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뉴스를 보니 국보 제147호인 울주 ‘천전리각석’에 낙서가 발견되었다고 난리들이다. 낙서를 한 추정시기가 지난 3월에서 7월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는데, 벌써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야 관할 지자체에서 포상금 1,000만원을 걸고 낙서범을 찾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각석 주변에 CCTV 있는데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녹화도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에 소재하는 ‘울주 천전리각석’은 태화강 줄기인 내곡천 중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이다. 위와 아래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사진출처 / 울산포커스의 사진을 인용했습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을 매번 말로만
 

국보를 비롯한 각종 문화재에 대한 낙서가 어디 어제 오늘 일이던가? 수도 없이 많은 문화재들이 낙서와 훼손에 멍이 들고 있다. 그런데도 관계당국은 매번 가중처벌이니 무엇이니 해대면서, 이런 일이 왜 자꾸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문화재청에서는 숭례문 화재 후 재난 예방 및 대응체계강화를 위해 목조문화재 방재시설 구축 예산을 증액하였으며, 중요목조문화재 150건에 대한 안전경비인력을 558명으로 증원 배치했다고 한다. 또한 '문화재보호법' 등을 개정하여 문화재 훼손범 가중처벌 규정과 문화재별 화재대응 지침서를 마련하였다고 하는데, 어째서 국보인 천전리각서에는 CCTV가 멀고, 녹화도 안된 것인지 모르겠다.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어른 가슴 높이에 돌멩이로 긁은 듯한 방법으로 ‘이상현’이라고 적혀있다는 것이다. 경찰에서도 범인을 잡기 위해 지난 8일에 수사에 착수를 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렇게 낙서를 하는 인간들을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수백 년에서 천년 이상을 지켜온 소중한 문화재이다.


국보인 김제 금산사 미륵전에 적힌 낙서들. 파고 쓰고 별 짓을 다했다. 국부는 마음대로 보수를 할 수도 없다. 밑에 '문화재가 아파해요'라는 글이 속이 아리다.(2006, 5, 26 답사자료)


낙서나 훼손이 되면, 그것은 다시 원상태로 되돌릴 수가 없다. 복원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과거의 장인의 혼이 깃들어 있을 것인가? 단지 외형적인 모습만 흉내를 낼 뿐이란 생각이다. 진정한 복원이란 장인의 혼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수도 없이 문화재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쇠귀에 경 읽기일까?

어느 누구도 그런 심각한 문화재 훼손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 않은 듯하다. 그런 무관심이 불러온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다. 오래 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때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사람들. 그들도 방관자라는 생각이다. 그 글의 일부를 다시 보자.

부끄러운 낙서 천국 대한민국

(전략)김제 금산사의 미륵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그 벽을 보면 정말 가관이다. 남녀 두 사람이 이름을 적어 놓고 영원히 사랑을 하자고 부언을 달았는가 하면 언제 자신이 다녀갔다고도 파 놓았다. 어느 것은 문화재를 일부러 훼손시키기 위한 문구도 있다. 종교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그저 파 놓고 간 것도 있다. 도대체 낙서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면 저희 집으로 가서 벽에 대고 마구 그리거나 마룻바닥 혹은 거실에라도 파 놓던지 왜 꼭 문화재나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다가 낙서를 하는 것일까?

(중략)전국 어디를 가나 여기저기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낙서는 그 도를 넘고 있다. 문화재고 머고 가리지를 않는다. 이런 낙서의 버릇은 무속적 사고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과거 사람들이 많은 질병으로 목숨을 잃거나, 재앙으로 인해 사고가 잦을 때는 커다란 암석이나 단단한 쇠붙이 등에 이름을 적어 놓으면 그 바위나 쇠붙이처럼 오래 간다고 하여 명산의 바위에다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그런 후에는 많은 치성을 드렸겠지만 그런 곳에 이름을 적고 오래 살았는지, 아니면 출새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자신의 이름을 그 곳에 적고 출세를 하고 싶다거나 사랑을 오래 지속하고 싶다거나 하는 발원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한마디씩 안 좋은 소리를 하고 지나간다면 오히려 좋아지라고 한 짓이 더 나빠질 것만 같다. 우리는 흔히 ‘입 살이 보살’이라는 속담에서 그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보물인 완주 화암사의 우화루 벽에 가득한 낙서. 어른의 팔을 뻗쳐도 닫지 않는 높이에도 낙서가 되어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높이까지 낙서를 한 것일까?(2008, 3, 27 자료)

사람들의 입에는 살이 있다는 소리다. 악담을 들으면 그만큼 자신에게 해롭다는 사실이다. 낙서를 한 것을 보고 한 마디씩 모두 악한 말을 하고 간다면 그 자신들에게 결코 좋은 일이 생길리가 없다. 욕을 많이 먹으면 명이 길어진다고 하는데 그도 괜한 소리다. 지지리 궁상을 떨면서 명만 길어지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는 제발 어디를 가나 버릇처럼 하는 낙서에서 좀 벗어나자. 어느 아는 분이 이런 소리를 하셨다. 낙서를 아무 곳에나 하는 사람들은 세상살이가 낙서판만큼이나 편하지가 않고 시끄러워진다고 말이다. 이젠 해외에까지 낙서를 하는 짓거리가 비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말로는 문화민족이니 어쩌니 운운하면서 속내는 비문화적인 일을 일삼는 몇몇의 사람들 때문에 정말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자숙하였으면 좋겠다.

내 나라의 문화를 내가 지키지 않으면 과연 누가 지켜낼 것인가? 아름다운 내 강산을 낙서투성이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준다면야 후에 무슨 지탄을 받을 것인가? 낯부끄러운 짓일랑 이제 그만하고 있는 그대로 자연과 문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보자.(끝)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산195-1 번지에 소재한 쌍봉사. 쌍봉사에서 좌측으로 산길을 조금 오르면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이 자리한다. 이 철감선사탑은 철감선사의 부도탑이다. 부도란 옛 고승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일종의 무덤을 말한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당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신라 문성왕 9년인 847년에는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다. 경문왕대 때에 이 곳 화순의 아름다운 경치에 끌려 절을 지었는데, 절 이름을 그의 호인 ‘쌍봉’을 따서 ‘쌍봉사’라고 이름 하였다. 경문왕 8년인 868년에 71세로 쌍봉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경문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국보 제57호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조각예술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뛰어난 조각술이 돋보이는 철감선사탑

8월 21일에 쌍봉사를 찾았으니,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화순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찾아간 쌍봉사. 쌍봉사는 고찰답게 많은 문화재들이 경내에 소재한다. 철감선사탑이 있다는 곳으로 오른다. 주변을 담을 쌓은 안에 자리한 탑 옆에는, 보물 제170호인 비문이 사라진 탑비도 함께 있다. 담이 터진 입구 쪽으로는 탑이 서 있고, 그 안쪽에 탑비가 있다.

철감선사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때의 일반적인 탑의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탑은 전체적으로 모두 남아있으나, 아쉬운 것은 꼭대기의 상륜부인 머리장식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철감선사탑은 기단이 상중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단부의 장식이 화려한데 그 중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화려하다.





하층기단인 밑돌은 2단으로 조성했는데 8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이 사자들은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마치 탑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감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사자의 아래는 조금 넓게 조성을 해 구름문양을 조각하였다, 그래서 마치 사자들이 구름위에 앉은 모습을 표현하였다.

조각한 장인의 염원이 담긴 탑

상층의 윗돌 역시 2단으로 조성을 하였다. 아래에는 커다란 앙화를 조각해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를 새겼다. 이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 비천상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몸돌에는 사천왕상과 함께 비천상까지 돋을새감으로 조각하였다(위) 천상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몸돌의 조각은 사천왕상을 조각하는 것에 비해, 철감선사탑은 비천상까지 함께 새겨져 더욱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뛰어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다.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감선사탑을 조성한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인 868년쯤으로 추정된다. 상륜부가 사라져 아쉽기는 하지만, 조각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다듬은 장인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걸작품이다. 아마도 이 탑을 조성한 장인은 자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비천인이나 가릉빈가들이 살고 있다는 극락을 염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8마리의 사자들은 각각 자세를 달리해 앞을 주시하고 있다. 탑을 지키기 위한 것일까?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평가를 받고 있는 철감선사탑. 그곳을 떠나기 아쉬운 것은 언제 또 다시 이런 아름다운 탑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1006번지. 금산읍에서 금산인삼장이 열리는 앞을 지나 제원면으로 들어가, 제원대교를 건너면서 좌측으로 보면 전각이 하나 보인다. 이 전각 안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산천내리용호석’ 중 ‘용석(龍石)’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100m 정도를 천변 둑을 타고 가다가 우측 농로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전각이 보인다. 그 안에는 용호석 중 ‘호석(虎石)이 있다. 천내리 마을 서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돌로 만든 동물상 2기인 천내리 용호석. 과연 이 2기의 석물로 조각된 용호석의 실체는 무엇일까?



공민왕이 두고 갔다는 용호석

공민왕은 고려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다. 충목왕 즉위 원년인 1344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으며, 충정왕 1년인 1349년 원으로 건너가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았다. 충정왕 3년인 1351년 충정왕이 폐위되자 원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귀족회의인 ‘정방’을 폐지하는 등 많은 개혁정치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공민왕이 1360년 홍건적이 침입을 하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신을 내려갔단다. 그곳에서 자신의 능묘의 위치를 정해놓고 필요한 석물을 준비하였는데, 이 용호석이 바로 그 석물이라는 것이다.


위 사진들은 용호석 중 용석의 모습이다. 용은 돌기를 만들고 그 돌기사이네 용을 조각하였다


왕은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는데, 이 용호석은 그곳에 그냥 두고 갔다는 것. 만일 이러한 설이 맞는다고 하면 이 용호석은 제작된 지가 700년이 된 것이다. 오랜 세월 이 용호석은 천내리 강변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용호석의 설을 받침 하는 공민왕묘

공민왕의 릉인 ’헌릉은 개풍군 해선리에 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묻은 능침은 봉명산의 무선봉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데, 서쪽 것이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이며, 동쪽 것이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이다. 1365년 왕비인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공민왕 지신이 직접 주관하여 9년이란 세월에 걸쳐 무덤공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금산 천내리의 호석은 꼬리를 앞발 사이로 넣어 앞다리에 걸친 모습이다. 민속화 등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로 앉아있다.


이 무덤은 고려의 모든 천문지리, 석조건축, 조형예술이 집대성되었다고 본다. 맨 위에는 봉분을 구성하고 3개의 층단과 맨 아래는 경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층단에는 조각과 시설을 적절히 배치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공민왕의 무덤에 바로 금산 천내리 용호석 중 호석과 흡사한 호석 한기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금산에서 조각한 용호석을 가져가지 못한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죽고 난 후 능침을 조성하면서 이 석물로 조각한 호석을 만들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호석의 형태가 흡사하다는 것을 보면, 천내리 용호석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낭설은 아니란 생각이다.

아래는 공민왕 무덤의 호석 / 인터넷 검색자료

조각기법이 퇴화한 고려 후기의 조각

금산 천내리의 용호석은 그 모습이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석은 여러 개의 돌기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를 조각하였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 양쪽으로는 아가미와 수염이 묘사되어 있다. 발톱은 우리나라 용의 네 발가락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비늘은 두텁게 표현을 하였다.

호석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호랑이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바로 이 모습이 공민왕 능침 앞에 있는 호석의 형태와 동일하다. 천내리 호석은 몸은 서쪽, 머리는 북쪽을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털 문양은 두툼하게 솟은 곡선과 동그라미를 교대로 조각하여 표현되었다. 호석의 꼬리는 앞발 사이로 감아 한편으로 조각하였다.

호랑이나 용의 특징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나, 전체적으로 조각기법이 투박하고 퇴화한 점 등으로 보아, 이 용호석은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시기적인 것이나, 공민왕의 능침에 있는 호석 등으로 추론할 때, 이 용호석은 공민왕이 자신의 무덤에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을 했을 것이란 설에 공감이 간다.

공민왕과의 관계설도 그럴 것이라고 공감을 하지만, 용석은 동쪽을 바라보고 호석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용호석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듯도 하다. 700년 세월을 천내리 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용호석. 언제까지라도 주인을 기다릴 듯한 자세로, 오늘도 길가를 주시하고 있다.

충남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 345번지에 소재한 충남 전통사찰 제85호 미륵사. 미륵사 상량문에 의하면 미륵사는 통일신라 성덕대왕 2년인 703년 봄에 창건되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재단법인 선학원의 분원이다.

미륵사는 1948년 불에 타 없어지기 전까지는, 대웅전과 칠성각, 산신각, 요사 등을 갖추고 있었다. 화재 후에는 인법당을 모셨으며, 현재는 대웅전을 새로 짓고, 산성각, 요사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미륵사에는 ‘미륵암(彌勒岩)’이 있다, 두상만 남은 석조불을 바위 위에 얹어 놓은 것이다.



미륵암 위에는 고려시대의 석불의 두상이 올려져 있다. 이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이라고 한다. 바위에 선각은 조성한지가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는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가 조각이 나 있다. 안면이나 두광 등이 잘 나타나 있고, 옆에는 몸만 나온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삼존불 중 협시불인 듯하다.


바위 위에 얹은 석불 두상

지난 8월 28일, 장수, 진안을 거쳐 금산으로 들어갔다. 보석사의 은행나무와 미륵암을 보기 위해서이다. 미륵암은 현 미륵사로 올라가기 전, 축대 밑에서 좌측으로 70m 정도 들어가면 만날 수가 있다.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하나 보이고, 그 위에 석불의 두상을 올려놓은 것을 볼 수가 있다.

두상으로만 보아도 이 석불은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밑으로는 평평한 바위 면이 있는데, 누군가 그곳에 두상을 염두에 두고 선각으로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것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쪼개진 바위조각에 조각을 한 흔적이다.


조각난 바위 뒤에는 전각의 주추를 놓았던 흔적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이 마애불을 보존하는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쪼개진 바위조각들은 마애삼존불인 듯?

미륵사로 찾아들었다. 주지스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자료를 들고 나와 보여주신다. 이곳으로 부임을 해와 보니, 바위를 절단 한 듯 톱날 등이 바위에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바위가 널린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다. 어림잡아 크기는 3m가 넘을만한 마애불이다. 전체적으로 이것저것을 맞추어보니, 삼존불을 새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렇게 조각이 나 버린 것일까? 그리고 저 바위에 선각을 한 것은 무엇일까?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는 여기저기 널려있다. 어림잡아도 10여 조각은 되는 듯하다. 미륵사 주지스님의 이야기로는 숲 속에도 조각들이 있다는 것이다.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면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선각을 한 바위 옆으로는 커다란 조각이 하나 서 있는데, 그것을 추론하여 볼 때 마애불을 새긴 바위의 높이는 3m를 넘었을 것만 같다.



주변에 널려진 바위조각에는 마애불을 새긴 흔적이 보인다. 마애불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각을 한 것의 기법 등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작이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낸 것일까?


무지가 빚은 참화, 눈물이 난다

그리고 바위는 넓적한 돌에 마애불을 새겼을 것만 같다. 그 마애불을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이다. 현재 조각난 마애불 주변에는 옛 기와조각이 발견이 되고, 바위 한편에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을 새기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각까지 지었다는 것이다. 기와의 와편은 보기 힘든 꽃이 새개져 있다. 와편만 보아도 이 마애불을 보존하기 위한 전각이 상당히 공을 들여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 역시 상당히 소중하게 여겼을 터, 그런 문화재급 마애불이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애불을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일까? 조각난 마애불을 돌아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세상에 소중한 문화재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다니. 무지가 불러온 문화재 훼손. 그것도 알만한 인물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참담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들이 제 모습 그대로, 제 자리에 편안한 모습으로 있을 것인지. 이 나라에서는 기대를 할 수 없는 것일까? 돌아 나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아름다운 정원이 있습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정원이긴 해도, 연못에는 물고기가 유영을 하고, 바위 위에는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꽃도 피어있고. 물레방아도 돌아갑니다. 그리고 좁은 물길로 물이 흘러 연못으로 들어갑니다. 얼핏 보아도 상당히 공을 들인 작은 정원입니다.

그 작은 정원을 이리저리 둘러봅니다. 상당히 많은 애를 쓴 흔적이 보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런 것에도 그렇게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면서도,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세상살이가 팍팍해져서 일까요? 작은 정원에 심은 소나무들도 분재라고 하나요?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작은 소나무 가지마다 철사로 동여매어져 있습니다.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이렇게 전기선 등으로 묶었는가 봅니다. 아마도 강제로 멋지게 키우기 위해서 일테죠. 그런데 사람을 멋지게 키우기 위해 저렇게 팔 다리는 칭칭 동여매 놓는다면, 그 사람이 받는 고통이 어떨까요?

말 못하는 나무지만 보기가 안타깝습니다. 이제는 풀어주어도 될 둣한데, 아직 더 묶어놓아야 하는 것인지. 나무가 이야기를 합니다.



“제발 저 좀 풀어주세요. 전깃줄이 파고들어 너무 아파요”

우리 인간들의 강퍅함은 어디까지인지. 두렵습니다. 그저 단지 나무이기 때문에 이래도 되는 것인지. 맛있게 먹은 밥이 다 곤두서는 듯합니다. 날이 뜨거워 더위를 먹었는가 봅니다.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되는데 말입니다. 왜 이런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픈 것인지.





아픈만큼 성숙해 지는 것은 사람에나 통하는 것인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나무들도 아픈 만큼 아름다워지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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