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에 세상에 현신할 부처님이다. 미륵은 대개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가면 마을에서 미륵당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주변에는 담이 둘러있고 전각 안에 모셔진 미륵불입상 1기가 서 있다.

 

미륵불로 조성된 매산리 석불입상. 전체적인 모습에서 고려 초기의 석불로 추정한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얼핏 이 미륵불을 보면 조금은 괴이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미륵불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다. 머리에는 사각형의 커다란 보개를 쓰고 있고, 보개 밑으로 쓴 보관은 전체적인 균형에 비해 길게 만들어졌다. 보관에는 여러 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보개와 보관 이목구비가 비례에 잘 맞지 않아 괴이한 모습이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상된 석불입상으로 추정한다. 좁은 어깨와 비례에 맞지 않는 조형, 머리에 쓴 보개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석불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옆으로 길게 찢어져 치켜 올라간 눈,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코와 입 사이가 짧아 어딘가 불안한 듯한 이 석불입상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밖으로 왼손은 안으로 향했지만 그 손의 조각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으로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머리에 쓴 사각형의 보개와 비례에 맞지 않는 보관

보개와 보관이 마주하는 부분에도 연꽃문양을 조각해 나름대로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은행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이 미륵당의 부처는 주변 사람들이 신성시 하는 것도 일반적으로 보이는 석불입상의 자비로운 모습보다, 오히려 괴이하기까지 한 모습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석불입상을 찾았을 때 집안에 일이 있어 빌러왔다는 한 분이 이 미륵에 열심히 기원을 하면 다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펴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열심히 비손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등이 해학적이기도 하다. 가늘고 길게 조성한 눈도 조금은 어색하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의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모습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인 모습은 비록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지만, 고려 초기 당시의 석불입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미륵당 석불입상. 그저 당시 사람들은 그 모습의 뛰어난 예술성보다는, 다음 세상에 현신할 미륵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간절하지나 않았을까? 많은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미륵당 석불입상 역시 소중한 문화재이다. 기실 문화재의 가치를 따져 국보, 보물, 지방문화재 등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다. 모든 문화재 하나하나에는 그 안에 담겨진 정신세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증평읍에서 청원군 초정 방면으로 가다가 보면, 남하2리 둔덕마을이나 조금 더 지나 남하1리 솔모루 마을에서 미륵마을로 접어드는 길이 있다. 이곳은 증평에서 유명한 두레마을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며, 매년 두레에 관한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 133 - 5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세구의 석불입상이 서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인 석조미륵보살입상

 

이 중에서 가장 큰 석불입상은 미륵보살입상으로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8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작은 석불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이곳을 미륵당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는 이곳이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 구의 석불은 모두 마을 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며, 석불입상을 바라보고 왼쪽에는 미륵보살입상이 서 있고, 중간과 좌측에는 작은 석불입상이 두 기가 서 있다.

 

 

보살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랫부분은 아직도 땅 밑에 파묻혀 있어서 정확한 크기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땅 위로 솟은 부분은 3,5m 정도로 석불입상치고는 큰 편에 속한다. 이 석불입상은 일석으로 조성을 했으며,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쓰고 있다. 충청지역에서 보이는 거대석불의 일종으로 보인다.

 

팔찌를 끼고 있는 특별한 석불입상

 

이 미륵보살입상은 얼굴 전체에 가득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이마에는 백호가 양각이 되어 있다. 이 미륵입상은 양쪽의 팔목에 팔찌를 끼고 있어 특이하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펴 배위에 붙이고, 왼손은 연꽃을 들고 가슴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 팔로 흘러내림 표현을 했고, 배 아래에는 활모양의 주름이 조각되어 있다.

 

 

법의나 기타 여러 가지 모습의 형태로 보아 10세기인 고려 초기에 조성한 석불로 보인다. 아마 이곳에 있었던 절터에 모셔 놓았던 석조보살입상으로 보이는데, 눈과 코 입 등이 아직도 원형보존이 잘 되어 있어, 선명하게 얼굴 표현을 알 수 있다. 안면에 비해서는 어깨 폭이 좁은 편인 이 석조보살입상은 전체적으로 보아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부처님도 양약수술 하셨나요?

 

석조보살입상을 바라보면서 그 우측으로는 두 기의 석불이 서 있다. 높이는 각각 1.3~1.5m의 석불들로, 이 석불입상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두 기의 석불이 제작연대가 다르고, 그 위치도 이곳에서 조성된 것은 아닌 듯하다. 아마 딴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듯한데, 그 원래의 자리를 알 수가 없다.

 

 

 

 

이 두기의 작은 석불은 한 마디로 보기가 민망할 정도다. 맨 우측에 있는 석불의 얼굴은 시멘트로 얼굴과 팔을 발라놓았다. 얼굴은 눈과 코, 입을 조성했는데 우스꽝스럽다. 팔도 시멘트로 발라 놓았는데, 그 역시 조악하기가 이를 데 없다.

 

시멘트 칠이 오히려 원형을 훼손해

 

중앙에 있는 작은 석불은 안면과 목 부위를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얼굴의 안면이 훼손이 된 것을 보수를 한 것인 듯도 하다. 그런데 눈을 너무 밑으로 처지게 그려 놓은 모습이, 자칫 원형을 훼손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코는 주먹코로 갖다가 붙이고 입 역시 조그맣게 선을 그어놓았다.

 

 

 

 

증평읍 남하리 두레마을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석존입상들. 작은 두 기의 석불은 언제 이곳으로 옮겨졌는지 모르지만, 자칫 보수를 한다고 해 놓은 것이 오히려 더 훼손을 시킨 결과가 되었다. 함께 답사를 한 분이 하는 이야기. "부처님이 언제 저렇게 성형을 하셨는지. 돌팔이 의사가 마구잡이도 고치셨네."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만 더 씁쓸하다.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산110번지, 설성산성지로 올라가는 길목 좌측에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된 선읍리 석불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죽곡 마을 앞 시냇가에 묻혀 있던 것을, 신흥사 주지가 현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을 보면, 보개석과 몸체, 그리고 발을 딛고 있는 연화대좌는 예전의 것인데, 머리는 새로 만들어 놓아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다.

 

얇은 판석에 돋을새김으로 조각을 한 몸 부분엔 장신구 없이 법의와 손을 조각하였다. 그러나 법의의 굴곡을 보면, 그 부드러움이 돌이라는 것을 잊게 할 정도다. 또한 발밑을 받치고 있는 대좌의 연화문 등을 보아도, 뛰어난 조각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몸의 형태를 보면 여래입상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신읍리 석불입상은 왜 두상이 사라진 것일까?

 

네 개 부분으로 나눠진 입상?

 

이 석불입상은 대좌와 몸체, 두상과 보개의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조각을 한 후, 조성을 헸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석불입상을 조성할 때, 몸과 머리 부분을 따로 떼지는 않는다. 거대한 석불도 아니고, 전체높이가 257cm 정도의 석불을 조성하면서, 머리를 떼어 조각을 한 후 신체에 올리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 석불입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발과 밑을 받치는 연화대는 넓적한 돌을 이용하였다. 발과 연화대를 조각하기 위해서는, 판석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위에 몸은 한 장의 판석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대개 얼굴과 몸은 한 장의 판석으로 조성하기 때문이다.

 

이 석불입상의 사라진 머리 부분과 연결되는 목 부분을 보면, 둥글게 올라가다가 사라진 목 부분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석불입상을 조각하는데, 구태여 두 장의 판석에 조각을 해 붙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점으로 보면 이 석불입상은 발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 그리고 몸과 보개석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머리 부분이 잘려나갔다고 보아야

 

몸에서 머리를 올린 목 부분을 보면, 삼도를 표시한 목 부분 아래가 파손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목이 훼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3년에 이 석불입상의 조각을 찾아 내 새롭게 조성을 할 때, 목 부분이 발견이 되지 않아 새로운 돌로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목 부분이 따로 조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확실해진다. 만일 목 부분을 따로 떼어 내 조각을 한 후 붙이고자 했다면, 땅 속에 묻혀있는 목의 한 부분이라도 발견이 되었을 것이다. 목 부분의 훼손이나 목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 석불입상의 머리 부분을 누군가 고의적으로 훼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뛰어난 미적 감각을 지닌 조각기법

 

이 석불입상을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조각기법이 돋보인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들어낸 우견편단으로 양팔에 걸쳐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법의를 표현한 것을 보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돌에 생명을 불어 넣은 듯한 이런 조각기법이라면, 기술이 뛰어난 석공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두 손의 손가락 부분도 훼손이 되어 시멘트로 발라놓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석불입상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내려 복무를 감싸고 있으며, 왼팔을 들어 가슴에 대고 엄지와 장지를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로 볼 때, 이 석불의 수인은 전법륜인과 시무외여원인의 복합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전법륜인에서 손가락을 구부려 마주할 때, 엄지와 둘째 인지를 맞대면 법신불, 엄지와 중간 장지를 맞대면 보신불, 엄지와 무명지를 맞대면 화신불이라고 한다. 이 석불입상의 수인은 엄지와 장지를 맞댄 보신불로 보인다.

 

발가락을 돌출시킨 석불입상

 

이천 장호원읍 선읍리 석불입상의 발을 보면, 안성 석남사 마애불의 발과 동일하다. 그 조각 수법도 동일하게 표현을 하였다. 즉 아래는 연꽃대좌를 조각하고, 그 위에 법의가 발목까지 덮인 형태로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목서부터 밖으로 돌출을 시켜, 열 개의 발가락을 조각한 수법도 동일하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선읍리 석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문화재들의 훼손. 그것은 결코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스스로가 훼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재에 무관심한 것 자체가, 문화재의 훼손에 일조를 한 셈이기 때문이다. 목을 잃은 선읍리 석불입상. 과연 그 목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새롭게 조성해 올려놓은 두상이, 조금은 불편한 듯하다. 좀 더 세심하게 조각을 해서 올릴 수는 없었을까?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 소재한 보물 제96호 미륵리 석불입상. 겨울에 이곳을 찾은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이상하게 깊은 겨울, 그것도 눈이 많이 쌓였을 때 이곳을 찾게 된다. 아마 그것도 인연인가 보다. 이 미륵리 석불입상을 찾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왜 이렇게 거대한 석불입상을 누가 무슨 이유로 조성을 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거대석불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보개석까지 합하여 모두 여섯 개의 돌을 쌓아 올려, 하나의 거대한 불상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돌을 이용해 거대 석불입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석불입상은 북향을 하고 있어,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으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그와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이 석불입상을 조성한 후,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도 전한다. 마의태자는 덕주산에 있는 덕주공주가 새긴 마애불과 마주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단지 전설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석불입상은 석굴식 전각 안에 모셔놓았던 것으로 보면, 그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이 미륵입상이 서 있는 좌우와 뒤편으로는, 거대한 돌들을 이용한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앞과 위로는 목조로 된 전각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타버렸다는 것이다. 이 석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미륵대원'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석불입상의 형태가 고려 초기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과 같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고려 거대석불의 특징을 보이는 미륵리 석불입상

미륵리 석불입상은 그 전체적인 조형은 투박하다. 신라의 석불처럼 섬세한 면은 떨어진다. 머리에 쓴 옥개석은 팔각형이며, 육계는 나발이 있다. 양귀는 큼직하고 이마에는 커다란 백호를 표현하고 있다. 눈썹은 반원형으로 하였으며, 눈은 가늘게 반개를 해 감은 듯하다. 코는 우뚝한데, 인중이 짧아 입과의 사이가 멀지 않다. 입술은 두툼하고, 목은 굵게 표현해 삼도가 뚜렷하다.

이러한 안면의 코와 입이 가깝게 표현한 것은, 멀지 않은 제천 사자빈신사지의 석탑에 보이는 비로자나불의 얼굴과 흡사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처리를 했는데, 옷 주름 등은 모두 약식으로 처리되었다. 얼굴을 중점적으로 공을 들여 조성을 한 것에 비해, 나머지 부분은 형식적인 모습이다.

어깨부터 이어지는 선은 발끝까지 통으로 되어, 굴곡이 없이 조각을 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의 공통적인 점이다. 이런 점을 보아 미륵리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미륵리 석불의 팔의 모습도 형체만 겨우 살렸다. 오른손은 가슴위로 들어 손등을 보이게 했으며, 복부 위에 대고 손바닥을 위로하여 둥근 물체를 들고 있다. 둥근 물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석불의 조성한 내력으로 보아 무엇인가 간구를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누가 조성한 것일까?

전체적으로 보면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이 석불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전문적인 석공에 의해서 조성되지 않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견줘 볼 때, 이 석불입상은 어깨 위 부분과 그 아랫부분이 차이가 많이 난다. 어깨 위의 돌은 흰색을 띄고 있는데 비해, 아랫부분의 돌은 검은색이 많이 나타난다. 6개의 돌을 쌓아 조성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이보다 더 큰 거대석불을 조성할 때도 일석, 혹은 이석 정도로 조성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이 석불입상을 처음으로 조성한 사람이 마의태자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뒤편에 만든 석굴의 형태도 그렇다. 이 지역에서는 이러한 석굴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마의태자가 이 석불입상을 조성했다고 하면, 석굴암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마의태자 조성설에 무게를 두어

정확한 문헌이 없이 구전으로 전해진 마의태자의 조성설(造成說). 마의태자는 신라의 부흥을 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신라 제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 박씨의 맏아들이다. 휘가 김일이며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하여, 마의태자로 불린다. 이 마의태자가 신라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길을 잡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을 것이다.

그들은 충주를 거쳐 원주를 지나 인제 설악산 기슭에 머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아마 지리적인 면에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현재 인제군과 고성군의 경계인 미시령을 중심으로, 북쪽은 금강산이고 남쪽은 설악산이 된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마의태자가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 마의태자가 충주에 도착하여 미륵대원을 조성했을 가능성이다. 이런 점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많은 일행이 따르고 있었으니, 그 중에 석공기능이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석굴암을 따른 석굴을 조성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또 하나 석굴암에 조성된 본존불은 백색의 화강암으로 조성이 되었다. 미륵리 석불입상의 얼굴이 백색인 이유는 그런 점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의 이 지역의 거대석불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도,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불상을 건립한다고 했으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자연 중앙의 뛰어난 기능을 가진 석공들이 아닌 향리의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을 수도 있다.


정확한 년대나 조성 경위 등을 알 수 없는 미륵리 석불입상. 그런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미륵입상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석굴을 보면서 그저 감탄을 할 수밖에. 언젠가는 이 전설에 얽힌 이야기가 밝혀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어본다.

매월당 김시습(1435(세종 17년)~1493(성종 24))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김시습의 한문 단편소설인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되었던 만복사는, 현 전북 남원시에 소재하는 사적 제349호이다. 한문 단편소설인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를 비롯하여 「이생규장전」「취유부벽정기」「남염부주지」「용궁부연록」 등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책이다.

이 중에서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인 양생이 왜구의 침입 때 정절을 지키다가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사람)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처녀가 떠난 뒤에도 양생은 그 사랑을 잊지 못해 장가를 가지 않고, 산속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조금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흔적만 남긴 만복사지. 도선국사가 창건한 남원 최대의 가람

남원 만복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에 창건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오층과 이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으며, 그 안에 길이 35(10m)척의 동으로 조성한 불상이 있다"라고 했다.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 당시에는 대웅전, 약사전, 장륙전, 영산전, 보응전, 천불전, 나한전 등 많은 전각이 있었고 수백 명의 승려가 생활하는 큰 절이었던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만복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만복사지 발굴조사 때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아내었다. 또한 청자와 백자, 많은 와편 등이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사지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만복사지에는 5층석탑(보물 제30호)·불상좌대(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 등이 절터내에 남아 있다. 만복사지는 고구려식의 절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중에 하나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들

김시습은 왜 이 만복사를 단편소설의 무대로 삼았을까? 만복사지를 찾아간 것은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해서이다. 낮은 경계로 주변을 둘러 친 만복사지. 입구를 들어서면 우측 길 밑으로 보물 제32호 당간지주가 서 있다. 투박한 모습으로 조성이 된 이 당간지주는 고려 초기에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너른 사지 복판에 보물 제31호 석좌가 보인다. 이 석좌는 불상을 올려놓았던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석좌의 아랫부분은 각 측면에 꽃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을 새겼으며, 그 위에 연꽃을 조각하였다. 높이 1.4m 정도인 돌에 여러가지 문양을 조각했는데 육각형으로 만들어졌다.

석좌를 지나 전각 쪽에는 5층석탑 1기가 서 있다. 보물 제30호인 이 오층석탑은 고려 초에 세운 것으로, 높은 기단부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다. 현재 남아 있는 탑의 높이는 5.75m이다. 1968년 탑을 수리하던 중 1층 몸체에서 사리 보관함을 발견하였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이에 넓은 돌판을 끼워 넣은 점은 특이하다. 전각 안에는 보물 제43호인 석불입상이 있다.

이 석불입상 역시 만복사를 처음 창건할 당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석불입상은 민머리에, 정수리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솟아 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 코, 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풍만한 인상이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의 광배로 구분이 되어 있다. 이 석불입상의 뒤에는 선각을 한 부처상이 조각이 되어 있어 특이하다.

만복사지에 가면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수백 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는 만복사. 지금은 그저 옛 영화를 알아볼 수 있는 몇 기의 보물들이 서 있을 뿐이다. 김시습은 도대체 만복사란 절을 왜 무대로 했을까? 김시습은 어려서는 신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는 불교 철학의 사유를 공유하려 했던 사람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만복사를 무대로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금오신화에 보이는 「남염부주지」는 미신과 불교를 배척하는 경주 박생(朴生)이 꿈속에 염라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염라대왕과에 토론을 하고 돌아온 후 염라국 왕이 되어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이생과 저승을 넘나들며 사랑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도교와 유교, 불교에 통달한 것으로 알려진 김시습. 어쩌면 이 만복사를 무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만의 고차원적인 사랑을 일깨우고자 했음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그런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이야기 때문에 광인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만복사지를 떠나면서 돌아본 옛 절터. 어디선가 양생과 처녀의 애절한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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