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들이 널려있다. 그리고 한편이 절개한 흔적도 보인다. 이 바위들도 누군가 쪼아내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스스로 세상구경이 하고 싶어 쪼개져 구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위 솟구치는 벼랑위로 성벽이 보인다. 이곳은 왜 이렇게 높은 것일까? 바로 그 위에 서장대와 서노대가 있는 곳이다.

 

만일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면, 적들은 정말로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은 가파른 비탈이고, 거기다가 높기까지 하다. 옆으로는 숨겨진 암문이 있어, 도대체 어디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 조차 분별하기가 힘들다. 그런데다 성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을 피할 수도 없다. 바로 서노대에서 쏘아대는 다연발 화살인 쇠뇌 때문이다.

 

 

바위야 니들은 왜 그곳에 있느냐?

 

이곳은 성벽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비가 오는 날 길도 미끄럽지만, 바위와 소나무들이 성벽 근처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이곳의 바위들은 정말 제멋대로이다. 그저 눕고 싶으면 눕고, 서고 싶으면 서 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을 제멋대로 생긴 채로 화성을 바라보고 있다.

 

나무도 바위도 그리고 사람도, 이 구간은 화성을 탐낸다. 비에 젖은 소롯길은 미끄럽다. 겨우겨우 비에 젖은 바위를 의지해 바위틈을 벗어난다. 갑자기 성벽이 급하게 아래로 내리닫는다. 그리고 그 성벽 위에 여장들도 함께 구르듯 한다. 나무들도 덩달아 성벽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화서문에 무슨 풍각쟁이라도 온 것일까?

 

 

포루의 으스스한 모습에 겁을 먹었을 것

 

급한 경사는 화서문까지 이어진다. 서장대에서 화서문까지의 길이는 630m 정도. 그 거리가 모두 내리막길이다. 조금 가면 서이치를 지난다. 굽은 소나무 한 그루, 치를 넘겨보고 있다. 화성 성 밖의 나무들은 왜 그리도 화성을 탐내는 것일까? 아마 이들도 전화(戰禍)를 피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철옹성인 화성 안으로 피신을 하고 싶음인지.

 

저만큼 서포루가 보인다. 화성의 포를 쏘아대는 5개 포루 중 한 곳이다. 성이 돌출된 치 위에 지은 구조물이다. 그런데 이 서포루의 형태는 색다르다. 딴 곳의 포루가 밑을 돌로 쌓고 그 위에 포사를 설치 한 것에 비해, 서포루는 아래부터 온통 검을 벽돌로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포사 역시 딴 곳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견고한 모습이다.

 

 

저런 서포루의 모습을 본 적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아마도 그 으스스한 모습을 보고, 포를 쏘기도 전에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치성의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서포루를 지난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배터리가 없다고 카메라에 불이 들어온다. 그리고는 화면이 사라져버렸다. 카메라마저 겁을 먹은 것일까?

 

 

세상은 참 살기 편해졌다

 

잠시 고민을 한다. 이제 화서문까지 남은 거리는 420m. 이처럼 비가 퍼붓는 날 지금까지 잘 견뎌왔는데, 배터리가 떨어지다니. 그러나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 법. 카메라 대신 지니고 있는 휴대폰을 사용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소형 카메라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고, 대신 휴대폰을 꺼내들고 걷기 시작한다.

 

서이치를 지난다. 저만큼 성벽이 휘어진 곳에, 사방이 훤하게 트여있는 서북각루가 보인다. 서북각루 역시 치성 위에 설치한 구조물이다. 서북각루도 예전에는 사방이 모두 판문으로 막혀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온돌방까지 마련해 겨울에도 군사들이 따듯하게 쉴 수 있도록 마련한 곳이다.

 

 

서북각루 가까이 가니 빗길에 나그네 한 사람이 하염없이 서 있다. 아마도 저 나그네도 나처럼 이 비에 화성 길을 오를 것인지를 고민하는 듯하다. 서북각루를 지나면 소나무 몇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화서문이 보인다.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더욱 세차진다.

 

9월 4일, 오늘의 발길을 멈춘다. 화서문 옆으로 지나는 차들이, 도로를 흐르는 물을 튀기고 지나간다. 화성을 겉도느라 어차피 다 젖었는데, 누구 탓해 무엇 하리오. 그러고 보니 나도 점점 화성을 닮아 가는가 보다.

서삼치를 지나면 성벽에 큰 통로가 보인다. 통로 앞에는 진달래 화장실과 화성관광안내소가 있다. 화성에서 중간에 밖으로 이렇게 출입을 할 수 있는 곳이 군데군데 있다. 그곳을 지나면 오르막길이다. 서장대를 향해 가는 길. 아마도 그 위에서 호령을 하던 옛 장용영의 장수들은 목소리도 우렁찼을 것이다.

 

성벽으로 달라붙는 적군을 무찌르려면 목소리께나 커야 호령을 할 것이 아닌가. 옛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구간은 전쟁도 피해갔을 것이다. 조금 걷다보니 오르막길에 소나무의 가지들이 앞 다투어 성벽을 오른다. 아마도 화성을 쌓고 전쟁을 했다면, 이렇게 성벽을 기어오르느라 수도 없이 곤경을 치러야 했을 것만 같다.

 

 

 

젖은 풀을 헤치며 걷다

 

갑자기 길이 미끄럽다. 조금은 정리가 되었던 길이 그저 편편한 흙길로 변했다. 비는 계속 뿌려대는데, 밟을 때마다 미끄럽다. 신발 안은 이미 물에 젖어 질척인다. 풀이 무성한 길을 걸으며 좌우를 살펴본다. 아무도 그곳엔 없었다. 그저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알 수 없는 새의 울음소리만이 숲을 지키고 있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걷는다. 자칫 한 발이라도 헛디디면 그대로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저만큼 성벽이 돌출이 된 치 위에 전각이 보인다. 서포루, 화성에는 두 가지의 포루가 있다. 바로 '포루(鋪樓)'와 '포루(砲樓)'이다. 전자의 포루는 군사들을 보호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고, 후자의 포루는 포를 쏠 수 있는 구조물이다.

 

 

 

난 말 없이 200년의 역사를 지켜보았다

 

병사들을 보호하고 쉴 수 있는 포루는 모두 5개소가 있다. 휴식공간이기도 한 포루는 성곽에서 돌출된 치성의 위에 올렸다. 휴식공간과 중간 지휘소 역할도 하는 화성의 포루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사면을 개방을 한 형태이고, 또 하나는 입구에 문을 내고 사면을 벽으로 둘러친 형태이다.

 

그 포루로 지나치면 커다란 노송 한 그루가 비를 맞고 고고히 서 있다. 성안을 들여다보고 서 있는 소나무는 주변의 시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곳의 성벽은 모두 200년 전 정조의 명에 의해서 축성이 된 그대로이다, 다만 성위에 여장만 새로 올렸을 뿐이다. 그 소나무는 200년 동안 화성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듯하다. 마치 역사를 알고 있다는 듯,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화성의 성벽은 모두 병사들이 위장을 한 것

 

9월 4일, 빗길을 걷기 시작한지 한 시간이 지났다. 그냥 걸으면 얼마나 걸리려는지? 일일이 성돌과 대화를 하다가보면, 언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굳이 시간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성벽을 쌓은 돌 하나하나를 다 어루만지지는 못해도, 눈으로 이야기는 해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저만큼 성벽 위로 우뚝 솟은 서장대가 보인다. 이곳이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그 위에서 장용영의 대장군이 정조에게 보고를 하고는 했을 것이다. 그 가까이가면 기단만 장대석으로 쌓고, 그 위는 벽돌로 쌓은 부분이 보인다. 검은 벽돌이 비에 젖어 더욱 윤기가 난다. 갑자기 한 무리의 군사들이 성벽을 뚫고 쏟아져 나온다. 혼비백산한 적들은 줄행랑을 치기 바쁘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저 화성의 성을 쌓은 돌은, 돌이 아닙니다.”

“이놈이 정신이 빠졌느냐.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돌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저 돌처럼 생긴 것들은 모두 장용영의 군사들이 위장을 한 것입니다. 성벽이 갑자기 장용영의 군사들이 되어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거긴 움푹 들어간 성벽 안에 교묘히 감춘 서암문이 있었다. 암문은 군수물자를 들이거나, 적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서장대를 공격하는 적을 급습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서암문을 지키기 위해, 가까운 곳에 서포루를 두었다. 서암문을 지나면 갑자기 성이 높아진다. 바로 위에 서장대와 서노대가 있기 때문이다.

 

조금 주춤했던 비가 갑자기 세차게 쏟아진다. 아마도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이곳에서 교전을 했다고 하면, 적은 단 한명도 살아남질 못했을 것이다. 빗속에서 앞이 잘 보이질 않는데, 뒤편에서까지 공격을 받는다면 이길 장사는 없다. 잠시 발길을 멈춘다. 서암문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해본다. 오늘따라 정말로 암문의 성벽들이 장용영의 군사들이 될 것만 같다.

 

 

또 다시 20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누군가 이곳을 돌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그도 나처럼 이 성벽과 대화를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 마음 하나 주어 담아 발길을 옮긴다.

‘화성 겉돌기’라고 하니, 사람들은 화성에서 빈둥거리고 노는 줄로만 아는가 보다. 하지만 말 그대로 화성의 겉(밖)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화성을 이야기할 때 주로 안으로 돌면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화성을 보다가 보면, 그 밖으로의 경치도 만만치 않게 아름답다. 또한 성이라는 축조물의 특성상 밖이 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성곽만 보이는 성벽을 끼고 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냐고 묻는다. 그렇지 않다. 성은 밖으로 돌면서 지형지물의 이용이나, 축성의 형태, 또는 주변 경관 등을 논하지 않고는 온전한 성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화성 겉돌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12회 정도로 나누어 돌아보는 화성 겉돌기를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채석의 흔적이 있는 화양루 밖

 

수원시 팔달구 교동 3-3에 소재한 수원중앙시립도서관을 마주보면서 우측으로 조그만 소로 길이 하나 보인다. 팔달산 지석묘군을 향해 오르는 길이다. 이 길 위에는 화성의 남쪽 능선을 지키는 용도가 있고, 그 끝에 서남각루인 화양루가 자리한다. 숲길을 따라 오르면 여기저기 지석묘군이 있다.

 

지방유형무형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지석묘군의 주변에는 바윗덩어리들이 널려있다. 바위에는 돌을 쪼아내기 위해 구멍을 파 놓은 것들이 보인다. 화성을 축성할 때 이곳에서도 성벽을 쌓을 돌을 채석한 것이다. 화양루를 향해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널린 바위들의 면이 똑바로 절개된 것들이 보인다. 아마도 돌을 떼어낸 곳인 듯하다.

 

 

 

그리고 보면 이곳의 바위와 성을 쌓은 돌의 색깔이 비슷하다. 멀리까지 갈 것 없이 바로 그 밑에서 떼어난 돌로 성을 쌓았는가 보다. 화양루를 끼고 성의 서쪽을 향해 걷는다. 이 길로 성길을 따라가면 서장대를 지나 화서문을 향할 수가 있다.

 

밖에서 보는 서남암문 과연 절경일세

 

9월 4일 오후. 비는 더 세차게 퍼 붓는다. 가끔씩 바람도 불어 땀을 씻어주는 것은 좋은데, 우산이 자꾸만 뒤로 넘어가잔다. 그래도 천천히 걸음을 걸으면서 숲 냄새를 맡아본다. 비가 오는 날은 숲은 더욱 더 냄새가 강하다. 심호흡을 하면서 성 밖의 소나무들을 본다.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제 멋대로 자랐다.

 

 

 

아마 역사의 진저리를 저리도 몸으로 표현을 한 것은 아닐까? 용도 서편의 담이 유난히 낮다. 지금이야 이곳에 길이 생겼으니 이리 낮지만, 과거에는 이곳 밖으로 급경사였으니 굳이 성벽이 높아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빗발이 점점 거세진다. 그저 아무렇게나 휘어진 소나무 숲에서 짙은 숲의 향이 코를 간질인다. 이런 분위기가 못내 좋아 이 길이 늘 정겹다. 조금 더 걸어본다. 새 한 마리가 비에 젖어 나무꼭대기에서 오글거리고 있다. 어찌 보면 저 새야말로 가장 행복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날개를 툴툴 털고 가장 편안하게 날아오를 수가 있을 테니까.

 

 

 

내가 화성 겉돌기를 하는 까닭이지

 

성곽 보수를 하느라 아래 위를 다른 돌로 쌓아올린 곳을 지나치다 보면 옛 분위기 물씬 풍기는 치(성 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뒤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든 구조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서삼치, 서쪽에 있는 치 중에서 세 번째 치라는 말이다. 화성을 안에서 돌던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 서삼치 앞에 늙은 노송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노송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먼 옛날 내가 이 자리에 있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다. 저 나무는 그저 성벽을 타고 넘어 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는지, 꽤나 키를 키우고 있다. 앞뒤로 보이는 서삼치의 풍광에서 첫 번째의 발길을 멈춘다. 그저 지나치기가 아쉽기 때문이다. 이런 풍광이 있어, 내가 화성 겉돌기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성에는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바로 북수문인 화홍문과 남수문이다. 남수문가지 복원되어 수원천의 물길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북수문은 칠간수문으로, 남수문은 구간수문으로 생김새는 전혀 딴판이다. 북수문 위에 건립된 누각에 화홍문(華虹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화홍문이란 말 그대로 수문의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넘쳐흐를 때 생겨나는 물보라의 장관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팔경 중에 하나로 손꼽힐 정도다.  

 

화강암으로 쌓은 북수문

 

화홍문은 화강암으로 쌓았다.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조성한 화홍문은 보기에도 여간 단단해 보이지를 않는다. 아마 이러한 수문이기에 그 오랜 시간 많은 물을 맞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인지도 모르겠다.

 

 

바닥 역시 화강암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았다. 7개의 수구가 있는 화홍문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원래는 쇠창살로 막아 외부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수문 옆 양편에 쌓은 축대도 당시에는 없었을 것이다. 넓은 내를 이루며 흐르는 물이 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 또한 장관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 화홍문 위에 누각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봄철부터 가을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누각에 올라 쉬어간다. 여름철이면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피서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누각은 이층으로 되어있으며, 아래는 군사들이 들어가 적을 맞아 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위는 장대석으로 계단을 만들어 양편에서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지금은 문이 없지만 예전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아름다운 누각, 수문과 조화를 이뤄

 

화홍문은 전체적으로 보면 수구와 누각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누각은 2층으로 아래층은 전술에 필요한 공간이고, 이층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문이 있었을 당시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웠을 것이란 생각이다. 한 겨울에도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누각의 아래는 살창으로 문을 내었다. 그것은 앞면이 벽돌로 막혀있어, 성 안쪽으로는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누각의 밑에 성 안쪽으로 난 살창문을 들어서면 장정이 고개를 숙여서 움직일 만한 높이의 공간이 있고, 밖으로는 안혈(眼穴)을 냈다. 북수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이다. 그저 수문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누각인 듯 하지만, 철저하게 전쟁을 대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화홍문의 멋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창문의 양 옆으로는 검은 벽돌을 이용해 문양을 넣었다. 양편에 있는 문양으로 인해 누각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누각의 앙 옆의 성곽은 돌이 아닌 흑벽돌로 쌓은 점도 돋보인다. 투박하지가 않아 누각의 형태에 중압감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세한 부분까지도 미적인 감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화성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누 위에 오르면 절로 시 한 수 나와

 

화홍문의 누각 위에 오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성 밖으로 보면 우측에 연지가 있고, 성벽을 따라 바라보면 그 유명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조금 떨어져 북문이 우뚝 서 있다. 수문을 지나는 물소리가 귓전을 간질인다. 수문 안쪽은 돌로 바닥을 깔고 격차를 두어 물이 낙수치는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그런 자연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조성을 한 것이 바로 화성의 멋이다.

 

 

 

 

누각 위 마루로 깐 바닥이 편안하게 만든다. 흡사 사랑방 앞의 대청마루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주변에 두른 난간도, 어느 경치 좋은 계곡 물가에 지은 정자 같기만 하다. 전쟁을 위한 성곽이면서도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자연 안에서 꾸며진 화홍문. 성곽으로서의 기능도 뛰어나지만, 그 모습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화성을 돌아보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화홍문 역시 그 아름다움의 한 부분이다. 싸움터이면서도 커다란 자연의 조형물 같은 화성. 그리고 수문이면서도 누정과 같은 화홍문. 언제나 찾아가도, 늘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고는 한다.

 

성을 축성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돌이 필요할까? 눈앞에 보이는 화성을 바라다볼 때마다 갖는 의문이다. 화성은 잘 가다듬은 방형의 돌을 이용한 곳도 있고, 전각이 있는 곳에는 장대석으로 다듬어 사용을 한 곳도 있다. 그런가하면 그저 막 쌓기를 한 성벽은 굳이 다듬지를 않았어도, 나름대로 잘 맞게 돌을 이용했다.

 

그 화성의 성돌에 이용한 채석장은 수원 곳곳에서 보인다. 가깝게는 팔달산 지석묘가 있는 곳으로부터 서둔동 일대, 숙지산 등, 인근지역에서 돌이 있는 곳은 모두가 채석을 했을 것이다. 그 중 서둔동 농촌진흥청 내에 속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7호인 ‘여기산 선사유적지’ 안에 있는 채석장소를 찾아갔다.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여기산

 

화성의 돌을 채석하던 숙지산 채석장(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은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산 41번지인 화서전철역 옛 연초제조창의 건너편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일대는 화성의 성돌을 채석해 공급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일대에서 채석한 돌은 수레를 이용하여 치도를 통해 화성의 축성 장소까지 운반을 하였다. 현재 선사유적지가 있었던 여기산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이곳 여기산 선사유적지는 서호 서쪽의 구능산에 있다. 1979~1984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숭실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곳이다.

 

 

 

이 여기산 선사유적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경질무문토기, 두드림무늬토기 등이 출터가 되어 이곳이 철기시대 전기와 삼국시대 전기(AD 0 ~ 300)의 집터가 발견이 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집터의 시설 중에서는 온돌시설의 초기형태라 할 수 있는 부뚜막이 있는 화덕자리가 발견이 되기도 했다.

 

여기산 채석흔적을 찾아가다

 

농촌진흥청을 들려 여기산에 오르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산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입산금지’지역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천천히 오르기 시작하는 여기산은 흙길이다. 비가 온 뒤라 그동안 말랐던 풀과 나뭇잎들이 새롭게 색을 만들어 가고 있다. 흙길을 밟는 감촉이 위로 전해진다. 도심 한 가운데 살아있는 자연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위로 길을 따라 오르니 우장춘박사의 묘가 보인다. 그리고 조금 후, 숲길 앙편에 세워놓은 석주가 있다. 아마 이곳에 예전 절터라도 있었던 것인지. 그 석주 좌측으로 바위가 보인다. 그리 크지 않은 바위. 밑에는 작은 바위들이 몇 개 널려있다. 이 바위를 보면서 생각을 해본다. 처음에는 얼마나 큰 바위였을까? 그리고 왜 이 바위만 남아있는 것일까?

 

바위 위에 남아있는 성혈, 혹 지석묘는 아니었을까?

 

바위에는 성벽을 뜨기 위한 자국이 남아있다. 바위의 앞면이 편편한 것을 보니 이곳에 쐐기를 박아 잘라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위의 중간 부분에도 쐐기를 박기 위한 자국이 있다. 그런데 왜 단단한 이 바위를 성돌로 사용하기 위해 쪼개다가 그만두었을까? 바위 의편을 보니 성혈인 듯한 흔적이 보인다.

 

커다란 바위위에 남아있는 성혈의 흔적. 그렇다면 이 바위돌은 혹 지석묘는 아니었을까? 이곳이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였다는 점이, 더욱 이 바위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지석묘인 고인돌은 탁자식, 바둑판식, 그리고 방을 땅 속에 두고 위에 커다란 돌을 얹어놓는 개석식이 있다.

 

수원인근의 오산 등지에서도 이 개석식 고인돌이 집단으로 발견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커다란 바위가 지석묘일 가능성을 유추해본다. 문화재 답사를 20년이 넘게 하다가보니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보는 법이 없다.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다 생각해 본다. 그래서 하나의 바위를 두고도 쉽게 곁을 떠나지 못한다. 아마도 그동안 생긴 고질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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