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안산 화성 등으로 출장 중이다. 수원 광교산 입구 저수지는 상수도 보호지역인데, 그 뒤편 산에 볼일이 있어 올라갔다. 스님짜장의 후원이사를 모집하기 위해 나선 출장길이다. 광교 저수지 옆 산에서 만난 두 녀석. 밤나무 양편에 묶인 녀석들은 보기에도 다정해 보인다. 이 녀석들을 보니 한 녀석은 수컷이고, 한 녀석은 암컷이다. 아마도 금슬이 꽤나 좋은 듯.

그런데 이 녀석들 너무 노골적으로 스킨십을 한다. 아마도 저 녀석들이 나를 약올리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지. 덩치가 큰 녀석이 수컷인데, 제법 나를 견제라도 하는 듯하다. 머시여... 감히 네가 나를 얕보는 것이여. 그런데 한 분이 나타나자 이녀석, 바로 꼬리 쳐트리고 한쪽 구석으로 실실 피한다. 먼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되게 혼쭐이 난 기억이 있는 듯.


노골적인 스킨십을 하는 녀석들

이 녀석들의 모습을 볼짝시면, 참 해도해도 너무한다. 내가 곁에 있는데도 난 사람취급도 안해준다. 지들끼리 별 해괴한 짓을 다 해대는 녀석들의 꼬락서니를 볼짝시면



 암컷이 요상한 자세로 앉아 있으니 수컷 이 녀석 나에게 와서 하는 말이

"아저씨 개 처음 봐? 처음 보냐고요?"
"아니 자주 봤다 왜?"
"그런데 멀 그렇게 찍냐고요?"
"그거야 내맘이지 왜 그래"
"아니 우리 여친이 잘 나기는 했지. 그건 나도 알거든요. 그렇다고 그렇게 찍어대면 나 섭하죠. 내 물그릇을 보고 덤비셔"



정말 물 그릇 한번 허벌나게 크다. 얼마나 물을 드셨는지, 아침에 준 물이 바닥에 붙어있다.

 



 

그런데 참 이녀석들이 해도 너무한다. 둘이서 아주 죽고 못 산다. 그런 와중에 암컷과 수컷이 나눈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

"이리와 봐 자기야"
"나 불렀어? 왜 왜?"
"저그, 저 인간 있잖아 우릴 보고 있는 인간"
"어 저 인간이 왜?"
"저것이 자기의 미모에 반했나보네. 저걸 한 번 열 나게 해볼까?"
"그러지 머 내가 이런 자세 취하면 저 인간 죽을텐데"



"놀고들 있네 이 녀석들. 얌마 내가 너희들하고 같은 줄 알아. 난 임마 블로그에 올리려고 하는 것 뿐야. 그렇게 요상하게 놀지말란 말야. 그래봤자 너희들만 망신이지."  
"저 인간이 아직 우리 정체를 모르나벼. 너희들 운운하는 것을 보니. 아직 우리가 개란 것을 모르는 모양이야"

일마들 정말 사람  무시해도 유분수지. 나 오늘 수원 광교에서 완전히 무시당한 남자여. 저 녀석들 한테. 그래서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지. 해괴한 모습을 공개를 해 버려서. 녀석들아 쪽 팔리지?

10월 17일 김제 모악산 금산사 개산대제가 열렸다. 금산사는 조선 성종 23년인 1492년에 작성된 <금산사 5층 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금산사가 통일신라 시대에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그 이유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보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기다림은 역시 지루해. 언제 시작하는 거야...'

금산사 1412주년 개산대제 열어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월 17일 금산사 대적광전 앞에서는 금산사 개산 1412주년을 기념하는 개산대제가 열렸다. ‘개산대제’라 함은 금산사가 창건한지 1412년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념식장에서 ‘화동(花童)’들을 만났다. 육법공양을 하기에 앞서 앞에서 꽃을 뿌리며 행진을 하는 화동들은, 비천상에서나 볼만한 그런 아름다움이다.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화동의 모습이다. 마치 비천인의 화신인 듯한 화동들이다.



너무 오래 서 있었나보다. 눈도 감기고 졸립기도 하도, 햇볕은 왜 이렇게 따가운 것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즐겁다. 사람도 겁나게 많고, 우리가 제일 먼저 들어간다네




드디어 행진이다. 예쁜 모습으로 꽃을 뿌리며 들어가야지....앗 그런데 꽃이 없다. 너무 빨리 뿌려버렸네~

너희들이 화동이면 난 청사초롱 소녀다. 보이냐 이 아름다운 자태가...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7) - 봉돈

화성 안에는 독립구역이 몇 개소가 자리를 한다. 이 독립구역들은 같은 화성에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방비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독립구역은 바로 봉화를 올리는 봉돈과, 공심돈이다. 이 독립지역은 화성 안에 또 다른 작은 성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신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곳이다.

봉돈은 외부와는 차단되어 있다. 봉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 안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야 하며, 사방은 벽돌로 쌓아 막혀있다. 하기에 이 봉돈을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앞쪽에 난 문 뿐이다.



일반적인 봉수대와 다른 봉돈

화성의 봉돈은 1796년 6월 17일에 완성이 되었다. 화성 봉돈은 일반적인 봉수대와는 다른 형태이다. 일반적인 봉수대는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부의 높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봉돈은 화성의 몸체 위 성벽에 맞물려 축조를 하였다. 봉돈의 재료는 벽돌로 활용하였으며, 우리나라 성곽 형식에서는 색다른 형태이다.

이 봉돈은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남쪽 횃불구멍인 첫 번째 ‘화두(火頭)’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한다. 화성 봉돈에서 신호를 보내면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로 신호를 보내는데, 다른 4개의 화두에는 위급한 일이 없으면 불을 피울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방지를 하였다.




독립된 축조물 봉돈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방이 있다. 좌측의 방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우측의 방은 봉돈을 지키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식으로 축조를 한 봉돈의 내부 벽은 모두 4층으로 구성이 된다. 각 층마다 성벽으로 타고 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안이나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봉돈이 독립된 구조물이라는 것은 성 안의 벽쪽으로도 총안이 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이 일부 적에게 열려도 봉돈은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의 계단마다 안으로 들어쌓기를 하고, 그 위편에 통로를 내어 군사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화성 봉돈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구성이다.




봉화의 신호체계는 어떻게 구별할까?

봉돈에는 모두 5개의 불을 피우는 화두가 서 있다. 일반적인 봉수대가 보이는 숫자와는 사뭇 다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이 되면 횃불을 피운다. 총 다섯 개의 화두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만을 올린다
○ 적이 국경 근처에 출몰하면 봉수가 2개가 오르고
○ 적이 국경선에 도달하면 3개의 봉수가 오른다
○ 봉수 4개가 오르면 적이 국경을 넘었다는 신호이며
○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수에 신호가 모두 올라간다



예전에는 이 봉돈의 연기나 햇불이 아마도 가장 빨리 상황전달을 할 수 있는 신호였을 것이다. 멀리서보면 아름다운 하나의 축조물과 같은 봉돈. 그러나 이 봉돈이 갖는 중요성은 화성의 그 어느 구조물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참 어이가 없다. 어제 저녁 절 사무일을 보고 있는 사무장이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인가 해서 나가보았더니, 누군가 법당 안에 놓아 둔 저금통을 털어갔다는 것이다. 손에는 부서진 저금통 3개와 검은 비닐봉투 안에 든 10원짜리가 있다. 누군가 법당 안에서 저금통을 들고 나가, 절 근처에서 돈을 빼가고 버린 것이다.

선원사는 ‘스님짜장’을 하는 곳이다. 일 년이면 거의 3만 그릇에 가까운 짜장봉사를 한다. 그렇기에 그 재원의 일부라도 마련하고자 생각한 것이, 바로 작은 저금통이다. 하나를 꽉 채워보아야 2만 원정도가 들어간다. 그래도 저금통 하나를 꽉 채워주면, 80명 정도에게 짜장 공양을 할 수가 있다.

스님짜장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저금통. 많은 분들이 이 저금통을 채워 함께 동참을 하신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데

어제는 절집 사람들이 모두 김제 금산사에 ‘모악산금산사개산대제’에 참석을 하느라 절이 비어있는 시간이 있었다. 아마 그 시간에 누군가 돈을 탄 것 같은데,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번에도 누군가 손을 탄 적이 있었다.




골목 길가에 버려진 저금통. 찢고 태워서 안에 있는 돈을 다 꺼내고 10원짜리만 버리고 갔다.

동전통을 들고 가 안에 있는 돈을 다 꺼내고, 10원짜리만 근처에 버려 놓았다는 것이다. 근처에 사시는 분이 골목길가에 버려진 저금통을 보고 연락을 해 주셨다는 것(어제 파르르님이 요즈음 아이들은 10원짜리를 돈으로 알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이 도적님 이런 것을 보면 아이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을). 그런데 이 도적님이 하나 모르는 것이 있다. 바로 선원사에는 CCTV가 7대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원사에는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이 계시다. 절마다 의무적으로 문화재가 있는 곳에는 CCTV를 설치하게 되어있다. 선원사 경내에 설치된 이 카메라는 20일 동안 녹화가 가능하다. 지난번에도 이 카메라가 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다. 이 카메라를 피해 절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 그저 보고도 못 본체 하는 것일 뿐.


선원사 경내에 설치된 CCTV화면. 7대나 되어서 경내로 들어오면 모두 다 찍히게 된다. 확대도 되기 때문에 누군인지도 알 수 있다. 20일 분의 녹화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상이 다르다. 하나가 셋이 되었다는 것은, 손이 타는 일이 그만큼 늘었다는 것이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데. 그냥 넘어가면 딴 곳에 가서 더 나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2일 분만 돌리면 카메라에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다 알아낼 수가 있기 때문에 잡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절집 안 분들도 의견이 갈린다. 당장 잡아서 벌을 받게 해야 한다는 분들과, 이번까지는 용서를 해 주자는 분들이다. 아마 이렇게 사람이 없을 때를 노리는 것을 보면, 근처에 있는 사람의 짓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공고를 하기로 생각을 했다.

“저금통 들고 가신 도선생. 48시간의 여유를 주겠습니다. CCTV로 바로 누군지도 알 수 있습니다. 제 발로 걸어와 잘못을 빌면 용서를 하겠습니다. 48시간이 지나면 바로 화면 캡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겠죠?”

스님이 한 분 계시다. 가끔 답답할 때 전화라도 드리면, 곧잘 우스갯소리를 해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시고는 한다. 나잇살깨나 먹어 세상을 살다가보니 사는 것이 점점 버거워진다. 아마 물질적인 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심적인 부담이 더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며칠 째 감기몸살로 인해 사람이 늘어져서인가? 괜한 우울증이 걸린 듯하다.

전화를 드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맑은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린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일까? 스님께서야 세상 놓는 공부를 하신 분이시니, 머 세상에 좋고 나쁘고도 없으실 것만 같다. 문안인사를 드리고 다짜고짜 질문을 퍼부었다,

“스님, 세상살이가 점점 힘들어지는데, 이유를 모르겠네요?”

스님 잠잠하시다. 딴 때 같으면 바로 한 마디 하시는 분이시다. 농담 삼아 한 마디씩 주고 받는 대화 속에 은연 중 세상살이 공부를 알려주시고는 하시는 분이라,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을 한다.

“하감독님(스님들은 예전 프로덕션에 있을 때 호칭을 지금도 쓰신다) 요즘 많이 힘든가보네요. 그러니까 곡차 좀 조금씩 하라니까요”
“곡차는 머 좋은 사람하고 만나면 한잔씩 하지만, 요즈음은 거의 안마시고 지냅니다.”
“그럼 곡차 부족인가? 하하... 아마 길 위로 나가면 곧 나아질 병인 것을. 요즘 바쁘다고 답사를 오래 안가서 그런 것 같네요.”
"그렇지가 않아요. 영 죽겠다니까요“
“그럼 죽어야지. 사람이 죽을 때를 잘 가려야 세상을 잘 살다가는 것이라는데”

늘 이런 식이다. 답답할 때 전화를 드려도 시원한 해법은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농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보면 어느새 속이 조금은 풀려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세상살이 한 번 이야기 해 볼까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전화를 주셨을까?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렇게 심각하게 말씀을 시작하면 열띤 법문을 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말을 피하고는 하는 나이다.

“세상살이를요?”
“예, 이 세상에는 딱 세 종류의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요”
“세 종류라뇨?”
“첫 번째는 부모님을 잘 만나 살아생전에 돈 걱정 안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우리가 흔히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은 절대 굶지는 않을 테니, 자신들의 생은 살아갈 수가 있겠죠.”
“예,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럼 두 번째는 무슨 사람들입니까?”
“두 번째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잡스 같은 사람들이죠. 실력이 남보다 출중해 자기 스스로가 이룰 수 있는 사람들도 살아남을 수 있죠. 우리나라 같은데도 그런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고 하네요. 아이티산업 쪽에는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개발을 해서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
“공감이 갑니다. 세 번째가 정말 궁금하네요. 세 번째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세 번째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특별한 공부를 했다거나 기술도 없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이 사람들이 사실은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고, 세상을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아야죠.”

이쯤 되면 이 세 번째 부류라는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스님은 세 번째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으로 구분을 지은 것일까? 대답을 듣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바빠지니 재촉을 할 수밖에.

“세 번째는 바로 쓰리기통에 거꾸로 처박아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은 실패를 해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가 있으니까요. 아마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만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보이네요. 특히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더 더욱 그렇죠.”

우리는 어느 부류에 속해있을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잠시 생각을 놓고 있는데, 말씀이 이어지신다.

“요즈음 젊은 부모님들 정말 큰일예요”
“왜요? 요즘 젊은 부모님들 아이들 잘 키우잖아요?”
“잘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바보로 만들고들 있어요. 그 부모님들 재산이 무척 많아요? 아님 아이들을 남보다 출중하게 가르칠 능력이 있다고 하나요? 그것이 아니라면 아이를 강하게 키워야 하는데, 받자만 하고 키우고 있으니, 그 아이들이 자랄 때 쯤엔 세상이 정말 험해질 텐데, 아이들이 어떻게 헤쳐 나갈 수가 있겠어요? 그 때까지 그 부모님들이 명을 버틸 수 있다고 해요? 그런데 무조건 받자를 하면, 아이들이 어려서 부터 부모님께 의지하는 마늠만 키우는 것이예요. 아주 어릴 적에는 사랑으로, 그리고 조금 지나면 스스로 일을 처리하도록 가르쳐야죠. 아이들 그렇게 키우면 부모님들이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긴 통화가 끝났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 혹 나도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부류는 아니었을까? 오늘은 정말 이 말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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