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만나는 여주 5일장은 어떤 모습일까? 30일(토) 날이 저물고 난 뒤 5일장을 찾아 나섰다. 한편에서는 파장 때라 짐을 챙기고 있는데, 아직도 장거리는 부산하다. 그 중에 눈에 띠는 것은 삼삼오오 무리를 이뤄, 5일장 거리를 누비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이다. 그들이 손에 봉지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5일장에 나와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한 것 같다.

 

'5일장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태국에서 왔다는 한 이주노동자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먹고 있다. 다가가보니 닭발 볶음이다. 그것을 맛있게도 먹는다.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먹는 모습이,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저 잘해요"

"5일장은 자주 나와요?"

"자주는 못 나와요. 일 끝나고 이렇게 밤에 나와요"

"장에 나오면 주로 무엇을 하세요?"

"친구 만나고요. 맛있는 것 사먹고요. 그리고 구경도 하고요. 정말 좋아요. 5일장"

 

이주노동자들이니 당연히 일을 마치고 나올 것이다. 한국에 온지 2년째라는 이분. 우리말도 꽤 잘 하신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다. 5일장이 최고라는 것이다.

 

5일장의 밤 거리에 모여있는 이주노동자들. 이제는 이들을 5일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감흥을 주는 곳

 

돼지껍질 요리를 하는 집을 찾아들었다. 이곳에도 역시 몇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는 5일장 어디를 가도 이주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가운데 끼어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나, 먼 타국으로 온 사람들. 돼지껍질 볶음을 앞에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그들은 이제는 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것 좋아하나 봐요"

"맛있어요"

"소주도 잘 드시네요"

"좋아요"

 

아직은 우리말이 서툰 사람이다. 나이가 25살이라고 하는 필리핀에서 왔다는 이주노동자. 그저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날이 5일장 날이라는 것이다. 이날 나오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어, 이곳이 흡사 고향의 장 같다고 한다.

 

"저 사람들 장날마다 나와요"

"많이들 오시나 보죠"

"장날이면 우리 집에만 한 20여명 정도 오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5일장이 저 사람들한테는 고향과 같은가 봐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을 떠나 멀리 온 사람들. 그들에게 5일장은 아마도 고향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제일 좋은 곳이란 생각이다. 그리고 많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 서로가 밀린 이야기도 하고 소식을 들을 수도 있을 테니.

 

돼지껍질과 닭발을 파는 가게. 그 안에도 소주잔을 기울이는 이주노동자들이 즐겨 찾고 있다.

5일장은 또 다른 고향

 

5일장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잔은 분위기가 다르다. 오래 전 잊었던 친구를 만나는 그런 느낌이다. 돼지껍질과 닭발, 그리고 막창 모듬을 앞에 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보면 시간이 훌쩍 지난다. 그래서 5일장은 늘 정겨운 곳인가 보다.

 

5일장에서 만난 많은 이주노동자들. 그들은 자연스럽게 5일장 속으로 스며들어 있다. 결국 그들도 같은 사람들이기에, 우리 5일장이 또 다른 고향이 되어가는 듯하다. 그곳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5일장의 분위기에 녹아든다. 우리가 하는 그대로를 하고 있다. 그래서 5일장에서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은 남 같지가 않다.

 

"아줌마 돼지껍데기 한 접시 더요"

 

5일장의 인심은 아직도 넉넉하다. 돼지껍질과 닭발, 그리고 막창 등을 놓고 막걸리를 한 잔 마시면, 그 무엇도 부럽지가 않다.

주인을 소리쳐 부르는 모습까지 우리를 닮았다. 피부색깔은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가 조금 다를 뿐. 5일장은 그들에게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가 보다. 아니 그들 스스로가 5일장의 구성원이 되어 가는가 보다. 그래서 5일장은 늘 많은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막걸리 한잔 마시고 나온 5일장은, 어느새 파장이 되어 캄캄하게 변해 있다.

느릿느릿
하늘로 오르는 산이 있습니다
산의 속도로 머리 허연 사내가
세상을 비우고 있고
비워지는 만큼
채워지는
잘 익은 바람이 있습니다
광교산 오르다
살아서는 술
죽어서 식초가 되는
막걸리 한 생애를 마십니다
인간 한 세상 섞어 마십니다

산 위로
구름과 바람이 지납니다
잔 속에
한 생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막걸리를 생산하는 도가의 대표인 이수원 시인의 '막걸리를 마시며'라는 시이다.

 

"제가 워낙 막걸리를 좋아해서 좋은 술을 마시려고 막걸리 도가 하나를 차렸습니다. 홍보 차 여기저기 다니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술 한 잔 들어보시죠. 맛 괜찮습니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충남집이라는 선술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명절 전 날의 쓸쓸함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술 한 잔 마셔보라고 권한다면 이보다 더 한 횡재는 없다. 꼭 돈이 붙어야 횡재가 아니다. 거의 한 달이면 25일 이상을 막걸리를 마시는 나에게는, 이보다 즐거운 말이 어디 있겠는가?

 

본인이 좋은 술을 마시기 위해 도가를 차렸다고?

 

'속푸리 생 막걸리'의 대표인 이수원(남, 57)은 본인이 즐겨 마시는 막걸리를 찾아 전국을 헤맸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막걸리 도가를 찾아 돌아다녀 보아도, 마음 놓고 먹을 만한 술이 그리 많지가 않았다고. 막걸리는 맛은 좋은 물이 좌우한단다. 우리나라에서 물이 좋기로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술맛을 보았지만, 두 세 곳을 빼고는 물맛이 그리 좋지가 않았다고 한다.

 

"술이라고는 막걸리 밖에 안마십니다. 그래서 한 때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막걸리를 마셔보기도 했죠. 그러나 정작 한 두 곳 빼고는 물맛이 좋은 곳이 그리 흔치가 않았죠. 그래서 이왕이면 내가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좋은 막걸리,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마실 수 있는 막걸리를 생각하다가 대부도에 '광교산 생 막걸리' 공장을 차렸습니다."

 

 

10여 젼 전에 처음으로 도가를 차렸단다. 그러나 본인이 마시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술도가를 차린다는 것도 쉽지가 않은 일이다. 거기다가 계속해서 술을 생산하려고 하면, 그만큼 판매가 되어야 하는데, 그도 만만치 않을 일. 결국은 기존의 대형 막걸리 도가로 인해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단다.

 

"참 마음이 아팠죠. 정말 좋은 술을 생산했는데, 기존의 대형 도가와 저는 경쟁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판촉을 하려고 하니,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고요"

 

다시 물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

 

속푸리 생 막걸리 이수원 대표는 그런 상처를 잊고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정말 좋은 물을 찾기 위해 무진 고생을 했단다.

 

"저희 술 공장은 충북 괴산군 문광면 속리산 자락에 있습니다. 지하 250m의 암반수를 사용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물중에 한 곳입니다. 막걸리의 생명은 좋은 물입니다. 그 물을 맛보고 나서 다시 막걸리를 생산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했죠."

 

 

그래서 다시 생산한 것이 바로 속푸리 생 막걸리라고 한다. 따라주는 술을 한 잔 먹어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막걸리를 마시는데 혀끝에 매운 맛이 돈다. 왜 막걸리에서 매운 맛이 도느냐고 물었다.

 

"예, 원래 엣 문헌에 보면, 막걸리는 매운 맛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운 맛은 항상 나는 것이 아니고, 발효 중에 몇 시간 정도 매운 맛을 감지 할 수 있습니다. 매운 맛이 돌았다면 그 막걸리가 최고로 맛이 있다는 것이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과향을 맡을 수가 있습니다. 숙성된 막걸리의 맛이 최고일 때죠. 그런 다음 식초가 됩니다. 지금 매운 맛을 느끼셨다면 그것은 정말 발효가 제대로 되었다는 것이죠. 막걸리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음식입니다"

 

원래 막걸리는 유산균이 많아, 요구르트 100병과 맞먹는 유산균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변비에 걸린 사람은 막걸리보다 좋은 음식은 없다는 것. 연구결과를 보면 막걸리는 비만예방과 염증의 억제, 항암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저는 제가 먹기 위해서 막걸리를 생산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생산하는 음식을 자신이 먹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불량식품이라고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즐겨 마시고, 이웃들과 함께 마시기 위해서 만든 술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최고의 재료를 사용했죠."

 

그 말에는 이해가 간다. 본인이 직접 만들어 마시는 술을, 안 좋게 생산할 수는 없을 터. 그래서 속푸리 막걸 리가 최고라고 마셔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한다. 옆에서 술을 마시던 분들도 한 말 거든다.

 

좋은 술은 내장이 알아봐

 

"이 술 달지도 않고 정말 좋습니다. 역시 술을 좋아하고 생산하는 분이시라, 술맛이 전혀 다르네요. 탁한 듯하면서 맑고, 연한 듯하면서 깊은 맛이 납니다. 더구나 술병에 보니 회사 전화가 아닌 대표님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네요. 그것 하나로도 자신 있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이수원 대표의 막걸리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다. 그만큼 좋은 술을 생산하고 그것을 즐기기 때문인가 보다. 이러다가는 밤을 새워도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아, 막거리를 좋아하는 주당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물론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꼭 당부하고 싶습니다. 시중에 판매하는 막걸리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좋은 물입니다. 다들 암반수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그 중에는 수돗물을 정제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막걸리를 마실 때 쏘는 맛이 있다면, 그것은 탄산을 주입한 것입니다. 탄산을 주입하면 상하지가 않죠. 그러나 정상적으로 좋은 막걸리를 전통 재로로 만들면, 35도 이상이면 짧은 시간에도 식초가 됩니다. 막걸리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탄산을 섞은 청량음료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듯, 막걸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수원 대표의 이야기. 술 한 잔을 마셔도 정말 좋은 물로 빚은 좋은 술을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나도 이참에 우리 술인 막걸리로 주종을 바꿔야겠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오래도록 사랑을 받은 막걸리가 아니던가? 이 술 갑자기 맛이 더한 듯하다. 나도 벌써 막걸리의 마니아가 되었는지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행궁은 조선조 정조 때(1794~1796년) 축성되었다. 역대 임금이 화성시 융릉(사도세자 부부무덤)과 건릉(정조 무덤)으로 행차할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멸실이 되어버린 이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별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멸실이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화성 행궁을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길을 떠난 날. 바람이 불면서 날이 쌀쌀하다. 이런 상태라면 찾아가보아야 사진 한 장도 제대로 찍을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이왕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마음 속으로 제발 그곳을 가면 날이 조금이라도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행국 앞에 도착을 하니 어찌 이런 일이. 그렇게 어둡던 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지고 있다. 그저 이런 날씨마저 고마울 뿐이다. 

 

재인(才人)의 기능 전수장소로 변했던 화령전

 

화령전은 화성 행궁이 복원을 하기 전에는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남아있었다.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이 멸실되고 난 뒤 이 화령전에는 재인인 무형문화재 발탈의 기능보유자였던 고 이동안옹과 그의 딸인 정경파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만일 행궁의 복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은 영원히 재인들의 춤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을 뻔 했다.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의 앞쪽에는 악공들이 제사를 지낼 때 연주를 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는 세 곳의 계단이 놓여있다. 이 중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지만, 요즈음은 그저 아무나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운한각에는 정조의 어진을 모샤놓았다. 현재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운한각이 화재나 홍수 등으로 인한 피해를 입을 때, 어진을 피난 시키기 위한 이안청. 복도로 운한각과 연결이 되어있다.


격자창을 내고 그 밑에 벽돌을 쌓아올린 담벼락. 돌의 크기가 위로 올라갈 수록 작아져 멋을 더한다.

 운한각을 돌다가 보면 참으로 잘 꾸며진 전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운한각에 모셔진 정조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운한각의 좌측에는 화재나 홍수 등에 대비해 어진을 대치시키는 이안청이, 복도로 연결이 되어있다. 운한각의 창문이나 기둥 등을 보면 당시에 이 전각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격자문이나 띠살문 등으로 꾸민 창호도 아름답지만, 벽돌 등으로 쌓은 담벼락 또한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인다. 이안청으로 가는 곳에는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한 것도, 여름철 습기가 차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도 물이 좋은 제정

 

화령전의 운한각을 마주보고 좌측으로 담 너머에 있는 전각이 있다. 작은 일각문으로들어서면 전사청이다. 전사청은 운한각에서 정조를 위한 제향을 준비할 때, 각종 제물을 마련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사청은 한편 마루가 돌출이 된 형태로 지어졌다. 전사창에서는 운한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을 내었는데, 이곳으로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날랐을 것이다. 

 


화령전의 한편에 서 잇는 전사청은 화령전에서 제향을 할 때 사용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정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 손바닥으로 물을 한 모금 마셔본다. 추운 날씨였지만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짜릿함이 일품이다.

 


화령전에서 제향을 드릴 때 정화구를 뜨던 우물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재인이 춤과 소리를 하던 풍화당

 

화령전 가운데 풍화당은 재실이다. 화령전에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들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당은 화령전 가운데 운한각과 함께 원형이 보존되어 있던 건물로 사료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 풍화당에서 바로 고 이동안과 정경파가 제자들에게 춤과 소리를 가르쳤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화령전의 전각 중 한곳인 풍화당에서,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 죄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풍화당은 양편으로 툇마루를 높여 그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풍화당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낮은 굴뚝이 있다. 흡사 거북이 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러한 작은 것들이 풍화당이 정감이 들게 한다.

 

 



풍화당의 양편에는 마루를 높이고, 그 밑에는 아궁이를 둔 방이 있다

 살창으로 꾸며진 외삼문의 특별함

 

화령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바로 외삼문이다. 화령전의 운한각 앞으로는 내삼문이 있고, 그 밖으로 양편에 작은 골방을 드린 외삼문이 있다. 양편에 작은 방은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라도 묵었던 곳인가 보다. 그런데 이 외삼문은 어떠한 전각에서도 보기가 힘든 모습으로 꾸며 놓았다.

 

모두 세 칸으로 되어있는 외삼문은 솟을대문이 아니다. 지붕은 모두가 - 자로 평형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문의 밑 부분은 판자문으로 막고, 그 위를 살창으로 꾸민 살문이다. 일반적인 궁이나 별궁의 문들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폐쇄적인 방법을 쓴데 비해, 화령전의 문은 왜 이렇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아마 그 뜻을 모르긴 해도 평소 백성들을 사랑했던 정조대왕이, 운한각에서 지나는 백성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외삼문 앞을 지나는 백성들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알현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행궁의 한편에 지어진 화령전은 그래서 오랜 시간 발길을 붙들고 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난 ‘세월’이라는 말보다. ‘시간’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어째 세월이라고 표현을 하면, 앞으로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그에 비해 ‘시간’이라는 단어는. 앞으로도 수많은 시간들을, 내가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다.

 

벌써 추석 연휴라고 한다. 다음 뷰에 글을 보니 추석에 대한 음식이며, 글들이 부지기수로 눈에 띤다. 추석 때도 그렇고 설 때도 그렇다. 솔직히 난 이런 글들이 보이면 썩 기분이 좋지가 않다. 늘 혼자이고, 늘 방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절집을 찾아가 우울한 기분을 달래든지, 아니면 행사를 하는 곳을 돌아친다.

 

 

 

집 나오면 개고생, 정말 그랬소

 

‘명절’, 참 좋은 말이다. 오죽하면 명절이라고 했을 것인가?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나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고 난 뒤,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내가 ‘이다’리고 하지 않고 ‘일 것이다’라고 쓴 것은, 벌써 이런 모습을 잊고 산지가 20년 가까이 되었기 때문이다.

 

살다가 보니 어쨌든 가족들과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20년 세월을 길 위에서 보냈다. 명절 때만 되면 그저 산행을 하던지, 아니면 문화재 답사를 한답시고 며칠 씩 길을 떠나고는 했다. 아마도 그런 날이 길어지다 보니, 이젠 그런 명절이라는 말에 무덤덤해 진 듯도 하다.

 

몇 해 전인가보다. 그 때도 계절이 지금쯤 되었다. 명절 전날 길을 나섰다. 그냥 방안에 쭈그리고 있는 것이 싫어서이다. 호기있게 길을 나선 것 까지는 좋았다. 잘 곳이야 돈만 주면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배가 고파 무엇을 좀 먹으려고 나갔지만, 문을 연 곳이 한 곳도 없다는 것이다.

 

하긴 명절 아침에 누가 장사를 하겠다고 문을 열 것인가? 아마 오후 6시까지인가 물로 배를 채우면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을 한다는데, 그 말이 정말 명언이다. 문제는 이렇게 명절 때마다 배를 곯은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개고생을 벌써 20년 가까이 했지만, 아직도 개고생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니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을까 싶다.

 

 

그래도 살만하잖소?

 

엊그제인가, 지인들과 만나서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저녁이 되면 수원 지동 순대타운 안은 온통 인파로 넘치는 곳이다. 자리 하나 차지하기도 버거울 때가 있다. 더구나 명절 밑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인해 통로를 다니기도 힘들 지경이다. 밖에서 술을 마시다가 옆을 보니 무엇인가 꿈틀거린다. 비닐 안에 무엇이 들어있어서 처음에는 누가 무엇을 갖다 버린 줄로만 알았다.

 

한데 자세히 보니 비닐을 푹 뒤집어쓰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것이다. 노숙자가 추위를 피해 그렇게 비닐봉지 한 장을 머리서부터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 세상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다. 남들은 명절이라고 모두 들떠서 난리인데, 저렇게 오갈 데 없이 비닐 한 장으로 쌀쌀한 밤 날씨를 견뎌내고 있다니.

 

하긴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제가 게을러서 그렇다고. 하지만 이 분 초저녁에 그곳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미 등이 굽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연세가 70을 넘을 듯하다. 그런 어르신이 어디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편에서 들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도대체 어떤 마음이 들까?

 

비도 오는데 오늘 저녁엔 이 어르신 어디로 갈 것인지? 나가서 막걸리라도 한 잔 대접을 해야 할 듯하다. 사람 사는 것이 별거 아니잖은가? 즐거운 명절에 기분 언짢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이제 우리 주변에 쓸쓸하게 명절을 보내야 하는 이웃도 있다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엔 요즘 사람들이 골목마다 북적인다. 바로 벽화를 그리기 때문이다. 지동의 골목 벽은 6세 어린아이부터 80세 노인들까지, 모두 화가로 만드는 마력을 지닌 벽들이다. 마을주민은 물론, 수원의 많은 시민들과 단체에서 참가를 한다. 지동의 벽은 날마다 그림들이 늘어만 간다.

 

9월 26일 오전 7시가 조금 넘었는데 문자가 하나 들어온다. ‘지동 어린이집 원생 15명이 10시부터 지동 벽화를 그리러 갑니다.’ 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가봐야지. 딴 행보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일정을 바꾸어버렸다.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더욱 이 날은 삼성전자 봉사단 70명이 벽화를 그리러 온다고 했다니.

 

 

 

어린 꼬마들의 마음속에 날리고 싶은 것은?

 

10시 지동 벽화골목으로 행했다. 큰길에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이 녀석들 죽 벽에 붙어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 그런데 손으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도 같이 그린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크레파스가 없다고 하는 녀석에, 안 주겠다고 도망을 가는 녀석. 시립지동 어린이집(원장 석숙현) 꼬마들 15명이, 이유리 교사의 인솔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 편 벽은 나비만 그리고, 반대편 벽에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게 한다. 그런데 한 녀석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검은 크레파스로 ×자를 그려 놓았다. 아마 피카소가 벽화를 그려도, 이렇게 당당하게 잘 못 되었다는 것을 표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람나비, 조개나비...들어는 보았소?

 

아이들이 벽에 그린 나비들이 온통 날갯짓을 한다. 수백 마리의 나비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를 듯한 기세이다. 그런데 그 나비들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대형 나비부터 시작해, 달팽이나비, 사람나비, 굼벵이나비, 조개나비 등등. 세상에 어린이들은 무엇이나 다 날려 보내고 싶은 것일까?

 

한 녀석이 커다랗게 나비를 그린다. 그 나비를 보다가 물어보았다. 그렇게 큰 나비가 날아갈 수 있는가를. 이 녀석 당당하게 대답을 한다. 자기가 날려 보낼 수 있다고. 그래서 아이들의 마음일까? 아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은 없다. 하기에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벽화를 그리는 아이들에게서 선지식 하나를 얻어간다.

 

 

‘네 나비는 아까 날아갔다’

 

오후에는 삼성전자의 경영혁신팀과 센서개발팀 70여명이 골목을 찾았다. 인원이 많고 어른들이다 보니, 벽에는 짧은 시간에 많은 그림으로 채워져 나간다. 달라지고 있는 벽들을 보면서, 참 사람이 노력을 하면 이렇게 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골목벽화를 담당하는 사람도 삼성전자 벽화봉사팀이 들어오면 마음이 놓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 틈에는 색다른 인물들이 있다. 바로 벽화를 지우고 다니는 팀이다. 벽화를 그렸는데 잘 못 되었다고 생각이 들거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면 지우고 다닌다. 그래서인가 여기저기 덧칠을 하고 새로 그린 부분이 있다. 그렇게 골목 벽화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골목 안으로 꼬마가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선다.

 

 

 

아침에 나비를 그리던 어린이집 꼬마가 제 그림 자랑을 하려고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한다. 이 꼬마 자신의 나비를 찾는데, 그 나비가 사라져 버렸다. 그림을 지우는 분들이 나비를 몇 마리 지운 중에, 꼬마가 그린 나비도 있었는가 보다. 여기저기 찾더니, 그래도 엄마에게 딴 아이와 함께 그린 반대편 그림을 보여준다.

 

그 모습을 보면서 꼬마가 대견하기도 하고, 갑자기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이 마음이 짠하기도 하다. 할 말이라고는 고작 이말 밖에 없다.

 

“꼬마야 아까 나비가 몇 마리 날아갔는데, 네 나비도 날아갔나 보다.”

 

 

이 꼬마,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괜히 이야기를 해놓고도 멋쩍다. 속으로 저 어린이가 그랬을 것이다. ‘저 아저씨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고. 그렇게 지동의 벽화는 날마다 풍성해지고 있다. 내가 지동 뒷골목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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