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남문은 전주시 완산구 전동 2가 남문시장 인근에 자리한다. 이 풍남문은 보물 제308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전주읍성의 남쪽 문에 해당한다. 읍성이란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는 곳으로, 고을을 둘러쌓았던 성을 말하는 것이다.

 

풍남문은 선조 30년인 1597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인 1734년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고 불렀다 한다. '풍남문(豊南門)'이라는 명칭은 영조 43년인 1767년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인 1768년에 풍남문을 중수하면서 붙인 것이다. 풍남문은 조선조 순종 때 도시계획으로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면서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현재의 풍남문은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특별한 기둥의 수법이 뛰어나

 

풍남문의 규모는 1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지어졌고, 2층은 정면이 3칸인데 비해 측면은 1칸이다. 이렇게 갑자기 이층 누각이 줄어든 것은 1층 안쪽의 기둥을 그대로 이층까지 올려 모서리 기둥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둥을 사용하는 수법은 우리나라의 문루 건축상 매우 드문 형태이다.

 

풍남문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며졌으며, 지붕의 처마를 받치기 위해 짠 장식은 기둥위에만 있는 주심포계로 구성되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해태 등 동물들을 장식한 것도 풍남문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풍남문의 부재에 사용된 조각이나,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점들로 보아 풍남문의 건립년도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축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견고한 성곽, 수원 화성을 닮아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화성을 축조하고 난 뒤, 우리나라의 모든 성곽은 화성을 기본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풍남문과 연결이 되는 전주읍성의 경우에도 문을 받치고 있는 아랫부분의 성곽을 보면, 화성도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문루에는 성 안쪽으로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 적고 있으며, 성문을 에워싸고 있는 옹성 쪽인 성 밖으로는 풍남문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성을 쌓고 있는 돌은 서로 귀퉁이를 깎아내 엇물리게 만들었다. 이는 성곽을 더 견고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인다.

 

 

 

 

 안에서 성문을 바라보며 밖으로 옹성이 보인다. 옹성 한편에만 출입구를 내어 적이 공격을 할 때 어려움을 겪도록 만들었다. 옹성은 문을 위주로 둥글게 반원으로 꾸며졌으며, 옹성 위에도 길을 낸 후, 여장을 쌓고 총안 등을 내어 내외의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문은 두꺼운 철판을 입혀 적이 공성무기나 불 등으로 공격을 해도 잘 버틸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은 전주 남문시장과 접해있어 풍남문을 주위로 원을 그리며 많은 차량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성벽은 중앙에 문루를 중심으로 양편에 포 등을 설치한 치와 같은 형태의 구조물이 있다. 양편으로 성곽이 연결되어 있던 부분인 듯하다. 성안에서 양편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으며, 좌측 위에는 포가, 우측 위에는 종이 달려있다. 위를 올라갈 수가 없어 이 종이 정확하게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어디나 그러하지만 문화제를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곳을 출입하기가 쉽지가 않다. 풍남문도 위로 오르는 계단에 출입통제 목책을 세워놓아 위로 오를 수가 없다. 위편을 찍으려면 아무래도 계단을 올라야 한다.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는 길이 무조건 문을 잠가버리는 것만이, 최고의 보존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용 진지를 말한다. 흙이나 돌로 쌓아 적과의 교전시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고,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구조물이다. 우리나라는 전국에 걸쳐 수많은 성곽이 있다.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 소재한 보령성곽은 평지에 구축한 상으로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성곽 일부만 남은 보령성

 

보령성은 세종 12년인 1430년 기존에 있던 성을 보강하여 쌓은 성이다. 원래 이 성은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봉당성(고남산성)의 동쪽으로 약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쌓았다. 현재 이 보령성은 남문인 해산루와, 해산루에 붙은 성벽 70m, 그리고 북쪽 성벽이 남아 있다.

 

 

현재 남문터에 남아 있는 보령성을 보면, 평지에 성을 축성한 관계로 안과 밖을 모두 돌로 성을 쌓았다. 남문 부근을 제외한 남은 부분은 바깥 부분만 돌로 쌓았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630m에 성곽의 높이는 3.5m 정도라고 한다. 처음 이 성을 지었을 때는 성벽을 오르는 적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적대가 8개소, 남문과 북문, 동문 등 문루가 3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1432년에 성을 축조할 당시에는 제민당, 공아, 병기고 등 140여 칸의 간물을 지었다고 전해지며, 우물이 3개소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들의 전쟁이 이곳에서 벌어지면서 모두가 다 소실되고, 현재는 남문인 해산루와 성곽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남아있는 일부 구간의 성벽과 성벽을 타오르는 담장이

 

조선왕조의 상징이었던 해산루

 

현재 충남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보령성의 남문인 해산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누각이다. 해산루는 장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양편을 성곽에 걸쳐 조성하였다. 예전에는 이 성곽 양편에 걸친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현재는 그러한 자취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 해산루는 당시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을 상징하기 위해 전국에 걸쳐 같은 형식으로 조성한 관아문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누각은 상벽 위에 마련한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으며, 누각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진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마 이 곳에서 밀려드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전략을 짰을 것이다. 남문 누각 정면에 걸려 있는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한다.

 

 

 

역사의 흔적엔 초여름의 뙤약볕만 남아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린다. 성벽에는 담장이 넝쿨이 타고 올라가 고풍스런 멋을 보인다. 남문 뒤편에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점심시간이라도 되는가 보다. 천천히 길지 않게 남은 성곽을 둘러보고 해산루에 올라본다. 그저 흔히 보아오던 누각이지만 이곳의 정취가 남다르다. 앞으로 펼쳐진 시골 작은 마을의 가지런히 뻗은 길에는 차 한 대가 보이질 않는다.

 

보령현은 고려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부터 현감이 파견되었고, 효종 3년인 1652년에는 보령부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그만큼 이곳이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읍성은 세종 12년인 1430년에 현감 박효성 등이 축성을 하였고, 세종 14년인 1432년에는 현감 정대가 140여 칸의 관아건물을 완성했다고 한다.

 

 

영의정 이산해가 썼다는 해산루 편액의 글씨(위)

 

처음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이 되었다는 성곽이다. 임진왜란과 의병들의 전쟁 등을 거치면서 소실이 되었다는 관아와 성곽. 그저 역사가 어떠한 형태로 뒤바뀌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남은 해산루 인근을 보면 담장이가 타고 올라간 모습만 모아도 이 성의 오랜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뙤약볕으로 인해 흐르는 땀을 해산루에 올라 추슬러본다. 또 얼마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이마져도 존재할 수가 있으려나. 괜한 걱정을 하며 또 다른 길을 걷는다.

 

 

오랜 세월에 흐릿환 흔적의 편액과 해산루 위에서 바라다 본 한가한 모습의 보령리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62번지 일대에 소재한, 사적 제140호인 독산성과 '세마대지(洗馬臺址)'. 이곳은 몇 번이고 가본 곳이다. 이곳을 자주 찾는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산 위로 올라가면 주변을 훤히 볼 수가 있어, 가슴이 후련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국민학교(우리 때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불렀다)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린 권율장군의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선조 26년인 1593년, 권율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 여명을 이끌고 독산성에 주둔하여, 가토가 이끄는 왜군 수만 명을 격퇴시킨 곳이기도 하다.

 

 

쌀로 말을 씻긴 세마대

 

산성에 오르면 보적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 뒤편에 지금은 정자가 서 있다. 정자에는 '세마대'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 세마대에 전하는 전설이 바로 국민학교를 다닐 때,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었다.

 

1593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권율 장군이 이끄는 병사 2만 여명이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이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내 조롱하였다. 그러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를 산 위로 끌어 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본 왜군은 멀리서 보니, 그 모습이 꼭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기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산성 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오판하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렇게 흰말과 쌀로 왜군을 속여 물리친 곳이 세마대이다. 사적 제140호는 독산성과 함께 말을 씻긴 장소라는 세마대지를 지정하고 있다.

 

도성을 지키는 요충지인 독산성

 

독산성을 언제 쌓았는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은 성을,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거점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독산성은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성으로, 용인의 석성산성이나 광주의 남한산성 등과 연계하여 도성을 에워싸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조 27년인 1594년에는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1595년에는 성벽의 돌출된 치에 포루의 시설이 갖추어졌다. 1597년 2월에는 왜병의 조총을 방어하기 위하여,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거기에 성의 아래로 향한 창문을 시설하였으며, 석차와 포차를 배치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인 1602년에도, 당시 부사 변응성이 성을 다시 보수하였다.

 

그 후 정조 16년인 1792년에도 성을 보수하였으며, 정조 20년인 1796년에는 수원읍성인 화성을 축조할 때 함께 개축하여 성을 단단히 하였다. 이렇게 독산성을 보수하고 단단히 쌓은 것은, 도성을 지키는 길목에 있는 군사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봄바람을 맞으며 독산성을 걷다

 

독산성의 둘레는 3240m이다. 성에는 문이 4개이고 암문이 있다. 정조 당시에 성을 개축할 때는 성의 둘레가 1800보였으며, 성벽은 외면이 장방형이나 방형이 되도록 다듬은 석재를 이용했다. 성벽은 안으로 약간의 기울기가 있도록 쌓아 매우 견고하게 축조가 되었다.

 

성안에 자리한 보적사에서 시작해 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황사가 심하게 낀 날이라고 하지만, 모처럼 맞은 따듯한 휴일이라 그런지, 성곽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세마대를 거쳐 동쪽으로 성벽을 밟고 걸어본다. 단단하게 쌓은 성벽에 돌출된 치가 보인다. 아마도 저 곳에 포루를 설치하고, 밀려드는 왜적을 향해 포를 쏘았을 것이다.

 

 

 

산성 주변을 모두 잡목을 제거하여 성벽이 훤히 보이도록 하였다. 3월의 봄바람이 시원하게 땀을 식힌다. 문지였을 것 같은 곳에는 성벽이 유난히 단단해 보인다. 뒷짐을 지고 걸어보는 독산성. 성벽 틈에 아래로 꺼진 곳, 그곳에 암문이 자리하고 있다. 적의 배후를 기습적으로 공격을 하거나, 적이 모르게 군수물자를 옮기기 위해 만든 문이다.

 

가파른 산비탈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아마도 저 곳에 수만 명의 가토가 이끄는 왜병들이 주둔을 했을 것이다. 독산성의 위치만으로도 오르기 힘든 곳이거늘, 거기다가 이렇게 견고한 성이 자리하고 있었다니. 왜병들도 이 성을 공략하기란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한 시간 남짓 돌아본 독산성. 옛날 옛적 교과서에서 배운 전설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며, 산자락에 걸린 성을 뒤로한다.

난 봄이 되면 가장 즐겨하는 답사 장소가 산으로 꼬리를 내닫고 있는 성곽이다. 유난히 봄이 되면 성곽을 즐겨 찾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산성을 오르다가 보면 주변으로 펼쳐지는 산의 모습들이 아름답다. 또한 그 산 마루로 오르는 길에 아주 가끔은 정겨운 짐승들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에 찾는 산성. 우선은 평지에 쌓은 성보다는 산성을 주로 찾는 이유는 또 있다. 평지에 쌓은 성에서 맛볼 수 없는 기분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성 위로 난 길을 걷다가보면, 주변으로 달라지는 풍광에 빠져들게 된다. 그 풍광이란 것은 우리가 그냥 산을 오르다가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묘미를 준다.

 

삼년산성

 

산성을 걷는 즐거움

 

전국에 수많은 산성들이 그동안 복원이 되었다. 하기에 산성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만만찮다. 산성은 각각 그 산을 에워쌓고 있는 방법이 다르다. 하기에 산성을 걷다가 보면, 많은 공부가 된다. 또한 역사 속에서 왜 우리 선조들은 이런 형태의 성을 쌓았을까를 생각하다가 보면, 꽤 길이가 있는 산성임에도 언제 돌았는지 모르게 한 바퀴를 돌게 된다.

 

산성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다르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보면,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그 땀을 산마루에 난 산성위에 올라앉아 식히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진다. 오염되지 않은 산마루에서의 심호흡. 그것 하나만으로도 산에 오른 효과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거기다가 공부까지 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 가 이닐까?

 

 

위 단양 적성, 아래 고모산성

 

자연을 따라 자연이 되는 시간

 

우리 선조들은 성을 쌓을 때 자연을 이용한다. 산성을 걷다가보면 어느 한 구석 자연을 넘어서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서 그 자연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산성이다. 그래서 그 산성이 곧 자연이다. 그 자연을 품고 걷다가보면, 나 스스로가 자연 안에 파묻히고 만다.

 

인위적으로 성을 쌓았지만, 그 성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런 것을 느끼면서 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 주변 곳곳에 참으로 아름답게 펼쳐지는 자연을 만나게 된다. 가끔은 성곽 틈사이로 졸졸거리며 흐르는 맑은 물을 만나기도 한다. 그 위로는 샘이 있고, 그 아래로는 수문이 생겨난다.

 

 

위 안성 죽주산성 아래 완주 위봉산성

 

그 모든 것이 자연을 거슬리지 않았다. 참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과 얼마나 동화되는 삶을 살았는가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런 산성 위를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이 밀려온다. 지금처럼 자연을 온통 뒤집어가며 커다란 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돌 하나를 놓으면서도, 그 돌이 자연과 동화될 수 있도록 마음을 함께 놓았다.

 

올 봄 산성을 걸어보자

 

올 봄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산성을 걸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산성을 따라 걸으면서 주변의 장관을 느끼고, 온통 꽃으로 덮이고 있는 아름다움에 취해보기를 권한다.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또한 그것이 자연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걷는다는 것은, 선조들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위 적성산성, 아래 홍주성

아름다운 산성 길. 가끔은 풀숲에서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를 보는 것도 즐겁고, 산짐승 한 마리가 새로 난 풀잎을 뜯다가 화들짝 놀라 뛰어가는 모습도 정겹다. 물 한 병 찔러 넣고 천천히 걷다가 보면, 그 산성 안에서 자연과 산성, 그리고 내가 결코 둘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산41-5번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인 ‘농성(農城)’이 있다. 이 성은 경기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마을의 북쪽 논 가운데 있는 성이다.

전체적인 성곽의 모습은 타원형으로, 둘레는 약 300m이고 높이는 4m 내외이다. 토축은 비교적 가파르게 조성을 하였으며 동쪽과 서쪽에 문터가 있다. 무너진 곳의 단면을 보면 붉은색의 고운 찰흙을 층층이 다져 쌓은 흔적이 있다.


초기 국가의 형성단계에서 쌓은 토성

이 성을 쌓은 이유는 분분하다. 삼국시대에 도적 때문에 쌓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신라 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하여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이 전하고 있기도 하다. 일설에는 고려시대에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전하기도 한다.

이 성은 평지에 만든 소규모의 토성으로, 이런 흙으로 쌓은 성곽들은 대부분 초기 국가의 형성단계에서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의 토착 세력 집단들이 그들의 근거지로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바로 옆에는 겨울철에는 따뜻한 물이, 여름철에는 찬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우물터가 어느 곳인지는 밝혀지지 않고있다.



임팔급이 쌓았다고 전하는 농성

농성의 남쪽 문터를 바라보고 좌측에 동상이 한 기 서 있다. 바로 이 농성을 축성했다는 임팔급의 동상이다. 그 동상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한국 임씨의 시조이신 충절공 임팔급(林八及)은 신라의 이부상서에 오르셨을 때 적병이 변방을 침입하므로, 공이 분연히 토벌하여 위난을 공정한 공훈으로 팽성군에 봉해지고, 신덕왕조에서 충절공의 시호를 받았다.

충절공은 중국 당나라에서 18세에 등과하여 한림학사를 거쳐 병무시랑 예부상서로 있을 때,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 칠학사와 함께 서기 850년 전에 우리나라 평택 팽성에 오시어 이 농성을 쌓고 정주하였다.(하략)」




익산임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 임팔급은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지내고, 신라에 들어와 이부상서를 역임하고 평택 용포리에 정착했다고 전한다. 그 후손들이 평택임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익산으로 삼았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고려 초기에 쌓은 성으로 추정

임씨종진회에서 농성 앞에 임팔급의 동상을 건립한 것에 대해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성이란 나라에서 어떠한 필요에 의해 쌓는 것으로, 일개인이 성을 쌓는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더욱 이 농성에서 발견된 토기편이 모두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1999년 경기도박물관이 평택일대의 관방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비파산성에서 ‘건덕3년’이라는 명문을 발견했다고 한다.




건덕3년이면 고려 광종 7년인 965년이다. 2004년에는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가 비파산성에서 ‘차성(車城)’이라는 명문이 적힌 기와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들어 학계에서는 이 농성 역시 고려 때의 토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도 농성 부근에는 조선조의 객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농성부근은 예전부터 교통의 요지였다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곳은 고려 때의 곡창을 보호하는 성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농성(農城)’이라는 명칭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농성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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