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영통구 창룡대로 265에 소재한 수원박물관에는 야외전시장이 있다. 이 전시장에는 많은 비와 수원시에서 발굴이 된 무덤 등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수원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기관과 문중으로부터 기증받은 유물과 수원 관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물을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야외 전시장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수원에서 관리를 지낸 인물들의 업적을 나타내는 선정비, 의장석물, 묘제석물, 생활 유물 등이 야외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야외전시 유물 중에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 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목동 석곽묘(石槨墓)’가 있어, 수원박물관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의 눈길을 끈다.

 

 

통일신라시대의 매장 문화를 알 수 있어

 

석곽묘는 일명 돌덧널무덤이라고도 부른다. 돌덧널무덤은 지하에 네모난 구덩이를 파고 자연 할석이나 자갈돌을 쌓아 직사각형의 공간을 마련한 무덤을 말한다. 여기에 시신을 직접 묻거나 목관에 넣어 매장한 후 판돌이나 나무를 이용해 뚜껑을 덮었다. 이 야외 전시장에서 만나 볼 수 있는 돌덧널무덤은 이목동에서 발굴한 것을 옮겨온 것으로 수원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의 석곽묘이다.

 

발굴상태 그대로 옮겨와 복원을 한 석곽묘는 머리 받침석이 있고, 장정 한 사람이 누워있을 정도로 땅을 판 후 사방을 돌을 쌓은 형태이다. 이 석곽묘의 발굴 당시 회청색의 연질 완과 연황색의 연질 대부완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런 통일신라시대의 석곽묘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경주 대릉원에 있는 천마총이다.

 

 

23기의 고분이 모여있는 경주 대릉원

 

대릉원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에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를 지냈다라는 기록 때문이다. 이 대릉원에는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경주시 황남동에 소재한 12만 평이 넘는 거대한 고분군이다.대릉원에는 23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 곳으로, 경주의 무덤들은 릉, , 총 등으로 구분 짓고 있다.

 

이 중에서 릉은 임금을 매장한 고분이고 묘는 왕이 아닌 사람들의 무덤, 그리고 총은 왕릉으로 보이지만 매장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치가 않을 때 붙이는 명칭이다. 하기에 경구 전역에 산재한 많은 묘 중에는 미추왕릉과 같이 릉이라는 명칭이 붙은 묘와, 김유신 묘와 같이 왕이 아닌 사람들의 묘, 그리고 황남대총이나 천마총처럼 총이라는 명칭이 붙은 묘명이 있다.

 

 

전설과 함께 문화재이야기를 들려주자

 

미추왕은 신라 제13대 임금이다. 경주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은 삼국사기에 미추왕은 백성에 대한 정성이 높았다. 5명의 신하들을 각처에 파견해 백성의 애환을 듣게 하였다. 재위 23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대릉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추왕의 릉을 죽릉혹은 죽장릉이라고 부르는데 그 연유가 전한다.

 

신라 제14대 왕인 유례왕 때 이서국의 침입이 있었는데, 이때 어디선가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수많은 병사들이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난 뒤 사라져 버렸다. 삼국사기 제2권 신라본기 제14대 유례 이사금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유례 이사금 14년인 297년에 보면 봄 정월에 지랑을 이찬으로 삼고 장흔을 일길찬으로 삼았으며, 순선을 사찬으로 삼았다.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우리 편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막았으니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왔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달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물리친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미추왕릉) 앞에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앞 임금이 음병으로 싸움을 도왔다고 했다

 

물론 이 전설은 수원지역이 아닌 경주지역에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수원박물관 야외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돌덧널무덤인 석곽묘를 보면서 설명을 한다면, 쉽게 석곽묘와 릉의 비교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고민할 때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일기도 좋아야하지만, 적지 않게 들어가는 답사 경비로 인해 늘 주머니가 가벼워 지기 때문이다. 지난 6일 돌아본 보령시의 문화제를 답사할 때도, 비는 간간히 뿌렸지만 걸음을 재촉했다. 하나라도 더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령시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그 중에도 남포면 읍내리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5호인 남포관아문을 만났을 때는 신이 난다. 이렇게 읍성과 함께 있는 문화재를 한 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한 곳에서 진서루와 내삼문, 외동헌 등을 만날 수가 있고, 거기다가 충남 기념물 제10호인 읍성까지 돌아보았으니.

 

 

한 곳에서 만난 많은 문화재들

 

남포관아문은 조선시대 남포현의 관아 건물이다. 앞에는 중층 누각인 진서루가 서 있고, 그 뒤편에 내삼문을 들어서면 동헌 마당을 지나서 외동헌을 만나게 된다.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무리를 해서 찾아간 곳이다. 진서루 옆 은행나무에서 많은 은행들이 떨어져, 은행나무 특유의 냄새가 난다. 날이 궂은 날에는 냄새가 더욱 심하다.

 

진서루는 외삼문으로 옛 남포현의 출입문이다.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2층 문루인데,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팔작지붕집이다. 아래층은 삼문을 달았고, 2층은 누마루를 깐 후 사면에 난간을 세웠다. 그 위에 올라서면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이 누각에서 남포현감은 주변 경관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동헌의 출입문인 내삼문은 정면 7,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1칸은 출입문으로 큰 대문을 달고 나머지 칸은 방으로 꾸몄다. 중앙 칸은 한단 올려 맞배지붕으로, 좌우의 방은 지붕 옆면이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이 문은 출입문 앙 옆을 살창으로 꾸민 특이한 형태이다.

 

남포현의 업무를 보던 외동헌은 대청으로 정면 7,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건물이다. 앞면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이렇게 외삼문인 누각과 옥산아문, 동헌 등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옛 동헌답게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중앙집권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전국의 아문이 똑 같은 형태로 축조되었다. 남포관아를 돌아보고 난 뒤, 읍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읍성은 동헌 뒤편에 성곽이 이어진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읍성

 

충청남도 기념물 제10호인 남포읍성은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이다. 남포읍성은 차령산맥 서쪽 끝자락의 구릉에 돌로 쌓은 성으로, 남포는 백제 때 사포현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읍성은 고려 우왕 때 서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이었는데, 공양왕 2년인 1390년 군대가 머물 수 있는 진영을 추가하여 완성하였다.

 

남포읍성의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의 바깥쪽 벽은 돌을 이용하여 직각으로 쌓았고, 성벽의 안쪽은 흙으로 쌓아올렸다. 동쪽과 서쪽, 남쪽 세 곳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4m의 높이로 성 바깥에 설치하는 또 하나의 성벽인 옹성을 둘렀는데, 1m이상의 큰 돌로 축성하였다.

 

 

남포읍성은 성벽이 꺾이는 부분에는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치성을 쌓았으며, 그 양쪽 성벽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도 보인다. 성 안에는 세 채의 관아건물인 진남루와 옥산아문, 외동헌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동서에 80높이로 배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가을이 열리고 있는 성벽

 

기록에 의하면 읍성 안에 우물이 세 곳에 있었다고 한다. 남포읍성은 서해안의 요충지로 왜구를 경계하는 한편, 해상 교통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아문과 성안에서 읍성을 돌아보고 난 뒤, 성 밖으로 향했다. 비는 멈췄지만 바람이 세차게 분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과 함께 조화를 이룬 남포읍성이 한 장의 그림을 방불케 한다.

 

 

성을 따라 조금 걸어본다.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은 남포읍성. 한 곳에서는 마을주민인 듯한 여인이 밭에서 무엇인가를 수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편 성벽에는 늙은 호박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이 읍성에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언제 떠난 것일까? 답사를 하면서 괜한 질문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그 답도 내 멋대로 지만 말이다.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62-1 외에 소재하고 있는 사적 제140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독산성은 다른 이름으로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독산성은 선조 25년인 159212월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여 명을 이끌고 이 곳에 주둔하여, 왜병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곳이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원래 백제 때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한다. 후에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중요한 거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조 27년인 1594년에는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인 1602년에 당시 부사 변응성이 다시 보수하였다. 그 후 정조 16년인 1792년과 20년인 1796년에도 다시 공사를 하였다.

 

 

전통사찰인 보적사가 성내에 있어

 

독산성의 성내에는 전통사찰로 등록된 보적사가 자리하고 있다. 옛 암문으로 추정되는 곳에 해탈문이라는 작은 간판을 걸어놓은 곳으로 들어가면 보적사 경내가 되고, 그 뒤편에는 세마대지가 보인다. 지금은 세마대라는 누각 한 채를 지어놓았다. 보적사는 삼국시대 독산성을 축성한 후 현재의 터에 전승을 위해서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중건을 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조 22대 정조가 용주사를 건립할 때 재건되었을 것으로 전하는 약사전과 요사 3동이 있었다. 1987년 사적의 경관에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증, 개축하였다.

 

 

독산성의 성 둘레는 3,240m이고 문도 4개소이나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이 곳에는 세마대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 권율 장군이 산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다는 이야기이다.

 

독산성을 뒤덮은 잡풀

 

13일 오후, 독산성을 찾았다. 보적사를 둘러보고 난 뒤 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독산성은 산 위에 축성을 한 산성이라 그런지 성벽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성은 가파른 벼랑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낮은 성벽으로 쌓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의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인지 모르지만 낮은 성벽으로 인해 사람들이 성벽을 타고 오를락 거리기도 한다.

 

 

사진을 촬영하면서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독산성이다. 성은 지형에 따라 대문지와 암문, 그리고 치가 여기저기 보인다. 그런데 성벽 위로 걸으면서 보니, 성벽이 보이지 않는 곳이 상당부분이 있다. 도대체 어디가 성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성벽 주변으로는 넝쿨로 자란 잡풀이 무성하고, 그 넝쿨식물들이 성벽으로 타고 올라 성을 모두 덮어버리고 있다.

 

암문 앞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그나마 암문 입구에는 나무까지 자라고 있다. 암문을 접근을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명색이 사적으로 지정이 된 문화재인데, 어찌 이렇게 방치를 한 것일까? 성이 낮아 사람들의 손으로 성벽을 가득 덮은 잡풀을 얼마든지 정리를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성벽에 가득한 잡풀 걷어내고 관리해야

 

여기저기 쓰인 우리 모두 문화재를 보호합시다-오산시라는 푯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이것은 성이 아니고 잡풀더미라고 표현을 해야 맞을 듯하다. 여름철에 비가 내려 잔뜩 자라버린 잡풀들이, 온통 성벽을 타고 올라 성이 보이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보적사가 자리한 주변에만 성이 깨끗하게 보인다. 높지도 않은 성벽에 가득한 잡풀들. “이렇게 문화재를 관리하면서 무슨 문화재를 보호하자고 하지”, 성을 돌던 관람객의 푸념어린 소리이다. 한 곳의 치에는 누군가 휴지까지 버려 볼썽사납다. 말로만 하는 문화재 사랑. 이런 모습으로 휴일을 맞아 독산성을 찾아 온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과연 문화재를 보호하자고 할 수가 있을까? 관련 지자체의 반성이 아쉽다.

 

 

지금은 한가한 포구의 모습만 보이고 있다. 이곳이 예전에는 수군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한 때는 충청도 수군의 총 사령부가 있었다는 곳. 충청수영성은 경관이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천항을 내려다보고 있는 충청수영성. 벌써 몇 번째 찾아온 충청수영성. 이곳을 찾았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번지 일대에 소재한 사적 제501호인 보령 충청수영성을 찾은 것은 106일이다.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인 1896년에 폐영이 되었다. 충청수영성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 142척에 수군 수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몰 즈음에 만난 오천항의 장관

 

10월의 해는 짧다. 더구나 잔뜩 흐린날이라 그런지 오후 5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어둑하다. 차를 달려 찾아간 보령시 오천면 충청수영성. 지금은 아치로 조성한 서문의 석문과 진휼청만이 남아있다. 서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바닷가로 삐죽 얼굴을 내민 성벽 위에 진휼청이 서 있다.

 

진휼청은 흉년이 들면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했던 곳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진휼청은 충청수영이 폐지된 후 민가로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을 하고 있다. 진휼청은 정면 5, 측면 2칸의 집이다. 진휼청은 그리 크지 않은 집으로 대청과 부엌, 온돌방, 툇마루 등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진휼청을 돌아본 후 성벽 위에 올라서 오천항을 내려다본다. 저 오천항에 수많은 어선들이 묶여있는 곳에, 예전에는 모두 군선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충청수영은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왜구의 침탈을 방지했다고 한다.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는 충청수영성. 해질녘 내려다보는 오천항은 숨을 죽인 듯 고요하기만 하다.

 

충청지역 해로의 요충지 충청수영성

 

선조 29년인 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인 15977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충청수영은 서해안을 지켜내는 요충지였지만, 많은 아픔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곳이다. 서해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는 성내의 정자인 영보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전한다. 서문 밖의 갈마진두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성을 한 바퀴 돌아보다.

 

해가 설핏하다. 서둘러 성벽 위를 걸어 한 바퀴 돌아본다. 근래 들어 도로개설이나 해변의 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872년에 그려진 충청수영성의 고지도에 보면 세 곳의 성문을 비롯해. 한 곳의 서소문과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

 

 

현재는 객사와 내삼문이 남아있지만, 한때는 충청도 수군 전체를 관리하던 성이다.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인 충청수영성은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 요해처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알아볼 수 있는 역사적인 성지이다. 귀중한 유적인 충청수영성의 영보정 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서해. 잔뜩 검게 낀 구름으로 인해 서해로 떨어지는 일몰의 장관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424(), 채인석 화성시장과의 인터뷰를 마친 후, 당성으로 올랐다. 당성은 옛 명칭으로 당항성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름 그대로 당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곳이다. 4월인데도 날이 덥다. 성벽 위로 걷는데, 숨이 가쁘다. 그도 그럴 것이 오후에 나선 답사 길을 재촉하느라,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삼국이 번갈아 차지했던 교통의 요지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복원 중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세 곳 정도로 나누어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석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148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은 그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토축 산성이었다, 그 길이는 336m이다.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복원을 마친 곳 외에 드문드문 옛 성의 흔적들이 잡풀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망해루터와 건물지, 우물터 등이 남아있어

 

얼마를 돌아보니 지대가 높은 곳에 돌이 쌓여있고, 뒤편으로는 넓은 터가 보인다. 아마도 건물이 들어있던 곳 같다. 앞에는 '망해루 터'라는 석비가 있다. 이곳에 망해루라는 누각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망해루는 목은 이색이 지은 남양부 망해루기에 보면, 고려말 남양부사 정을경이 고을의 치소에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직은 복원이 되지 않은 곳에 문지인 듯한 곳이 보인다. 성을 한 바퀴 돌아 밑으로 내려오니, 우물터가 보인다. 이 우물터는 당성 안에 식수를 공급한 곳으로 추정한다. 지름이 50cm 정도에 깊이는 1m 정도로 비교적 작은 우물이다. 우물은 원형으로 땅을 판 후, 주변에 돌을 쌓아 올렸다.

 

 

당항성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

 

원효(617-686)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이었다.

 

원효대사의 행적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당으로의 유학을 시도했던 원효대사가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대사는 45세에 두 번째로 의상대사와 함께 이번에는 해로로 해서 당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항성 아래에 도착을 하였다. 당항성 아래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원효대사는 거기서 깨들음을 얻는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며 다시 서라벌로 발길을 돌렸다. 원효대사의 이 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채인석 화성시장 대담

 

- 과거 당성의 무역항으로서의 역할과 역사적 가치는 무엇인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 당성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당항성으로 추정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 신라가 중국과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특산물을 수출하던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헌 자료의 부족 등으로 그 동안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간 2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석축 성벽, 토석혼축 성벽과 망해루지 및 다각형건물지 등의 내부 건물지가 확인됐습니다. 특히, 산성 내부의 시설들은 군사적행정적 건물들뿐만 아니라 원형(다각형)의 건물지를 통해 당시 당성이 의례적 기능을 하고 있었던 국가적으로 핵심적인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성이 원료 대사의 대오각성의 현장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661, 원효와 의상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중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고 그 날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진리를 깨닫고 발걸음을 돌렸다는 이야기, 즉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의 큰 깨달음을 얻은 현장이 당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입니다. 이렇듯, 당성은 문화재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우리 53만 화성시민은 물론이고 전 국민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중요한 정신 문화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 화성시의 당성 복원을 위해 그간의 노력과 향후 계획은?

우리 화성시는 그간 2차례(1998, 2000)의 발굴조사를 실시했으며, 639m의 성곽을 복원했으며, 또한, 당성을 종합적으로 정비하고자 지난해 10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127일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화성시 주최,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당성의 황해연안교류에서의 역할(당성의 역사지리적 가치)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이 세미나를 통해 당성의 황해 교통로,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의 당성의 역사적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을 통해 우리시는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당성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동안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당성과 남양지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졌으며, 앞으로 당성 정비에 있어 초석으로 작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시는 당성 종합정비계획을 통해 당성의 성벽과 내부시설물 정비는 물론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 당성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당성복원과 관련한 세부사업으로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해 주차장, 진입도로 등 부대시설 조성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당성 주변 토지 매입 시작하고, 201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시작해 2017년까지 연차적으로 착수하려 합니다. 또한, 2014년부터 성곽, 건물지 복원과 외곽지역 종합정비를 위해 성내 시설물 보수 공사와 당성의 성벽과 내부 시설물, 성벽(석축), 망해루지 등의 복원을 연차적으로 착수할 계획입니다.

 

또한, 안내시설, 편의시설, 안전 및 방제시설을 설치하고 탐방로 정비, 홍보관 건립, 전시공간 등을 확보하고, 스토리텔링을 이용한 교육 및 관광 활용 방안도 마련해 당성의 역사 문화적 인식을 확대하고 타 지역의 문화재와 차별화된 전략을 통해 당성의 고유한 특성을 발현시킬 계획입니다. 특히, 당성 정비가 일정한 성과를 나타내는 2024년 이후에는 역사길 조성, 교육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역사와 생태환경 교육 등 생동감 있는 현장을 전달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를 개발할 계획입니다.

 

- 역사적인 관점에서 과거 당성의 역할을 현재의 화성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중국을 비롯한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통로의 역할을 했던 곳이 당성입니다. 오늘날로 보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의 역할과도 같은 곳으로 무역은 물론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 화성시는 대한민국 최고의 역동적인 도시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시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세계로 거침없이 나가려는 도전과 개척정신의 상징이었던 당성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화성시와 화성시민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성이 상징하는 도전과 개척정신은 미래를 향해 큰 꿈을 갖고 달려 나가는 우리 시민들에게, 용기를 주는 어디에도 없는 정신문화재가 될 것입니다.

 

- 긴 시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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