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하나를 다듬어 칠층 높이의 땀을 쌓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것일까? 보물 제459호인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 제천시 장락동 현 장락사 앞에 서 있는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에 몇 기 안 되는 모전석탑 중 하나이다. 회흑색의 점판암(粘板岩)으로 조성된 이 모전석탑은 현재 높이가 9.1m에 달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이 모전석탑을 조성하는데 쓰인 점판암은 장력강도와 내구력이 큰 얇은 판으로, 쉽게 쪼개지는 세립의 점토질 변성암이다. 점판암은 검은색·파란색·보라색·붉은색·녹색·회색 등을 띤다. 점판암의 어두운 색은 탄질물이나 미세한 황화철에 의한 것이며, 붉은색과 보라색은 산화철인 적철석에 의한 것이고, 녹색은 녹색의 운모질 점토광물인 녹니석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접판암으로 조성한 칠층석탑

 

점판암은 채석된 원석으로부터 약 7.5㎝ 두께로 쪼개진다. 정을 원석의 가장자리에 대고 나무망치로 가볍게 두드리면 벽개면을 따라 틈이 생기게 되는데, 정이 지렛대 역할을 하여 원석이 매끈한 표면을 가진 2개의 조각으로 쪼개진다. 원석이 16~18개의 조각이 될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한 후, 손 작업이나 회전절삭기를 이용해 적정한 크기로 다듬는다.

 

이러한 점팜암의 특성을 이용해 만들어진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탑(模塼塔)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탑이 서있던 절터 주변이 논밭으로 변하여 절의 규모는 알 수 없다. 뒤편으로는 장락사라는 새로 지은 절이 있다. 7층에 이르는 거대한 장락동 모전석탑. 주위를 압도하듯 버티고 서 있는 탑의 위용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천년 세월 버텨낸 칠층석탑

 

탑을 받치는 기단은 점판암이 아닌 자연석으로 1단을 마련하였으며, 그 위로 벽돌로 이루어진 7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1층의 네 모서리에는 점판암 대신 화강암을 다듬은 기둥을 세워, 탑 전체의 조형을 단단하게 하였으며 그 모습이 특이하다. 또한 남쪽과 북쪽 면에는 사리를 두는 감실(龕室:불상이나 사리 등을 모시는 방)을 설치하여 문을 달아 놓았는데, 현재 남쪽의 것은 없어졌던 것을 새롭게 조성해 달아놓았다.

 

각 몸돌을 덮는 지붕돌은 재료가 벽돌처럼 만든 돌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경사면 위아래 모두 층급을 두었으며 처마도 짧고 수평을 이룬다. 탑의 머리 부분에는 머리장식이 없어지고 장식받침인 노반만이 남아 있다. 윗면 한가운데에 동그란 구멍이 있고 구멍둘레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1967년 무너지기 직전에 탑을 해체하여 보수했는데, 7층 지붕돌 윗면에서 꽃무늬가 조각된 청동조각이 발견되어, 상륜부에는 청동으로 머리장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 전체에는 표면에 회를 칠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주목된다.

 

 

 

 

오랜 세월 한 장 한 장 땀 흘려 쌓은 흔적이 보이는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 보물로 지정이 되었기에 소중한 것이 아니다. 그 한 장 한 장을 오랜 시간을 일일이 쪼개고 다듬어서 쌓은 노력을 행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하나의 탑을 조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을 노력을 했을까? 그리고 이 탑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그 하나하나에 새겨진 정성이 오늘까지 전해진다. 하나의 문화재를 보존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문화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안에 숭고한 우리 선조들의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우리가 문화재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야 한다는 점이다.

비바람이 거세다. 장마철에 답사를 떠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좋은 기회를 맞았다면 그보다 더한 날이라고 해도, 망설일 이유가 없다. 7월 14일(토), 아침 일찍 출발을 하여 도착한 남해 보리암. 가는 내내 비가 뿌려댄다. 버스에서 내려 셔틀버스로 옮겨타고, 다시 걸어 올라가는 보리암의 여정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카메라가 젖지 않게 하기위해 거기다만 신경을 쓰다가 보니, 옷은 이미 속까지 축축하게 젖어온다. 질척이는 길을 걸어 도착한 보리암은, 자욱한 해무 속에서 신비로운 모습으로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어디라고 들릴 사이에 없이 전각 앞을 지나, 바닷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삼층석탑으로 향했다.

 

 

전설과는 거리가 먼 삼층석탑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보리암 경내에 서 있는 경남유형문화재 제74호인 ‘보리암전 삼층석탑’. 이 탑은 보리암 종각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닷가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다. 크지 않은 이 삼층석탑은 비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석탑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3년인 683년에 원효가 금산에 처음으로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락국의 수로왕비인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을 이용하여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허태후가 가져 온 부처님의 사리를 이곳에 안치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도 전한다.

 

 장맛비 속에서 남해  보리암으로 오르는 사람들(위)과 비와 해무에 쌓인 보리암(아래)

 

하지만 이러한 전설은 실제와는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삼층석탑은 파사석이 아닌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의 조형을 보면 고려 초기의 형태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전설과는 차이가 난다.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크지 않은 석탑

 

장맛비가 쏟아지는 데도,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석불입상 앞에는 그 비를 맞으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석탑 옆 바위에는 이름들을 새겨 놓았다. 저 바위와 같이 오랜 시간 잘 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였을까? 어디를 가나 저렇게 돌에 새긴 이름들을 본다는 것이 이젠 씁쓸하기만 하다.

 

 

삼층석탑 주변의 바위(위)와 경남 유형문화재 제74호인 '보리암전 삼층석탑(아래)

 

보리암 전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에 비해, 그 크기가 크지 않은 편이다. 석탑에는 특별한 조각이나 그런 것들이 없이 그저 평범한 모습이다. 커다란 돌 하나로 기단을 놓고, 그 위에 면석을 놓았다. 면석에는 양편에 모서리기둥인 우주를 새겨놓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각 층의 몸돌에도 양 우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의 받침은 4단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처마는 약간 경사가 지게 하여 자연스럽게 처리를 하였다. 상륜부에는 보주가 남아있으며, 고려 초기의 석탑의 유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천년 세월 남해를 바라보고 금산 보리암의 비보석탑으로 지켜 온 고려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보리암 삼층석탑

 

쏟아지는 장맛비 속에서 자욱한 해무에 쌓인 보리암전 삼층석탑.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서 남해를 바라다보면서, 이곳을 들리는 수많은 참배객들의 기원을 얼마나 들어준 것일까? 그래도 그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어 고맙다. 이 탑 하나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빗길에 달려온 나그네를 맞는 삼층석탑. 비보석탑인 이 삼층석탑에 고개를 조아리고, 내 주변의 모든 나쁜 기운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몸은 늙어가고, 답사는 끝이 안보이고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상상 외의 것들을 만날 수가 있다. 가끔은 그런 문화재를 만나게 되면 당황한다. 한 마디로 잘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참 그동안 무엇을 했나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경주 서악동 태종 무열왕릉 옆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면, 뒷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산은 선도산으로 오르는 길인데, 마을 끝에서 우측 길로 보면 고분이 몇 기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삼층석탑이 보이는데, 일반적인 탑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어 특이하다.

 

주사위 모양의 돌로 쌓은 기단

 

서악동 산 92-1에 소재한 보물 제65호 서악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의 석탑이다.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 탑은 일반적인 형태의 탑과는 다르게 모전석탑형이다. 밑에 있는 바닥 돌 위에 화강암으로 네모지게 만든 커다란 돌 8개를 이층으로 엇갈리게 쌓아 기단을 만들어놓았다.

 

서악리 삼층석탑의 기단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는 1층의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의 불상을 모셔두는 감실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다.

 

 

 

그 위에는 3단의 몸체를 쌓았는데, 1층 몸돌 남쪽 문틀 양편에는 인왕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인왕상은 그 동안 심하게 마모가 되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몸돌 위에 올린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해 놓았다. 전체적으로 기단에 비해 몸돌이 갑자기 작아져 있는 형태이다. 석탑의 부분은 그동안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아직도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퇴화하는 석탑

 

높이 5.07m, 기단 폭이 2.34m인 서악리 삼층석탑은 돌을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의 형태로, 이런 유형의 석탑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교적 투박하게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탑으로, 색다른 느낌을 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이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아직도 제대로 공부도 못했는데, 몸은 늙어가

 

그동안 매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벌써 20년 넘는 세월을 답사를 하러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20년 동안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문화재는 이제 겨우 20% 정도일 것으로 추산한다. 아직 보고 싶은 것들도 많고, 가고 싶은 곳들도 많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음을 늘 탓하고 살아야만 한다.

 

 

 

오늘 서악산 삼층석탑을 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이 삼층석탑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 부러운 것이 아니다. 천년 세월, 그렇게 변함없이 서 있는 모습이 부러운 것이다. 사람도 저렇게 버틸 수만 있다면, 좀 더 여유를 갖고 답사를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 말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참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비가 오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후줄근하게 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정 반대다. 비만 오면 짐을 싸서 길을 나선다. 버릇치고는 참 희한한 버릇이다.

 

좋은 날은 방에 들어앉아 자료 정리를 하다가, 비만 오면 미친 듯 석조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서는 이유. 이런 나를 보고 비만 오면 살짝 이상해지느냐고 농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다. 좋은 날 두고, 하필이면 비가 오는 날 돌아다니니 말이다. 

 

비가 오는 날 모악산 용각부도를 보라

 

모악산에는 천년고찰 대원사가 있다. 대원사는 진묵스님이 술을 보고 '곡차'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절이다. 모악산 중턱에 있는 대원사는 금산사의 말사다. 금산사는 모악산 북쪽 김제에 있는데 비해, 대원사는 모악산의 남쪽 완주군 구이면에 자리하고 있다. 대원사는 매년 4월 둘째 주 토요일에, 수만 명이 모여드는 <진달래 화전축제>로 더 유명해진 절이다. 이 대원사 향적당 뒤편 산에는 부도 몇 기가 자리하고 있다.

 

 

평상시의 용각부도

 

그 중에 유난히 눈길을 끄는 부도가 한 기 있다. 용이 부도를 감고 올라가는 모습이 예사 부도 같지가 않다. 고려 때의 부도로 추정하는 이 용각부도는 정확한 조성 시기는 모르지만,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용은 이 부도를 감고 있다. 머리를 아래로 하고 있는 이 용은, 금방이라도 부도를 벗어나 승천을 할 것만 같다.

 

비가 오는 날 승천하는 부도의 용

 

그런데 이 부도의 용 문양이 날이 좋은 날은 확실치가 않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용이 발로 여의주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비가 오는 날 이 부도를 보면 전혀 다르다. 비늘 하나하나가 모두 들어나 보인다. 그리고 용은 금방 승천을 할 듯한 기세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 되면, 미친 듯 석조문화재를 찾아 달려 나가게 된다. 그 생생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비가오는 날 용각부도

 

이 용각부도 역시 마찬가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섬세하게 조각을 한 용의 모습이 확연히 들어나 보인다.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용의 모습. 힘차게 비상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듯 하다. 용의 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 고승의 부도로 보이는 이 용각부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용각부도의 문양이 드러나 듯,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석조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선다.

 

국보 진전사지탑도 비가 오면 부처님이 일어나신다

 

비가 오는 날 답사를 나서는 까닭은 맑은 날 선명하게 볼 수 없던 탑이나 마애불 등의 조각이 선명하게 들어나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런 나를 미쳤다고 한다. 아무리 선명한 조각을 볼 수 있다고 비가 오는데 길을 나서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라도 더 섬세한 모습을 담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비도 어쩌지를 못한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신라시대의 절이었던 진전사지가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122호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높은 2단의 기단 위에 삼층으로 조성을 한 통일신라 8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그 조각 하나하나가 뛰어난 작품이다. 통일신라의 탑 중에서도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1층 탑신에는 여래좌상이 각 면에 한구씩 조각이 되어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 하단에는 연화좌 위에 광배를 갖춘 비천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기단부 상단에는 팔부중상이 역동적으로 표현이 되어있다. 높이가 5m인 이 탑은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만든다. 그저 평범한 돌을 이용한 조성한 신라시대의 탑. 그 조각 하나하나가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만나면 돌을 박차고 뛰어 나올 것만 같다.

 

비가 오면 난 짐을 싼다. 그리로 문화재를 찾아 떠난다. 오늘 비가 오려나? 하늘에 가득 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이제 비에 젖지 않게 갈무리를 잘한 짐을 싸 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비가 오는 날 꼭 보아야 할 마애불이 있어서이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2 운주사 경내에 소재한, 보물 제797호 운주사석조불감(雲住寺石造佛龕)을 보는 순간 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금동으로 목조각으로 만든 작은 불감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석조불감이 있다니.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이다.

 

하기에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다탑봉 골짜기에 자리한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의 대표적 예이다. 다탑봉이라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주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산의 정상에 이르는 동안 여러 기의 석탑과 불상을 볼 수 있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거대 석조불감 

 

건물을 본뜬 불감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그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서 보아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다.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예이다.

 

불상을 새긴 수법은 그리 정교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나타난 지방적인 특징이 잘 묻어나온다. 이처럼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유례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등을 서로 맞댄 감실 안의 두 불상 역시 특이한 형식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의 특징을 그대로

 

불감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안에 계신 부처님의 상을 보니, 눈을 지그시 감고계시다. 누군가가 입을 훼손한 듯도 하다. 꺼멓게 보이는 부분이 아마 무엇인가를 갖고 훼손을 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부처님 스스로 말 많은 세상, 입을 다물어 버리셨는가도 모르겠다. 좀 더 멀리 떨어져 바라다본다. 그래도 석조불감 안에 좌정하신 부처님은 미동도 없다.

 

그저 세상사 다 접어두고,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누군가 열심히 마음을 다하면 언젠가는 저 눈도 뜨시지는 않을까? 뒤로 돌아가 본다. 또 한분의 부처님이 앉아계시다. 등을 서로 맞대고 계신 두 분의 부처님들이 어떤 말을 우리에게 하는 것일까? 두 손을 모아 가슴으로 올린 부처님 역시 한일자로 굳게 입을 다물고 계시다.

 

 

 

그러나 찬찬히 올려다보면 그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느껴진다.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저 두 분은 등을 마주하고 계시는 것일까? 한분은 인간세계를 바라다보면서 할 말을 잊으신 것이고, 또 한분은 피안(彼岸)인 운주사 안을 바라보면서 참 세상을 알려주시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네 속 좁은 인간들이 그 뜻을 어찌 알리요. 하지만 운주사 불감 안에 계신 부처님들은 오늘도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계시다. 혹 그것이 세상을 바로 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마디 일침은 아니었을까?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그런 주문은 아니었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운주사 불감 안에 좌정하신 부처님을 바라보다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만다. ‘맞습니다. 세상에 가장 더러운 것은 바로 저랍니다. 오늘 그 모든 것을 참회합니다.’ 눈을 들어보니 주변에 가득한 탑들 위로 초여름의 무더운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불감 안에 두 분이 매우 더우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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