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에는 수 많은 해수욕장이 있다. 이제 이 지리한 장마가 끝나고나면 불볕더위가 시작이 된다고 한다. 그 더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역시 피서를 가는 일이고, 그 피서에는 바닷가가 제격이다. 많은 해수욕장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족이나 연인과 더불어 조용히 쉬고 싶을 때는 어찌해야 할까?

그저 물 속을 들락거린다면 그것도 별 재미가 없다. 느낄 수 있고, 좀 더 색다른 재미가 있는 곳. 동해안의 많은 해수욕장 중에서 비교적 사람들이 붐비지 않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을 돌아본다. 단 강원도 고성, 속초, 양양의 헤수욕장 중에서. 물론 몸짱이신 분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신 곳에서 몸매 자랑을 하셔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몇 곳을 소개한다.   

조개가 발을 물어요. 천진해수욕장



고성군 토성면에 위치한 천진해수욕장. 해안선을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형성이 된 천진해수욕장은 연이어 봉포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은 물 속에 들어가 발로 조개를 잡을 수 있는 곳. 주변에는 경동대학이 있어 원룸시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해안선을 따라 주변 해수욕장으로 이동을 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바위와 맑은 물이 일품인 아야진 해수욕장



아야진해수욕장은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아야진할 해변도로를 따라가다가 북쪽 끝에 위치한 곳으로 물 속 바위와 맑은 물이 어우러진 조용한 곳이다. 주변에는 관동팔경 중 한 곳인 청간정이 자리하고 있어 두루두루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징어 맨손잡기가 즐거운 장사해수욕장



속초시 장사항 인근에 자리한 장사해수욕장. 해수욕장으로서는 그리 좋은 곳은 아니다. 바로 옆에 항이 있고, 바닷가로는 많은 횟집들이 즐비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색다른 재미가 있는 곳이다. 바로 맨손 오징어잡기이다. 아이들과 아른들이 함께 맨손으로 오징어를 잡아, 그 자리에서 회로 먹을 수 있는 곳. 운이 좋으면 20만원을 홋가하는 녀석도 잡을 수가 있다. 바로 인근에는 나무도 조용한 등대해수욕장이 자리한다.

싱싱한 회가 즐거운 외옹치 해수욕장



속초해수욕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러나 외옹치 해수욕장은 속초 해수욕장과 연결이 되어있으면서도 조용한 곳이다. 두 해수욕장이 해안 산책로로 연결이 되어있다. 외옹치 해수욕장은 2005년에 처음으로 문을 연 곳이며, 주변에는 외옹치항과 대포항이 자리하고 있어, 싱싱한 해산물을 즐길 수도 있는 곳이다.

마을 인심이 후덕한 양양 정암 해수욕장




정암 해수욕장은 7번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어, 해수욕장으로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또한 주차장이 따로 없어 주차도 국도변에 해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물치항과 설악 해수욕장이 인근에 있어 조용하게 가족이나 연인끼리 찾아 쉬기에는 제격이다. 주변에는 호텔과 모텔 숙박시설이 있어 숙박을 하기에는 편리한 점이 있다. 음식점은 마을부녀회에서 운영을 하기 때문에 깨끗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선사유적지가 있는 오산해수욕장



양양 오산해수욕장은 내수면 연구소와 선사유적지 등이 잇는 곳이다. 이곳은 연인이나 가족들이 찾기에 적당한 곳이며, 아이들과 함께 주변에 있는 오산리 선사유적지 등을 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양양 남대천 연어축제 때는 현장 체험 코스로도 이용을 하고 있다.

파도타기가 즐거운 기사문(3,8) 해수욕장



7번 국도를 따라 속초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3, 8 휴게소가 나온다. 그 안 마을에 자리한 이 해수욕장은 기사문 해수욕장이지만, 3. 8 해수욕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주변에 숙박시설이 많아 가족들이 함께하기에 좋다. 또한 운이 좋으면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써핑을 하는 모습도 볼 수가 있기도 하다.

송림 야영지가 즐거운 연곡해수욕장



가족들이 즐겨 찾는 곳 중 한 곳은 바로 양양에 위치한 연곡해수욕장이다. 이곳은 해수욕장과 물려있는 송림이 아름답다. 피서에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은 그리 많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맑은 바다다 있어 좋고, 수영을 마치고 나면 우거진 송림 사이에 텐트를 치고 산림욕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있는 옛 사지인 선림원지에 소재한 네 기의 보물 중 보물 제445호인 석등은 사지 안에 자리한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탑비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선림원은 발굴 당시  출토된 신라 범종에 의해 당시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에  의해 창건된 절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는 기단과 상,중, 하대석을 놓는다. 위로는 덮개석인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올리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보물 제445호인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 팔각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받침돌과 머릿돌에 귀꽃을 장식해

선림원지 석등은 아래받침돌과 머릿돌에 같은 형태의 귀꽃을 장식하고 있다. 받침돌인 지대석은 4매의 네모난 돌을 받쳐놓고 그 위에 팔각의 하대를 올려놓았다. 하대의 각 면에는 안싱을 음각하였으며,그 위의 복련에는 팔각에 앙증맞은 귀꽃이 돌출되어 아름답다. 그 위로는 가운데 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이 허리가 잘록해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렀다. 간석의 아름다움 만으로도 이 석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석등의 간석과 화사석은 색깔이 달라 보는이로 하여금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후에 파손된 부분을 보수 한 것은 아닌지.


받침돌의 뛰어난 조각과 음각한 안상(아래)

귀꽃이 조형미의 극치

전국에 있는 많은 석등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팔각으로 조형을 한 석등에 받침돌과 머릿돌에 함께 귀꽃을 장식한 예는 흔하지가 않은 듯하다. 화사석은 사면에 장방형의 화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장방형의 액을 마련하고 그 안에 한 구씩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형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움을 지닌다.


장고통처럼 조성한 간석

화사석을 덮은 몸돌은 팔각의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아래받침돌에서 보았던 같은 모양의 귀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일부가 깨어져 나간 지붕돌의 귀꽃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나마 남아있다는 인도감 때문인가 보다. 처마의 선은 부드럽게 굴곡을 이루고 있으며, 귀꽃조각과의 만남이 자연스러워 이 석등의 조각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석등의 맨 위에 올린 상륜부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만일 이 파손이 된 귀꽃과 상륜부만 온전하다면, 아마도 국보로 지정이 될만한 걸작이다. 장고통처럼 조형한 간석 상, 하의 권운문이나 상대석에 조각한 겹잎앙련 또한 이 석등이 갖는 아름다움이다.


귀꽃을 장식한 머릿돌과 화시석

신라 시대의 석조미술 품 중에서도 뒤쳐지지 않는 훌륭한 아름다움을 지닌 선림원지 석등. 이러한 소중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우리나라의 뛰어난 예술세계를 느낄 수가 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일부의 문화사대주의자들이 우리 문화를 폄하하는 일만 없다면.

해수관음으로 유명한 낙산사 7층 석탑만큼 아픔을 바라본 석탑은 없을 것이다. 보물 제499호인 낙산사 칠층석탑은 원통보전 앞에 서 있다. 2005년 산불로 인해 원통보전을 비롯한 낙산사 일부가 불에 탈 때, 담장이 무너지고 원통보전이 전소되는 것을 앞으로 보면서, 그저 열에도 꿋꿋하게 지켜 낸 탑이다. 난 개인적으로 이 탑을 볼 때마다 문화재이기 보다는, 한 시대의 아픔을 이겨냈다는 장인의 온기를 느끼기도 한다.

낙산사 칠층석탑은 의상대사가 처음에는 조성을 할 때는 삼층이었다고 한다. 그 뒤 세조 13년인 1467년에 4층을 올려 현재의 모습인 칠층석탑이 되었다는 것이다.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낙산사 칠층석탑은 안정감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6.2m의 높이에 비해 기단부가 좁기 때문이다. 삼층석탑을 4층을 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진 위는 이번 11월 14일 답사 때의 칠층석탑, 가운데는 지난 2006년 12월의 모습. 그리고 아래는 무너진 원통보전의 담장모습. 불에 탄 흔적이 보인다.
 

부분적인 손상 외에는 제 모습 지녀

일반적으로 석탑은 기단부와 몸돌인 탑 부분,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이 된다. 낙산사 칠층석탑은 덮개석이나 탑의 일부가 훼손이 되었을 뿐, 상륜부 등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다. 기단부에는 정 사각형의 지대석 2매가 놓여있으며, 윗면에는 24판의 겹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는 고려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양식의 특징으로 보인다.

낙산사 칠층석탑의 특징은 탑신부인 몸돌에 있다. 각 층마다 고임돌을 놓고, 위에는 3단의 옥개받침을 올렸다. 이는 간략하기는 하지만 조선조에 보이는 석탑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맨 위에 상륜부에는 노반 위에 청동 복발과 보륜 등으로 장식을 했다. 이러한 형태의 모습들은 조선시대 다층석탑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탑을 볼 때마다 가슴이 허전해

불타버린 원통보전. 그리고 일부가 무너져 내린 담장. 낙산의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기와로 문양을 내고, 중간에 둥근 석재를 이용해 멋을 더했다. 그러한 아름다운 원통보전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이번 답사에서 만난 원통보전과 담장을 말끔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산불이 원통보전을 태울 때, 그 뜨거운 열에서 칠층석탑이 온전하게 버티었다는 것이 장하기만 하다. 온 나라가 불이 타는 낙산사를 보면서 가슴 아파 할 때, 그래도 그 불길 속에서 남아있던 칠층석탑이다. 그래서인가 칠층석탑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각별하다. 하나의 소중한 문화재가 무너져 내렸다면, 아마 내 마음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리라는 생각이다.

기단에 새겨진 화려한 연꽃 무늬와(위) 정비가 된 담장(아래).
그러나 무녀졌던 곳의 색이 달라 아픔을 기억하게 한다.

이번 답사에서도 낙산사에 들려 칠층석탑을 바라보면서, 낙산사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저 고맙고 또 고마운 생각에 부여안고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그 생명도 없는 차디찬 돌에 대고 무슨 할 말이 그리 많냐고 질문을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탑이라도 생명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온 열과 정성을 다해 하나하나 만들어 놓은 문화재들. 비록 그 돌과 쇠붙이에는 생명이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 장인의 혼이 그 안에 깃들어 있지는 않을까? 아마 하나의 문화재가 소실이 되고 훼파가 될 때마다, 숱한 조상들의 마음이 함께 사라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낙산사 칠층석탑이 그저 돌을 쌓아 놓은 것으로 보이지 않고, 생명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양군 서면 황이리, 양양에서 출발을 하여 구룡령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선림원지는, 미천골이라는 계곡 곁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선림원지에는 4종의 보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선림원지 한 편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446호는, 홍각선사의 탑비 귀부 및 이수이다. 이 탑비는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이다.

2004년 10월에 선림원지를 답사 갔을 때는 비 받침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남아있었다. 이번 11월 14일 답사를 할 때는 새롭게 조성을 한 비가 새워져있어 완전한 옛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문이 파편만 남아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재현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 홍각선사 탑비의 재현된 비는 가로 94cm, 세로 173.5cm 정도로 1,340자 내외가 있던 것 중, 710자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새로 몸돌인 비를 세운 이번 답사 때의 모습과(위) 지난 2004년 10월 귀부와 이수만 있을 때의 모습(가운데와 아래)

통일신라 때 세워진 홍각선사 비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 비는 통일신라 때인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탑비는 비받침인 거북이인 귀부와 몸돌, 그리고 머릿돌인 이수로 구분한다. 홍각선사 비의 받침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로 넘어가는 시대에 많이 보이는 형태이다.

이 거북이는 땅에 납작 엎드린 형태이며,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네 발은 모두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어, 거북이의 발톱이라고 보기보다는 용의 발톱에 가깝다. 이 거북이의 또 하나 특징은 바로 네발에 있는 수염 같은 형태이다. 발에서 나온 이 수염 같은 형태의 조각은 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 수염 같은 것은 날개를 대신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다리에 붙은 저 조각은 수염인지? 혹은 날개를 상징한 것인지 궁금하다.

특징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예술

귀부의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비의 몸돌을 세우는 자리이다. 이곳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소라형의 무늬 위에 안상이 새겨져 있다. 비머리인 이수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는 네모난 안에 ‘홍각선사비명’이라는 전액을 양각하였다. 그 주변에는 온통 운용문을 새겨, 신라 하대 석비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비 머리에 보면 두 마리의 용은 서로 마주하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두 마리의 용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양편에 자리하고 있다. 비명을 사이로 대각으로 마주하고 있는 형태이다. 사실적으로 묘사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힘찬 조각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새로 조성된 몸돌인 비와 머릿돌인 이수의 앞과 뒤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홍각선사는 경서에 해박하고, 수양이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비문은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다른 곳에서 모아 새긴 것이라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비명과 비문의 찬술 관련자, 홍각선사의 생애와 선사가 입적 후 비를 새우게 된 내력 등을 적고 있다.

처음 찾았을 때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한편에 엎드린 듯 보이 던 홍각선사 탑비. 새롭게 조성을 한 탑비로 인해 제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국에 이렇게 비문이 사라진 수많은 문화재들이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낙산사 일주문을 지나 원통보전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돌로 만든 문이 나온다. 이 문은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이 홍예문은 전각이 없이 세웠던  것을, 1963년도에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전각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아서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조가 조성할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석재는 화강암 장대석으로 꾸며졌으며, 2단의 기대석을 놓고 그 위에 두 줄로 조성을 하였다.


아픔을 간직한 낙산사 홍예문

낙산사의 홍예문은 2005년 양양지역에 난 산불로 인해서 홍예문 위에 세운 누각이 소실이 되었다. 화마는 낙산사 일대를 뒤덮어 홍예문은 물론, 원통보전과 종각 등을 모두 한줌 재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TV를 통해 불이타는 낙산사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만큼 낙산사는 동해를 바라보며 선 해수관음을 비롯하여 아름답게 자리잡은 절이었다.

이번 양양답사를 하면서 일부러 낙산사를 일정에 집어 넣었다. 숙소도 해돋이도 볼 겸 낙산해수욕장 인근에 잡았으나, 정작 아침에 구름이 가득 낀 흐린 날씨 탓에 해돋이는 보질 못하고 낙산사로 향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길에 늘어선 노송숲을 보면서, 더 마음이 아픈 낙산사의 정경이다. 저렇게 울창하던 해송 숲이 거의 다 타버렸기 때문이다.



홍예문은 26개 고을에서 가져 온 26개의 장대석을 두 줄로 쌓아 올렸다.

다시 조성된 홍예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

일주문을 지나 차를 놓고, 조금 걸어올라가니 홍예문이 보인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홍예문이다. 새롭게 조성을 한 홍예문은 마치 새단장을 한 신부처럼 말끔하게 보인다. 천천히 걸어 홍예문 앞으로 다가서니, 문 위에 올린 누각이 보인다. 예전에는 문루 주변을 강돌로 조형을 하였던 것을, 불이 난 후에 다시 복원을 하면서 산돌로 꾸몄다고 한다.

문루는 처음과 같은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문루 앙편에 용의 머리가 돌출이 되어 위엄을 보인다. 홍예문은 두 단의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두 줄로 나란히 올렸다. 장대석을 다듬은 것도 일정한 규격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만든 홍예문은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그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는 한다. 아픔이 있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낙산사 홍예문. 


문루는 2005년에 난 산불로 인해 소실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복구하였다.

사람들은 그 아픔을 알고 있기에 문을 들어서면서 멈칫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런 아름다운 문화재들이 수도없이 소실 된 재난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역사의 아픔속에서 그래도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화재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낙산사의 홍예문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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