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251호 파사성은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다. 파사성은 신라 파사왕(80∼112)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암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해발 235m 정상을 중심으로 5각형 모양의 둘레로 경사가 가파른 곳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성 둘레는 약 943m로, 높이 4 -5m 견고한 암반층을 기반으로 하여 쌓았다. 잘 다듬은 직사각형 돌을 이용한 초축성벽과 부정형의 쪼개진 돌을 이용한 추축성벽이 있는데, 이는 여러 시기에 걸쳐 축조되어 오늘날 구조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 구조물로는 치 3개소, 문지 2개소, 우물지 1개소, 수구지 1개소 등이 있다. 파사성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보인다. 성벽 발글조사중 출토된 삼국시대 유물은 대부분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류였으며, 축성기법 또한 신라 산성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파사성은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여주, 이천, 양평으로 가는 길목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더욱 여주에서 양평을 흐르는 남한강을 한 눈에 볼 수가 있어 이 파사성의 중요성을 알 수가 있다.

 

  
아직은 복원이 끝나지 않아 군데군데 무너진 곳을 볼 수 있다.

  
성위로 오르면 양평방향의 남한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미 고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여주 북방 53리에 있으며, 둘레가 3만8825척의 석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595년(선조28) 3월에 비변사의 요청으로 승 의엄을 도총섭으로 임명하여 수축하도록 하였다. 의엄은 성안에 집을 짓고, 성밖의 구릉과 평지는 둔전을 마련하고 군사의 양식을 마련하였으며, 무너진 성벽은 승인을 동원하여 수축하여 1597년에 공사를 마치었다"고 했다.

 

이 파사성에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파사왕 때 남녀 두 장군이 내기를 했다. 남장군은 나막신을 신고 중국을 다녀오고, 여장군은 파사성을 쌓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장군이 성을 다 쌓기전에 남장군이 돌아왔다. 그 소식을 들은 여장군은 마지막으로 성을 쌓을 돌을 양평군 개군면 석장리에서 날라오다가 놀라는 바람에 치마가 찢어져, 그 마을에 돌담이 쌓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파사성은 미완의 석축산성이라는 것이다.

 

  
파사성은 뚜벅이 여행족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복원이 된 성벽. 견고한 석축산성임을 알 수 있다

전설이야기를 생각하며 천천히 성벽 안으로 난 길을 걸어본다. 아직은 복원이 다 되지 않아 여기저기 널부러진 돌무더기가 오히려 정감이 간다. 잘 복원된 동문지 성벽들이 단단한 석축산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 밖으로 걷다보면 어느새 파사산 정상에 도착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절경이라고 칭찬을 늘어놓는다.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본다. 이 곳은 주변이 모두 30~40m 낮은 구릉지대이기 때문에, 사방 어디를 보아도 한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중요한 전략지라는 것이다. 이곳에 산성을 쌓은 것도 그러한 지리적 중요성 때문이다.

 

  
정상에 오른 뚜벅이 연인들

  
파사성의 정상에 서 있는 안내표지목

  
성 위에서 바라본 여주방향의 남한강.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아이들 손을 잡은 젊은 부부들도 성내를 걷는다. 한 쌍의 연인들은 정상에 올라 밑으로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환호를 한다. 신라 때부터 수차례 축성을 해 온 파사성. 산 높이나 성벽 길이나 걷기에는 적당한 것 같다. 뚜벅이족의 주말 나들이 장소로는 최적이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정리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할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역사와 건강이 함께하는 파사성. 전설이 있어 더욱 좋은 곳이다. 산성을 한 바퀴돌아 산성 밑에 자리한 막국수촌에 들려, 시원한 막국수 한 그릇에 산성의 가을이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곳이기도 하다. 

기온이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산을 오르는 행위는, 그야말로 제 정신이 아닌 행동이다. 그것도 무슨 돈벌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날이 좀 선선해 진 다음에 해도 될 텐데 말이다. 늘 새로운 것을 써야 하는 문화재 답사는, 웬만한 정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연 8일 째 찜통더위라는 8월 4일.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고달사지’를 찾았다. 꼭 고달사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위 해목산 중턱에 있는 상교리 석실묘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기념물 제198호인 상교리 고려 석실묘는, 고달사지 느티나무에서 800m 정도를 해목산으로 오르면 된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길을 걷다가 보니 옆으로 차들이 지나간다. 팍팍한 여름의 길은 차가 천천히 지나가도 뿌옇게 먼지가 인다. 그 또한 참기 힘든 일이다. 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소리가 들린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이런 날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니”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이 맞는 듯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33도가 넘었다는 시간에 멀지 않은 길이라고 해도,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오를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잘 정리가 된 고달사지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원종대사 승탑을 만날 수가 있다. 그 못미처 해목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안내판에는 ‘여주 상교리 고려 석실묘 500m'라고 적혀있다. 그동안 산으로 오르면서 이 500m에 대한 아픈 기억이 생겼다. 몇 곳의 문화재를 답사를 하다가, 500m 안내판을 보고 길을 나서 더위에 몇 번인가 탈진이 오는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벌써 3번 째 오르는 곳이다. 처음 100m 정도만 가파를 뿐, 그 다음부터는 평지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8월 복중에 오르는 길이다. 그리 만만치가 않다. 산을 오르면서 만난 나무들도 찜통더위에 지쳤는지, 모두 잎들이 기운없이 늘어져 있다. 며칠만 이 더위가 계속되면 농작물에도 심각한 정도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한다.

 

 


 

주변 정리가 잘 되어있는 석실묘


석실에 도착하니 주변이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다. 세 번째 오른 석실묘이지만,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모습은 처음이다. 사실은 며칠 전에 누군가 전화를 했다. ‘여주 고달사지 뒤편 석실묘에 잡풀이 자라 엉망이다’라고. 그래서 오른 해목산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것을 보니, 이 더위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석실로 조성한 이 고분은 1983년 11월 ~12월에 한양대학교 박물관 발굴단에 의해서 완료가 되었다. 발굴 당시 상감청자 파편 등의 유물로 보아 고려 때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석실은 고려 때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발굴 전에 석실의 기단부는 완전히 흙더미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불탑의 기단을 연상케 하는 방향기단


석실의 지상 위에 쌓인 돌로 조성한 방향기단과, 그 밑에 연도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석실로 구분이 되어있다. 하부의 원형의 석실에는 연도가 달려 있고, 상부에는 방형의 이층으로 된 기단이 쌓여있어 ‘상방하원 석실묘’라는 명칭을 붙였다. 지하의 석실은 원형으로 돌 축대를 쌓고, 그 앞으로는 연도를 조성해 열쇠모양의 형태처럼 조성하였다.


석실의 위편은 큰 돌 두 장을 놓아 석실을 덮고 있으며, 그 위에는 이층으로 제단 모양으로 된 기단이 있다. 1층 기단은 동서가 442em, 남북이 280cm, 높이가 46cm 정도의 장방형이고, 2층 기단은 그보다 조금 적지만 높이는 50cm 정도이다. 현실 벽의 높이는 167~175cm 정도이다.

 


고려 말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실묘는, 아래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로 미루어보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석실 위에 돌탑처럼 방형기단을 조성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찾아간 상교리 고려 석실묘. 말끔하게 정리한 문화재의 주변이, 잠시 그 찜통더위를 잊게 만든다.

전주천을 굽어보는 한벽당 앞 다리 쪽에서 올려다보면, 산마루 가까이 7부 능선쯤에 커다란 입석불상이 서 있는데 이곳이 동고사다. 동고사는 전주의 사방에 세워진 절 중 하나로, 남고사, 서고사, 진북사와 더불어 사방에 세운 절 중 한 곳이다.


차를 타고 올라도 힘든 길이다. 6월 7일 5시가 넘어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다.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이라 숨이 턱에 닿는다. 전주의 남고산성과 더불어 마주하고 있는 동고산성을 오르기 위해서다. 동고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조선 순조 때 건너편에 있는 산성을 '남고산성'이라 부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헌강왕 때 도선스님이 창건한 동고사


현재 동고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전주의 동쪽에 자리한 절이라 하여 '동고사'라 칭했다고 한다. 동고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되었던 것을 조선조 헌종 10년인 1844년에 허주 스님이 재건을 하고, 그 후 1946년에 영담스님이 대웅전 등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동고사는 신라 경순왕의 둘째아들이 '범공'이라는 이름의 스님이 되어, 도를 닦으며 나라를 잃은 설움을 달랬던 곳이라고도 한다. 동고사를 오르니 전주 시내가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그만큼 동고산성 인근 위편에 자리한 절이다. 절에는 대웅전과 종각, 산신각, 염불원 등의 전각이 있다. 전각 아래로는 언제 쌓은 것인지 돌을 쌓아 탑을 여러 개 조성하였는데, 담장이가 타고 올라 고찰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견훤의 왕궁 터엔 주추만 남아


동고사 인근에 견훤의 왕궁 터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 나섰다. 동고사에서 내려오다가 단군성전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난 길을 돌아 올라가면 동고산성의 안내판이 있다. 동고산성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44호로 전주시 완산구 교동과 대성동에 걸쳐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왕궁 터라고 전해진다.


견훤은 신라 효공왕 4년인 900년에 완산주(현재의 전주)에 '전주성'을 쌓고 도읍지로 정했다. 그 후 936년까지 37년간 존속을 했다. 1990년 이곳을 발굴할 때 전면 22칸 84.4m, 측면 3칸 16.1m, 총 66칸의 건물지가 발견이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단일 건물지로는 최대의 크기고, 이곳이 견훤왕의 궁성이었던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잡초가 우거진 궁궐터에는 커다란 돌 들이 나란히 놓여있다. 다듬지 않은 넓적한 이 돌들이 당시의 주초였는가 보다. 앞으로는 축대를 쌓았던 흔적인지 가지런히 돌들이 남아있다. 세월이 변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백제부흥을 꾀했던 견훤은 37년 만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역사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발굴된 자료에서 견훤의 궁터임을 알 수 있어


이곳을 견훤의 궁터로 추정하는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자료와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해서다. '전주성황사중창기'에는 이곳을 <견훤고궁허>라 하였고, 1980년 발굴된 건물지의 기와 명문에서 '전주성'이라는 글자가 발견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城)'자가 박힌 기와는 왕궁 터에서나 쓰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이 기와의 연꽃무늬는 신라 말 고려 초기에 것으로,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한 시기와 일치한다.

 

 


역사는 비정한 것인지.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이곳 완산주에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불과 37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동고산성 안에는 여기저기 건물지가 보이는데, 아마 궁을 중앙에 두고 앞으로는 군막들이 있었고, 뒤편으로는 또 다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보니 이곳이 천혜의 조건을 가진 성터로 보여진다. 하지만 37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낸 후 사라진 후백제. 그러나 이곳은 영원한 백제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아닐는지. 그 넓은 왕궁터에 남은 주춧돌만 보아도, 당시 견훤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송도 명기인 명월이 황진이가 벽계수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지었다는 시조이다. 세월은 덧없는 것이라. 황진이의 시는 전하지만, 벽계수는 대체 어떤 이유로 첩첩산중 찾는 이 없는 외로운 곳에 유택을 마련했을까?

 

그러고 보면 이곳을 다녀온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문막에서 원주로 가는 도로 우측 편에 보면 ‘동화사’라는 이정표와 함께, 벽계수 이종숙 묘역이라는 입간판이 있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큰 돌 하나를 세워 세종대왕의 증손인 벽계도정 후손묘원이라고 썼다. 양편으로 밭이 있고 임도를 따라 조금 들어가다가 보면 벽계수 묘역이 우측 산길로 400m 라는 표시가 보인다.

 

 

찾는 이 없는 벽계수를 찾아가다

 

조금은 가파르다 싶은 산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고묘가 한기 보이고, 그 앞에 벽계수묘역이 100m 전방에 있다는 표시를 본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 산90번지, 바로 벽계수와 부인인 해평 윤씨가 함께 잠들어 있는 유택이다. 세종대왕의 증손으로 알려진 벽계수는 왕족이다.

 

세종대왕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영해군이 태어났고, 영해군의 차남은 ‘길안도정’이다. 이 길안도정의 3남이 바로 황진이와 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뻔한 벽계도정 벽계수이다. 여기서 도정이라 함은 세자의 증손 혹은 대군의 손자나 세자의 아들 및 적증손 에게는 정3품 계자를 제수하고 도정이라고 했다. 벽계수 또한 도정이라는 품계를 제수 받았다.

 

 

 

현실과 거리가 먼 벽계수의 사랑

 

벽계수는 중종 3년인 1508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사망한 년대는 불분명하다. 품계는 명선대부에 올랐으며 휘는 종숙, 호는 현옹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혼탁한 세상을 싫어하며, 빗대어 쓴 시가 많이 전한다. 35세인 1542년에는 관찰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흔히 드라마 속의 벽계수를 기억한다. 황진이와 서로 사랑놀음을 하면서 밀고 당기는 가운데, 자신이 연모하고 있는 여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거리가 먼 것일까? 황진이는 송도 부근 성거산에 있는 화담 서경덕을 찾아가, 그를 유혹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는 다시 서경덕을 찾아가 스스로 송도에 꺾을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박연폭포요, 둘째는 화담 서경덕이요, 셋째는 바로 황진이 자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유명한 송도삼절이 생겨난 것이다.

 

벽계수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일까?

 

그러나 막상 청산리 벽계수의 주인공인 벽계수는 황진이의 그 애간장을 녹이는 시조 한수로 그만 낙마를 하고, 황진이의 마음속에서 멀어졌다. 문막읍 동화리 산 속에 있는 벽계수 이종숙의 묘, 묘지 위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있다. 앞에 석물 몇 기는 최근에 후손들이 세운 듯하다. 묘역 한편에 있는 석물을 보니, 꽤나 오래된 돌이다.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묘역은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묘역이 배향한 방향을 보니, 이 길로 가면 송도로 가는 방향은 아닐까? 한참이나 묘역 앞에 앉아 벽계수와 황진이,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기억해 낸다.

 

누군가 묘역 앞에 술병을 치우지 않고 갔다. 그럴 줄 알았으면 막걸리라도 한 통 받아올 것을. 내려오는 길에 숲속에서 나무 부딪는 소리가 나 쳐다보니, 커다란 노루 한 마리가 산등성이를 향해 치닫는다. 아마도 벽계수의 영혼이 그리운 황진이를 찾아 뛰어가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 사라진 숲만 쳐다보고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한 자료가 이제는 CD로 3,000장이 훨씬 넘었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으니, 아마도 김정호 선생만큼은 안되도 이제는 구석구석 꽤 돌아다닌 듯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 문화재의 10분지 1도 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꼭 쓰고 싶은 책이 4권 정도이다. 하나는 정자요, 또 하나는 고택이다. 그리고 마애불에 대한 책도 한 번은 내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성곽이다. 성곽은 가는 곳마다 힘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한 바퀴를 돈다. 그것은 언젠가 성에 대한 역사이야기가 아니라, 성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쓰고 싶어서이다.

 

 

덕주공주가 청건했다는 덕주사를 가는 길

 

성을 보면 그 성곽이 얼마나 견고하게 쌓여졌는지 알 수가 있다. 월악산에 있는 덕주사를 오르다가 만나는 덕주산성.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덕주공주가 신라 말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덕주사를 오르는 길목에 만날 수가 있다.

 

원래 이 덕주산성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덕주공주는 이곳 덕주사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인 1256년에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덕주산성의 동문인 덕주루의 밖과 성안

 

월악대왕의 가호가 있다고 전하는 덕주산성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다. 조선조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3개의 성문이 남아았는 덕주산성

 

덕주산성은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이다.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인 월악루, 동문인 덕주루, 북문인 북정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한창 복원을 하고 있는 덕주산성의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다. 아름답게 조성을 한 월악루는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나 된다.

 

 

덕주루 성문의 안편 무지개아치와 덕주산성의 성벽 외부

 

덕주골 입구에 서 있는 동문인 덕주루는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 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으로 쌓여있다. 아는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시대에 따른 성을 쌓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겹으로 된 철옹성에는 슬픈 사연이 많아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 하 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동문주변), 그 외곽으로 하성이 있으며(제3곽)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 등 첩첩히 쌓여진 철옹성이다. 이러한 성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하여, 성문을 축조한 것일까? 권력이 무엇인지 참 슬픈 우리 역사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덕주루라고 현판이 붙은 동문. 보기에도 견고한 성이다. 문루 위로 올라가면 주변으로 쌓여진 성곽이 얼마나 첩첩이 쌓았는지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단단하게 쌓은 성곽이 어떤 일로 다 무너져 내렸을까? 역사란 이렇게 모든 것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북문인 북정문과 문 위에 복원한 문루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를 돌아보고 명오리를 지나 나오면 새터 말 도로변에 북문인 북정문이 있다. 최근 보수를 한 북정문은 평지에 있어서인가 동문인 덕주루보다 더 견고하게 축조가 되어있다. 북정문 곁에 놓여진 돌들을 보면 그 크기가 2m 가 넘는 것들이 있어, 이 덕주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북문 주변에 놓인 옛 성돌의 크기를 보면 덕주산성의 견고함을 알 수가 있다(위) 아래는 돌 축대를 쌓기 위해 사용한 석주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 역사의 훼손된 부분을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저 어디를 가나 온전히 보존이 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역사들. 그 안에는 우리 선조들의 땀과 피와 한이 맺혀져 있다. 그런 것 하나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과연 먼 후대에 우리의 자선들에게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그러한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는 길은, 우리의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전해주는 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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