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그런 소리를 듣는다. ‘1박 2일이 다녀가면 지역에 많은 보탬이 됩니다.’라는 이야기다. 지난달인가 남원 답사를 할 때 ‘지리산 둘레길’을 1박 2일 팀이 다녀간 곳을 찾았다. 남원시 운봉읍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데, 그 옆을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간다.

나처럼 문화재 답사라도 하는 사람들인가 하여 기다렸는데, 그냥 지나쳐 산 밑으로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물어보니 “여기가 1박 2일 사람들이 지나간 길이거든요. 그래서 걸어가는 갑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아가는 곳이 이승기가 지나간 길이라는 것이다.


1박 2일이 촬영을 한 하조대

지역경제에는 얼마나 보탬이 되나?

“사람들이 많이 오나요?”
“말도 마세요. 처음에 방송 나가고 나서는 주말에는 사람들로 줄을 이었어요.”
“그러면 여기는 수입이 많아져서 좋겠네요?”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아요. 모두 준비들을 해오기 때문에요. 그리고 들려서 가버리니까요”
“괜히 부산하기만 한가요?”
“아무래도 도움은 되죠. 그런데 여기야 지역이 좁으니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만큼 다양한 것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지속적이라야 하는데, 반짝하고 마는 듯도 하고요”

어느 정도 보탬이 되기는 하나보다. 지역에서는 주말이면 몇 만 명이 다녀갈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이번 양양 답사 길에서 하조대를 들렸다. 하조대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동해안의 절경에 자리 잡고 있는 하조대는, 평소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리는 곳이 아니다.


휴일에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차들이 들어찼다.

잘나가는 TV프로는 사람들을 움직여

하조대를 자주 찾는 나로서는 이곳을 철마다 찾아보았지만, 주말에도 만나는 사람들은 불과 수십 명이었다. 주차장에도 차 몇 대가 서 있는 것이 다였고. 그런데 이번에 찾아간 하조대는 차를 댈 곳이 없어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오지도 못하는 차들은 길에 서 있기도 하도.

갑자기 날도 찬데 웬 사람들이 이렇게 이것을 찾았을까? 하고 의아해 하는데, 위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1박 2일 촬영지’라는 것이다. 바로 1박 2일이 주는 홍보효과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리로 향하게 한 것이다.

하조대는 등대와 함께 새로 건축한 정자가 있다. 물론 인근의 경치가 절경이라서 사진을 찍는 작가들이 많이 들리는 곳이다. 특히 새해에 일출을 보기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하지만 평소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차를 댈 수 없을 정도로 모여들었다.


등대에서 하조대를 배경으로 촬영을 하는 사람들(위), 바위를 때리는 파도가 시원하다
 
인기 TV프로의 영향을 실감하게 한다. 하조대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1박 2일 촬영을 하고나서 장사가 어떠냐고. “사람들이 많이 오고 장사도 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대박이 날 정도는 아니다. 모이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장사는 그렇게 잘 된다고는 볼 수없다.”라는 대답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가 보니 오히려 버리고 가는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더 귀찮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좋은 프로는 지역에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많은 방문객에 비해 장사는 별로라는 지역사람들. 그보다는 정말 지역 경제에도 보탬이 되는 프로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좋은 방송도 하고, 지역경제에 많은 도움이 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방송이야 한번 하고 가면 그만이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은 지자체의 몫일 것이다. 가평 남이섬과 같은 곳처럼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진전사지가 있다. 진전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곳 진전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니 8세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을 일으킨 도의선사가 신라 헌덕왕 13년인 821년에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한 곳이다.

이 진전사에서는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와 같은 고승들이 많이 배출이 되었으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도 이곳에서 체발득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진전사는 16세기경에 폐사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진전사지에는 국보 제122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39호인 부도탑이 있다.

양양군 강현면에 소재한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

거대사찰이었을 진전사

국보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보물인 부도탑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상당하다. 또한 둔전리를 나오다가 보면 절의 축대로 사용되었을 만한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아마 이 진전사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현재 둔전리 야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은 현재의 진전사로 가는 길 우측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이번 답사가 4번째이다. 2004년과 2006년, 그리고 2008년 비가 오는 날과 이번 11월 14일이다. 다행히 갈 때마다 시기적으로 다르게 찾아갔는데, 가을에 찾아간 것은 처음인 듯하다. 갈 때마다 달라지는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가?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언제나 감탄을 하게 만든다.


하층 기단에 조각되어 있는 비천좌상

도대체 여래불의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그동안 수많은 문화재를 답사를 하면서도, 지금 다시 찾아가보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문화재를 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창피스럽다. 지금처럼 문화재 한 점에 적게는 30장, 많게는 60장 정도의 사진을 담는 것이 아니고, 고작해야 5~6장의 사진만 달랑 담아왔으니 지금 생각해도 낯이 부끄럽다. 하지만 그런 지난 사진이라도 있으니 문화재의 변화를 알 수 있어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높은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설치했다. 밑 기단에는 연화좌 위에 좌정한 비천상을 각 면에 2구씩 조성을 해, 총 8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윗 기단에는 한 면에 2구씩 8구의 팔부중상을 조각하였다. 일층 탑신에는 한 면에 한 구씩 여래좌상을 조각되어 있다. 진전사지 석탑의 특징은 모두가 좌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천인이나 팔부중상의 경우에는 입상을 조각하는데, 이 석탑은 돋을새김한 모든 상이 좌상이다.


기단 상층에 조각되어 있는 팔부중상 좌상. 이 탑에는 모든 조각이 좌상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이 여래좌상 중에 서편으로 앉은 여래좌상의 얼굴이 사라져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지난 사진자료를 찾아보니, 역시 그 자료에도 여래좌상의 안면이 없다. 그저 희미한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번 답사를 하면서 ‘도대체 이 여래좌상의 안면을 누가 떼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 땅에 소재한 문화재부터 관심을 가져야.

딴 면은 다 괜찮은데 서쪽 편의 여래좌상과 그 아래 팔부중상 중 왼편의 얼굴도 보이지가 않는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탑이다. 만일 일부러 훼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저렇게 깨끗하게 안면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안면을 일부러 떼어낸 듯하다.

기단부와 몸돌 1층에 세련된 조각들이 있어 국보로 지정이 될 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안면이 사라지다니. 혹 세월이 오래되어 자연적으로 마모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렇다면 딴 조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한 편의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얼굴이 사라진 것일까?


돋을새김한 여래좌상은 안면부분만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마치 떼어낸 것처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화재들. 세월이 지나 자연적으로 변화가 되고, 풍우에 씻겨 그 아름다움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도 안타까운데, 이렇게 누군가 일부러 훼손이 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문화재의 반환도 중요하지만, 내 땅에 있는 문화재부터 간수를 해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양양군 현남면 인구리 7번 국도에서 해송천로를 따라 상월천리 방향으로 난 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보면, 인구2리 길가에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두 그루 다 처진 소나무와 같이 아래로 가지를 내리고 있다. 이 중 길가에서 볼 때 뒤편에 있는 소나무는 흡사 정이품송을 닮았다.

길을 가다말고도 희귀한 나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차에서 내려 소나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런데 소나무를 보니 가슴 높이 정도에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어떻게 된 일인가하여 밑동서부터 자세하게 살펴보니 틀림없는 연리목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함께 자라다가, 이곳부터 연리목이 되었는데, 밑과 위가 완전히 붙어버렸다.



정이품송을 닮은 소나무의 밑에 구멍이 나 있다

희귀한 연리목, 나무의 생김새도 아름다워

이 나무가 여느 나무와 달라 보이는 것은 모양도 아름답게 생겼지만, 연리목이라는 점이 더욱 특이하기 때문이다. 밑동을 보아도 한 나무인지 두 그루의 나무가 붙어있는 것인지 구별이 쉽게 되질 않는다. 다만 나무의 구멍이 난 부분을 보니 그 안에 표피가 잇는 것을 보아, 이 나무가 한 그루가 아닌 두 그루가 붙어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나무를 촬영하고 난 후, 길 건너 배추밭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마을 분들이게 이 나무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저 뒤편에 소나무가 혹 수령이 얼마나 되었는지 아세요?”
“저희들은 잘 몰라요. 어르신들 이야기로는 500년이 지났다고도 하는데”
“저 나무에 혹 전설 같은 것은 없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나무의 구멍을 살펴보니 연리목인 듯하다.

양양군의 아름다운 나무로 선정되어

더 이상은 물을 수가 없다. 일손을 놓지 않고 대답을 하시는 분에게, 자꾸만 질문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남면사무소에 문의를 하였더니, 양양군 내에 있는 소나무 품평회에서 이 나무가 아름다운 나무로 선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게 자란 소나무가 그리 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이 나무에는 애틋한 사랑이야기 한 편쯤은 전해지고 있지 않을까?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소나무다. 더구나 두 나무가 붙은 연리목이라는 데에는 한 가지 사랑이야기라도 만들어 주고 싶다.


밑동에도 가운데가 떨어진 것이 보인다. 이 나무는 양양군 소나무 품평회에서 아름다운 나무로 선정이 되었다고 한다.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전설을 붙이기를 좋아하는 우리민족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에 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다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마 이 나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을 텐데, 혹 잊은 것은 아닐까? 그런 이야기 한 가지 듣지 못하고 떠나는 발길이 내심 아쉽기만 하다.

선림원,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했기에, 쌀을 씻은 물이 앞을 흐르는 내를 모두 쌀뜨물처럼 만들었을까? ‘미천(米川)골’이란 명칭은 바로 쌀 한 끼 밥을 하기 위해 쌀을 씻은 물이, 하류까지 흘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오대산 자락을 깊숙이 들어가는 곳에 자리한 선림원지. 이곳은 흥각국사가 804년경에 창건한 선림원이 있었던 곳이다.

선림원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선수련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는 대규모의 절로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10세기 경 홍수와 산사태로 매몰이 되었다고 한다. 11월 14일 양양군을 한 바퀴 돌아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미천골로 향했다. 몇 번을 들른 선림원지다. 선림원지는 매몰이 되었던 곳인 만큼, 지금도 금당지의 주추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선림원지에 있는 보물 제447호 부도의 기단부와 금당지(아래)

보물로 지정된 부도 안타까워

선림원지를 오르는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앞에 삼층석탑이 한 기 서 있다. 그 뒤편에는 금당지가 있고, 여기저기 석물들이 널려져 있어 이곳이 대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금당지 동편 산 밑에는 부도의 기단이 한 기 서 있다. 원래는 북쪽으로 50m 정도 위편에 서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에 있는 부도의 기단은 정교한 조각과 함께, 화려한 문양 등을 자랑하고 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으나 정교하게 조성이 되었다. 이 부도의 건립연대는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부도는 지대석 위에 상중하로 구분된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탑신석, 옥개석, 상륜부를 올려놓는다.




일제의 훼파로 사라진 부도 몸돌

일제는 침략기에 무수한 우리의 문화재를 강탈하고 훼파를 시켰다. 요즈음 문화재 반환운동을 하면서 일부가 돌아온다고 하지만, 그들이 강탈해 간 우리의 문화재는 30여 만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도 거의 국보급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이 선림원지 부도 역시 일제 강점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이다.

1965년 각 부재를 수습하여 복원한 것으로 겨우 기단부만 남아있다. 이 부도의 지대석을 훑어보면서 만일 이 부도가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라고 질문을 해본다. 지대석만 보아도 상당히 걸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재를 훼파한 일제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없다.


연화대석에 조각이 된 용은 금방이라도 돌을 박차고 나올 것만 같다.

운문룡의 조각은 상상을 초월해

기단부만 남아있는 선림원지 부도. 보물 제447호로 지정이 될 만큼 대단한 걸작이다. 이 기단부는 네모난 지대와 팔각의 하대까지 같은 돌 2매로 구성되었다. 지대석은 땅 위에 들어난 부분만 다듬어,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하대 8각의 각 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상 안에는 교대로 사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하대 위에는 둥근모양의 연화대석을 놓았다.

연화대석 위에는 간주모양의 중대석과 원형의 상대석이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위에 부도가 놓여 있어야 하나, 일제에 의해 조각이 나 사라져버린 것이다. 연화대석 표면에는 서로 다투듯 조각을 한 운문룡이 있다. 구름과 함께 조각을 한 용은 발을 힘차게 뻗치고, 금방이라도 연화대석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이렇게 대단한 기단부였다면, 그 위에 올려 진 부도는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사라진 부도가 아쉽기만 하다. 수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문화재들. 오늘 선림원지의 부도가 주는 안타까움이, 여행자의 발길을 재촉하는가 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또 한 번 통곡을 한다. 아직도 그치지 않는 문화재의 훼손이 마음이 아파서.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 1번지에 소재한 보물 제439호 진전사지 부도. 부도이기 보다는 탑이라는 느낌이 든다. 일반적인 부도가 탑형이나 석종형 등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이 진전사지 부도는 아래에 탑처럼 이중의 기단부를 설치하고 그 위에 부도를 놀려놓았다. 현재는 탑 옆에 진전사라는 절이 있다.

이 진전사지 부도는 조성시기를 9세기 중반으로 추정하는데, 신라 선종의 종조인 도의선사의 부도탑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몇 번이고 찾아간 부도탑이지만, 볼 때마다 그 느낌이 새롭다. 아마 이 부도의 생김이 여느 부도와 같지 않은 모습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물 제439호 양양 진전사지 부도

진전사지 부도 기단부는 탑

이 진전사지 부도의 기단은 이중으로 조성을 하였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하나의 돌로 짜 4매를 붙여 놓았다.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겨 넣어 석탑과 같은 형태이다. 갑석 역시 4매로 짜놓았다. 상층기단 중석은 2매로 조성을 하였으며, 각 면에는 우주를 표현하였다. 갑석의 아랫면에는 부연이 있다.

탑과 같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단부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 틈이 벌어졌을 뿐이다. 그만큼 진전사지 부도는 정교하게 제작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보인 진전사지 3층 석탑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당시에 이 진전사가 어느 정도 세를 갖고 있었는지 가늠이 된다.



앙련을 새긴 뛰어난 부도의 받침

2단의 기단 위에 올린 탑신은 8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다. 다만 탑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8각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이 굄돌에는 16연의 앙련이 돌려져 있어 뛰어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옥개석 역시 8각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처마가 날렵하게 표현이 되어 자칫 무거운 부도를 무게를 탈피하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탑과 부도를 합쳐놓은 것만 같은 진전사지 부도. 뛰어난 조각을 조성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부도를 특색 있게 꾸며놓았다. 탑 위에 올린 부도, 그리고 그 위에 올린 옥개석 등의 반전이 부도를 보는 사람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옛 선인들의 놀라운 조형술

이 진전사지 부도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내세우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생각을 한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절제된 미를 갖고 있으며, 그렇다고 밋밋한 것도 아니다. 수많은 부도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탑과 부도를 합한 특색 있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이런 부도를 조성을 했다는 것에 대해, 옛 선인들의 뛰어난 조각술에 감탄을 한다.



부도탑을 돌아보는데 절에서 키우는 백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쫒아온다. 절에서 키우는 대개의 개들은 사람들에게 길이 들어 있는가보다. 낯선 사람이 와도 짖지를 읺고, 오히려 함께 놀아달라고 조르기가 일쑤다. 이 개도 부도탑 주위를 돌면서 영역표시라도 하는 듯 떠나지를 않는다. 무료한 문화재 답사에서 가끔은 이런 풍경이 있어,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보물 제439호 진전사지 부도. 선조들의 솜씨에 감탄을 하면서 떠나는 길에, 절집 백구가 배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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