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증평군 도안면 광덕리 산21에 소재한 광덕사. 이 절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949년 한 보살은 석불의 꿈을 꾸고, 석불 옆에 세 칸의 작은 암자를 지은 뒤 광덕사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고려 초기인 10세기를 전후해 조성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한 기 서 있다. 석불입상의 내력으로 보아, 고려 때 이곳에 절이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광덕사는 도안면 소재지에서 충주 방면으로 36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도안농공단지입구에서 작은 고개를 넘어 1km 쯤 접어들면 도안면 광덕2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마을회관에서 700여m쯤 더 들어가면 농경지를 지나 산기슭에 외따로 떨어진 작은 절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광덕사다.


어쩌다가 쇠 머리띠까지

광덕사는 작은 절이다. 절 경내에는 모두 3동의 전각이 있다. 절로 들어서면 우측에 석불입상이 보인다. 석불입상은 전체 높이가 4.8m에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석불입상은 마모가 심한 편이다. 특이하게 이마에는 쇠 띠를 두르고 있는데, 이는 목과 머리에 균열이 생겨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석불은 그 크기에 비해 간단하게 조성했다. 미간에 있어야 할 백호는 보이지가 않는다. 양 귀는 길게 늘어졌으나 어깨에는 닿지 않았다. 눈은 가늘게 반쯤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석불의 인상은 위엄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오래 동안 노천에서 비바람에 마모가 되어서인지 선명하지 않은 부분이 보인다.




두 개의 돌로 조성된 석불입상

광덕사 석불입상은 두 개의 돌로 조성이 되어 있다. 연화대좌와 석불이 같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함께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석불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는 80cm의 높이로 꾸몄으며, 꽃잎 등을 표현한 수법이 투박하다. 고려 초기 지방에서 나타나는 석불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이 석불의 연호대좌와 석불의 조각 등으로 보아, 이 지역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연화대좌 위에 세운 석불입상은 일석으로 꾸며졌다. 머리는 큰 편이며 이목구비가 큼지막하게 표현을 했다. 오랜 세월 풍우에 씻겨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었는데,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듯하다. 왼손을 배에 붙여 손바닥을 안으로 향했다. 법의는 양편 어깨서부터 주름이 잡혀있으며, 아래로 내려가면서 U 자형으로 표현을 하였다.



문화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광덕사 석불입상은 1949년에 암자가 지어지면서 나름대로 보존이 잘되고 있다. 이렇게 절 경내에 있지 않고, 야외에 있는 석불이나 탑 등은 훼손이 심하다. 아무래도 관리하는 이들이 없다보니,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광덕사 석불입상의 이마에 머리띠를 두른 것도 경내에 있어 가능한 것이다. 야외에 있었다고 하면 관리가 안 돼 파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갑자기 지역마다 문화 콘텐츠를 개발한다고 난리도 아니다. 하지만 정작 지역의 문화를 잘 이용하는 지자체는 그리 많지가 않은듯하다. 그 이유는 문화를 관리하는 부서들이 대개는 전문적인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땅에 수많은 문화재들. 이렇게 쇠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 석불입상의 앞에서 괜스레 낯이 붉어진다.

세상이 요상해서인가? 아니면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 더 이상은 말이 필요하지 않아서인가? 이천 대포동의 석불은 아예 입 부분이 없어져 버렸다. 이천 단월동에서 행죽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길 가에 석조여래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정확한 소재지는 이천시 대포동 산123 - 1번지이다. 현재 이천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이 된 이 석불은, 고려중기의 거대석불의 한 유형으로 보인다.

지난 해 5월에야 제 모습을 드러내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올 5월까지만 해도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 있어, 정확한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2009년 5월 하반신을 드러낸 석불입상은, 높이가 3.6m의 거대석불로 어깨 폭이 96cm 정도이다. 이 석불입상의 이마에는 큼직한 백호공이 있어 보주를 박았던 흔적이 있다. 두 귀는 떨어져 나갔으며, 코 밑으로 입과 턱 부분은 심하게 파손을 입고 있다.

이 석불입상이 서 있는 곳의 뒤편을 '미륵골'이라 하고, 앞으로 펼쳐진 벌판을 '미륵댕이들'이라 이름을 붙인 것도, 이 석불입상과 관계가 지어지는 것은 아닌가 한다. 이 마을을 대포동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이곳이 물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는 곳에서 가깝게 원두천과 자월천이 흐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과거에 이곳이 큰 내가 형성이 되어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요대와 손의 모양이 눈길을 끌어

얼굴 등 상반신이 심하게 파손이 된 것에 비해, 땅 속에 묻혀있던 하반신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허리 부위에 두른 요대는 그 복판을 묶은 결대로 조각을 했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했다. 엄지와 검지를 마주 대하고 있는데, 손바닥에는 손금까지 새겨 놓았다.




하반신의 밑은 법의가 발목까지 덮고 있으며, 맨발을 벗은 발가락이 뚜렷하다. 상체에 비해서 하체가 짧은 형태로 구성이 되어있어, 조금은 균형이 맞지 않은 듯하다.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고려불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석조여래입상. 그동안 땅 속에 묻힌 부분을 놓고 분분한 의견들이 많았지만,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날 수가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심하게 파손이 된 얼굴, 왜일까?

대포동 석조여래입상의 얼굴부분을 보면 그 어느 곳 보다도 심하게 훼손이 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얼굴이 심하게 훼손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술적인 사고에 의해서다.
과거에는 성기석이나 석불의 코 등을 갈아내어 그것을 이용해 득남을 할 수 있다는 주술적인 사고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석조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둘째는 억불정책에 의한 훼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불상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생겼다고 본다. 많은 불상들이 이 때 파괴 및 훼손을 당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자연적인 파손이다.
석조물을 조각할 때 두상과 몸 부분을 이어주는 목 부분이 얇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금이 가고 파손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자연적인 훼손도 간과할 수가 없다.
넷째는 일제에 의해서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당했다.
일제는 우리 문화재를 수 없이 찬탈을 해가면서, 지역에 있는 석조물 등을 훼손했다. 특히 마을에서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석조물들은 더 많은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가져갈 수가 없는 것들에 대한 훼손일 경우도 있다.
다섯째는 타종교에 의한 훼손이다.
타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한 무분별한 훼손도 적지 않다. 전국에 있는 장승이나 단군상 등을 훼손한 사람들의 몰지각한 행동과 같이 석불도 이들로 인한 훼손을 당헸다.



이천 대포동의 석조여래입상이 어느 시기에 어떻게 훼손이 되었는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얼굴의 전부분이 심하게 훼손이 되고, 어깨와 목 부분에 집중적으로 훼손을 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대개 인위적인 훼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더 이상의 훼손만은 방지해야 할 것이다.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를 찾아가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이 된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한 기가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을 찾아가는 길을 그리 어렵지가 않다. 큰길가서부터 석불입상까지 안내판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으로 세상을 구하러 온다는 부처이다. 미륵불은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석리의 석불입상은 부처로 표현을 하였다. 마을 안에 버티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지나가면서도 쉽게 발견을 할 수가 없다. 높이 4,32m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두 덩어리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허리 아래까지가 한 개의 네모난 석재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밑으로 발까지가 또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사각석주와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된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느낌은 한 마디로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가 봄눈 사라지듯 사라졌다고 표현을 하고 싶다. 그 정도로 안면에 온화한 미소가 흐른다. 석불입상의 수인은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다. 가슴 앞으로 표현을 한 손 모양이, 조금은 어색하고 투박해 보인다.

이러한 투박한 모습의 석불들이 고려시대 경기, 충청지방에서 보이는 석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양발의 발가락이 뚜렷하게 보이게 조성한 아래로는, 꽃부리를 위로 향한 연꽃무늬가 새겨진 앙련을 조각한 연화대좌가 있다.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혀있는 이 연화대좌는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기도 한다.

찬 돌속에 편안한 온기가

석불입상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팔각의 보개석을 이고 있다. 이 석불을 보면서 저 보개석이 인간의 고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석불입상의 커다란 짐을 올려놓은 까닭은, 인간의 수많은 고통을 저리 부처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계신 것이나 아닌지. 그 고통을 이고도 저리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석불입상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억만겁 세월, 스스로를 달굼 질한 수행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어석리 석불입상은 네모난 얼굴에 뺨과 턱이 둥글게 표현이 되고, 눈은 길게 꼬리가 뻗어있다. 오뚝한 코에 작은 입, 그리고 입 주위를 둥그렇게 원을 만들었다. 생명이 없는 찬 석재를 갖고도, 저리 온화한 미소를 표현할 수가 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이 미륵입상을 조성한 석공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네모난 석주처럼 보이는 석불입상. 커다란 돌을 갖고 이렇게 깎아내고 다듬기까지, 석불을 다듬은 장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땀은 또 얼마나 흘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보면 절로 마음속에 고통을 잊게 된다. 아마 이 불상을 조각한 석공이 바로 부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전각은 사라지고 주추만 남아

석불입상 주변을 보면 사방으로 네모 난 장초석이 서 있다.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이 선돌들은 주추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석불입상은 전각 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근처 어딘가에 절이 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는 고려시대의 미륵불이 유난히 많다.

그것은 통일신라 후기에 일어난 궁예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스로 미륵이라 자처한 궁예가 미륵정토를 염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쏟아내다가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다. 그런 마음속의 생각으로 인해 잠시 세상의 고통을 잊는다. 아마도 석불입상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의 행복이, 결국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법문 한 자락 내린 것이나 아닌지.

도선(道詵)국사는 전라남도 영암 풀신이다.신라말기의 고승으로 827년에 태어나 898년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풍수설의 대가였다. 도선은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절을 창건하였으며, 그 절마다 모두 풍수에 기인하여 창건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남원지역의 많은 절들은 대다수가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남원의 풍수를 보아 적당한 곳에 절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런 도선국사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도선은 틀림없이 신라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려 때 지은 절에 도선국사가 창건을 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생몰연대조차 정확하게 따져보지 않은 이런 류의 안내로 인해 가끔은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용담사

남원에서 운봉을 향해 가다가 보면 남원을 벗어나는 곳이 주천면이다. 이곳 도로 좌측에 보면 용담사라는 절의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보물 제42호 용담사지 석불입상이 있다고 적혀있다. 용담사에 소재하고 있는 석불입상에 관해서는 두 번째 글을 쓰고 있다. 문화재란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더 안목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용담사가 언제적에 지어진 절인가는 확실하지가 않다. 용담사 경내에 있는 안내판의 설명을 보면 ‘용담사지 석불입상’이라 쓰여 있다. 이것은 예전의 절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금의 용담사는 이름만 전하는 용담사 터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절이라는 설과, 통일신라 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정작 석불입상 앞에 적힌 또 하나의 안내판에는 전혀 황당한 긇이 적혀있다. 용담사에 관한 내력을 적은 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증없이 적어 놓은 글이 문화를 잘못 알려

<천년의 향기 - 용담사는 고려시대 사찰로써 천년전 절이 세워지기 전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있어, 밤이되면 여우로 둔갑하여 사람을 잡아먹고 농작물을 해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려도 어찌할 수 없었으나 마침 도선국사께서 큰 원력을 새워 이곳에 미륵물을 모시고 기도 중에 해탈주를 독송하니 이무기가 순간 업보의 허물을 멋고 용이되어 사라졌다. 해서 용담사라는 전설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이 설명 하나가 결국 절의 내력을 다 망쳐놓은 결과가 되었다. 신라 때 고승인 도선국사가 고려 때에 젏을 지었다는 황당한 설명에는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구를 적은 안내판을 석불입상 앞에 버젓히 세워놓아 문화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담사는 고려 떄가 아닌 신라말에 지은 절이며,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여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거대석불로 보이는 용담사 석불입상

보물 제42호인 용담사지 석불입상은 광배와 입상이 '일석(一石)'으로 꾸며졌다. 대개 석불의 경우에는 불상과 광배가 따로 제작이 된다. 하지만 용담사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입상과 광배를 조각하였다. 석불입상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의 거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높이가 6m에 달하는 이 석불입상은 체구가 당당하다. 

용담사 석불입상은 이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고려 시대 미륵의 형태이다. 머리위에 육계의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고, 귀는 긴 편이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법의는 거칠게 표현을 하였으며, 두 손 등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많은 훼손이 되어 있어서 그 형태만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석불의 안면 밑으로는 양 편 어깨부근에 구멍이 하나씩 나 있는데, 이 구멍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무슨 장식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는 자연석 위를 둥글게 조성하였다. 이곳에도 양편에 구멍이 나 있다. 아마도 이 석불입상을 보호하기 위해 전각을 지었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화재 하나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안내판 하나를 잘못 기재함으로써, 문화재의 소중함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잘못된 안내판은 하루 빨리 철거해야 할 것이다. 


전북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 110 - 6번지에는 보물 제914호로 지정이 된 석불입상 2기가 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다. 야산중턱에 나란히 서 있는 2구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고목이 서 있는 뒤편에 전각을 짓고 그 안에 모셨는데, 백제시대의 불상으로 확인되었다.

두 불상은 모두 비슷한 형식과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불상이 왼쪽 불상보다 약간 커서 원래는 삼존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른쪽의 큰 불상은 뒤편의 광배가 깨지고 대좌의 아랫부분을 잃어버린 것 외에는 완전한 모습이다.


눈이 파여진 2기의 석불입상

보화리는 정읍시 소성면사무소 가까이 있다. 보화리 석불입상을 찾아가니 야산에 한 폭의 그림같이 커다란 고목이 서 있다. 돌계단을 오르니 보물인 석불입상의 안내판이 있고, 곁에는 전각 안에 석불 2기가 가지런히 서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2기의 석불입상의 두 눈이 파여져 있다. 움푹 파여진 눈이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입부분도 파여져 있는 이 2기의 석불입상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기의 석불입상은 민머리에 상투 모양의 큼직한 소발이 솟아 있는데, 얼굴 역시 길고 풍만하며 부드러워 백제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불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법의인데, 좌편견단으로 처리를 하였으며, 속에는 속옷과 아래엔 치마를 받쳐 입었다. 옷 주름들은 부드러우면서도 소박한 편으로 어깨나 손, 발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른팔이 없어진 작은 불상도 같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얼굴의 각 부분은 마모가 심하나 입가로부터 양쪽 볼에까지 미소를 짓고 있어 어린 아이와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 소경에게 눈을 주셨을까?

석불을 이리저리 돌아보고 뒤돌아 나오면서도, 두 눈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누가 저 부처님들의 눈을 가져간 것일까?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인지라 마을로 들어갔다. 마침 정자에 마을 어르신들 몇 분이 담소를 하고 계시다. 보화리 석불의 눈은 왜 그렇게 됐느냐고 물었으나 모르시겠단다. 언제부터 저렇게 눈이 파여져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모습으로 서 계셨단다.



팔이 떨어져 나가고 여기저기 흠집이 생긴 것이야 세월의 탓이라고 하겠지만, 두 눈을 저리도 움푹 파일 정도로 훼손을 시켰다면,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일부러 훼손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차를 돌려 마을을 떠나다가 우연히 할머니 한분을 만났다. 그저 궁금하던 것이라 재차 물었다. 석불의 눈이 왜 없어졌느냐고.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부처님께서 마을에 눈을 못 뜬 사람들이 있어서 주셨나 보지’. 그랬을까? 부처님께서 두 눈이 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두 눈을 시주를 하셨을까? 그렇게라도 대답을 들으니, 속이 좀 시원하다.



두 분 부처님의 눈은 도대체 누구에게 시주를 하셨을까? 아니면 세상이 하도 추악한 모습들이 많아 스스로 눈을 멀게 하셨을까? 그도 아니면 부처님의 두 눈을 누가 훔쳐갔나? 대답 없는 석불의 얼굴에는 자비가 가득하다. 그저 그렇게 온 세상을 다 보겠다는 듯. 아마도 눈이 있으면 한부분만 보겠지만, 마음의 눈으로 온 세상을 어루만지기 위해 눈을 없앤 것은 아닌지. 그 큰 뜻을 감히 누가 짐작이나 할 것인가? 대답 없는 두 분 석불입상 쪽을 바라보니, 저녁 해가 설핏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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