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은 기분풀이로 문화재가 아닌 딴 것에 눈이 가기도 한다. 딴 것(?)이라고 하면, 괜히 속으로 홍홍~ 거릴 분들도 있을 것 같아, 미리 답을 얻고 간다. 바로 내가 만난 것은 '개밥 그릇'이다. 순수하고 조금은 촌스러운 우리 말 표현을 하면 '개밥 그릇'이요, 좀 좋게 요즈음 말로 하면 '강쥐 얌얌통'이라고 해두자.

원래 동물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평소 사람과 개를 구별하는 데는 이골이 나 있는 나이다. 아무리 딴 말은 다 이해를 해도, 아직 개와 나와의 관계를 '엄마, 아빠'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물론 개를 안아도 주고, 진심으로 귀엽다고 예뻐해 주긴 한다. 동물을 가족처럼 살피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개 아비가 되는 일은, 내 살아 생전에는 절대로 없는 말이다.

개밥 그릇의 종결자 - 유기 일첩 반상
 
이거 머이가 있다?


일이 있어 국악을 하는 곳을 찾아갔다. 사람 섭외를 하러 갔는데, 정작 내가 가야할 곳은 엉뚱한 곳에 있다는 것이다. 항상 그렇지만 길을 가면서도 무엇인가 글 소재를 찾아 굶주린 하이애나처럼 눈을 번뜩거린다. 연식이 좀 있는 블로거는 늘 그렇다. 그것이 초보와 고참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저 녀석은 누구람? 개 한 마리가 자꾸만 힐끗 거리면서 자리를 피한다. 직감적으로 느낌이 온다. 무엇인가가 여기 근처에 있다. 저 녀석 눈을 보니 불안해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한테 들켜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간 내 눈은 사냥을 하는 매의 눈이 된다.


멀리가지 못하고 불안한 듯 주변을 돌고 있는 녀석
  

멀리 가지 않고 주변에서 맴도는 녀석. 무엇인가를 내가 들고 갈까봐 불안한 것이다. 녀석이 나왔던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러면 그렇지, 거기 제 밥이 있었다. 얼라 그런데 이건 머? 개 밥 그릇이 새로 나온 것인가? 조금 색다르다. 가까이 가서보니, 사료를 담아놓은 그릇이, 농악을 할 때 사용하는 꽹가리다. 녀석 이걸 집어갈까봐, 그렇게 멀리가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는가 보다. 하긴 이건 '일첩 유기반상'이 아닌가?

아무리 단단한 용기라도 깨지기 마련, 그런데 이런 고귀한(?) 유기반상에 밥을 먹는 저 녀석은, 분명 이 집 주인은 아닌 것 같다.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녀석을 위해, 누군가 사료와 물을 이곳에 놓아 준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반문을 하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우선 이 정도되는 개를 키우는 집이라면 사료를 먹이는 것으로 보아, 물과 밥을 함께 주는 커다란 사료그릇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저만한 개라면 목줄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돌아보아도 개집이 없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곳에 찾아들어 굶주리고 있는 저 녀석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개밥 그릇의 종결자. 유기 1첩 반상


누군지는 몰라도 참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소중한 국악기인 꽹과리에 개밥을 주고 있다니. 밥통을 들고 살펴본다. 금이 가 있다. 그러면 그렇지. 설마 국악을 하는 곳에서 멀쩡한 꽹가리에 개밥을 주었을라고. 그랬다가는 이 성질 별로 안좋은 인간이 벌써 난리를 쳤을 텐데.

속으로는 '아~ 그냥 깨지지 않은 꽹가리에 주었으면, 내 무용담을 담은 더 좋은 글을 쓸수 있었을 것을. 아쉽다' 생각을 했다. 역시 난 블로거 맞다. 그래도 이건 정말로 대단한 글 소재를 주은 것이다.

바로 '유기 1첩 반상 개밥그릇'이 아닌가? 이 정도면 어디가서 '개밥 그릇의 종결자'라고 우길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요리에 관해서 리뷰를 쓰려고 하면, 요리에 대해 기본적인 상식은 가져야만 한다. 요리를 모르는 사람이 요리책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것은, 자칫 책을 펴낸 저자에게 누를 끼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해 망설이기를 여러 날이다.

‘친환경 요리 전도사, 비바리가 제안하는 178가지 자연식 레시피’. 책을 한 마디로 소개하는 문구이다. 얼마 전 블로거 비바리님으로부터 소포를 하나 받았다. 그 안에는 책이 한 권 들어있다. 이미 블로그를 통해 책을 냈다는 소식을 접한지라, 그리 놀랍다거나 감격을 한 것은 아니다(죄송합니다요). 내가 비바리님이 애써 쓰신 책을 받고도, 감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얼굴도 모르는, 벌써 10년 지기 이웃 비바리님

블로그 이전에 ‘플래닛’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플래닛을 할 때부터 비바리님을 온라인상에서 알고 있었으니,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아마 온라인상에서 알게 된 가장 오랜 이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도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저 댓글로나마 근황을 묻고는 하는 사이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당연히 나에게는 책이 올 것이라고 건방을 떨고 있었다.

비바리님처럼 변함없는 블로거는 흔치가 않다. 그 변함없는 모습이 오늘 이런 책을 쓰게 된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책을 쓴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더우기 요리는 음식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거기다가 설명을 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런 요리책 하나하나는 정말 소중한 정보가 되고,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는 지침서가 된다.

정성 가득 담긴 자연 그대로의 맛으로, 우리 집 식탁의 건강을 책임진다!

책의 소제목은 굳이 머릴 쓰면서 발문을 하지 않았다. 책을 펴낸 출판사에서 발문을 어련히 잘 뽑았을까? 그대로 사용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리뷰를 쓰기 전에 먼저 출판사의 책 소개를 보기로 하자.


파워 블로거 '비바리'가 제안하는 친환경 반찬 레시피 『우리집은 친환경 반찬을 먹는다』. 블로그와 카페 등을 통해 건강을 생각한 친환경 재료와 노하우를 알려온 저자가 집에서 직접 만든 각종 양념으로 음식을 요리하는 법을 소개한다. 무침요리, 볶음요리, 부침요리, 조림요리, 찜요리, 절임요리, 김치, 구이요리, 샐러드, 튀김요리 등 178가지에 이르는 레시피를 담았다. 음식 만드는 과정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며 보다 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음식을 만들기 전에 알아야 할 각종 천연 조미료와 양념 만드는 법, 계량법 등의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178가지에 이르는 많은 양의 요리가 모두 친환경적인 요리이다. 그리고 사진과 함께 조리법, 팁까지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그저 친환경요리의 백과사전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문제는 요리를 할 때 사용하는 조미료까지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정확한 계량을 하여 요리의 맛을 정수로 끌어올리려고 노력을 했다. 그만큼 이 요리책에 쏟아 부은 정성이 대단했다는 것을 뜻한다.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곁에 두어야 할 책

블로그 활동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비바리’님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 블로그가 2005년10월인가에 처음으로 문을 열고 난 후, 2006년부터 블로그 활동을 꾸준히 해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비바리님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요리 레시피를 소개하는 블로그 ‘비바리의 숨비소리’는, 건강을 생각한 친환경 재료와 그녀만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평가 / )





책의 목차를 따로 정리하지 않았다. 이 위 화면 그대로가 목차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블로그를 통해 많은 곳에 이름을 올리고 수상을 한 비바리님이다. 더 이상 잡다하게 소개를 한다는 것이 불필요하다. 뷰 구독자만 5,000명이 넘을 정도로 많은 교류를 하고 있는 블로거이기 때문이다. 비바리님의 또 하나의 장점은 바로 사진이다. 환경사진도 찍는 비바리님은 산림청 산하 녹색사업단의 객원기자로도 활동 중이다. 그만큼 사진이 좋다는 것을 뜻한다.

178가지의 요리들을 10부로 나누어 테마별로 묶어 소개를 한 비바리님의 『우리 집은 친환경 반찬을 먹는다』는, 발간 15일 만에 2쇄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출판사에서는 다음 책을 준비하자고 졸라댄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더 이상의 소개는 사실 사족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리뷰를 끝내면서 또 다른 책 소개로 글을 접는다.

‘우리집은 친환경 반찬을 먹는다’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공품 사용을 거의 하지 않고 집에서 직접 만든 각종 양념으로 음식을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무침 요리, 볶음 요리, 부침요리, 조림요리, 찜요리, 절임요리, 김치, 구이요리, 샐러드, 튀김요리 등 178가지에 이르는 레시피를 수록하고 음식 만드는 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사진과 함께 글로 설명하였다. 특히 본격적으로 음식을 만들기 전에 각종 천연 조미료와 양념 만드는 법, 계량법 등의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여 독자로 하여금 친환경 요리가 어렵거나 멀게 느껴지지 않고 각 가정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임을 알려주고자 하였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 영암사지에는, 보물 제480호인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높은 축대 안쪽에 서 있는 이 탑은, 쌍사자 석등이 서 있는 금당터 앞에 있다. 영암사지는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로 알려져 있다. 절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014년에 ‘적연선사’가 이곳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 기록으로 보아 영암사는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정비중인 절터에는 석탑을 비롯하여 보물인 쌍사자석등과 귀부 등 각종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황매산의 바위산을 배경으로 조성된 영암사지는 아직도 정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8월 20일 비를 맞으며 찾아간 영암사지. 그곳에서 삼층석탑을 만났다.




무너져 있던 탑을 복원하다

이 삼층석탑은 영암사지에 탑신부가 무너져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쌍사자석등을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주민들이 막아냈다고 하는 점으로 보아, 아마도 이 삼층석탑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해체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일제치하 하에서는 이렇게 수많은 문화재들이 해체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1969년에 복원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삼층석탑은, 화강암재로 조성을 하였다. 기단은 상당히 높은 편이며, 몸들은 1층에 비해 2, 3층이 유난히 낮다. 기단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인 우주와 탱주를 새겼으며,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몸돌의 모서리에는 우주를 새겼으며, 지붕돌 밑면의 층급받침은 4단씩이다. 몸돌의 비례가 정형을 벗어나 있으며, 처마 밑은 수평으로 조성하고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탑의 상륜부인 머리장식부분은 모두 없어졌으며, 3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쇠막대인 철주를 끼우던 구멍이 있다.

간결하고 규모가 작은 영암사지 삼층석탑

비를 맞으며 영암사지의 이곳저곳을 돌아본다. 과거에는 이 영암사라는 절이 얼마나 대단한 가람이었는가를 추정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석등 뒤에 조성한 금당터와 위쪽에 있는 또 하나의 금당터, 그리고 석등과 삼층석탑. 귀부와 각종 석재 등을 보아도 상당한 절이었을 것이다.


그런 영암사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전체적으로 볼 때는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균형을 잃지 않고 있으며, 각 부재의 짜임새 또한 간결하다.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이어받고는 있으나, 기둥 표현이 섬약하고 지붕돌의 층급받침수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건립 시기는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보물 제480호인 영암사지 삼층석탑. 기단부와 머릿돌 등이 깨어지긴 했지만, 간결하면서도 나름대로 품위가 엿보인다. 삼층석탑 한편에 미륵형태의 조형물이 있다. 이 석조물은 무엇일까? 혹 이 탑을 조성하면서 공양상으로 함께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석탑의 부재가 여기저기 한편씩 깨어져 있는 것도, 혹 이 석탑을 해체해 운반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비를 맞으면서도 석탑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석탑이 무너져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노인복지법’이 있다. 어르신들의 생활을 여유롭게 하자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노인복지법 제 1조는 ‘목적’이다. 그 목적을 보았더니 「제1조 (목적) 이 법은 노인의 질환을 사전예방 또는 조기발견하고 질환상태에 따른 적절한 치료·요양으로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노후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노인의 보건복지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있다.

제2조는 기본이념이다. 그 내용은 「①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온 자로서 존경받으며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는다. ②노인은 그 능력에 따라 적당한 일에 종사하고 사회적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보장 받는다. ③노인은 노령에 따르는 심신의 변화를 자각하여 항상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그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노인복지 제대로 행해지고 있나?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점점 나이가 많은 분들의 사회참여도 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사회의 일면에는 복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있다. 노인복지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난 복지전문가도 아니고, 복지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하지만 내가 다니면서 피부로 느끼는 것은 과연 노인복지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데 의아심이 들기도 한다. 점점 어려워져만 가고 있다는 어르신들의 이야기. 실제로 생활이 어려워 하루 한 끼 식사를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분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에 노인복지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점점 늘어만 가는 급식소의 어른들

‘스님짜장’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부산 구서전철역 옆에 자리한 무료급식소를 찾아간다. 처음에는 600여명, 그리고 한 달 후에는 700여명, 이번에는 800명이 넘는 인원이 점심시간에 모여들었다. 지난 달 기준으로 준비를 해갔는데, 결국에 모자라고 말았다. 당연히 큰 소리가 나올 상황. 긴급히 대처를 하기는 했지만, 여기저기서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짜장을 달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오래 봉사를 하고 있는 분들에게 물었다. 급식소를 찾는 인원이 얼마나 늘어난 것이냐고. 대답은 ‘자꾸만 늘어만 간다’ 였다. 물론 그 중에는 그저 친구와 함께 나왔다가 잠시 들려 점심 한 그릇을 먹고 간다는 분들도 계시다. 그러나 세 번째 간곳에는 안면이 있는 분들도 생겼다.


정말 대책이 없는 것인지?

이 어르신들 중에는 이곳에 와서 하루에 한 끼만을 해결하는 분들도 계시다고 한다. 그리고 배식이 12시 부터인데 10시가 조금 넘어서면 이미 자리는 다 차고, 밖으로도 줄이 늘어선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해본다. 과연 우리사회에 노인복지가 제대로 실행이 되고 있는 것일까?

기본이념 제 1항에 보이는 ‘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온 자로서 존경받으며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는다.’라는 조항. 이 조항만 제대로 지켜주어도 고맙겠다. 존경은 그만 두고라도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이라도 보장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다. 또한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조의 정치적 포부가 담긴 곳으로,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 한양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곳이었다.

둘레의 길이 5,744m인 화성은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축성이 되었다. 성내의 시설물로는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현재는 41개 시설물이 남아 있다.



창룡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손이 되었던 것을 복구하였다. 동쪽으로 난 문인 창룡문은 푸를 '창'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을 보면 옹성 밖의 성벽이 돌출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성문을 지키는 옹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다. '철옹성'이란 말이 생각난다.


동문인 창룡문을 들어서다

수원화성은 규장각의 문신인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1793년에 저술한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하여 축성을 하였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을 하였다. 화성 축성 시에는 거중기와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 이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동방을 ‘청(淸)’이라고 하는데, 그 청을 상징하는 것인가 보다. 창룡문은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에 복원하였다. 창룡문은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동문의 옹성은 밖은 벽돌로 쌓고, 안은 화강암으로 이용하여 축성을 했다. 옹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터진 곳 밖에 없다. 성문을 깨트리는 공성무기를 안으로 옮기기도 힘들지만, 성문 앞으로 다가서면 전멸을 하게 된다. 성문은 모두 여러조각의 철퍈으로 덮어 놓았다


창룡문을 들어서면 우선 홍예의 크기에도 놀랍지만, 창룡문서부터 팔달문까지 이어지는 제1저지선이 있다는 것에 더욱 경이롭다. 용머리길이라고 하는 이 외곽의 저지선은 그 자체가 토성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루로 올라본다. 한편을 터놓고 둥글게 문을 감싸고 있는 옹성. 옹성위로도 병사들이 이동을 할 수 있어, 적이 성문으로 접근하는 것을 방비하였다. 성벽 여기저기에는 뜨거운 기름등을 부어 성벽을 타고 흐르게 만들었다. 성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적을 막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문루에 올라가면 옹성위로 난 길을 따라 이동을 할 수가 있다. 옹성 위 여장에는 총혈과 화살을 쏠 수 있는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아래로는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도 있다. 상상만 해도 옹성 안으로 들어온 적이 어떻게 될지가 그려진다.


보물로 지정된 화서문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서문으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이 되었다. 서문인 화서문의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동문인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계단을 꺾어지게 해서 층을 만든 것이 다르다. 화서문을 둘러쌓고 있는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동일하며, 높이는 11척이다.

화서문은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화서문은 정조 19년인 1795년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년 1월 8일에 완성을 하였다, 화서문은 서해안과 남양만 방면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서장대에서 성벽을 떠라 내려오다가 만나게 되는 화서문. 화서문은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보물 403호로 지정이 되었다


화서문의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단 채제공이 썼다고 한다. 동문인 창룡문의 옹성이 벽돌로 쌓은데 비해, 화서문의 옹성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쌓아 올렸다. 문루는 양편으로 출입문을 내었으며, 안에는 마루를 깔았다.

성문, 그 위에 올라서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다. 파손된 부분을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 그 위 문루에 올라서 난 무엇을 보았을까?



서문인 화서문은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꺾어 놓아 또 다른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화성의 모든 문은 각기 특색있게 꾸며졌다. 성문의 두께도 대단하지만, 겉을 보누 철판으로 마감을 하였다.


화성의 성문들은 자연이다. 사방으로 난 길을 따라 난 성문들은, 그 형태들이 나름대로 특징을 갖고 있다. 네 곳의 문이 다 다른 모습으로 서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인양 하다. 주변의 지형에 맞게 꾸며진 사대문. 그것 하나만으로도 화성에 쏟아 부은 정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 성곽인지 알만하다.



옹성 위로 올라가면 성문에 접근하는 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성무기조차 사용할 수 없는 화성의 문. 당시 어떻게 이런 구조물을 생각해 낸 것일까?  


사람들은 화성을 돌아보면서 참 잘 쌓은 성이라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만하다는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 엄청난 성을 쌓기 위해 수많은 눈물을 이곳에 얼마나 흘린 것일까? 땀과 눈물, 창룡문의 문루 위에서 저 멀리 높게 보이는 서장대를 바라보니, 군사들의 함성과 함께 수많은 민초들의 땀으로 얼룩진 모습이 있다. 끝내 이루진 못한 이산 정조의 눈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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