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떤 때는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라고 생각이 든다. 문화재 답사는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만일 누가 이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에 답사를 하라고 시켰다면, 길길이 뛰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답사를 하는 것을 보면, 아마 전생에 내가 우리 문화재에 큰 잘못을 했던 것만 같다. 이런 나를 두고 누군가 한 마디 한다.

 

“아마도 과거에 우리 문화재를 일본 놈들에게 팔아먹던 사람이었을 것” 이란다. 전생에 그런 죄를 지은 업보로, 이렇게 20년이 넘는 시간을 문화재를 찾아디닌다는 것. 그러지 않고서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더우나 추우나 그렇게 돌아다닐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야 알 수 없으니, 그만해도 참 다행이란 생각이다.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있을 것인가?

 

 

하기야 지금도 그런 인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에 낙서를 하는 사람들.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도, 문화재를 방치하는 사람들. 그리고 소중한 문화재를 도굴하여 몰래 치부를 하는 사람들. 이 모두가 다 이 땅에서 사라져야만 할 사람들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참 고맙고 또 고맙다.

 

문화재의 보고 여주 고달사지

 

사적 고달사지,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일대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던 사찰이었다.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 그리고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와 비지정 문화재 등 많은 석조유물들이 남아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사지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물들로 보아, 신라말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요즈음 고달사지를 가면 또 다른 발굴작업을 하고 있어, 고달사지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문화재가 출토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전 고달사는 한강을 끼고 있던 흥법사와 법천사, 거돈사, 신륵사 등과 함께, 한강의 수로를 이용한 교통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두 점의 석조가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제작되어 사용된 수조는 일정한 공간에 물을 담아 저장 하거나, 곡물을 씻거나 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수조는 일반적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져 석조 또는 목조가 많이 제작되었으며, 사찰이나 궁궐 등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많이 기거하는 건축 공간에 조성하였다.

 

새롭게 보인 고달사지 석조

 

고달사지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가-4 건물지에서 발견 된 석조는, 물을 담아 두기 위한 시설이기 때문에 한 돌로 치석, 조성하였다. 이 석조는 일부 파손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그 규모는 장변 321cm, 단변 149cm, 높이 98cm 이다. 석조는 한 돌로 치석되었으며, 평면이 긴사각형으로 표면을 고르게 다듬어 전체적으로 정연하면서도 정교한 인상을 주고 있다.

 

 

 

33도를 웃돈다는 8월 4일. 고달사지를 한 바퀴 돌면서 만난 석조 앞에는, 예전 답사 때 볼 수 없었던 문화재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석조를 설명하는 이 안내판에는 석조가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이 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석조를 살펴보니 각 면의 모서리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 석조를 보았지만, 이렇게 안내판을 보고 다시 돌아보니 모르고 있던 부분까지 알게 된다. 문화재를 자주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이 석조의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 부분에서 호형으로 치석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으며, 바닥 중앙부에는 지름 7.5cm의 원형 배수공이 관통 되어 뚫려 있다.

 

이 외에 주목되는 부분은 모서리의 치석과 장식 수법이다. 특히 모서리는 바깥 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쌀을 씻기 위한 석조인 듯

 

이 석조는 전체적인 치석 수법과 고달사지의 연혁 등을 고려할 때 고려 전기 에서도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고달사지에는 또 하나의 석조가 있다. 한편이 심하게 훼손이 된 또 하나의 석조는, 지금은 중앙국립박물관으로 옮겨 간 쌍사자 석등지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어, 이는 예불을 드리기 전 손을 씻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된 석조는 건물터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쌀을 씻기 위한 것이나, 식수를 담아두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석조가 쌀을 씻기 위한 것이었다면, 당시 고달사에 얼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성 시기가 빠른 편에 속하는 고달사지 석조, 문화재는 보면 볼수록 눈이 맑아진다고 한다. 그만큼 많이 알아가기 때문이다. 고달사지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조로 인해, 과거 고달사의 또 다른 일면을 유추해 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찜통더위마저 잊게 만든다.

설봉산을 오르다가 보면 이천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영월암이라는 크지 않은 절이 있다.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하여, ‘북악사(北岳寺)’라 칭하고 산 이름도 북악(北岳)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실증적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 영월암에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마애여래불이라고 하지만은 그 모습은 오히려 나한상에 가깝다. 이 자연암석에 조성한 마애불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오르는 길목에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가 보인다. 이는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럼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영월암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한 절로 추정하고 있다.

 

영월암 창건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연화좌대와 광배

 

사람들은 꼭 국보나 보물이라야 문화재인줄로만 알고 있다. 물론 국보나 보물이 더욱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유형문화재나 향토유적 등도 같은 문화재이다. 그것을 어디서 지정을 한 것인지가 다를 뿐이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지자체에서 지정한 향토유적이라고 해서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은근히 울화가 치미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천시 향토유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영월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영월암 창건 장시에 조상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당시는 이 광배와 연화좌대가 주불을 모시고 있었을 것이다. 주불은 없어지고 광배와 연화좌대만 도괴되어 있던 것을 마애불로 오르는 길목에 놓고, 그 위에 1980년에 새롭게 불상을 조성해 놓았다.

 

마모가 심한 광배

 

광배는 한 장의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였다. 배형으로 조성한 광배는 많이 마모가 되어 문양 등을 쉽게 식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찬찬히 보면 2조로 된 융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현재 좌불상이 있어 뒤편에 있는 복판을 촬영하기는 무리였지만, 원을 중심으로 단엽 8판을 연잎을 둘렀다.

 

중앙의 연잎 주위에는 불꽃을 상징하는 화염문과 당초문을 조성하였다. 두광의 상부와 신광의 좌우에는 화불이 3구 조성되어 있으며, 불상을 주착했던 흔적이 나 있다. 광배의 전체높이는 156cm, 폭은 118cm이며 두께는 45cm 정도이다.

 

 

생동감이 넘치는 연화좌대

 

연화좌대도 대좌에 조각한 것들이 많이 마모가 되었다. 하지만 한 마디로 장엄하다는 느낌이 든다. 연화좌대는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의 하대석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8각으로 조상한 안상, 그 위편에는 앙련좌와 복련좌를 쌓아 올렸다. 4부분으로 조성한 좌대는 각각 1석을 사용해 조성하였다.

 

전체높이가 107cm인 연화좌대는 생동감이 넘친다. 앙련좌 위에 올린 팔각형의 석주에는 나한상을 조각한 듯하다. 그러난 심하게 마모가 되어 그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이 광배와 연화좌대 주변에는 몇 개의 석물이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이 영월암의 역사로 보아, 옛 절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7월 23일, 한 낮의 더위가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오른 영월암이다. 그저 몇 발자국만 걸어도 땀이 비오듯 한다. 이런 날 답사를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하지만 문화재라고 해서 늘 좋은 날씨에만 찾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 더위에 올라 만난 수중한 문화재 한 점. 그래서 나에게는 더욱 소중하단 생각이다.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시집을 가서 살았다는 ‘궁집’을 돌아보고 난 뒤 앞 정원을 거닐다가 작은 석교(石橋) 하나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지나쳤는데, 다리를 건너보니 작은 돌다리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예사롭지가 않은 듯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작은 돌 하나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인자라, 다시 다리로 가서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이가 불과 2.5m 남짓인 이 돌다리가, 그냥 예삿다리가 아니라는 알았다.

 

 

 

하나의 돌로 조형한 돌다리

 

돌다리는 둥글게 위가 불룩하니 구름다리 형으로 조성을 하였다. 양편 다리 끝에는 각각 한 마리씩의 해태가 앉아있어, 사방에 해태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다리는 턱이지게 올려졌다. 다리의 옆부분에는 길고 넓적한 돌을 이용해 바닥을 놓고, 그 밑으로는 원형의 꽃문양을 세긴 버팀목을 질렀다.

 

그런데 이 다이가 조금 이상하다. 아무리 보아도 틈새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갖은 조형물을 조성하기는 했지만, 어디 한 곳도 틈을 발견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단단한 화강암을 갖고 참 정교하게 조형을 하였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다고 해도, 어디 한 곳이라도 빈틈은 있게 마련이다.

 

 

 

놀아운 조상들의 석재 다루는 솜씨

 

돌다리를 살펴본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놀라울 수가. 이 돌다리는 커다란 화강석 한 장을 이용해 조성을 한 것이다. 조형물을 갖다가 붙인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커다란 돌을 이용해 다리를 만들었다. 어떻게 이 작지 않은 돌다리를 한 장의 석재로 만들 수가 있었을까? 조상님들의 돌을 다루는 솜씨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긴 선조들의 솜씨에 감탄한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깎아지른 절벽에 돋을새김을 한 마애불을 보고 있노라, 서산에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적도 있었다. 부도탑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비에 새겨진 받침의 용두와 머릿돌의 꿈틀거리는 용을 보고, 흠칫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한 뛰어난 석재를 다루는 선조들이었다. 새삼 주변을 돌아본다. 여기저기 널린 석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내 위에 걸린 이 돌다리는 그것들 중에서도 눈에 띤다. 단 한 장의 석재를 깎아내어,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지금처럼 장비가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망치에 정 하나만을 갖고 이 작품을 완성했을 것이다. 이 돌다리 하나가 7월 17일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고 답사를 한 나에게, 선조들의 배려인 듯해 고맙기만 하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비가 무던히도 쏟아진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있는 성모상을 찾아가기 위해 지리산을 오르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답사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내친 걸음이니 어찌하랴. 마음 굳게 먹고 성모상을 안치해 놓은 곳으로 힘든 발길을 옮긴다.


수풀 속에 서 있는 중산리 초입의 장승들. 그 웃는 모습에서 잠시 피로를 잊는다. 그러나 비는 더 쏟아지고 갈 길이 바쁘니 계속 발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짙은 비안개가 계곡에서 피어오른다. 성모상을 모셔 놓은 절 입구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정성들여 쌓아 놓은 돌탑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무조신이 된 마고할미


지리산 성모상은 현재 경남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지리산 성모상에 대한 설은 다양하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모셔놓았다거나,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 산신으로 모셨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닿는 것은 천신의 딸 마고가 흰옷을 입고 인간세계로 내려와, 여덟 명의 딸을 낳아 무당으로 키워 팔도로 보냈다는 설화다.

 

 

마고할미를 만나러 가는 길에 서 있는 장승과(위) 커다란 바위에 올려놓은 마고할미상(붉은 원안)

 

마고할미는 산신이다. 마고할미에 대한 설화는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나타난다. 이러한 마고할미가 딸들을 팔도에 보내 무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팔도무당의 시조가 되었다. 지리산은 영산이다. 많은 무속인들은 지리산을 무속의 본향이라고 한다. 이는 마고할미가 무조신(巫祖神)이란 설화와 관련이 지어진다.


꿈속에 현몽을 하다 


지리산 천왕봉에 성모사를 지어놓고 성모상을 모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산 성모상이 1972년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 채 도난을 당했다. 성모상의 도난을 마음 아파한 중산리의 성기룡이라는 젊은이가 성모상을 찾고자, 천왕봉 한 토굴에 들어가 기도에 정진했단다.

 


6년째 되던 날 꿈속의 가르침에 따라, 진주 비봉산 과수원에서 성모상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 천왕사라는 암자를 짓고 성모상을 모셔놓았다. 매년 음력 3월 7일이 되면 천황제를 올린다. 비바람은 더욱 세차다. 성모상은 커다란 바위 윗부분을 파내고 그 안에 좌정을 시켰다.  앞으로는 전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안에서는 성모상을 촬영하기가 힘들다. 비가 쏟아지는데 밖으로 나가 여러 장을 찍었지만, 카메라도 사람도 온통 젖어버렸다. 주변에 늘어선 돌탑들이 비를 맞아 번들거린다. 비안개에 쌓인 지리산은 그야말로 비경이다.


기다려 보지만 좀처럼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팔도무당의 시조가 되었다는 지리산 성모상. 마고성모는 그렇게 빗속에서도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작은 석상 하나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연신 절을 하고 있다. 그 안에 내 작은 마음 하나 두고 지리산을 내려간다.

전남 벌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벌교의 유명한 참꼬막의 맛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벌교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지기 전이다. 해가 길어서 조금 늦게 가도 언제나 대낮이다. 요즈음 답사는 절로 신이 난다. 하루 해가 길다가 보니, 겨울철 보다 두 배는 더 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벌교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홍교로 달려갔다.

 

홍교보다 ‘횡갯다리’가 더 좋아

 

홍교라는 말보다는 ‘횡갯다리’라는 말이 더 정겹다. 우리 문화재의 명칭이나 부분을 설명할 때 거의가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있다. 아이들이나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읽어보기에는 난해하다. 각 지역에서 부르는 우리말을 사용하면 더 친근감이 들고, 오히려 귀중한 것임을 알리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명인 벌교(筏橋)라는 말은 '뗏목다리'라는 뜻이다. 벌교읍 벌교리 벌교천에 놓인 다리를 말한다. 예전에는 이 벌교천 위에 뗏목다리를 놓아 통행을 했기 때문에 벌교라는 지명도 그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뗏목을 연결해 만든 다리를 말하는 '벌교'라는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뀐 유일한 곳이 바로 벌교라는 것이다.

 

월천공덕으로 지어진 다리

 

홍교는 무지개다리를 말한다. 무지개다리란 아치형으로 만든 다리를 말하는데, 벌교 홍교는 세 칸으로 축조된 다리이다. 다리의 길이는 총 27m 정도이며 높이는 3m, 폭은 4.5m 정도이다. 이 다리는 조선 영조 5년인 1729년에 순천 선암사의 초안과 습성 두 선사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월천공덕'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깊은 내에 다리를 놓아 사람들에게 편의를 주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공덕 중 하나이기도 한 월천공덕. 선암사의 두 선사는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불어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는 벌교천에, 횡갯다리를 놓아 언제나 사람들이 건널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회심곡의 사설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선심하마 발원하고 진세 간에 나가더니 무슨 선심 하였느냐 바른대로 아뢰어라

늙은이를 공경하며 형우제공 우애하고 부화부순 화목하며

붕우유신 인도하여 선심공덕 하마더니 무슨 공덕 하였느냐

배고픈 이 밥을 주어 기사구제 하였느냐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선심 하였느냐

좋은 터에 원을 지어 행인구제 하였느냐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 하였느냐

목마른 이 물을 주어 급수공덕 하였느냐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 하였느냐

높은 뫼에 불당 지어 중생공덕 하였느냐 좋은 터에 원두 놓아 만인 해갈하였느냐

 

 

다리 옆에 중수비군이 서있어

 

벌교 홍교는 현재 보물 제30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다리는 영조 13년인 1737년과 헌종 10년인 1844년에 중수를 하였다. 홍교 곁에는 다리를 중수할 때마다 세워놓은 중수비가 있다. 홍교는 '단교(斷橋)'라고도 했다. 이는 비가 많이 오면 다리가 끊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교 옆에 있는 5기의 중수비에도 단교라고 적혀있다.

 

이 중수비는 마모가 심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중수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1737년, 1844년, 1899년에 보수를 한 것이 파악이 되었다. 현재의 홍교는 1981 ~ 1984년에 걸쳐 보수하여 원형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홍교 곁에 붙여 건축한 또 다른 다리다. 그 다리로 인해 자칫 보물인 홍교의 가치를 잃을 것만 같다. 괜한 우려인지는 몰라도. 차라리 홍교는 그 상태로 놓아두고 조금 떨어진 곳에 다리를 가설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아니면 홍교 곁에 뗏목다리를 놓아, 홍교의 옛 모습을 재현했다면 하는 바람이다.

 

 

 

벌교의 명물인 보물 횡갯다리. 다리 밑으로 들어가면 천정에 붙은 용머리가 보인다. 얼핏 말머리 같기도 한 이 용머리는 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물이 많이 불어나지나 않을까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월천공덕으로 놓아졌다는 이 다리에서 초안, 습성 두 선사의 마음을 읽는다. 잠시나마 부처가 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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