지만, 과거에는 절은 힘들게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런 것 하나도 섬김의 도라고 한다면, 그 섬김 안에는 항상 자연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절을 다니면서 들러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자연을 벗어난 웅장함은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사랑을 실천한 우리 선조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선조들이었다. 대표적인 축조물은 바로 수원 화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공격과 방어라는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내기 위한 거대한 축조물이지만, 화성은 그 어느 곳 한곳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 스스로가 자연이 되어 아름답게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 일이 있어 이천으로 발길을 옮겼다. 관고동에 자리한 이천시립도서관을 찾아가면, 그 바로 아래에 이천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천시 창천동 336번지에 소재한 이천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2호이다. 우르 수원의 경우에도 팔달산에 위치한 중앙도서관 아래 수원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향교라는 조선시대의 배움 터가 있기 때문에, , 주변에 도서관을 마련하는 듯하다.

 

 

새를 불렀다는 봉호탑(鳳呼塔)’

 

이천 향교를 들러보고 나오려는데, 옆 산 한편에 무슨 안내판 같은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바위에 무슨 각자(刻字) 같은 것도 보인다. 올라가 보았더니 바위에는 봉호탑(鳳呼塔)이라고 바위에 음각을 해 놓았다. 바위를 네모나게 파낸 후 그 안에 다시 깊게 음각을 한 글씨이다.

 

말 그대로 하면 봉황을 불러들이는 탑이라는 뜻이다. 탑이라면 돌을 깎아 세워야 하는데, 그저 향교 옆 산에 있는 자연적인 바위에 이렇게 음각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앞 안내판에 쓰인 문구를 보니 이해가 간다. 이 바위에서 새를 부르는 의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읽어보고는 다시 한 번 자연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지금도 이천향교 주변에는 큰 느티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다. 그런데 예전에는 주변에 큰 느티나무 숲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숲이 우거지다가 보니, 하절기가 되면 꾀꼬리 등 많은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다웠을 것이다. 향교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도 그 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즐거워했을 것이고.

 

망치소리에 놀라 사라진 새들

 

그런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천 향교를 중수를 했다고 한다. 향교를 중수하면서 대목장들이 나무를 다듬기 위해 내는 망치소리에, 새들이 놀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유생들은 늘 듣던 새소리가 사라지고 나자, 아름다운 새소리가 그리워졌을 것이다. 유생 중에 박정수, 이면용 두 사람이, 이 바위 앞에 먹이를 놓고 새를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봉호탑은 바로 먹이를 놓고 고사를 지낸 곳이라고 한다, 관고동 주민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이 이야기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당시의 유생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이 봉호탑을 보면서 또 한 번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과연 우리 선조들처럼, 자연을 아끼고 있는가를 스스로 질문을 해본다. 바위에 새겨진 각자 하나, 그것이 주는 교훈이다.

이천시 관고동 401-2에 소재한 이천시 향토유적 제5호인 관고리 오층석탑’. 이천 도자기 축제장이 있는 설봉공원 안쪽, 관고리 저수지 안을 지나 토야랜드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탑의 형태나 규모로 보아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되는 이 오층석탑은 훼손이 심해 거의 원형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 탑이 발견이 된 곳은 관고리 저수지 위편 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석재를, 1978년에 수습하여 옛 절터 앞에 복원을 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석재들이 흩어져 있던 곳을 절터라고는 하지만, 어떤 절이었으며 어느 시대에 창건된 것인지 등은 알 수가 없다. 또한 현재 이 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도, 원래의 탑이 있던 자리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훼손이 심한 오층석탑

 

탑은 한 마디로 훼손이 너무 심해, 이 탑의 원형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또한 밭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 쌓은 탑으로, 한 기의 탑의 석재인지도 불분명하다. 현재의 탑은 기단부와 일층 몸돌이 있고, 그 위에 지붕돌인 옥개석을 오층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만일 이 오층석탑의 석재들이 한 기의 탑이었다고 하면, 상당히 장엄한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탑들은 대개가 장엄하다. 그것은 옛 고토를 회복하려는 뜻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관고리 오층석탑의 경우에도 현재 몸돌이 사라진 채로 쌓아올린 높이만 보아도,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가 있다. 현재의 오층석탑은 탑의 상륜부는 존재하지 않고, 전체적으로는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훼손이 심하다.

 

고려 탑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기단은 일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위에 4매의 돌을 이용해 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기단의 덮개돌은 일석으로 조성을 했으며, 기단 덮개돌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기단의 돌에는 양 우주를 표현하였으며, 덮개돌의 윗면에는 탑의 몸돌을 받을 수 있는 괴임부분을 층이나게 표현하고 있다.

 

몸돌은 1층만이 남아있는데 이것도 1층의 몸돌인가는 정확치가 않다. 몸돌 위에는 5층의 덮개동인 옥개석을 쌓아 올렸는데, 그 크기는 층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있다. 층급은 1층의 덮개돌은 4단으로 표현하고 있고, 2층부터 5층까지의 층급은 각각 3단이다. 덮개돌의 높이는 1층서부터 150cm, 122cm, 100cm, 74cm, 70cm로 줄어들고 있다.

 

 

현재의 몸돌이 사라진 채 높이가 4.3m에 이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의 이 관고리 오층석탑의 높이는 7~8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비교적 넓고 평평한 편이다. 옥개석의 하면에 낙수 홈이 없는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전체적인 규모에서 고려의 힘을 느끼다

 

44일 오후에 찾아간 관고동 오층석탑. 그저 하나의 조형물처럼 저수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은, 멀리서 보아도 그 규모가 상당해 보인다. 2층 이상의 몸돌이 사라졌고 상륜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상당하다. 전체적인 규모로 따진다면 상당히 거대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탑의 8m정도가 된다고 하면, 기단석이나 1층에 올려놓은 몸돌의 형태로 보아 비례가 잘 맞지는 않을 듯하다. 이런 탑의 형태는 대개 지방에 거주하는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이 되어있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상당히 위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고려의 석탑에게서 느끼는 강인함이, 관고리 오층석탑에서도 보인다. 이렇게 탑을 장엄하게 조성을 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탑 하나를 갖고도 느낄 수가 있는 옛 고려의 염원. 오늘 관고리에서 다시 한 번 그 기운을 받아간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 동안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그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산재한 문화재를 담고는 있지만, 돌아보면 아직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만 바쁘다.

 

수많은 문화재 중에는 갖가지 사연을 지닌 것들이 많다. 떄로는 해학적인 것도 있지만,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것들도 있다. 내용이 가슴저리기도 하고, 볼썽사납게 흉물로 보낸 현재의 모습이 안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재답사 힘들고 고통스럽다

 

4문화재를 찾아 길을 떠난다는 것, 그리고 문화재를 만났을 때의 행복함. 그런 것을  항상 느끼기게 발길을 멈추지 못하는가 보다. 정혜사지 석탑을 처음 만나는 순간, 그야말로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석탑이 있을 수 있나? 전국을 그렇게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석탑이 있었다니.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 85%가 불교문화유물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 중에서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조를 거치는 동안 불교가 흥성을 했기 때문이다. 천년 이상의 세월을 이 땅에 뿌리박은 불교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문화유물을 창츨했기 때문이다. 행여 이 시대에 종교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4대강 개발을 한다는 구실로 이러한 문화유산이 훼파가 된다면,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역사의 죄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보 제4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번지에 소재한 국보 제40호 정혜사지 13층석탑. 이 탑을 본 순간 가장 먼저 생각이 든 것은, 도대체 이 탑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것은 정혜사지 13층석탑의 독특한 양식 때문이다.

 

 1층 몸돌에는 4방에 감실이 나있다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 모습을 보인다

과연 이 석탑의 장인이 누구였을까?
 
 

정혜사지 13층석탑은 통일신라 석탑 가운데서 그 유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흔히 이러한 석탑의 형태는 우리나라보다는 동남아쪽 탑사 비슷한 형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이 탑을 볼 때마다 도대체 이 13층 석탑을 누가 조성하였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9세기 경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정혜사지 13층석탑. 전국을 돌면서 수많은 석탑을 보아왔지만 이런 형태의 석탑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이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볼 때마다 '누가 세웠을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언젠가는 누구에 의해 그 비밀이 밝혀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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