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성주사지에 소재한 보물 제19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성주사지 중문지를 지나 석등과 오층석탑, 금당지가 일렬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한다.

 

성주사는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는 성주사를 지난 106일에 찾아보았다. 바람이 불고 간간히 빗방울도 뿌리는 날 찾아간 성주사는, 인적도 없이 고요함뿐이었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이 절의 금당 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다. 금당 터 뒤로는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에 양 우주를 새겼으며, 가운데는 탱주를 새겨넣었다.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평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도 기둥 모양인 양 우주를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가서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우아한 모습의 오층석탑

 

성주사지 오층석탑의 전체 높이는 634cm이다. 기단부와 목개석, 몸돌 등이 완만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좁아져, 우아하고 경쾌한 모습으로 균형미가 돋보인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 두었으며, 1층 몸돌에 사리공이 있다.

 

대개 신라의 석탑은 기단부 위에 삼층의 몸돌을 올리는 것이 기본이지만, 이곳이 옛 백제의 지역이므로 신라와 백제의 석탑의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이 시기가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이므로, 새로운 양식의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형태로도 보인다. 현재는 상륜부가 사라진 오층석탑은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다.

 

문화재 보호는 개인이 할 수 없어

 

전국에 산재한 많은 문화재들은 어느 누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아니다. 문화재 보호란 해당관청은 물론이려니와, 언론, 종교단체, 사회단체, 개인 등 모든 분야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하지만 언론이나 그런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것을 종용해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는 포털 사이트 등은 아예 외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문화재보호, 참으로 소중하고 우리가 함께 책임을 져야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나 몰라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늘 문화재보호 운운하는 그런 속보이는 짓거리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정한 문화재보호를 해야 하는 것은, 그 안에 우리의 정신세계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운길산에 소재한 수종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조선 세조 5년인 1459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온다. 이 수종사 경내에는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오층석탑은 보물 제1808호로 올해 94일에 지정이 되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운길산 중턱에 위치한 수종사에 전해오는 조선시대의 석탑이다. 이 석탑은 원래 사찰 동편의 능선 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전한다. 원래의 위치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여, 경관이 우수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 이 오층석탑은 석조부도, 소형석탑과 함께 대웅전 옆으로 옮겨져 있다.

 

운길산을 오르다

 

수종사 오층석탑이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종사로 향했다. 915일에 찾아갔으나, 생태교통 수원2013으로 인해 아직 정리조차 못한 자료를 모처럼 뒤져냈다. 운길산을 오르던 이 날은 한 낮의 온도가 꽤 무더웠다. 그래도 문화재를 보기 위해 얼음물 한 병을 들고 걸어 올랐지만, 워낙 가파른 비탈이라 땀이 비 오듯 한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맥이 풀릴 때는, 어렵게 찾아 간 문화재 앞에 공사 중이란 글씨와 함께 문화재를 가려 놓았을 때이다. 수종사 오층석탑도 주변에 천막을 친 것을 보니, 주변 정리를 하는 듯 한데 다행히 탑은 온전히 볼 수가 있었다. 조선초기의 석탑이라고 하니 500여 년은 족히 넘었을 석탑이 온전히 남아있다.

 

 

불상 등에서 1493년에 조성한 탑임이 밝혀져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같이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으면서, 규모가 작아지고 장식적으로 변모한 조선 초기 석탑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 탑에서는 1957년 해체수리 시에 1층 탑신과 옥개석, 기단 중대석에서 19구의 불상이 발견되었고, 1970년 이전 시에는 2, 3층 옥개석에서 12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함께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서 이 불상들 가운데 태종의 후궁이었던 명빈 김씨(?-1479)가 발원조성하고, 성종의 후궁들이 홍치 6년인 1493년에 납입했다고 하는 불상 2(석가여래 1구와 관음보살 1)와 인목대비의 발원으로 조성된 금동불과 보살상들, 숭정원년인 1628년에 조각승인 화원 성인이 조성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확인되어, 석탑 건립의 하한은 1493년이며 1628년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문양의 조선 초기 석탑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탑이 여러 형태의 문양으로 인해 화려해 보인다. 오층석탑은 지대석 위에 팔각의 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불상의 팔각연화대좌와 같은 형식의 기단을 올렸다. 팔각 대석의 각 면을 2등분하여 장방형의 액을 새기고 그 안에 안상을 표현하였으며, 같은 형태의 안상은 기단의 받침과 탑신 받침에도 통일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는 상대 앙련석과 하대 복련석에 16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연판에는 고려중기 때부터 유행했던 화려한 꽃머리 장식이 새겨져 있고, 팔각 중대석에는 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가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5층의 탑신 역시 팔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은 목조 탑을 석재로 옮긴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옥개석 처마의 부드러운 곡선과 원형 기둥, 옥개받침 등이 목조 건축의 형태이다. 머리부분에는 합각지붕 형태의 삼각형 문양이 조각된 복발과 보주가 올려져 있다. 이 탑은 복장된 내용물에서 확인이 되듯, 왕실 발원의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많은 조선시대의 석탑 중에서 특별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불상대좌와 같이 조성하였고, 탑신부는 목조건축의 양식이다. 또한 상륜부는 팔작 기와지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형식은 현재까지 조사된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탑 중 유일한 팔각오층석탑이다.

 

9월 중순의 한 낮에 오른 운길산. 많은 사람들이 찻집에 들려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지만, 갈 길 바쁜 일정에 오래 머물 수가 없다. 경내를 바삐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을 촬영을 한 후에 다시 하산을 서두른다. 전날 내린 비로 인해 물줄기가 시원한 소리를 낸다. 이 무더운 날에 그 물소리도 행복이려니.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올적에

아~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산길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아주 오래 전 송춘희라는 여가수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가요 제목을 가진 노래이다. 수덕사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 노래 때문인가? 먼저 비구니인 여승을 떠 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수덕사는 비구니 절이 아니다. 아마도 이 노래 때문에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는 주변에 수덕사의 말사로 등록된 선원인 정혜사와 비구니 강원인 견성암이 있다. 비구니 절로 알려진 것은 이 견성암의 비구니들 대문으로 보인다. 노래 하나가 사람들의 생각을 고착시켜 버린 것이다.

 

아마 이 노래가 처음 불려 질 때인 1966년에는 수덕사가 인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이 몰려든다. 드넓은 주차장에는 차들로 가득하고, 입구에는 장사꾼들이 갖은 상품을 진열하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가요도 이제 가사가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수덕도령의 애끓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

 

7월 28일(일)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보면 좋다고 했던가? 딱히 무엇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저 절집에서 세 곳을 돌아오면 좋다고 하니 길을 따라 나섰다. 그 두 번째로 찾아간 예산 수덕사.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소재하는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 ~ 397) 때에 지명법사가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덕산향토지>에 보면 수덕사의 창건설화가 실려 있다.

「홍주마을에는 수덕이란 도령이 살고 있었다. 이 수덕이라는 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자식이었다고 한다. 수덕도령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먼발치에서 본 덕숭이라는 낭자에게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가문이 좋아도 상사병을 앓는 것인지? 수덕도령은 애를 태우다 못해 덕숭낭자에게 여러 번 청혼을 했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수덕도령이 하도 끈질기게 청혼을 하자 덕숭낭자는 자신의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부터 수덕도령은 절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절을 빨리 짓고 덕숭낭자를 품을 생각을 한 탐욕 때문에 벌을 완성하자 불이 나버렸다. 다시 절을 짓기 시작한 수덕도령은 이번에도 덕숭낭자를 그리워했기에 또 불이 나 버렸다.

 

세 번째는 오직 절을 지을 것만을 생각하고 열심을 내었다. 그 때문인지 절이 완공이 되었다. 함께 살 것을 허락한 덕숭낭자였지만,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오직 덕숭낭자만을 그리며 절을 지은 수덕도령. 그만 참을 수가 없어 덕숭낭자를 안아버렸다. 그 순간 뇌성벽력이 치면서 덕숭낭자는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수덕도령의 손에는 버선 한 짝만이 들려있었단다.

 

덕숭낭자를 끌어안았던 자리는 큰 바위로 변하고 그 자리에는 하얀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이 꽃을 ‘버선꽃(물단초)’이라고 부른다. 덕숭낭자는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절 이름을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부르고, 산 이름을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했으며, 지금도 ‘덕숭산 수덕사’라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전설과 수덕사의 중창 내력을 보면 흡사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태여 짜 맞추기 식의 논리를 펼 것은 아니지만, 혼자 생각에 젖어 고뇌를 한다. 한국불교의 5대 총림의 한 곳인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때 지명법사가 창건을 하고, 고려 공민왕 때 중수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조 고종 2년인 1865년 만공스님이 중창을 하였다. 전설에는 세 번을 지은 것으로 전하고, 실제로 수덕사는 창건 이후 두 번을 중창을 해 세 번째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귀퉁이 깨진 삼층석탑, 그런데 왜 이렇게 끌리지?

 

일주문을 지나 수덕사 경내로 들어서 대웅전을 찾아가면 그 앞에 탑이 한 기 서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 되어있는 이 탑은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이 삼층석탑의 형태는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상륜부를 얹은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양 옆에 우주를 돋을새김 하였고, 기단에는 가운에 탱주를 새겼다.

 

높이 410cm의 이 삼층석탑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있다. 상륜부는 3층 지붕돌과 한 돌로 만들어진 머리장식받침인 노반이 있고, 그 위로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인 보륜과 보개를 올려놓았다.

 

이 고려시대에 조성한 삼층석탑은 1층과 2층 지붕돌 귀퉁이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이 탑은 통일신라 문무왕 5년인 665년에 세웠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탑의 모양을 보면 오히려 통일신라 석탑 전성기에 비해 몸돌의 가운데 기둥인 탱주가 생략된 점이나, 지붕돌의 받침이 4단인 점을 볼 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국을 돌면서 수없이 만난 석탑이다. 수덕사의 삼층석탑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완벽하게 남아 아름다운 석탑도 많이 만났다. 그런데 이 수덕사의 깨진 석탑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때문일까? 아니면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대웅전 때문일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하고나서도,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다. 하긴 저 깨진 채로 서 있는 삼층석탑도 참 바보 같기는 마찬가지이다. 처음 이 탑을 조성할 때 저렇게 귀퉁이가 깨진 채로 사람들을 만날 것을 누가 알았으리요.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줄도 모르겠다. 저 탑이나 나나 다 깨어진 채로 세상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백년지 뒤로 구층석탑이 보인다

 

아무리 장마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하루 종일 퍼부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충남 청양군의 문화재를 답사하겠다고 나선 까닭은 바로 대치면에 있는 장곡사 때문이다. 절은 그리 크지 않지만, 이곳은 유일하게 대웅전이 두 곳이 있는 절이기 때문이다. 장곡사를 나와 칠갑산을 옛 길을 넘어 찾아간 정산면 서정리에 있는 ‘청양 서정리 구층석탑’.

 

멀리서도 도로 옆 벌판 한 가운데 서 있는 구층석탑이 보인다. 사실 청양군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는 딴 곳의 두 배가 더 힘들었다. 우선은 도로에 안내를 유도하는 안내판이 서 있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쏟아 붓는 듯한 장맛비로 인해서 찾아가는 길도 낯설고, 사진을 촬영하는데도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이다.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을 때 연꽃을 찍느라... 

 

주변에는 400년이 지난 백련지가 조성되어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16-2에 소재한 보물 제18호인 ‘청양 서정리 구층석탑 (靑陽 西亭里 九層石塔)’은, 공주에서 청양 방향으로 23㎞ 정도 떨어진 벌판 가운데에 서 있다. 이 탑이 있는 부근에 고려시대에 ‘백곡사(白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주위에 기와조각 등이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유물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이 구층석탑 주변에는 백련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백련지는 조선 선조 20년인 1587년에 송담 송남수가 정산 현감으로 재임을 할 때, 정산현 좌측에 연못을 만들고 만향정이라는 정자를 세우면서 심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 내용으로 보면 이 백련지는 400년이 훨씬 지난 백련지이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구층석탑

 

정산면 서정리 구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한 면에 2개씩의 안상을 돌려 새겼는데, 바닥선이 꽃모양으로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양식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위층 기단에는 네 모서리에 양우주를 돋을새김 하였고, 면의 가운데에는 기둥 모양인 탱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기단의 위로는 알맞은 두께의 돌을 덮개석으로 안정된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이 구층석탑은 탑신의 1층이 지나치게 크다. 하지만 2층부터는 높이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넓이는 그리 좁아지지 않아 우아한 느낌이다. 덮개석인 지붕돌은 층급받침은 1층은 5단, 나머지 층은 3단씩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네 귀퉁이가 약간씩 추켜 올라가 있다.

 

서정리 구층석탑은 전체적으로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석탑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9층이나 되는 층수로 인해 형태가 매우 높아져 안정감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이 구층석탑은 각 부분의 세부적 조각양식이나 기단의 안상을 새긴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기단부에는 한 면에 두개씩의 안상을 새겼다 

 

천년세월 그 자리에 서 있어 고맙다

 

몸돌인 탑신부는 몸돌과 덮개돌인 옥개석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는 이 탑은,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 몸동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우아하게 체감되어 있다. 몸돌의 덮개석 역시 탑신에 따라 아름다운 체감비율로 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현재 모두 없어진 생태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석탑의 형식이 신라시대부터의 전형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상하의 비례가 아름답다. 서정리 구층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에 조형된 균형이 잘 잡혀간 거탑의 일종이다. 고려시대에는 석불이나 마애불, 탑 등을 이렇게 크게 조성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강한 국권의 상징은 아니었을까?

 

옥개석의 사방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나 있다

 

변 백련지에 핀 백련과 아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서정리 구층석탑. 천년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상륜부만 사라진 채 잘 보존이 되어있어 고맙기만 하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던 장맛비가 다시 ‘후두둑’하며 쏟아지기 시작한다.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한 가지라도 많은 문화재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재촉한다. 다음에 만나게 되는 문화재는 어떤 것일까? 기대를 하면서 빗길을 달린다.

석탑은 대개 3층 석탑, 혹은 5층석탑 등 그 층수를 앞에 붙인다. 하지만 전북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6에 소재한 금당사의 경내에 있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인 금당사 석탑은 그냥 앞에 층수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현재 남아있는 부재들로 보아, 처음에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 석탑의 기단부는 가운데돌이 없어져 다른 돌로 대신하였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형태로 남아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꼭대기에 놓인 상륜부의 머리장식은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탑으로, 제작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호국, 항일의 절 금당사

 

삼국유사 제3권 홍법조에 보면 금당사는 신라 때 처음으로 창건된 절로 전해진다. 무상, 금취 화상이 서기 650(백제 의자왕 10)에 마이산(신라 때는 서다산, 고려 때는 용출산, 조선개국 후에는 속금산이라 불렸다)에 열반종의 사찰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금당사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이 절이 상당히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려 말에는 나옹스님이 금당사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태조 이성계가 이곳 도장굴에서 100일 기도 후,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아 조선을 개국하였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을 혈암사라고 적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주둔지로, 승병이 패퇴함에 따라 절이 전소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전봉준의 딸이 이곳 고금당에서 10여 년간 숨어 지냈으며, 1906년 윤 4월에는 호남최초의 항일의병 경사체이기도 한 장의동맹이 이곳을 진앙지로 삼았다고 한다.

 

금당사에는 보물 제1266호인 금당사 괘불탱이 전해지고 있다. 이 괘불탱은 조선조 숙종 18년인 1692년에 제작한 것으로 높이 약 9m에 넓이 약 5m 정도이다. 한국의 괘불탱 중에는 유일하게 화관에 4마리의 봉황이 그려진 화려함의 극치를 선보이고 있다. 이 외에도 전북 지방문화재 제18호인 금당사 목불좌상이 있다.

 

 

연못 가운데 서 있는 석탑

 

이 석탑은 당시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작은 형태의 석탑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석탑이 크게 파손이 되었다. 기단부도 사라져 현재는 원래의 석탑에 사용한 부재가 아닌, 딴 돌을 이용해 채워놓았다. 조선조 숙종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 고쳐 세운 탑이다.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금당사 석탑은, 구조나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덮개돌의 밑받침은 3층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추녀는 밋밋하게 꾸며졌다. 탑의 몸돌에도 특별한 조각이 없이, 사각형의 탑신으로 올려놓은 형태이다.

 

한 때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병들의 거점으로, 승병을 키우는 곳으로,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개국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금당사. 그 대웅조번 앞쪽에 오롯이 서 있는 금당사 석탑, 그 석탑은 금당사의 역사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까? 무더운 날 찾아간 금당사에서 만난 석탑 한기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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