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는 관을 쓰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다. 눈은 왕방울 눈에 툭 튀어나오고, 양편의 송곳니가 밖으로 삐죽이 솟아있다. 길가에 서서 이런 해괴한 모습으로 서 있는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비보(裨補)의 역할을 한다. 경남 통영시 문화동 세병관으로 오르는 길가에 서 있는 통영 문화동 벅수의 모습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벅수는, 고종 10년인 1906년에 벅수계를 만들어 세운 것이다. 벅수의 옆에 서 있는 비석에는 이 벅수가 마을의 전염병과 액운을 막기 위해 세웠으며, 동남방이 허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세웠다는 것이다.

 

 

장승의 기능

 

장승의 기능은 경계표시장승, 로표장승과 비보장승 등으로 구분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장승의 기능은 대개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경계표시 장승은 사찰 등의 입구에 세워, 잡귀들의 출입을 막고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로표장승은 길목에 세워, 길의 안내를 하는 기능을 갖는 장승을 말한다.

 

광주 엄미리의 장승은 마을의 비보장승이면서, 로표장승의 역할도 함께 한다. 목장승의 밑에는 광주 ○○리, 이천 ○○리 등을 적어 놓아 행로의 안내를 하고 있다. 비보장승의 마을의 안녕을 구가하는 장승으로, 모든 장승들은 이러한 비보적 성격을 함께 띠우고 있다.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장승은,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마을의 허한 곳을 보충하는 토지대장군

 

흔히 마을입구나 사찰 입구 등에 세우는 장승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르게 불린다. 흔히 장승, 장생, 장성, 벅수 등으로 불리며 전승되고 있는데, 이곳 통영에서는 ‘벅수’라고 한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도 한다.

 

문화동 벅수는 남녀 한 쌍이 짝을 이루어 서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장승은 하나만 있는 독장승이다. 이 문화동 세병관 부근의 위치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낮은 지대로 기(氣)를 보강해주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

 

 

 

머리 위에는 벙거지를 쓰고 턱 밑에는 굵은 선으로 세 가닥의 수염이 표시되었다. 벅수의 앞면에는 ‘토지대장군(土地大將軍)’이라는 음각으로 글자를 새겼으며, 뒷면에는 '광무십년병오팔월일동낙동 입(光武十年丙午八月日同樂洞 立)'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독벅수는 익살스러운 민간 특유의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유례가 드문 독장승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벅수에 반해 걸음을 떼지 못하다.

 

통영 문화동 벅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채색을 한 벅수이다.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벅수는 U자 형으로 벌린 입과 큼직한 이빨, 그리고 솟아난 송곳니가 비보장승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벅수의 높이 198cm, 둘레는 160cm인 문화동 벅수. 그 모습에 반해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한다.

 

벅수 하나만으로도 중요민속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벅수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10월 13일, 통영답사 2일차에 찾아간 세병관,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우르르 벅수 앞으로 몰려온다. 그리고 벅수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어대더니, 다시 동피랑 벽화마을로 향한다. 하지만 난 쉽게 동피랑으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벅수의 기운을 좀 더 받아가기 위해, 한참이나 손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 까다로운 샘도 다 있다. 샘을 보호하기 위해 샘 위에 전각을 지으면 마을에 돌림병이 돌고, 상여나 시신이 근처로 지나가면 물이 탁해진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샘 이름도 ‘명정(明井)’이라고 한단다. 통영시 명정동에 소재한 충렬사의 입구 길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샘이다.

 

이곳 사투리로 ‘정당새미’라고 부르는 이 샘은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27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우물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그 전부터 있던 샘을 1670년 제51대 통제사인 김경이 중수하여 지금의 샘처럼 조성을 했다고 한다. 샘을 조성한지가 벌써 350년 가까이 되었다.

 

 

 

두 개의 샘이 나란히 자리해

 

샘은 네모나게 조성하여 두 개가 나란히 있다. 위샘은 ‘일정(日井)’이라 부르고, 아래샘은 ‘월정(月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월정 안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 끼어있다. 아마도 청소를 한지가 꽤나 오래 된 듯하다. 월정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두 개의 샘의 물은 맑은 편이며, 샘의 아래쪽에는 길고 네모난 큰 물 가둠 장소가 있다.

 

이렇게 두 개의 샘이 있는 것은 처음에 위샘을 팠는데, 물이 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밑에 샘을 하나 더 팠더니 물이 맑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개의 샘을 판 후 물의 배출량까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샘을 합하여 ‘명정’이라고 부른다. 원래 이 명정은 충렬사에서 전용을 하였으나, 이 근처에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식수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정당새미에 얽힌 전설

 

문화재 담사를 하면서 우물에 얽힌 전설을 많이 들었다. 마을마다 공동우물에는 한 가지씩의 전설은 꼭 있는 법이다. 그 전설 중 가장 많은 것은 ‘샘이 넘치면 마을에 경사가 있고, 마르면 마을에 흉사가 생긴다.’거나 ‘샘의 물자리를 찾는데 지나가는 백발노인이나 노승이 샘 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라는 등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그런 곳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물이 있는 곳에 마을이 생겨났다. 물은 그만큼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하기에 마을에서 사용하는 우물이 탁해진다는 것은, 곧 그 마을의 폐허를 불러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통영의 명정샘에도 이런 전설이 전하고 있다.

 

 

 

명정은 두 개의 우물이 나란히 있다. 일반적인 샘처럼 깊지도 않다. 그러나 물은 얕지만 매우 맑다. 이 우물은 주위로 시신이나 상여가 지나면 물이 탁해진다고 한다. 지금도 이 명정샘 곁으로는 상여가 지나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샘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 개의 샘 위에 팔각정으로 지붕을 만들었더니, 마을에 질병이 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샘은 그대로 노천 샘으로 남아있다. 이 두 개의 샘인 일정과 월정은 그 용도가 다르다. 일정은 충렬사에서 제향을 지낼 때 사용하고, 월정은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우물을 촬영하고 있는데 어느 어르신이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신다. 우물 기사를 쓰려고 사진을 찍는다고 했더니, 얼른 나오라는 것이다.

 

 

 

“다 찍었습니다. 나갈께요.”

“거긴 외부사람이 들어가면 안 되는 우물인데”

“무슨 이유가 있나요?”

“이순신장군의 제향 때 사용하는 우물인데, 외지사람들이 드나들면 부정타거든”

 

그 이야기에 할 말이 없다. 아직도 이곳 우물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명정샘 주변 사람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전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마을주민들이 그렇게 영험한 샘으로 믿고 있기에 보존이 잘 되는 것이겠지만.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에 소재한 봉녕사. 봉녕사는 우리나라 비구니 가람의 으뜸이라 칭한다. 봉녕사는 고려 희종 4년인 120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성창사라 하였다. 1400년경에는 봉덕사로 개칭하여 오다가, 조선조 예종 원년인 1469년 혜각국사가 중창하고 사명을 봉녕사라 하였다.

 

혜각국사는 수원 광교산 일대에서 오래 생활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광교산 중턱에 있었던 창성사에서도 혜각국사의 흔적이 발견이 된 것을 보면, 광교산 일대에 99개의 사암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허튼 소리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혜각국사는 세조로부터 스승으로 예우를 받았으며, 간경도감의 경전언해에 기여를 하기도 했다.

 

 

 

19세기 말에 활발한 불사가 이루어져

 

그 이후 봉녕사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1971년 비구니인 묘전스님이 주지로 부임을 하면서 봉녕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묘전스님은 봉녕선원을 개원하였으며, 1974년에는 비구니 묘엄스님을 강사로 승가학원을 설립한다. 1979년에는 묘엄스님이 주지와 학장을 겸직하고, 1983년에는 승가대학을 설립했다.

 

1999년 6월에는 비구니 사원으로서는 처음으로 금강율원을 개원하였다. 수원에서 가장 오랜 전통사찰인 봉녕사에는 고려시대의 불상인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조 삼존불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2호인 신중탱화와 현왕탱화가 모셔져 있다.

 

 

 

 

지난 10월 5일, 사찰음식문화대향연을 취재차 찾아간 봉녕사. 대적광전 앞으로 올라가 참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석조와 어우러진 꽃들, 연화세계가 여기든가?

 

대적광전과 수령 800년이 지난 향나무의 모습만 보아도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젖어든다. 그런데 여기저기 놓인 석조마다 가득 꽃을 품고 있다. 그만 그 꽃구경에 취해버렸다. 정작 사찰음식대향연은 뒷전으로 미루고, 꽃에 반해버리다니. 아마도 누구보다 꽃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워낙 석조와 어울리는 꽃들이기 때문이다.

 

 

 

 

가끔 취재를 다니다가 보면, 이런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정작 취재를 할 것보다 더 좋은 소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도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한다는 것은, 더 없이 즐거운 일이 아닌가. 땀을 흘리며 꽃을 찍고 있다가 보니, 어느새 나도 그 꽃들을 닮아가고 있다.

 

그래서 꽃과 바람, 산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늙지 않는다고 했는지. 대적광전과 향나무 인근에 꽃들을 촬영하고, 대적광전 앞으로 가 잠시 머리를 숙인다. 누군가 열심히 절을 하는 뒷모습이 보인다. 등 뒤로 땀이 축축이 배어있다. 아마 오랜 시간 저렇게 절을 하고 있는 것인지. 마음속에 간구하는 것이 있어 저리도 열심을 낸다면, 그 원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작은 내 마음 한 자락 덜어내어 그 절을 하는 이의 마음에 보태고 싶다.

 

 

 

아마도 아직 봉녕사에는 그 석조에 담긴 꽃들이, 찾아가는 이들을 반겨줄 것만 같다. 서리가 오기 전에는 시들지 않을 꽃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없는 아쉬움이 크지만, 멀지 않은 길이라면 봉녕사를 찾아 꽃들과 대화를 해보기 바란다. 아름다움은 사물과의 소통에서 나온다고 하신 어느 노스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더 생각이 난다. 그것이 바로 법문이었다는 것을.

 

 

전주, 완주, 김제를 아우르는 모악산은 깨달음의 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모악산의 금산사와 뒤편 대원사를 기점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였다.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후백제의 견훤, 기축옥사의 정여립과, 한국 불교 최고의 기승으로 대원사에서 오랜 시간 정진을 한 진묵대사, 그리고 근세에 들어 전봉준, 증산 강일순, 보천교의 차경석과 원불교 소태산 등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을 했다.

 

모악산은 『고려사』에 보면 ‘금산(金山)’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금산사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사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정상 근처의 낭떠러지를 형성하고 있는 바위가 어미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엄뫼’라고 부르던 것을 의역하여 금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 모악이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석종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인 600년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가 두 번째로 확장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 경내 국보 미륵전의 우측에는 높은 축대 위에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종 모양의 석탑이 있다. 이 석종은 매우 넓은 2단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이고, 그 위에 탑이 세워졌다.

 

이러한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탑의 외형이 범종과 비슷하다고 해서 석종이라 불린다. 이 방형의 석조로 구성한 방등계단은 바로 불교의식의 하나인 수계식을 거행하는 신성한 장소이다. 기단은 대석, 면석, 갑석으로 되어있고, 상·하 기단 면석에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석종의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판석 위에는 종 모양의 탑신이 서 있다.

 

9마리의 용이 끌어 올리는 석종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 연꽃 모양을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이 방등계단은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진신 불사리를 모신 사리계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탑은 가장 오래된 석종으로 조형이 단정하고 조각이 화려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종은 방형으로 상·하 2단의 기단을 구비한 높이 2.27m이며, 외형이 석종 형태를 띠고 있으며, 수계의식을 집전하던 방등계단에 세워진 사리탑이다.

 

이 방등계단은 1918년에 발행된 『Korean Buddism』이라는 책자에 수록된 것을 보면, 미륵전 앞에서 바로 방등계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28년도에 와타나베 아키라의 편집본인 『금산사관적도보(金山寺觀跡圖譜)』에 수록된 방등계단 일대를 보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큰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이때에 방등계단을 「송대(松臺)」라는 명칭으로 표시하고 있다.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탑

 

이 방등계단과 불사리탑은 현재 보물 제2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방등계단을 따라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적멸보궁이 보인다. 적멸보궁이란 방등계단에 놓인 탑을 참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배전이다. 이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 않다. 그것은 적멸보궁의 유리벽 밖으로 보이는 탑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그 탑이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법당 내에는 따로 부처님을 봉안하지 않는다.

 

모악산이기에 이 방등계단에서는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 탑을 봉안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당시의 선대들이 미처 얻어내지 못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정진하는 사람들. 금산사의 방등계단은 오늘도 그 답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우리들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할 뿐.

 

사람은 가끔 이상한 생각을 한다. 그것도 아주 해괴한 생각 말이다. 아마도 찜통더위가 계속되면서, 하도 햇볕에 싸돌아다니니 머리에 이상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 그 절터 한 복판에 장방형의 석조물 한기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보물 제8호인 ‘고달사지 석조대좌’이다.

 

난 이곳을 들릴 때마다 이 석조대좌 위에 올라앉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위에 올라가 하늘에 흐르는 구름만 바라보아도 바로 부처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가끔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해대는 것도, 무료한 답사를 즐겁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찜통더위를 잊으려면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석조대좌 하나만으로 보물이 되다니

 

이 석조대좌는 현재 정리가 된 고달사지의 중앙에 자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석좌가 있었다는 것은, 이곳에 석불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석좌가 놓인 곳이 대웅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간 쌍사자 석등이 놓여있던 자리가 그 남쪽이었기 때문이다.

 

장방형으로 조성된 이 석불대좌는 모두 3단으로 구성이 되었다. 위에 올렸던 불상은 사라졌지만, 이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아마도 이 위에 있던 석불 역시, 석조대좌로 가늠해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석불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고려 초기의 역작인 석조대좌, 정말 대단하다

 

방형대좌로 조성이 된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일반적인 석불좌처럼 화려하게 조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네모난 대좌는 큼직한 앙련과 안상을 새겨놓았다. 단순하지만 조화를 이루는 형태는, 당시 이 고달사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이 받침돌은 상중하의 3단으로 조성하였는데,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다. 윗면은 불상이 놓여 있던 곳으로 평평하니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또한 중간돌에는 한 면에 꽉 차게 안상을 새겨놓았으며, 아래받침돌에도 작은 안상을 4구씩 새겨 놓았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방형의 종첩과 연꽃과 안상을 교차적으로 조각하여, 밋밋함을 느낄 수 없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승탑과 동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여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같은 고달사지 내에 소재한 국보 제4호인 여주 고달사지 승탑의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게 조성이 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대좌의 축조시기가 승탑과 같은 고려 초기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달사지 석조대좌. 불상을 올려놓았던 이 석조대좌가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8월 4일의 찜통더위에 찾아간 고달사지. 그곳에서 만난 석조대좌로 인해 무한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힘든 답사길의 새로운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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