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정(水月亭)’, 이름대로라면 정말 운치가 있는 정자일 듯하다. 산청군을 답사하는 13일, 수월정을 찾아 나섰다. 이번 답사에 유일하게 찾아보고자 했던 정자이다. 내비를 이용해 주소를 입력했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안봉리 444번지. 수월정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45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고 한다.

수월정의 지번 앞에 도착하자, 내비가 찾는 장소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어디에도 정자가 보이지를 않는다. 안내판을 있을 텐데,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수월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곳을 지나 수월마을로 접어들었다. 마을 분들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다.


안내판이 없어 찾기가 어려웠던 수월정.

길가에 안내판 하나 없는 수월정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길가 쉼터에서 쉬고 계시던 어르신이, 저 아래로 내려가면 길에서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길에서 보인다는 정자는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를 않는다. 444번지 앞에서 위로 오르는 가파른 길이 있다. 혹시나 해서 그 길로 올라가 보았다. 중간까지 가도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돌아 내려갈까 하다가, 다시 더 위로 올라가 보자고 아우를 졸랐다. 더 가파르다. 위로 올라가니 우측에 기와지붕이 보인다. 수월정이 거기 그렇게 숨어 있었다. 그런데 모든 문화재를 길거리에 안내판을 세워 놓았는데, 왜 수월정의 안내판은 없었던 것일까? 근 1시간 이상을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수월하게 찾을 줄 알았던 수월정은 그렇게 애를 쓴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수월정의 측면과 나뭇가지로 막혀버린 입구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 수월정

수월정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가운데에 방 두 칸을 두고, 그 앞쪽으로 툇마루를 깔았다. 정면을 마주하고 가운데 방을 둔 좌측에는, 뒤편으로 밀어 한 칸의 방을 두고 우측으로는 누마루를 깔았다. 마루 앞에는 양편 모두 난간을 둘러 운치를 더했다. 기둥은 외진주는 원형이며, 내진주는 사각형이다.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올린 정자. 앞으로는 나무가 들어차 정면에서 전체를 다 담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측면에서 비스듬히 사진에 담아냈다. 수월정은 1915년에 석초 권두희가 김재 권습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대개 마루를 중심으로 구성을 하지만, 이 정자는 추운 겨울을 맞이하는 산청지방에서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해, 온돌방을 중심으로 구성을 한 것이 특징이다.



천정에 달린 말벌집과 시멘트로 발라 놓은 기둥 아랫부분. 그리고 떨어져 나가버린 판문

문화재 관리의 허점을 보다

산청군은 비교적 문화재 관리를 잘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월정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생각이 산산조각이 났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주추위에 세운 기둥에 시멘으로 발라 놓았다. 아마도 기둥이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함인가 보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흉하게 만들어 놓다니. 아마 시멘트가 마르면, 이것을 주추처럼 만들려고 한 것이었는지.

마루 위로 올라가 본다. 누마루 끝에 판문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천정에는 커다란 말벌 집이 달려있다. 벽은 무너져 마루에 떨어져 있다. 도대체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명색이 문화재인데, 이렇게 관리를 했다니.


벽과 찬정에서 떨어져 내린 흙더미

이 수월정을 가파른 길을 오르기 전에 찾을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가 나뭇가지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안내판도 없고, 부수어져 가고 있는 수월정. 그 이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관리를 했더라면, 아마도 제 이름값을 톡톡히 했을 정자인데 말이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정말로 구석구석을 누비게 된다. 그러다가 가끔은 수지를 맞기도 한다. 수지를 맞았다니까, 무슨 재물을 얻은 것으로 아는 분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사람 사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즈음이야 세상 사람들 생각에 아름답게 사는 모습이라고 하면, 멋진 집에 좋은 환경. 그리고 멋진 차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드라마틱한 모습들을 연상하겠지만, 내가 사는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한 마디로 지난 세월을 연상케 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산청 지리산 대원사 경내에 세워둔 석등. 자연스언 바위 위에 얹은 간주석. 그리고 투구처럼 생긴 돌과 그 안에 들어있는 등잔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자연스러움은 어디에나 있다

‘자연스럽다’ 과연 이 말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 이 말을 다음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형용사 : 자연(自然)스럽다.

1. 억지로 꾸미지 아니하여 어색함이 없다.
2. 무리가 없고 당연하다.
3. 힘들이거나 애쓰지 아니하고 저절로 되다

이런 정도의 설명이다. 우리말이 상당히 표현력이 좋은 것에 비해서, 설명은 참 간단하게 표현을 하고 있다. 하기에 자연스러운 것을 복잡하게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지 못할 수도 있다.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세상. 물론 많은 것이 좋아졌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좋아진 것이 살기에 편해졌다는 것이지. 정말로 자연적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8월 13일 촬영을 위한 답사를 하면서, 산청에서 만난 그리운 모습. 그것이야 말로 정말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가 있는 그런 모습들이었다.


점점 잊혀가고 있는 그리운 모습들

사람들은 옛 기억을 가끔 해내고는 한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별 의미가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지난 세월을 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우연히 만난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 어릴 적 참 많이도 보았던 모습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릴 적에 동내 앞으로 큰 개울이 흘렀다. 당시는 물이 맑아 개울에서 피라미도 잡고, 물장구도 치고 놀았다. 그런 물이었으니 어머니들이 나와 빨래를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답사를 하다가 문화재를 찾아 들어간 마을. 그곳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참으로 아련한 추억이다. 물론 시골에 사는 분들이야 지금도 늘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도심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아련한 기억 속에 남은 정경일 수밖에 없다.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과, 집앞에서 콩대를 정리하는 할머니. 그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움이었다.

자연은 그 모습만으로도 아름답다

그 모습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 그것이 바로 자연이었다. 조금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할머니 한 분이 집 앞에서 콩을 뽑아 정리를 하고 계신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그저 열심히 콩대를 가지런히 추스르고 계시다. 그 모습 또한 자연이다.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아주 오랫동안 우리가 해온 행위인데도 불구하고, 잊혀 가고 있는 모습들. 그것이 바로 자연이었다.

또 한 마을을 들어가니 바위 위에 정자를 얹고, 그 정자에 앉아 붉은 고추를 자르고 있는 어머니도 보인다. 아주 까마득히 오랜 지난 시간에, 어머니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카메라를 꺼내든다. 그 모습을 농치기 싫어서이다. 그 안에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정자에 앉아 붉은 고추를 자르고 있는 모습. 바로 어머니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간만이 자연스러움은 아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움은 편해야 한다. 오랜 시간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감이 가야한다. 그런 모습들을 만날 수 있는 답사. 그것이 바로 길을 나서게 하는 것이다. 그 길에서 나도 자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오늘 아침 6시부터 연락을 하고 떠난 답사길. 오늘 촬영을 위한 답사는 경남 산청으로 정했습니다. 산청군으로 정한 것은 지난 번 집중호우로 지리산 일대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부러 산청 쪽의 문화재가 피해는 입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비만 많이와도 문화재가 늘 걱정이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강 공사를 한답시고 보물급 문화재를 훼손하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일찍 산청으로 출발하여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위치한 덕양전과 구형왕릉입니다. 구형왕릉은 산비탈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돌을 쌓고, 그 위에 역시 돌로 봉분을 올린 곳이기에 어느 곳보다도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형왕릉서 부터 시작한 촬영은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빗 속에서 강행군이 되었습니다.

구형왕릉에서 촬영 모습 - 동행한 아우가 아이폰으로 찍었습니다. 이렇게 찍힌 것이 아마 두번 째 인 듯합니다.

빗속에서 강행한 촬영

평상시 답사 때는 그저 편한 등산복을 즐겨입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답사일정 중에 마애불이 들어있어 산을 오르기 편한 헐렁한 바지를 입었습니다. 물론 신발도 늘 편하게 신는 목이 긴 구두를 택했고요. 그렇게 시작한 답사는 구형왕능을 거쳐 덕양전과 지리산 대원사, 내원사로 이어졌습니다. 

지리산 대원사는 보물 제1112호인 다층석탑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 다층석탑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 안에 있습니다. 종무실을 찾아가 문화재 촬영을 하러 왔다고 말씀을 드린 후, 사진 몇 장을 찍고 얼른 나오라는 조건으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알다시피 대원사와 내원사 계곡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대원사 다층석탑 촬영현장

대원사의 계곡은 그런대로 많은 피해를 입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내원사로 오르는 계곡은 물이 길 위로까지 넘친 자국이 보입니다. 여기저기 길이 끊어지고 심지어는 내원사로 연결하는 다리도 한 곳이 동강이 나 있을 정도입니다. 

그나마 문화재는 피해가 없다고 하니 그만해도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죠. 점심을 먹고 난 후에도 비는 오락가락하면서 촬영을 어렵게 했습니다. 생비량면의 마애불상군은 들어가는 입구가 굳게 닫혀있어 애를 먹기도 했고, 신안면의 수월정은 안내판이 없어 정자 앞을 몇 번씩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자세 한 번 하고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마친 촬영. 숙소로 돌아와서도 촬영은 계속되고, 눈까지 아파 겨우 일정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문화재 답사를 함께 한 PD님과 운전을 해준 아우. 이 두분은 먼 죄로 그 고생을 한 것인지. 그저 고맙고 또 고마을 뿐입니다.

빈 집을 들려 안부를 남겨주신 분들도 모두 고맙습니다.
주말과 휴일, 그리고 3일간의 연휴까지 행복한 시간들 되시기 바랍니다.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하리, 상왕산 영탑사의 우뚝 선 암벽에 돋을새김 한 높이 3.5m의 마애불이 있다. 원래는 연화봉 자연 암반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던 것이었는데, 유리광전이라는 전각을 지어 보존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에 새겨진 그대로였다면 좋았을 것을, 오히려 전각이 마애불의 멋스러움을 가로막은 듯한 느낌이다.

이 마애불은 약사여래마애불이다. 약사여래는 인간의 질병과 함께 무지(無智)까지도 고쳐준다는 부처님이다.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은 고려말기의 마애불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무학대사가 조성했다는 영탑사 마애불

영탑사 마애불은 무학대사가 조성을 했다고 한다. 고려 말기 무학대사가 전국을 돌아보면서 도읍터를 찾고 있을 때, 이곳에 들렸는데 바위에서 이상한 빛을 내고 있었다. 대사가 가까이 가니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보이고, 그 바위에서 아름다운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고. 이를 이상히 여긴 대사는 이 바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여기에 불상을 조각해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는 것이다.

현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악사여래 마애불은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지막하게 표현이 되어있다. 얼굴은 윗부분은 넓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가름해진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길게 표현하였다.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라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영탑사 마애불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무학대사님 조각 실력이 영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세련되지는 못했으니 친근한 마음이 들어

눈과 코, 입은 길고 큼직한데 다소 서투르게 표현을 하였다. 그런 조각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둔한 느낌을 준다. 이런 유형의 마애불은 고려 말기 이 지역의 마애불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형태이다.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는 인근 바위와는 다르게 하나의 산처럼 생겼는데, 마애불은 근엄한 부처이기 보다는 친근함이 드러나는 형태이다.

그리 크지 않은 암벽 면에 조각을 한 탓인지, 몸은 사각형으로 건장하나 움츠린 듯한 느낌이 든다. 무릎 또한 높고 넓어서 얼굴과 함께 둔중함을 나타낸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치고 있으며, 가슴께는 V자 형으로 되어있어, 유려하지가 않다. 안에는 속옷이 표현되어 있으며, 굵은 선으로 새긴 옷주름은 오랜 세월동안 마멸이 심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은 둔중하면서도 친근미가 느껴지는,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병을 고쳤다고 소문이 나 있다. 아마도 무학대사의 마음이 전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단 한 장의 사진이 남아

영탑사 마애불을 답사하고 난 후, 집에 와서 사진 정리를 하다가 무엇인가를 잘 못 만졌는가 보다. 사진이 보이지를 않는다. 일반적으로 답사를 하면, 문화재 한 점을 30~40장 정도를 찍는다. 물론 고택 등을 답사할 때는 그보다 더 많은 양을 찍기도 하지만.

그런데 사진이 보이지를 않는다. 세세하게 찍어 온 사진이 온데간데없다. 마애불을 촬영하면 전 부분을 세세하게 찍어오는데, 도대체 어찌 된 것일까?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 몇 시간을 땀을 흘리고 마음을 조리면서 카메라를 만져본다. 그런데 단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적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친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나, 이 사진은 어떻게 남은 것일까? 아마도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이 사진을 찍어 영험이라도 사라진다고 생각을 하신 것일까? 아니면 내가 촬영을 하면서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일까? 답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지만, 이렇게 이상한 일을 당한 마애불이다. 영탑사 마애불이 그래서 더 영험한 것은 아닐지.

단순히 글을 쓰기 위해 전국을 내 집처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글이야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던지, 지자체 문화관광 페이지를 보면 설명과 사진 등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죽자 사자 전국을 돌아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답사를 하는 블로거들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문화재가 늘 그 자리에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항상 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지난번에는 멀쩡하던 문화재가 심하게 훼손이 된 경우도 있고, 어떤 것은 낙서로 인해 볼썽사납게 변하기도 한다. 심한 경우에는 문화재 안에 술병이 나뒹굴고 있기도 하다.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 일제에 의해 훼손이 되었다고 한다.(2008, 9, 25 답사)


문화재 관리,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 종류만 해도 상당하다. 물론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이야 잘 간수가 되고 있지만, 노출이 되어있는 것들을 보면 심각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경우 해당 지자체에 이야기를 하면, 대개는 판에 박은 대답을 듣는다. 한 마디로 인력이 부족해 일일이 돌아보지를 못했다는 대답이다.

어느 곳을 찾아가면 아예 문화재를 유도할 수 있는 간판 하나가 없는 곳도 있다. 도대체 문화재가 어디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한 번에 찾을 것을 수십 번을 되묻고 다녀야만 한다. 날이 덥거나, 눈비가 오는 날, 아니면 추운 겨울에는 사람조차 만날 수가 없으니 답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심지어는 문화재 안내판 글씨가 하나도 알아볼 수 없는 곳도 있다. 안내판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일까? 덩그러니 서 있는 안내판 글씨는 다 지워지고, 내용에 오자도 상당수가 발견이 된다. 문화재 보호나 보존을 이웃집 지게작대기 취급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경우에는 천불이 난다.

충주 숭선사지 발굴현장. 발굴을 하다가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다 (2009, 9, 22 답사)


문화재 블로거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다음 뷰에는 30만 명 가까운 블로거가 있다. 물론 그들이 다 글을 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중에서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는 문화재 블로거는 몇 사람에 불과하다. 그만큼 문화재 블로거 노릇을 하기가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적지 않은 경비가 들어간다.

그렇다고 누가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직 문화재 하나를 더 많이 알리고, 그 문화재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알려주기 위해 발을 벗고 나선 사람들이다. 거기다가 문화재 답사를 하기 위해서는 입장료 또한 만만치가 않다. 한주에 한번 꼴로 일 년을 다녀보니 주차료며 입장료를 합쳐 2~3백만 원 정도가 들어간다.

그런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면서 그들이 하는 것은,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화재에 글을 열나게 써 보았자, 그것이 노출이 되는 것도 아니다. 순식간에 뷰에서 조차 사라져 버린다. 그럼에도 왜 그들은 길에 나서는가? 그것은 문화재를 보는 마음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시간과 돈, 그리고 마음까지 허비를 해야 하는 것이 문화재 블로거들이다.

여주 신륵사를 찾은 외국인들. 문화재를 보러 오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가는데,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빵점이다.( 2009, 10, 9 답사)


문화재청장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화재를 포스팅 하는 블로거들이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 문화재 훼손 현장을 만나게 된다. 만류를 하다가 시비가 붙기도 하고, 심지어는 패거리들에게 심한 행패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왜 문화재를 찾아다닐까? 그것은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내기 위함이다. 관계기관에서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에게는 너무 버거운 일들이 많다. 길을 나서면 기본적으로 드는 경비에다, 곤욕까지 치루기도 한다. 문화재 훼손 현장을 보아도 입을 다물어야만 한다.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그런 모습을 글로 올리는 것뿐이다. 시간을 쪼개가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는 문화재 블로거들. 그들 때문에 소중한 문화재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에 비해, 그들이 받는 물질적, 정신적 고통이 너무나 크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만일 그들에 문화재에 관한 급박한 상황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문화재 지킴이> 증명이라도 있으면, 그렇게 곤욕을 치르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문화재청장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문화재를 사랑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들여서라도 문화재를 지켜내려고 하는 블로거들에게, 증명서 하나라도 발급해 준다면 더 열심을 내지 않을까요? 누가 하라고 시켰냐? 라는 대답보다는, 긍정적인 판단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일선에서 발로 뛰며 문화재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블로거들에게 이 정도는 해주셔야 한다는 것이 속좁은 제 생각입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