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에 소재한 삼막사. 삼막사의 내력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5호인 ‘삼막사사적비’에 보면, 신라 문무왕 17년인 577년에 원효, 의상, 윤필 등이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성산’이라는 명칭도 이때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사적비는 조선조에 세워진 것이지만, 그만큼 삼막사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사찰이라는 것이다.

 

비문에는 신라의 원효(617-686)등이 창건하고 도선국사(827-898)가 중건하여 ‘관음사’라고 개칭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 후 고려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 하였고, 여말 선초에는 나옹, 무학 등의 고승이 오래 머물면서 선풍을 드날린 고찰이라는 것이다. 그 뒤 조선 태조 때 왕명으로 중수되었다는 등의 사실이 적혀있다.

 

 

사적비를 지나 오른 산신각

 

사적비는 삼막사 경내를 들어서면 좌측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 위쪽에 자리한다. 이 사적비를 지나면 바위를 직접 깎아서 조성한 돌계단이 있다. 삼막사 인근은 바위가 많은 곳으로, 삼막사에는 남녀근석과 마애불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사적비를 촬영하고 있는데, 여러 사람이 곁을 지나 위로 올라간다. 그 위편에는 전각이 보이지를 않는데, 바위에 대고 수없이 절을 한다. 도대체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저렇게 산 쪽을 향해서 절을 하는 것일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보았다.

 

밑에 산신각이란 이정표는 있는데 정작 위편에 전각이 보이지를 않아 의아해했는데, 계단 위를 올라서는 순간 그 모든 의문이 풀렸다. 바로 바위를 안으로 깊이 파내고 그 곳에 산신을 새겨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는 전각은 바로 이렇게 바위에 산신각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기분 좋은 답사

 

삼막사 입구 주차장에서 삼막사까지 올라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날 오른다고 생각을 하면, 처음부터 한숨부터 나온다. 그런 가파른 오르막길을 물도 없이 한 시간 넘게 걸어 올라가보지 않은 사람은, 그 답사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올라가 만난 절 삼막사. 전통사찰인 삼막사에는 몇 점의 문화재가 있기도 하지만, 그동안 여러 해 찾아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올 들어 가장 기온이 높다는 날 올랐으니, ‘땀이 비 오듯 한다.’는 말을 실감한 답사 길이다.

 

그렇게 찾아 올라간 삼막사. 저 멀리 까마득하게 마을이 보인다. 거의 산 정상부에 절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계곡 밑에서 치밀어 오르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살 것만 같다. 시원한 물을 한 대접 마시고 올라가 만난 사적비와 산신각이다.

 

 

 

이 산신각 명물 되겠네.

 

삼막사 바위암벽 산신각은 바위면을 안으로 네모나게 깊게 파 들어가, 그 안에 산신과 호랑이 동자상 등을 돋을새김 하였다. 양 편에는 기둥을 새겨 놓았으며, 바위를 보고 우측 위편에는 구름을 새겨 놓았다. 처음에는 산신이 타고 앉은 호랑이를 보고 한참이나 속으로 웃었다. 산신님이 들었으면 노했을 듯도 하다.

 

 

 

호랑이가 어딘지 모르게 옛 만화에 나오는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앙편에 새겨 놓은 동자상도 조금은 어색하다. 아마도 지금은 기계를 갖고 조형을 했을 텐데, 일부러 옛 분위기를 만드느라 민화에 나오는 모습으로 조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몇 사람인가가 또 올라와 절을 한다. 이 더위에 그늘도 없는 곳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치성을 드려서 덕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살기 팍팍한 세상에 그래도 이런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도 행복이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이 산신각에도 이야기가 생겨날 것이고, 그 후에는 명물이 될 것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 온 바람 한 점이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인 서기586년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였다. 신라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고려에 패망한 뒤, 경순왕의 첫째 딸인 덕주공주가 이곳에 들어와,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불(보물406호)을 조성했다.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덕주공주가 일생을 마친 뒤로, 산 이름은 월악산으로 절 이름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주사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찾을 수 있다. 「덕주사는 월악산 밑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절을 창건했으므로 덕주사로 이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충주 산수조에 의하면「동으로 45리에 있어 청풍 경계를 이룬다. 상, 하덕주사가 있다.」 고 하여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라 하고, 이곳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지금의 덕주사를 예전에는 하덕주사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덕주사가 있는 곳을 ‘절골’이리 불렀다.

 

예전에는 하덕주사라 불렸던 현재의 덕주사를 절골이라 했고, 상덕주사인 마애불사지는 윗절이라 했다. 현 덕주사의 경내에는 남근석 3기가 서있다. 절 안에 이렇게 많은 남근석이 서 있는 곳은 매우 흐ㅟ귀한 현상이다. 그런데 왜 적주사에는 남아를 낳기를 기원한다는 남근석이 서 있는 것일까?

 

덕주사는 남아선호 신앙이 깃든 곳이다. 서쪽 언덕 산 밑에는 네 기의 부도와 장대석이 있다. 6.25 때 불탄 뒤로 1963년에 지암화상이 5칸인 법당을 중창하였으며, 1985년 성주화상이 현재의 법당을 다시 중창하였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고려시대에 조성 된 약사여래입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월악산은 명산 중 명산

 

산 정상을 ‘영봉’이라고 부르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밖에 없다. 그만큼 월악산은 명산으로 꼽힌다. 월악산을 수산리 쪽에서 바라보면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과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하기에 월악산은 여산신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소산에는 모두 산신이 있는데, 영험한 산인 지리산, 계룡산, 월악산 등이 여산신이다.

 

 

산의 명칭에 ‘악(岳)’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산은 ‘큰산’이요, 음기가 강한 산이라고 한다. 그러한 음기를 누르는 것이 바로 남근석이다. 덕주사 경내에 남근석이 많은 까닭은 바로 그런 음기를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한 음기가 강한 곳에 남근석을 세우고, 그곳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덕주사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이 음기를 누르는 남근석에 정성을 들여 득남을 기원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였을까? 덕주사 경내에 있는 남근석을 바라보면서 혹 이 남근석에는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이 남근석에 치성을 드려 많은 여인들이 아들을 낳아 강한 신라를 기대한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모셔온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충북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약사여래입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다. 대좌는 따로 만들었으며, 두발을 윗면에 조각하고 몸체를 얹었다. 옛 정금사 터라고 전하는 곳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명산 중 명산이라는 월악산에 자리하고 있는 덕주사. 그 경내에서 볼 수 있는 남근석들. 지금도 그 남근석에 비손을 하는 부인들이 상당수가 있다고 한다. 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덕주공주의 염원이 이루어지려는지. 속모를 새 한 마리 울며 날아간다.

전남 여수시 연등동 376번지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도로변 양편에는 석장승이 서 있다. 예전에 이 길은 여수시로 진입하는 구 1번 도로다. 이 도로변에 동·서로 서있는 한 쌍의 돌장승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장승을 벅수라고 부른다.

 

이 벅수라고 부르는 석장승 한 쌍은 조금 경사진 길을 오르는 곳에 서 있는데, 좌수영 시절에 조선시대 수군이 주둔하여 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서문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이런 문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한 쌍의 벅수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한 듯하다. 해학적으로 생긴 이 한 쌍의 벅수는 남녀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하늘과 땅을 관찰하다

 

연수시 연등동 375번지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224호인 이 벅수는 한쌍으로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남벅수의 몸체에는 하늘을 맡은 신이란 뜻으로 ‘남정중(南正重)’, 여벅수의 몸체에는 땅을 관장한다는 뜻인 ‘화정려(火正黎)’라고 새겨져 있다.

 

동쪽에 위치한 남자벅수는 모자를 쓰고 위로 올라간 눈썹에 달걀형의 눈과 길고 큰 자루병코를 가지고 있다. 입은 조금 벌어져 이빨이 보인다. 그저 바라보기에도 큼지막한 코에 세 개의 이빨이 솟아있는 것이, 여간 해학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눈, 코, 입, 귀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나름대로 구조가 맞는다.

 

 

서쪽의 여자벅수는 위로 길게 솟아오른 모자를 쓰고 올라간 눈썹을 하고 있으며, 왕방울눈과 눈과 길고 복스러워 보이는 귀에, 코볼이 넓은 매부리코로 되어 있다. 또한 벌린 입 사이로는 뜬 이빨이 보인다.

 

정조 12년에 세운 연등동 벅수, 나리님들 좀 배워라

 

 

 

여자벅수의 뒷면에 적혀있는 글씨로 보아 정조 12년인 1788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 연등동 벅수들은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 친근감을 주고 있다. 석장승으로 조성된 벅수 중에서 시간이 오래되었음에도,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민간신앙을 보여주는 민속문화재로서 높은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벅수, 장승, 장생 등으로 불리는 이 석물이나 나무로 된 신표들은 사찰의 입구, 길 가, 마을의 입구 등에 세워져 성역을 나타내고 있다. 잡귀를 막고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신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224년이나 지난 세월을 그렇게 두 눈을 부릅뜨고 길가에 서 있는 연등동 벅수 한 쌍. 이 벅수를 촬영하고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벅수를 여의도 양편 입구에 세워놓으면, 여의도로 들어가는 잡귀를 다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못된 생각 말이다. 하도 시끄러운 세상 어째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지, 국민을 위해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매번 다툼으로 일관하는 의원나리들을 보면서, 그저 묵묵히 세월을 지켜본 벅수가 오늘은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옛 풍습에 ‘매향(埋香)’이란 의식이 있었다. 이 의식은 하늘과 땅의 신을 모시기 위한 의식으로, 향나무를 땅에 묻거나 피우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의식을 행하는 과정과 시기, 그리고 관련된 집단이나 사람들을 기록한 돌을 <매향비>라고 한다. 매향비는 다듬은 돌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커다란 바위에 기록을 해 놓는 형태이다.

 

미륵의 세계를 그린 민초들의 염원

 

매향의식은 내세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기원하며 향을 땅에 묻는데, 매향 의식은 고려 때도 성행하였으나, 그 후 불교에 대한 억제가 강화되던 조선조 초기에 극락정토로 갈 것을 기원하면서 비를 세우던 비밀 종교행위의 하나이기도 하다. 매향은 주로 민초들이 즐겨했으며, 순수한 민간신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로는 1309년 8월에 세운 고성삼일포 매향비를 비롯하여, 1335년 3월에 세운 정주 매향비, 1387년에 세운 사천 매향비, 1405년에 세운 암태도 매향비, 1427년에 세운 해미 매향비 등이 있다.

 

보물 제614호 사천 매향비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산48 소재한 보물 제614호 사천매향비는 보호각을 지어 보호를 하고 있다. 사천 매향비를 답사한 해가 2005년이었으니, 벌써 4년이 훌쩍 지났다. 하기야 벌써 20여 년을 전국을 돌아다녔다. 꽤 오랜 시간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마음은 조급하고, 그 수많은 경비며 시간이 점차 부담스럽다.

 

자연석에 15줄 202자를 썼다. 매향은 민간들이 행한 의식이다

 

그래도 그동안 현장에서 담아 온 것을 정리하여 이렇게 소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퍽이나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사천 매향비는 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표면의 굴곡이 심하다. 그저 바라보면 글자를 제대로 판독하기도 어려운 글자가 많은 듯하다. 글자 크기도 각자가 다르고 종횡도 잘 맞지 않아 보기가 힘들다.

 

전체 15줄 202자를 각인한 사천 매향비의 판독된 내용에 보면, 고려 후기 사회가 혼란하던 때에 불교 승려들을 중심으로 4,100여 명이 계를 조직하여, 왕의 만수무강, 나라의 부강, 백성의 평안 등을 기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매향의식을 치렀다는 것을 기록했다. 당시 매향의 주도집단은 주로 보(寶)·결계(結契)·향도(香徒)였다.

 

소중한 민간신앙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있는 문화재로 가치가 높다

 

비문은 승려 달공이 짓고, 수안이 썼으며, 김용이 새긴 것으로,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세워졌다. 건립목적과 세운 연대가 확실한 비로, 잊혀진 우리의 옛 민속을 알려주고 고려 후기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에 맞는 매향의식이 필요해

 

매향의식을 거행할 때 땅에 묻는 향은 주로 침향이란 희귀약재로 쓰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가의 향을 땅에 묻는다는 것은 그만큼 민초들의 절박한 마음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흔치 않은 문화재인 매향비. 사천 매향비를 답사한 지 오래 전이지만, 지금도 그 매향비 안에 깃든 민초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만 같다. 어차피 민초들이야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자들과 함께는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보물 제614호 사천 매향비

 

갑자기 사천매향비가 생각이 난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이 너무 절박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굳이 매향의식이 아니라고 해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정작 국민들을 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잔치에 빠져 있는 것이 요즈음의 현실이다. 과연 이네들을 믿고 살아야만 할까?  이제는 이 시대에 ‘매향의식’이 필요한 때일 것이란 생각이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소재지에서 592번 도로를 이용해 부흥, 청천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느티나무들이 서 있는 문당리 오리목 마을 입구가 나온다. 이 느티나무 밑에는 돌무더기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 막돌을 쌓아올린 이것이 바로 문당리 성황단이다. 안내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막돌로 쌓은 돌 제단

 

여름에 나뭇잎이 무성할 때는 돌무더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뭇잎이 무성하기 전의 성황단은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 놓고 있다. 성황단은 앞쪽 길가에 서 있는 느티나무를 기점으로 해서, 뒤 산 능선을 향해 쌓아 올렸다. 철책을 돌아 돌무지 위로 올라가니, 길가 쪽에 폭 3m, 길이 5m 정도로 편편하게 돌을 놓아뒀다. 이곳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그리고 뒤편에는 제물을 차릴 수 있도록 단을 만들고 그 뒤로는 돌을 수북이 쌓아 능선을 향하게 하였다. 능선을 향해 놓은 돌무더기는, 산의 정기를 받아 마을이 잘 되고, 주민들 중에서 큰 인물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제단은 마을을 둘러싼 능선 하단의 경사지에 막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아래 제단의 높이는 2.5m 정도가 된다. 제단의 위로 올라가니 넓이가 꽤 되어, 10여명은 족히 올라설 만하다. 뒤편으로 10여m 정도 길게 만들어 주산과 연결을 해놓았다. 좌, 우에는 높이 1.5m 정도에 지름 3m 정도의 원추형 돌탑이 서있다. 마을에서는 이것이 남녀를 상징하는 탑이라고 한다.

 

 

 

성황단의 다양한 형태

 

성황단은 일반적으로'서낭'이라고 부른다. 서낭은 오랜 옛날부터 마을제의 신위로 모셔지면서, 우리민족의 토착신앙 대상이 되어왔다. 서낭의 형태는 대개 돌무더기를 쌓은 누석총(累石塚)이나, 고목을 지정해 만든 서낭목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가하면 장승과 솟대를 세워놓고 서낭제를 지내는 곳도 있다. 일부 마을에서는 성황당이라는 당집을 짓고, 그 안에 위폐를 모시거나 화분을 그려 모시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성황은 보편적인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위함을 받는 성황신 외에도, 지역의 방백이 직접 성황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성 안 높은 곳에 성황사를 짓고, 그 안에 위폐를 모신다. 성황사의 집제는 고을의 방백이 주관을 한다. 또한 길거리에 지나는 길손들의 안위를 위한 서낭도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성황은, 우리민족의 마을신앙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문당리 성황단은 독특한 제단으로 가치가 높아

 

문당리 성황단은 앞에 열거한 일반적인 성황제의 신표와는 다르다. 우선은 누석총을 양편에 쌓아 남녀를 상징하는 것도 그렇지만, 돌을 쌓아올려 제단을 조성하였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리고 그 뒤쪽을 높이 층이 나게 쌓아, 음식을 차리는 진설대를 만든 것도 그렇다. 또한 그 뒤편을 길게 늘어놓아, 산의 능선과 연결을 시도한 것도 이 마을 성황단의 특징이다.

 

 

현재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문당리 성황단은, 조선 중기에 마을이 형성 된 후 오랜 시간 마을의 수호신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 지내왔다. 전국적으로 많은 마을제의 신표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즈음에, 문당리 성황단의 가치는 더욱 높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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