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오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남원으로 와서 생활을 한지 벌써 3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정작 남원 밖에 있을 때는 그렇게 자주 하던 남원 답사를, 정작 남원으로 내려와서는 등한시 한 듯하다.

8월 2일. 일과를 마치고 6시가 넘어 답사에 나섰다. 두어 곳 돌아보려니 하고 나선 길이다. 남원에서 곡성으로 나가다 보면,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 65번지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석불입상이 서 있다. 곡성으로 나가는 길에서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좁은 하천 곁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

마을 진입로를 들어서니 석불입상의 위부분이 보인다. 주변은 비닐하우스와 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 말기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고려 때는 거대석불을 많이 조성하였다. 아마도 고려의 숙원인 북진정책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불상이나 석탑, 그리고 절 등이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古土)를 찾겠다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지당리 석불입상을 처음 보는 순간에 느낀 점은, 장중하다는 생각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그 당당한 모습은 사람을 압도한다. 지당리 석불입상은 하나의 돌에 광배와 불신, 대좌를 새긴 불상이다. 현재 높이는 3.63m 정도이지만, 땅 속에 뭍인 대좌를 감안하면 4m가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두광만 조각을 한 특이한 형태

지당리 석불입상은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다. 상투가 너무 커서 투박해 보이는데,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좌우대칭으로 곡선을 그리면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법의는 가슴부분을 깊게 파 뚜렷한 U자형의 표현을 굵게 하였다.

이 석불입상의 어깨는 1.15m로 정도로 상당히 넓은 편이다. 양 팔에 걸쳐진 소맷자락은 발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머리 부분만 광배로 표현을 하였다. 두광의 지름이 1.82m 정도로 상당히 크다. 머리광배의 안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둘레에는 원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석불입상의 두 팔은 어디로 갔을까?

머리광배에 있는 연꽃무늬 등 세부표현은 상당히 간략화 되어 있어, 섬세함을 잃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볼 때 인근에 있는 보물 제43호인 만복사지 석불입상보다 시대가 떨어지는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불상의 체구가 거대하고, 조각기법이 대담하고 거침이 없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당당한 고려의 기개를 상징하듯 조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 밭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석불입상. 그 보호철책 밭으로는 석물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예전 절터가 아니었나 생각을 해본다.




한 가지 이 석불입상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두 팔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 팔을 끼웠던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팔이 있었다고 하면 좀 더 자세하게 이 석불입상의 존재를 알만한데, 팔이 사라졌음이 아쉽다. 우리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이렇게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아쉬움이 사라지는 날은 아마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문화재 답사를 계속하는 한은.

여름철 답사는 평탄치가 않다. 특히 산에 문화재가 있는 경우에는 곤욕을 치르기가 일쑤이다. 비가 오고 난 후 부쩍 키가 자라버린 각종 풀이며, 넝쿨들이 길을 가로막기가 일쑤이며, 땀 냄새를 맡은 날파리며 산 모기들이 극성스럽게 달라붙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여름철의 문화재 답사이다.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에는 전남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담양 분향리 석불입상’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길을 지나다가 이정표가 보여 무작정 찾아들어간 곳이다. 그러나 마을 분들에게 물아보아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시겠다는 대답이다. 마침 어르신 한 분이 지나시다가


“그 돌부처 저 산 위에 있어. 이리로 돌아 올라가“

라고 말씀을 하신다. 마침 알려주신 곳으로 가니 작은 토굴 하나가 있고, 그 앞에 안내판이 걸려있다.

가로막힌 풀을 헤치고 산을 올라

작은 암자처럼 생긴 산 밑 절로 들어갔다. 이곳에 석불입상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런데 대답은 산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있다고 한다. 처음엔 그래도 길처럼 나 있더니, 조금 더 올라가니 대와 풀들로 인해 길이 사라졌다. 아침부터 길을 찾느라 애를 먹었는데, 이 곳 역시 남다를 바 없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대밭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나마 길의 흔적이 남아있어 다행이다. 날파리와 모기떼가 달라붙는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것이 여름철 문화재 답사의 가장 큰 고통이다.


대숲으로 들어가 대나무 잎을 헤쳐 가며 산길을 오르다보니 저만큼 석불입상의 윗부분이 보인다. 석불입상 주변은 모두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놓아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자연과 스스로 어우러진 모습을 기대했는데, 영 사각으로 발라놓은 시멘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랜 풍상에 훼손이 된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연화좌대와 불상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이 되어있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는 낮아 거의 민머리 형태이다. 얼굴은 둥글넓적한데 귀는 짧은 편인데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고, 코는 누가 떼어내 시멘으로 발라놓았다. 전체적인 표정은 둔화된 모습이다. 양 눈썹 사이와 코, 입 등은 형식화 되어있으며, 마모가 심해 자세한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다.




이 석불은 2m가 넘는 비교적 큰 불상이다. 전남지방에서는 이렇게 큰 석불입상이 그리 흔하지가 않다.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게 선각되어 있는데 간격이 넓게 표현하였다.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에서 굵은 곡선으로 물결모양을 그리다가, 양쪽 다리 밑으로 내려오면서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외곽으로는 한 줄 띠를 돌려 마무리를 하였으며, 양쪽 팔에 걸친 옷자락은 직선으로 길게 늘어뜨려 다리 하단으로 내리뻗어 있다. 팔에 걸린 법의의 소매 끝자락은 약간 밖으로 외반되어 옷 주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발은 길게 늘어진 옷주름에 가린 채 발등만 보인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발밑에 놓인 연화대좌는 8각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16잎의 앙화가 아래로 향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수인이다. 양쪽 손바닥을 안으로 구부려 서로 대치하게 하여 허리춤에 대고 있다. 특히 왼손에는 약병을 쥐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약사여래석불입상으로 볼 수 있다. 뒷면은 머리 부분에서 두발이 보이며 그 외에서는 평평하게 처리하였다.

조성시기가 고려 전기로 추정되는 이 석불입상에서 보여주고 있는 옷주름 양식이나 수인 등은, 보기 힘든 특이한 기법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이 조금은 편안하지 않은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석불입상의 형태가 뒤로 약간 젖혀져 있어 거만스런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저렇게 거만한 모습으로 서 계신 것일까?


아마도 손에 든 약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쳤기 때문은 아닌지. 달라붙는 모기들을 쫓아내며 괜히 헛웃음을 날린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산으로 들로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그런 황당한 생각이 힘든 답사 길을 조금은 가시게 하는 것을.


‘아이패드2’를 이용해 문화재 답사를 나가보았다. 6월 7일 오후 전주에 일이 있어 나가는 길에, 아이패드를 지참했다. 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문화재답사를 하던 나로서는, 일보 진전을 했다고 보아야할까? 아니면 현대문명의 이기를 갖고 또 다른 것을 느끼고 싶어서일까? 여러 가지 의미로 아이패드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아직은 낯설기 만한 아이패드2를 이용해 답사를 한다는 것은, 나에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동안 답사를 하면서 몇 번이고 산을 헤매다가 굴러 떨어져, 몇 대의 카메라가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하기에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 아이패드를 이용해, 편안하게 산을 탈 수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아이패드2'를 이용해 촬영한 오수리 석불입상

산에서 걸어 내려 온 ‘오수리 석불’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550번지에 소재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인 오수리 석불. 오수면 오수리 관월마을 뒷산 밑에 서 있는 이 석불은, 약 삼백년 전부터 마을의 수호신처럼 마을을 굽어보고 우뚝 서 있다. 이 석불이 이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 석불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마을의 한 아낙네가 어느 날 뒤쪽 산을 바라보니, 큰 집 채만한 바위덩어리가 걸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낙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저것 좀 보라고 큰소리를 치니, 이 아낙네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바위가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소리에 놀라 쫓아와 보니, 커다란 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하체가 땅에 묻혀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가 석불인 것을 알고 난 후부터, 서로 불공을 드리고 관리에 정성을 쏟아오고 있다. 사람들은 만일 이 석불을 아낙이 조금 늦게 발견해 마을 뒤 산 쪽에 멈추지 않고 마을 앞까지 나와 자리를 잡았더라면, 이 마을이 더욱 융성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의 자손들이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라 전한다.

그 후 오랜 세월 눈, 비, 바람을 맞고 외로이 서있는 석불을, 이 마을주민인 최경태가 움막 같은 집을 만들어 주었으며, 다시 약 100년 전 쯤 진안 마이산에 거주하던 이갑용처사가 꿈에 이 석불이 나타나 ‘내가 옷을 벗고 있으니 집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하므로, 다시 개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전각은 없고 보호철책만 주변을 둘러놓았다.



아이패드2로 촬영을 해보았다. 선명도는 떨어진다
 
고려시대 지방장인의 솜씨로 조성된 석불

현재 오수리 석불의 하체 부분은 땅에 묻혀 있다.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어, 옆에서 보면 한쪽 면은 완만한 타원을 이루고 있으며 불상이 조각된 면은 약간 볼록하다. 광배의 위는 배처럼 끝이 뾰족하며, 불꽃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돋을새김을 한 석불은 민머리 위에 작은 상투 모양의 소발이 솟아 있다. 얼굴은 역삼각형이며 귀는 길게 표현되어, 어깨까지 닿을 듯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어깨에서 몸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데, 어깨 폭은 1.4m이고 땅에 접한 부분은 1m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가슴 밑에서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아래 소매 자락은 양손을 마주잡고 옷으로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볼록하게 표현되었다. 무릎 아래 부분이 땅 속에 묻혀있어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성된 석불로 보인다.



산에서 스스로 걸어내려 왔다는 오수리 석불. 아마도 세상이 하도 보기가 답답해 산을 벗어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아간 오수리 석불 앞에는, 먼저는 보이지 않던 토굴하나가 생겨났다. 그리고 불사를 준비하는지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비바람에 석불이 더 이상 마모가 되지 않도록, 전각이라도 하나 지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패드2' 휴대가 간편하고 사진촬영과 동영상이 가능해 답사를 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기능을 익히지 못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화질은 그리 좋은편이 아닌 듯하다. 좀 더 기능을 익히고나면, 또 다른 세계를 접할 수 있으려는지는 몰라도.  


부처상은 언제 최초로 만들어졌을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성불 한 후, 한 때 도리천에 올라가 그곳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설법을 하였는데, 밧사국의 우드야나왕이 지상에 부처가 없는 것을 허전해 하였다고 한다. 우드야나왕은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150cm 정도의 여래상을 만들어 공양하였는데, 이것이 최초로 만들어진 불상이라는 것이다.

그 때 만들어진 여래상의 법의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여래상과는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런 최초의 여래상과 같은 법의를 걸친 석불입상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보물 제1436호로 지정된 농산리 석불입상이다.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산53번지에 소재한 이 석불입상은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이다.

보물 제1436호 농산리 석불입상은 석불과 강배가 일석으로 조형되었다

최초의 밧사국 여래상과 같은 법의

이 석불입상의 법의는 양쪽 어깨에 걸쳐, 가슴 위로 몇 갈래의 U자형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온다. 이 법의는 허리부분에서 Y자 형으로 갈라졌다가, 두 다리에 밀착되어 작은 U자를 그린다. 그리고 종아리 부분에서 다시 큰 V자를 그리며 마무리를 짓는다. 바로 이런 형태의 법의가 밧사국의 우드야나왕이 최초로 조성한 여래상과 같은 형태라는 것이다,

이런 법의의 표현법의 형태를 보고, 인도 우드야나왕의 여래상 형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우드야나상의 법의 형태는 몇 곳에서 보이고 있는 석불입상의 법의 형태이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석불입상에서 이런 법의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당시의 특징적인 석불입상의 조형 형태라고 것을 알 수가 있다.



인도 밧사국의 우드야나왕이 최초로 만든 여래상과 같은 법의를 입고 있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석불입상

농산리 석불입상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다. 길을 가다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정표조차 찾을 수가 없다. 도로에서 산속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몇 개의 이정표가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자칫 딴 곳으로 빠지기 쉬운 산길이기 때문이다. 농산리 석불입상을 들어가기 전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보인다. 그리고 넓게 마련한 공지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석불입상을 찾아간 날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아, 여기저기 흰 눈이 보인다.

농산리 석불입상은 광배와 받침대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모습이다. 바위를 원추형으로 쪼아서 불상과 광배를 하나의 돌에 조각을 하였다. 알맞은 형태의 이목구비와 상투가 듬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띠우고 있으며, 적당히 벌어진 가슴으로 인해 날렵한 인상을 준다.



받침돌은 마모기 되었다.

당당한 어깨에 잘록한 허리, 그리고 법의 속에 드러난 사실적인 몸매 등이 이 석불입상의 조각이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형미는 뛰어난 입체감을 보여주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광배의 한편 쪽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뛰어난 예술성이 돋보여

이 석불입상의 광배는 몸 전체를 감싸고 있다. 광배에는 불꽃 무늬를 새겼으며, 석불입상이 딛고 서 있는 받침대에는, 연꽃잎이 아래로 행하고 있으나 심하게 마멸이 되었다. 이 석불입상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바로 발이다. 발은 몸과 광배를 조각한 돌과 떨어져, 받침돌에 발을 조각하였다. 그래서 발과 몸이 떨어져 있다.


발은 몸에서 떨어져 받침돌 위에 조각하였다. 뒤편은 자연석 그대로 놓아두었다.

통일신라 사대에 조성된 농산리 석불입상.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 여기저기 눈에 쌓이고, 12월 11일의 날씨는 차갑다. 더구나 숲속에 있는 석불입상을 만나기 위해 들어간 곳에는 주변 나무에 가려 햇볕조차 들지 않는다. 옷자락을 여미게 하는 산바람이 차갑지만, 쉽게 석불입상 주변을 떠날 수가 없다.

한 해에 몇 명이나 이곳을 찾아오려나. 그래도 누군가 관리하고 있는 듯하다. 주변이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인도 첫 여래상과 같은 형태의 법의를 입고 있는 농산리 석불입상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에는 ‘미륵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도로에서 찾기가 수월한 것은 앞쪽으로는 건물이 없기 때문이다. 미륵암은 전각이 3곳에 요사 정도가 있는, 산 밑에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암자이다. 절을 찾아들어가다가 보면 입구 양편에 목장승이 서 있다. 절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 듯하다.

미륵암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인 ‘미륵암 석불입상’이 있다. 미륵암을 들어가면 좌측으로 요사가 있고, 앞으로 용화전이 보인다. 바로 석불입상을 모셔 놓은 전각이다. 이 건물은 1927년 미륵암 신도들이 기금을 모아 지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미륵입상이 노천에 서 있었는가 보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 남원 미륵암 석불입상

고려초기의 일석으로 조성 된 석불입상

미륵암 석블입상은 온전한 형태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안면은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아마 오랜 세월 풍상에 훼손이 된 듯하다. 미륵암 석불 역시, 석불입상과 뒤에 광채를 표현한 광배가 한 돌로 만들어졌다. 남원 지역의 거의 모든 석불입상들이 이렇게 일석으로 제작이 된 것을 보면, 이 지역의 특징인 듯하다.

미륵암은 통일신라 때에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한다. 미륵암에 모신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때 세웠다는 미륵암은 흔적도 없다. 다만 현재의 대웅전을 세우려고 기초공사를 할 때 예전의 와편 등이 많이 발굴이 되었다고 하는데, 중요한 것을 모르고 다 없앴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안타깝다.


안면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가슴께에서 양팔을 모은 듯하다.

심하게 훼손이 된 석불에는 사연이 많아

미륵암 석불입상은 전체적인 모습은 얼굴이 둥글고 온화한 표정인 듯하다. 머리 위에는 육계가 솟았으며 귀는 어깨까지 닿았다. 코나 입, 눈 등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미륵암의 주지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와서 코를 갉아갔다는 것이다. 아마 기자속(祈子俗)에 상당한 영험을 보인 듯하다.

어깨는 둥글게 표현을 하였으며, 손은 가슴께로 모은 듯하다. 법의는 양편으로 흘러내렸으며, 밑 부분에서 양편으로 U자형을 그리고 있다. 광배에는 불꽃 문양을 새겼는데,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흐릿한 윤곽만 남아있다. 광배의 한편이 떨어져 한 옆에 따로 모셔놓았다.



하반신에는 법의의 주름이 보인다(위) 받침돌은 원래 일석이었으나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떼어놓았다(가운데) 석불입상과 광배가 한돌에 조각이 되었다.

일본인에게 팔려갈 뻔한 석불입상

단단한 바위로 조각한 미륵암 석불의 광배는 왜 쪼개진 것일까? 마침 주지스님이 차 한 잔을 하고 가라고 한다. 석불입상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겸, 방으로 들어갔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광배는 왜 쪼개졌나요?”
“그것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일제 때 군산에 사는 어떤 사람이, 이 미륵암 석불이 효험이 있다고 하여 일본인에게 팔았답니다. 그런 다음에 받침돌과 석불입상을 따로 떼어 내, 아마 당시에는 길이 안 좋아서 커다란 리어카 같은 것에 실어서 마을 밖으로 옮겨 갔던 것 같아요”
“그럼 그 때 깨졌나요?”
“예. 그런데 절 입구를 빠져나가자 그 사람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두려운 마음에 다시 제자리로 갔다가 놓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합니다. 그 때 광배 일부분이 깨어졌다고 합니다.”
“다시 부쳐보지는 않았나요?”
“대학에서 교수님들이 부쳐준다고 했는데, 철심을 박고 쇠를 박아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까지 해서 붙여놓으면, 볼썽사나울 것만 같아 그냥 놓아두라고 했습니다.”


일본으로 가져가려다가 쪼개진 광배의 한편과 석불입상을 모셔놓은 용화전
 
미륵암 석불입상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와서 정성을 드리면, 아이를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정성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미륵암을 떠나면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그래도 일본으로 팔려갈 것을 막아낸 것이 고맙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에 일본으로 건너갔더라면 다시는 볼 수 없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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