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石槽)’란 돌로 만든 물을 담아두는 용기를 말한다. 꼭 물을 담아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돌로 만든 물을 담아 목욕을 하는 용기도 석조라고 한다. 예전에는 욕조를 돌이나 나무 등으로 만들었다. 석조는 주로 절에서 많이 사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요즈음에 남아있는 석조의 대부분이 절터에서 많이 발견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여에서 발견된 수많은 석조를 보면, 대개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 일반 가정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소재하는 부여국립박물관 경내에는 많은 백제시대의 석조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마도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런 석조를 하나 쯤 갖고 있는 것이 신분의 고하를 상징하는 것이나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많은 석조들이 현 부여읍 일대에서 발견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지에서 발견이 된 석조들

 

우리나라의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는 석조는 대개 옛 절터에서 많이 발견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석조가 절에서 사용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보물 제64호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의 용도로 사용이 되었다. 보물 제102호인 서산 보원사지 석조 역시 절에서 물을 담아 쓰는 용기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절에서 많이 사용한 물을 담아두는 석조는 장방형, 원형, 팔각형 등 다양하다. 공주 중동 석조처럼 특이한 석조도 있다. 보물 제148호인 공주 중동 석조는 공주 대통사 터에서 보물 제149호인 반죽동 석조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 석조는 원형으로 물통을 만들고, 중간에 간주석을 놓고 밑에 받침을 두었다. 연꽃을 담아 장식을 하던 용기로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부여에도 보물로 지정 된 석조가 있다. 부여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194호인 부여 석조이다. 이 석조는 ‘공(工)’자 형태로 되어있는데,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즐겼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 외에도 보물 제1523호인 경주 불국사 석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인 법주사 석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인 도갑사 석조,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인 보문사지 석조 등이 있다.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한 백제인들

 

부여국립박물관 경내에 전시가 되어있는 석조들은 그 모양이 그리 크지 않다. 원형이나 네모나게 조형을 한 것들도 있으나,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한 석조들이 눈에 띤다. 백제시대인 6~7세기경에 현 부여읍 일대에서 발견이 된 석조들이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석조를 만들어 사용한 백제인들은 뛰어난 석조물을 조성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석조 중에는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한 것들이 눈에 띤다. 아마도 당시 백제인들은 자연을 사랑했던 것이란 생각이다.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조형을 한 석조들. 부분이 깨어지고 떨어져 나갔지만, 그 안에서 백제인들의 자연사랑을 알아볼 수가 있다면 너무나 비약적인 생각일까?

 

부여국립박물관 야외에 전시가 되어있는 석조들을 보면서, 다양한 그 모습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자연을 사랑한 백제인들. 그 작고 볼품이 없어진 많은 석조에서,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기란 어렵지가 않다. 비록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오랜 시간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도로변에 서 있는 석장승 한 쌍. 중요민속문화재 제1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장승은, 동문리 국민건강보험공단 앞에 마주하고 서 있다. 이곳은 옛 부안 읍성의 동문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동문 안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동문 안 장승은 성문과 성문 안에 있는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고, 재복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세워진 것이다.

 

숙종 조에 세워진 동문 안 장승

 

이 동문 안 장승은 조선 숙종 15년인 1689년에 세워진 것으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석장승을 ‘벅수’라고 부르는데, 마을의 화재도 예방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2년마다 음력 정월 보름에 풍물과 줄다리기, 당산제로 이어지는 마을의 축제가 열린다. 원래 이곳에는 커다란 당산나무와 마을사람들의 쉼터인 모정이 있었으나 지금의 도로가 뚫리면서 없어졌고, 문지기장군이라 불리는 한 쌍의 장승도 조금씩 뒤로 옮겨졌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한 쌍의 석장승은 벙거지를 쓰고 도로를 바라보고 있는 장승이 남장승이다. 이 남장승은 ‘상원주장군’이라고 불렀으며, <당산하나씨> 또는 <문지기장군>이라고 부른다. 길을 등지고 서 있는 장승은 여장승으로 ‘하원당장군’이라 부르고 있다. 자리를 옮겼다는 한 쌍의 장승은 도로변 작은 소공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험상궂은 얼굴 안에 새겨진 미소

 

길을 등지고 서 있는 여장승은 정형화되지 않은 긴 화강암 돌에 면상을 새겨 넣었다. 이마는 밑으로 내려가면서 조금 넓어졌으며, 이마는 불거져 있다. 그 밑으로는 눈썹을 새겼는데, 중앙에는 백호를 새겨 넣었다. 눈은 동그랗게 만들고 가운데 작은 눈동자를 만들었다. 코는 삐뚤어진 주먹코에 입은 위아래 이빨이 험상궂게 새겨져 있다. 복판에는 하원당장군이라고 썼는데, 풍화에 마모가 되어 흐릿하다. 복판 위에는 손을 만들어 놓았는데, 팔은 없고 손만 흐릿하게 보인다.

 

길을 바라보고 있는 남장승은 머리 위에 끝이 둥근 벙거지를 쓰고 있다. 얼굴은 여장승보다 갸름하며 눈썹 사이에는 백호를 새겨 넣었다. 코는 뭉툭하니 주먹코에 길이가 짧다. 입은 송곳니를 표현한 듯한데, 양 볼이 튀어나왔다. 팔은 형상만 있으며 상원주장군이라 쓴 복판의 글씨는 마모가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몸은 전체적으로 오른팔 쪽으로 약간 굽어져 있다. 두 기의 장승은 서로 마주하고 있다.

 

 

두려운 존재, 그러나 그 안에 편안함이 있어

 

마을의 입구에 서서 마을로 들어오는 재액과 잡귀잡신을 막는 역할을 하는 장승. 장승의 기능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경계 장승이다. 이 경계 장승은 사찰의 입구 등에 세워, 그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준다. 둘째는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수호 장승이다. 수호 장승은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소멸시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셋째는 로표 장승이다. 로표 장승은 길가에 세워, 방위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장승들은 복합적인 성격을 띠우기도 한다. 수호 장승과 로표 장승, 혹은 경계 장승과 로표 장승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부안읍 동문 안 장승은 수호 장승이다. 험상궂은 얼굴로 길을 보면서 마을로 들어오는 재액을 방비한다. 그 험상궂은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무한한 해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못생기고 추한 모습이지만, 우리네가 가장 친근하게 여기는 도깨비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험상궂은 장승을 세우고, 그 장승의 뒤에서 재액이 소멸되고 평안하기를 기원한 것이다. 밖으로는 험하고 안으로는 편안한 모습. 그 안에 해학적인 모습이 있어 사람들은 이를 신격화시키고, 스스로를 위하였는가도 모르겠다.

‘하마비(下馬碑)’라는 것이 있다. 하마비는 궁궐이나 향교, 혹은 사찰이나 옛 고택 등의 앞에도 서 있다. 이 하마비가 서 있으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하마비의 한편이나 뒤쪽을 보면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혀있다.

 

여기서 ‘대소인’이란 당하관인 종 3품 이하의 관원을 뜻한다. 또한 원(員)이란 당상관을 말한다. 우리가 옛 각판 등에서 볼 수 있는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개(皆)’는 ‘모두 다’ 라는 뜻이니, 결국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이 하마비가 서 있는 곳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란 뜻이다.

 

자연석을 이용한 하마비도 있어

 

물론 전국에 있는 하마비는 거의 위와 같은 ‘대소인원개하마’라고 각자를 했다. 하지만 가끔은 예외도 있다. 고을의 방백 등이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직급을 적고 그 밑으로는 다 말에서 내리라고 적은 글귀도 보인다. 이런 예외인 하마비는 고을의 수령이 근무를 하는 입구에 놓여있기도 하다.

 

이러한 하마비는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가 있다. 하마비는 대개 일석으로 조성을 한다. 길게 세운 위를 둥그렇게 조형을 해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하마비의 모습이다. 하지만 특별하게 만든 하마비도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하마비를 만든 곳도 있고, 돌에다가 하마비라고 각자를 해 놓은 것들도 보인다.

 

 

하마비는 조선조 태종 3년인 1413에 종묘의 궐문 입구에 표목을 세운 것이 처음이다. 이곳에는 ‘대소관리과차개하마(大小官吏過此皆下馬)’라고 적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 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이나 종묘, 문묘, 왕장이나 성현, 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졌다.

 

전주 경기전 앞의 하마비는 특이해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번지에 소재한 경기전은 ‘어용전(御容殿)’이다. 어용전은 조선 태종 10년인 1410년에 완산과 계림, 평양에 건물을 짓고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으로 세종 24년인 1442년부터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다고 한다. 경기전은 전주에 있던 어용전을 가리키는데 선조 31년인 1598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고쳐지었다.

 

경기전 입구에 보면 특이하게 생긴 하마비가 서 있다. 일반적으로 하마비는 일석으로 조성을 하는 것에 비해, 경기전 앞의 하마비는 밑에 두 마리의 행태가 비를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두 마리의 해태가 사각형의 넓은 판석을 이고 있으며. 그 위에 하마비를 세웠다. 판석에는 사방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하마비의 표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적혀있다. 즉 이곳에 이르거든 누구나 다 말에서 내려야 하며, 잡인을 일체 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이 하마비는 1614년에 세웠으며, 그 후 1856년에 증각을 하였다.

 

하마비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 대개는 비의 중앙에 ‘하마비’라고 음각을 한 후, 한 편에 대소인원개하마란 글귀를 적어 놓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경기전 앞에 서 있는 하마비는 하마비라는 글자를 음각하지 않고, 양편으로 나누어 글귀를 내리 음각했다. 아마도 이 경기전이 태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특별한 하마비를 세운 듯하다.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많은 곳에서 만날 수 있는 하마비. 때에 따라서는 하마비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도 들을 수가 있다. 이제는 이와 같은 하마비도 훌륭한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한 과부가 있었다. 이 과부는 날마다 홀로 지새우는 밤이 너무나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커다란 남근석을 두 개 만들었다. 그리고 치마폭에 싸서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 집으로 옮겨오는데, 너무나 무거워 한 개의 남근석은 창덕리에 두고 왔다.

 

산동리 남근석을 답사하는 날은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비가 내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저 퍼붓는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거기다가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카메라 렌즈에 빗방울이 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남근석은 참으로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었다. 아랫부분은 연꽃문양을 둘렀으며, 1500년 대에 세웠다고 하니 벌써 500년 동안 이 마을에 서 있었다. 남근석은 다산이나 득남을 위해 세운다. 그동안 이 산동리 남근석을 찾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성을 드렸을까? 마을에서는 정월 보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이야기를 한다.

 

  
비바람이 몰아쳐 촬영이 힘든 날에 찾아갔다

  
산동리 팔왕마을 이정표

산동리 팔왕마을에 서 있는 남근석은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남근석을 들고 오던 과부가 힘이 들어 버리고 왔다는, 또 하나의 남근석을 찾으러 팔덕면 창덕리를 찾아갔다. 길가 낮은 둔덕에 서 있는 또 하나의 남근석. 생김새나 크기가 산동리의 남근석과 흡사하다. 그러고 보면 산동리에 전하는 이야기가 수긍이 간다. 산동리에 살고 있던 과부가 두개를 만들어 오다가 무거워서 하나를 버렸다는.

 

  
팔덕면 창덕리에 서 있는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5

현재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창덕리 남근석. 산동리의 남근석과 재질이나 크기, 그리고 조각을 한 모습이 유사하다. 이 남근석도 1500년 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산동리의 남근석과 같은 연대다.

 

산동리에 사는 과부는 도대체 왜 남근석을 두개씩이나 만들었을까?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만든 이 남근석은 대담하게도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였다. 나무로 만든 해학적인 것들은 무수하다. 그러나 돌로 만들어진 것들 중에도 이렇게 사실적으로 제작된 것은 드물다.

 

  
창덕리에 소재한 남근석. 좁은 길가에 서있다

도대체 이 과부가 남근석을 만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외로움에 지쳐서 밤마다 이 성기석을 보고 마음속에 둔 남정네를 그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 성기석을 신표로 삼아 이런 장대한 남성을 얻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비는 쏟아지는데 이 남근석을 보면서 이리저리 궁리를 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남근석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표현을 한 순창 팔덕면의 남근석. 비를 맞은 남근석은 조각이 선명하게 나타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다. 비가 쏟아지는데 남근석 곁을 서성이면서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마 저런 강한 남자가 되고 싶음인가 보다.

우물이란 땅을 깊게 파서 물이 괴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하지만 우물은 단순히 물을 얻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물은 그 나름대로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집집마다 우물을 꼭 파고는 했다. 물론 민초들은 그런 우물 하나를 판다고 하면 많은 경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마을에 공동우물을 파서 식수원으로 삼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우물이 꼭 생명을 유지하는 식수원으로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옛 어르신들 말씀에 따르면 ‘우물의 물맛이 좋으면 그 집 장맛은 먹어보지 않아도 된다.’고 할 정도로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은 여러 용도로 사용이 되었다. 우물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우물은 다 같은 것일까?

 

 위는 경주 김호장군 고택의 우물. 아래는 전남 보성 득량면의 마을 공동우물

 

우물에도 여러 형태가 있어

 

우물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우물, 집안에서 사용하는 우물이 있는가 하면, 산 속 깊은 곳에서 사람들의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옹달샘 등도 있다. 어느 곳을 가든지 당집 등이 있는 곳에도 제를 사용하는 데만 사용하는 우물도 있다. 예날 능원 등에도 제정 혹은 어정이란 우물을 팠다.

 

다양한 형태의 우물에는 또한 이런저런 전설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우물을 돌아보는 것만도 꽤 재미가 있다. 사람들은 그저 우물을 마실 수 있는 물이나 떠먹는 곳쯤으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우물에 대한 기록물 하나쯤을 남겨놓는다는 것도 꽤 의미있는 일인 듯하다.

 

 위는 서울 운현궁의 우물. 아래는 충북 증편 사곡리 우물

 

갖가지 사연도 많은 우물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생각 외로 많은 우물을 만난다. 그저 사진 한 두 장을 찍고 돌아섰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우물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책 한권을 쓸 수 있었는데 말이다. 참으로 별별 사연도 많은 우물들이다. 기회가 되면 우물만 한 번 엮어볼 심산이다.

 

여주군 북내면 한 골프장 안에는 ‘어수정’이란 우물이 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영월로 귀향을 갈 때 마셨던 우물이라고 하여, 임금이 마신 우물이란 뜻을 갖고 있다. 충북 증평군 사곡리 마을에는 사람이 빠져도 빠지지 않고 떠 있다는 우물이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식을 잃은 어미가 다 죽게 되었을 때 꿈에 아이가 나타나 어미를 우물로 인도를 하고, 그 물을 먹은 어미가 기운을 회복하였다는 함양 지곡마을의 우물도 있다.

 

 
위는 함양 지곡마을의 종암우물, 아래는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신 성신사의 재정

 

이런저런 사연을 갖고 있는 우물들 중에 일반인들이 전혀 마실 수 없는 우물이 있다. 옛 임금들의 능원이나 제를 지내는 전각 옆에는 우물이 있게 마련이다. 이 우물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가 없다. ‘어정(御井)’ 혹은 ‘제정(祭井)’이라고 부르는 이 우물은, 임금의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물을 긷는 곳이기 때문이다.

 

화령전에서 만난 제정

 

사적 제115호인 정조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제를 지내는 화령전에는, 운한각을 바라보고 좌측 담 너머로 우물이 자리한다. 이 우물은 일반적인 어정이 둥근 형태로 조성을 한데 비해,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려 우물을 조성하였다. 아마도 이 우물은 화령전을 축조할 당시인 1801년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제정은 복원을 한 것이다.

 

 여주군 북내면 골프장 안에 있는 단종이 유배시 마셨다는 어수정

 

화령전에서 제를 지낼 때 물을 떠 사용을 하던 제정은, 정방향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도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높이는 5.5m이고 바닥에서 물이고인 높이는 약 4m 정도이다. 우물의 밖으로 뻗어 나온 돌은 서로 반을 갈라내어 엇물려 놓았다. 장대석을 쌓아올려 우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색다르다.

 

11월 4일 파워소셜러 팸투어에서 만난 제정에 소셜러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우선 우물의 형태도 남다르지만, 길게 물길을 내고 그 밑에 네모나게 물이 고이게 만들어 두었다는 점이 색다르기 때문이다. 물은 맑아서 물고기를 넣어둘 정도이다. 팔달산에는 약수가 몇 곳이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의 물 역시 일반적이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화령전 안에 있는 제향에 사용하는 물을 긷는 제정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는 우물. 그동안 참 다양한 형태의 우물들을 만났지만, 그동안 만났던 우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경주 김호장군 고택에서 만난 천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신라 때는 절터였다고 한다. 그 때부터 아직도 우물은 제자리에 있다고)를 지키고 있는 우물과, 여주에서 만난 어수정, 그리고 화령전 안에 조성한 제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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