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만에 300mm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진 수원지역은, 곳곳에 침수피해를 입기도 했다. 화성의 멸실된 구간을 복원한 남수문은 이런 비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7월 6일 오후 찾아간 복원된 남수문 구간은, 여기저기 비에 이겨내지 못하고 흉물로 변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수원천의 상류인 광교저수지의 물은 6일 0시를 기해 방류를 중단했지만, 정작 수원천에는 많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만큼 많은 비가 내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비에는 시간이 지나 굳어지지 않은 곳은 당연히 파이게 마련이다. 공사를 할 때는 그런 것도 염두에 두고 했어야 옳다는 생각이다.

 

 

남수문 근처 곳곳에 문제점 발견

 

남수문 성 안쪽에는 돌로 만든 징검다리가 있다. 징검다리 위를 걸어가는 행인이 뒤뚱뒤뚱 불안해 보인다. 낮은 징검다리 위로 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철 장마 때를 대비해 조금 높게 징검다리를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물길 양편으로 조성한 흙더미는 이미 다 파헤쳐져 남수문 안쪽으로 수북이 쌓여있는 모습도 보인다.

 

물길은 전체를 흐르고 있는데, 단 한 곳뿐인 어도는 그야말로 말로만 어도일 뿐,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어 보인다. 이미 많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어서, 어도를 통해 내려가는 물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구간 수문 중에 양편 두 곳은 사람들의 통행로를 만들었다고 해도 남은 칠간 수문에는 어도를 갖추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 한 곳만의 어도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식의 보여주기 위한 어도일 뿐이란 생각이다.

 

날림공사 흔적 역력히

 

공기를 마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집중 호우 등에 대한 대비를 아예 염두에 두질 않은 것인지, 남수문 복원 공사 구간에는 날림공사를 한 흔적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벽 밑에 심어 놓은 잔디는 이미 다 파헤쳐져 돌들이 다 들어나 보이는 흉물이 되어버렸고, 그 흙들은 여기저기 쌓여있다.

 

 

사람들의 통행로에도 어디서 밀려온 흙인지 시커먼 흙이 쌓여있다. 이런 것은 하수구에서 쏟아져 내린 듯하다. 아름다운 화성을 생각하면, 남수문 주변은 그야말로 볼썽사나운 꼴로 변해버렸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 그리고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복원한 남수문. 비가 오는데 걱정스럽게 남수문을 내려다보고 있던 시민 조아무개(남, 68세)는 답답하다고 한다.

 

 

“남수문은 두 번이나 홍수에 파손이 된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이번 장마에 또 어떤 변고가 있을까 궁금해 보러왔는데,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홍수에 대비를 해 단단히 지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변 조경공사는 한 마디로 실망스럽습니다. 어떻게 갑자기 내렸다고는 하지만 장마철이 이제 겨우 시작을 했는데 저렇게 망가질 수가 있나요? 국민들이 낸 세금을 이렇게 함부로 사용하는 공사 책임자에게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죠.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나와 보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히 이런 현장을 살펴보아야죠.”

 

그러나 이 세찬 빗줄기 속에서도 더 이상 훼손이 되는 것을 막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도 보였다. 처음부터 제대로 공사를 했으면, 이런 수고로움은 덜 수 있었을 것을. 아름다운 화성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을 만 했다는 남수문. 그 복원된 남수문이 하루의 집중호우로 인해 주변이 온통 볼썽사납게 변해버린 모습이 마음이 아프다. 그저 아름다운 남수문으로 영원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에서 중요한 시설물 중 하나는 아마도 북수문인 화홍문과 더불어 물길을 지켜낼 수 있는 남수문이었을 것이다. 남수문은 1846년의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는데, 1922년의 대홍수 때 또 다시 떠내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1910년대에 사진을 보면 부서지긴 했어도 그나마 남수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형 수문을 가진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 개의 무지개형태인 아치형 수문을 냈다. 가히 그 모습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그런데 북수문이 일곱 개의 수문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아홉 개의 수문을 낸 것일까?

 

 

90년만에 복원 된 세계문화유산 화성 남수문의 성밖(위)과 성안(아래)

 

왕권의 상징이었을 남수문

 

아마도 남수문에 아홉 개의 문을 낸 것은 왕권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9는 양수 중에서 가장 큰 수이며, 꽉 찬 것을 의미한다. 왕의 복장 중 가장 품격이 높은 것이 ‘구장복’이고 보면 남수문은 왕권을 상징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북수문은 상류의 물이 유입되는 곳이지만, 남수문은 팔달산 등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합쳐지기 때문에, 그만큼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공간확보가 더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북수문과 남수문은 1794년 2월 28일에 장안문, 팔달문과 동시에 터를 닦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의 남수문(위)와 1920년도에 촬영한 남수문(아래)

 

"남북 수문의 터는 동서로 38보, 남북으로 51보를 파내서 터를 닦고 땅을 14척 깊이로 판다. 모래에 진흙을 섞어서 다져서 쌓은 후 전을 2중으로 깔았다. 다리의 안팎에도 넓게 고기비늘처럼 전을 깔고 그 끝에 장대석을 물리어 굳혔다."

 

난공불락의 조형물이었던 남수문

 

남수문은 화강석으로 수문을 쌓고 쇠살문을 달았으며, 수문 위의 구멍을 통해 쇠사슬로 수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9개의 수문 구간 위에는 다리의 넓이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에는 사람을 통행하게 하고, 다리의 길이인 동서 약 28.6m에 남북 3.6m의 검은색 벽돌로 꾸민 ‘포사(舖舍)’를 길게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포사에는 세 개의 문을 내어 짧은 시간에 많은 군사들이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여장을 검은색 벽돌로 쌓아 57개의 총안을 내었다. 이 총포의 구멍이 수문을 향해 공격을 하는 적을 향하고 있으니,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것이다. 여장 역시 구간수문의 아치형에 어울리게 무지개형으로 조성하였다.

 

 

 

 일몰시간의 남수문 조명. 그 앞에 분수대만 있었더라면 정말 아름다웠을 것을...

 

또 하나의 명물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남수문 주변이 홍수로 떠내려 간 뒤 90년이 지난 올해 복원이 되었다. 물론 그 복원의 의미를 갖고 글을 쓰기도 했지만, 어차피 지어진 남수문이 다시는 홍수피해의 아픔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2차적인 것은 해당부서와 담당자들이 알아서 옛 남수문의 기능을 다시 되살리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6월 25일(월) 일몰시간이 지난 다음에 남수문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구간에서 아름다운 조명이 남수문을 화려하게 만든다.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잠시 동안 촬영을 하였다. 아름다운 자연의 조형미술이라는 화성, 그 중에서도 과거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한 곳이었던 남수문의 야경이다.

 

 

촬영을 하다가 불현 듯 생각을 한다. 만일 저 앞에 분수라도 설치를 해서 그 분수에 조명과 함께 어우러진다면,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참 막힘이 없이 자연스러운가 보다.

당연히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생부에 의해 ‘뒤주’속에서 젊은 나이로 목숨을 잃어 ‘뒤주세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250년 세월, 그렇게 슬픈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었던 ‘사도세자’기 250년 만에 <장조황제>가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수원시 팔달구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화성박물관(관장 이달호) 기획전시실에서는 6월 1일부터 7월 1일까지 수원화성박물관과 용주사효행박물관 공동으로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 추모 특별기획전 ’사도세자‘를 열고 있다. 전시는 크게 4가지 테마로 되어있는데, 생애와 활동, 가족, 원찰 용주사 창건, 그리고 왕세자에서 황제로의 추숭으로 꾸며져 있다.

 

 

2세에 왕세자가 된 선

 

사도세자(1735~1762)는 창경궁의 집복헌에서 조선조 제21대 임금인 영조와 영빈이씨의 왕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선, 자는 윤관, 호는 의재이다. 영조가 첫 번째 얻은 아들인 효정세자를 잃고 난 뒤, 42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왕자여서 사랑과 기대가 남달랐다. 아마도 그 사랑과 기대가 너무 큰 것이 화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전시실을 들어서면 한 설치벽면을 커다랗게 장식하고 있는 국보 제249호인 동궐도(고려대학교박물관)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동궐’은 창경궁과 창덕궁을 함께 호칭한 것이며, 창경궁과 창덕궁의 전체 구조와 배치, 주변의 자연환경 등을 16책의 화첩에 나누어 제작한 궁궐도이다. 이곳 창경궁 집복헌에서 사도세자가 태어나, 삶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지냈다.

 

 국보인 동궐도. 붉은 원안이 사도세자가 태어난 집복헌이다


사도세자는 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세자 수업을 받았다. 15세 때에는 이미 부왕인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에 임하였으나, 1762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와 활동이 전시공간에는 13년 동안 왕세자 수업을 거쳐, 대리청정에 임해 대소신료들과 국사를 논하고 정무를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736년 3월 15일 장조의 왕세자 책봉시 반포한 글을 새긴 ‘장조왕세자 책봉 죽책’이다. 제술관은 윤순이고 시사관은 김취로이다. 죽책은 모두 6폭인데 1폭 당 죽책 5간 씩을 엮어 제작하였으며, 총 30개의 죽간 중에서 28개의 죽간에 글을 새겼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전략) 아 너 원자 선이여 내가 다행히도 늦게 너를 낳았는데 하늘이 꼬 남다른 자질을 주었다. 품 안에 있을 때부터 지각과 사려가 먼저 트여 말은 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것처럼 의젓하였으며, 자세히 보면 기국과 도량이 현저하여 훌륭한 덕을 갖출 조짐이 뚜렷하였다.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침착하기가 남다르니, 자라서는 총명하고 어질며 효성스러우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삼종(효종, 현종, 숙종)을 계승할 수 있을 것 같아 십년 동안 깊은 밤까지 걱정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팔도의 백성이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니 조정 관원 모두가 세자 책봉의 경사를 기뻐한다.(하략)」

 

‘폐세자반교’에 얽힌 내용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총명하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소신료들과 정사를 논할 수 있는 왕제의 덕목을 갖춘 사도세자였다. 그러나 열 살 무렵부터 사도세자는 책읽기를 싫어하고 말타기나 활쏘기 등을 더 좋아하였다. 그리고는 살이 쪄 몸이 비대해졌다.

 

1749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부터는 상황이 악화되었다. 『영조실록』에는 이 무렵부터 사도세자에게 병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자에게 병이 생겨 본성을 잃었다고 했다. 이 본성을 잃었다는 병은 곧 광증인 정신병을 말한다. 그리고 발작을 하면 살인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도세자는 서인이 되어 뒤주에 갇히고 만다.

 

 대리청정시 사도세자가 내린 교지


사도세자를 폐세자로 한다는 ‘페세자반교’의 내용을 보면 사도세자는 광증이 있었고, 병이 깊어지면서 아랫사람 100여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생모인 영빈이씨까지 죽이려했고, 마침내 영조까지 죽이려하다가 영조의 처분을 받아 죽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세자가 내관,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인데 한도 없이 갖다 썼습니다. 또 장번 내관은 내 쫒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 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 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생모인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아뢴 말이다. 창덕궁으로 사도세자를 찾아 갔을 때 영빈 이씨는 몇 번이나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했다. 이러한 일로 인해 결국 사도세자는 폐세자가 된 후 죽음으로까지 가게 된 것이다.

 

 

 원찰 용주사 상량문과 불설부모은중경 동판


고종 때 황제로 추존되어 명예를 되찾다

 

아마도 이런 폐세자를 실행하게 된 것은 그만큼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죽책의 내용을 보면 영조가 장조 왕세자에게 건 기대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기대가 결국 사도세자의 이른 죽음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을까? 전시실을 한 바퀴 돌아 가족과 원찰 용주사 창건을 지나, 마지막 테마인 ‘왕세자에서 황제로의 추숭’ 편을 돌아본다.

 

정조는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을 하여 왕위를 계승한다. 왕위에 즉위한 정조는 바로 부친인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추상하면서 생부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존호의 추상 뿐 아니라 궁묘의 정비와 능원의 조성 등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정조의 ‘효(孝)’는 지극하였다.

 

 

 

이런 와중에 정조 16년인 1792년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한 영남만인소는 정조를 한껏 고무시켰고, 이러한 추숭과 현창사업은 후대 왕들에게로 이어졌다. 그 결과 고종 때에 이르러 사도세자는 왕세자에서 왕위를 거쳐 황제위까지 추존되어 명예를 되찾았다.

 

 

 

250년 만에 뒤주에서 우리 곁으로 돌아온 사도세자.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화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만날 수가 있다. 무예와 예술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사도세자. ‘능허관만고’라는 문집을 지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세자가, 광증이 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늘 사도세자를 만나 직접 그 이유를 들어보기를 권한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은 그 축성을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였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조선조 정조 18년인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화성은 정조 이산이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축성되었다. 또한 아버지인 장헌세자를 향한 효심과,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축성 이전부터 몰려든 상권

 

성을 쌓기 위해서는 많은 물자와 인력이 필요하다. 화성은 축성을 할 이전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축성이 시작되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생필품은 물론, 물자조달을 위한 장거리가 형성이 되었다. 팔달문 앞에 있는 상권은 이미 정조 이산이 화성을 축성하기 이전부터, 이곳을 기점으로 난전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수문을 복원하고 있는 곳에서 그 위편 매향동 방향으로 수원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보면, 개울가에 세워 놓은 그림을 그려 넣은 안내판이 눈에 띤다. 팔달문시장에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안내판은, 팔달문시장의 개장배경과 함께 정조 이산의 꿈이 이곳 상권에 함께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정조 이산이 직접 6만냥이라는 밑천을 대주어 이룩한 시장. 남문인 팔달문 앞에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어 시장을 일으킨 것은, 바로 이러한 정조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 시장으로 인해 경제를 살리고 더욱 강한 왕권을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한 것이다.

 

전국의 선비상들이 몰려든 수원

 

유상, 일반적인 장사치들이 아니다. 유상이란 수원 팔달문 앞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선비들이었다. 물론 이 유상이란 말은 버드나무를 심은 수원을 ‘유경’이라 부른데서 비롯한 용어이다. 이들을 새롭게 조명해서 부르는 용어가 바로 유상이며, 전국 각처에서 모인 선비들로 이루어진 장사치들을 뜻한다. 그래서 이 유상들은 정조의 효심과 장조의 강한 왕권을 기반으로 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뜻에 동참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 유상들 중에는 윤선도 가문의 후손들을 비롯하여, 전국의 내노라하는 선비들이 참여를 하였다. 정조는 이들에게 갓과 인삼의 유통권을 주었다. 갓과 인삼의 유통권을 갖는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수원 팔달문 시장의 우리나라 시장경제의 중심에 섰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유상의 근거지인 수원의 팔달문 시장. 지금도 이곳은 팔달문시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7~8개의 시장이 모여 있는 상권의 중심지이다. 수원시는 이곳을 지난해 8월부터 올해 2월까지 사업비 12억원(국,·도비 포함)을 투자해, 유상박물관과 팔달문시장 문화센터, 조형물 설치, IT 콘텐츠 제작 등 1차 사업을 완료했다. 또한 2차 사업은 12월까지 10개월에 걸쳐 추가로 진행될 예정이다.

 

 

 

팔달문 시장 등 재래시장 경쟁력을 키워주어야

 

그러나 이런 제반의 행위들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수원시는 수원역사의 AK백화점을 비롯하여 역세권 상권을 조성한다며 대형 롯데쇼핑물 등을 허가를 내주었다. 거기다가 호매실 등에는 대형 매장인 홈플러스 등이 속속 입점을 위한 공사에 착수를 했다. 이러한 대기업의 물량공세에 과연 기존의 상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어찌보면 시가 스토리텔링을 통하여 ‘유상선포식’ 등을 하고 재래상권을 살리겠다고 하지만, 이곳에 있는 상인들은 그리 마음이 편치가 않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러한 대기업의 물량공세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나와야한다는 것이다.

 

 

일부 의원들은 대형마트 등의 영업시간을 한 달에 두 번정도 쉬는 날을 제정하고, 영업시간을 단축한다고 하지만, 그도 '눈 가리고 아웅' 이라는 것이다. 집집마다 대형 냉장고 등을 갖추고 있는 작금에 하루 정도 대형마트 등이 문을 닫는다고 해서, 재래시장으로 상권의 중심이 옮겨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재래시장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조치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이산 정조의 꿈은 220년이 흐른 지금 끝이 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세상은 변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 ‘유상선포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유상들이 옛 선조들의 당당함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단 생각이다.

건물 안에는 많은 악기들이 진열이 되어있다. 편종과 특종, 편경과 특경, 운라, 공후 등. 화성 행궁에서 비장청을 지나면, ‘외정리아문’이란 현판을 달아놓은 문이 보인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한편은 담장인 ㄷ 자로 막힌 건물의 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문의 좌우에는 ㄱ 자 건물을 반으로 나누어, 아래는 빈 공간이고 위는 다락과 같이 꾸몄다.

그 건물 끝에는 방을 하나 드렸는데, 방 안에는 한 사람이 앉아(인형) 무엇인가 서류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앞으로는 유기그릇들이 나열이 되어있다. 이곳을 처음에는 정리소라고 하였으며, 정리소는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다.



역대 임금이 행차 시 행사를 준비하던 곳

이 정리소는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정조 20년인 1796년에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아마도 ‘아문’이란 현판을 달아 놓은 것도, 유수가 이 정리소를 관장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 하였다. 그만큼 이 행궁에 대한 정조의 관심이 깊었다는 것을 뜻한다. 마당을 지나 외정리소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마루를 놓은 전각이 보이고, 그 안에는 ㄱ 자로 지은 광채와 같은 곳이 있다. 이 건물 안에 편경 등 제례나 연례에 사용하는 악기들을 진열하였다.




12차례에 걸친 정조의 능행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의 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이산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정조 24년인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행사 때, 이 외정리소에서 행사를 맡아하던 곳이다. 이곳에 많은 악기와 유기그릇 등이 보이는 것은, 행사 때 사용하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연희를 베풀면 상당한 인원과 많은 준비를 하여야 한다. 그렇게 준비를 해서 연희를 베풀 때는 아마도 외정리소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왕래를 했을 것만 같다.


외정리소에 진열되어 있는 악기들. 시계방향으로 편종, 편경, 아래는 우측부터 특종, 특경, 운라


행궁 안 한편에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도에 보면 수 많은 무희들과 악사들, 그리고 조정대신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행사 역시 외정리소에서 담당을 하였다는 것이다.

왕의 모든 행사를 담당한 외정리소

외정리소의 행사 담당은 정조가 승하한 뒤에도 계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순조 1년인 1801년에는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 하였다. 아마도 이런 제의례를 할 때도 외정리소에서 맡아했을 것이다. 또한 그 뒤로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행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외정리소는 많은 왕의 행사를 맡아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 모형. 외정리소는 이런 행사를 맡아하던 곳이다.


1998년 12월에 옛 모습대로 복원이 된 외정리소. 행궁을 돌아보면서 만난 외정리소에 진열되어 있는 편경 등 많은 악기가 낯설지 않음에서인가(사실 나는 중, 고등학교 시절에 국악을 전공했고, 고등학교 졸업을 한 후에는 국립국악원에 재직을 한 적이 있기에 늘 이런 악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외정리소라는 곳이 정감이 가기도 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