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시 흥국사길 134-11에 소재한 보물 제563여수 흥국사 홍교 (麗水 興國寺 虹橋)’. 흥국사 입구에 있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 흥국사 홍교는 인조 17년인 1639년에 세워진 다리로, 지금까지 알려진 무지개형 돌다리 중에서는 가장 높고, 긴 다리이기도 하다.

 

언제 찾아가도 주변 경치와 잘 어우러진 이 다리는, 개울 양 기슭의 자연 암반에 기대어 쌓았다. 부채꼴 모양의 돌을 서로 맞추어 들어 올린 다리 밑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가 아릅답게 조형이 되어있다. 이 흥국사 홍교의 특징은 양옆으로 둥글둥글한 돌로 쌓아올린 벽이다.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친 듯, 길게 뻗쳐 조화를 이룬다.

 

 

계특대사가 조성하였다는 홍교

 

이 흥국사 홍교는 인조 17년인 1639년에 계특대사가 화강석을 이용하여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주변 경치와 어울려 하나의 아름다운 조형물로 평가되는 이 홍교는, 다리 아래로 흐르는 하천의 암반 위에 편단석을 놓고, 그 위로 같은 형태의 석재를 층층이 쌓아 홍예를 조성하고 있다.

 

86괴의 장방각석이 반원의 형태를 이루면서, 정확한 각을 이루어 스스로 지탱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견고하게 홍예를 조성할 수가 있었는지 놀랄 만하다. 다리의 총 길이는 11.8m이며 폭은 2,7m, 높이 5.5m의 흥국사 홍예교. 흥국사를 답사할 때 들렸던 이 무지게 다리는 아직도 눈에 삼삼하다.

 

 

자연잡석을 이용한 노면

 

기하학적인 정확한 각을 이루어 스스로의 무게를 지탱하도록 조형을 한 흥국사 홍교. 그러나 1981년 폭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붕괴가 되었으나, 그 이듬해 복원을 하여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홍예의 한복판에는 양쪽으로 마루돌이 튀어 나와, 그 끝에 용머리를 장식하여 마치 용이 다리 밑을 굽어보고 있는 듯하다.

 

양측벽은 자연잡석을 마구 쌓기로 하여, 완만하고 긴 노면을 형성하고 있다. 잡석을 쌓은 양쪽 석벽 하류는 여유 있는 날개 모양으로 전개되어, 수압 및 자체 하중에 견디도록 구축하였다. 홍예의 석축 위에는 흙을 쌓아 자연 노면을 만들었는데, 그 양쪽 가에는 풀이 나서 자연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선조들의 놀라운 조형술

 

우리나라의 많은 돌다리 중 홍예교를 보면 가히 놀랄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그리 정확한 수치로 계산을 해, 한 장의 돌이 아닌 여러 장의 석재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 돌들이 서로 버티면서 무너지지 않고 오래도록 갈 수 있는 것인지. 선조들의 조형술은 가치 압권이란 생각이다.

 

늦은 가을에 찾아갔던 흥국사 홍교. 아마도 수많은 문화재를 보기위해 전국을 다녔지만, 그 중에서 만난 석교 중에서도 주변 경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다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올 가을 단풍이 흐드러지게 드는 날 다시 한 번 찾아가 보아야겠다. 문화재란 늘 잊지 않고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수원 역 광장 삼거리에서 안산, 인천 방향으로 조금 가다가 보면, 이층에 카삼(kasam)’이라고 하는 인도, 네팔 전문 음식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카삼에서는 인도에서 직접 전수받은 인도, 네팔의 대표적인 음식인 탄두리 치킨과 커리, 난 등 다양한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들을 맞는다.

 

이곳은 인도나 네팔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곧잘 찾아들어 음식을 맛보고는 한다. 이 카삼의 사장인 '거허르만 라이'씨는 네팔사람이다. 10여 년 전 한국으로 건너와 갖은 고생을 하다가 수원역 앞에 ‘카삼’이라는 네팔 인도식 레스토랑을 차렸다.카삼이라는 이 명칭은 약속을 지킨다.’라는 뜻이다.

 

 

향신료의 색다른 맛과 화덕에 구운 치킨

 

313(), 오후에 카삼에 들렸다. 지인들의 안내로 생전 처음으로 찾아가 인도와 태국의 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아주 오래전 동남아 쪽의 음식을 먹다가, 진한 향으로 인해 고통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수원역 맞은편에 동남아 쪽의 음식점이 여러 곳이 있지만,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었다.

 

음식의 이름을 모르니 함께 간 지인들이 시키는 것을 맛볼 수밖에. 처음으로 내온 것은 라씨라는 음료였다. 이 음료는 수제 요구르트에 홍차를 가미한 맛이 나는데, 생각 밖으로 맛은 괜찮은 편이다. 카삼에는 플레인 라씨와 수제요구르트에 바나나를 섞어 만든 바나나 라씨’, 딸기를 섞어 만든 딸기 라씨’, 망고와 함께 섞어 만든 망고 라씨등이 있으며, 가격은 한 잔에 4,000 ~ 4,500원 선으로 부담이 없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은 인도의 대표적인 바비큐인 탄두리 치킨이다. 닭을 인도의 향신료를 첨가하여 하루를 숙성 시킨 후, 화덕에 구워낸 바비큐이다. 모두 네 조각을 소스와 함께 내어 놓는데, 바삭한 것이 그렇게 진한 향신료를 사용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저 편안하게 먹을 수 있도록 향신료를 우리 입맛에 맞게 조절을 한 듯하다.

 

화덕 구원 낸 바삭한 빵,

 

카삼에 가면 인도 풍의 화덕에 구운 빵인 을 맛볼 수가 있다. 난의 종류는 밀가루, 우유, 계란으로 숙성시켜 화덕에 구워낸 인도 전통 빵인 플래인 난’, 밀가루 우유, 계란으로 숙성시켜 다진 마늘을 얹어 화덕에 구원 낸 고소한 인도 전통 빵인 갈릭 난’, 버터를 첨가 한 버터 난과 양파를 첨가한 양파 나등이 있다.

 

 

난의 가격은 플래인 난은 2,000, 갈릭 난과 버터 난은 2,500, 양파 란은 3,000원이다. 이 화덕에 구원 낸 인도 전통 빵인 난을 커리라고 하는 죽과 같은 것에 찍어먹거나, 아니면 란을 넓게 찢어 커리를 싸 먹기도 한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카삼에서의 전통 인도 풍의 만찬.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색다른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움이다. 이 카삼에서의 인도 풍의 전통 음식은 맥주를 마시면서도 부담이 없이 함께 할 수 있어 좋다. 혹 수원에 들리실 일이 있다면, 카삼에 들려 전통 인도풍의 맛과 항에 푹 젖어 보시길...

 

 

전화 : (031) 252-9771

요즈음 어느 국회의원이 담배 값을 2,000원이나 올리겠다고 해서, 누리꾼들 사이에 말들이 많다. 담배 값을 올리는 것도 좋고 금연지역을 설정하거나, 서울처럼 담배 피우지 못하는 지역을 정해놓고 벌금을 물리는 방법도 다 좋다. 하지만 그 분들 정책을 잘 이끌어 국민들이 마음 편하게 살게 해준다면, 흡연 인구는 저절로 줄어 들 것이란 생각이다.

 

흡연인구가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살기가 팍팍해지면 술을 마시게 되고, 그러다가 보면 자연히 담배 한 대 쯤 피워 물게 되기 때문이다. 담배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타인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해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인 듯하다.

 

 

눈처럼 깔린 담배꽁초

 

12() 오후에 지인들과 만나 지동 순대타운을 갔다. 요즈음 순대타운에는 화성을 둘러보고 난 후 가족들과 함께 들어오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듯하다. 가족들이 들리다가 보면 아무래도 아이들도 동석을 하게 된다. 지동 순대타운은 지난해부터 전체가 금연 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아이들까지 적지 않으니 금연지역으로 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잠시 순대타운 뒤로 나가보았다. 순대타운은 화성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 평소에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그런데 건물 뒤로 나가보니 길바닥에 무엇인가 하얗게 눈처럼 깔려있다. 담배를 피우고 버린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였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만 같다. 지난 주말과 일요일에 이곳에 들린 사람들이 버리고 간 것인 듯하다.

 

 

순대타운 뒷길은 화성을 관람할 수 있는 관람로와 멀지 않다. 그런데 심하게는 축대를 쌓고 잔디를 조성한 곳까지 담배꽁초들이 즐비하다는 점이다.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고, 밖에서 피웠다는 것은 물론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함부로 길가에 꽁초를 버려야만 헸을까?

 

재떨이라도 설치해야

 

이렇게 방치되어 있는 수북한 꽁초들을, 화성을 찾는 사람들이 본다면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인가? 근처 어디를 찾아보아도 재떨이 등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독이나 이런 것을 갖다놓고, 모래를 담아 놓은 임시 재떨이도 보이지 않는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 것만 종용을 했지, 대책은 하나도 세워놓지 않았으니 자연히 길거리가 재떨이가 될 수밖에.

 

 

무조건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만 할 것이 아니고, 흡연자들도 이곳을 찾아온다는 것은 유념하고 그런 것을 준비를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지동 순대타운의 이미지를 버리는 이런 일은 사전에 미리 막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뒷길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를 보면서,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는 번암면 소재지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남노령이 주산을 이룬 대성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중엽에 홍성 장씨들이 이주해 집단마을로 취락이 형상되었다. ‘노단이란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의 집터와 같은 명당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노단 마을 도로변 대성산 자락에는 겹처마 우진각으로 지은 육각형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정자는 길에서 보면 조금 위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낮은 담장에 일각문을 내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를 오르는 길 한편에는 반계정(磻溪亭)’이라 음각한 돌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도 깨어진 바위에 반계정이란 글이 쓰여 있다.

 

 

 

바위에 새겨져 있던 반계정 표석

 

원래 이 깨어진 바위에 새겨진 반계정이란 글씨는,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우측 도랑끝의 암벽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1978 ~ 198019번 도로의 개설로 인하여 방치되어 오던 것이라고 한다. 2007년 반계정 아래에 있는 우물을 정비하던 중, 본 표석이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를 원 상태로 복원을 하고자 했으나, 오랜 시간 풍화로 인해 보존하기가 어렵자, 탁본을 하여 현재의 돌에 그대로 새겨 넣었다고 한다. 200710월의 일이다. 계단을 올라 일각문 안으로 들어선다. 안에는 육각형으로 지은 누정이 있다. 정자로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겹쳐 놓았다.

 

 

 

취헌의 정자 반계정

 

취헌 장안택 선생은 자는 사유이고 아호는 취헌이다. 선생은 만인을 구제하는 제세구휼을 일생의 업으로 삼고 몸소 실천을 하였다고 한다. 취헌 선생의 이러한 마음은 전국 각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구제를 하던 장안택 선생은 급변하는 세태의 변천을 개탄하며, 세상을 등지고 자연에 몸을 묻고자 생각했다.

 

그래서 지은 것이 대성산 바위 암벽 아래에 반계정이다. 지금이야 앞으로 도로가 나 있지만, 아마 이 정자를 지었을 때는 바위와 앞으로 흐르는 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자였을 것이다. 선생은 이 정자에서 자손들을 교육시키며 여생을 보냈다. 반계정이란 바위와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상징하는 뜻이다.

 

 

취헌 장안택 선생은 조선조 철종 14년인 1863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조선 후기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사업가이다. 부친은 동몽교관인 장석룡이며, 조부는 남요 장홍규이다. 선생은 조부로 부터 예의범절과 학문을 닦았다. 선생의 집은 장부자집으로 통했다. 종손인 선생은 적선을 많이 하였다.

 

고종 31년인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는, 관군에 쫓긴 농민들이 장수 번암까지 피신해 이곳 번암면이 농민군들의 집결장소가 되었다. 선생은 농민군으로 인해 민폐가 일어나자, 이들에게 술과 고기 등 음식을 베풀어 민폐를 줄였다. 관군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음식을 베풀어 민폐를 줄이기도 했다.

 

 

자손들이 기억하는 반계정

 

반계정 뒤편 암벽에는 장안택, 반계정이라고 음각한 글이 있다.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자 병준이라 새개 넣었다. 조상의 정자를 기리기 위해 후손이 새겨넣은 글씨이다. 이 반계정은 1800년에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장수군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최근에 보수를 한 듯하다.

 

정자는 육각의 모든 면에 문을 달았다. 아직은 보수 중인 듯 문은 모두 떼어내 한 편에 쌓아놓았다. 정자 안에는 반계정 운이란 선생이 지은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취헌이란 편액이 있다. 정자는 입구를 뺀 전면에 난간을 둘렀다.

 

 

우진각으로 지은 정자는 밑 안으로는 장초석으로 된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운 뒤 누마루를 깐 정자를 올렸다. 그리고 겹처마를 받치기 위해 활주를 세웠는데, 아래편은 육각형의 장초석을 세운 후, 그 위에 육각형의 기둥을 받쳤다.

 

취헌 장안택 선생. 평생을 자선사업가로 살다간 마음을 담고 있는 반계정. 아직은 주변이 부산스럽기는 해도, 그 위에 올라 선생의 마음을 담아간다. 세상이란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전북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내소사의 대웅보전은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에 지어진 전각이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고 한다. 원래는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고 하였는데, 그 중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가 지금의 내소사이다.

 

대웅보전은 조선 인조 11년인 1633년에, 청민대사가 절을 중창할 때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대웅보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이다. 대웅보전의 규모는 정면 3측면 3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짠 장식구조가 다포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포개진 모습은 우리 옛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꽃 창살의 아름다움은 창호의 백미

 

내소사 대웅보전의 앞쪽 문에 달린 창호의 창살은 꽃무늬로 조각하여, 당시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연꽃, 국화꽃, 해바라기 등 꽃문살 무늬는 문마다 모양이 다르고 나무결을 그대로 살려 꽃잎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대웅보전 안쪽으로 들어가면 벽체 윗부분에 있는 부재 끝을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보머리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 건물의 화사함을 더해 준다.

 

천장은 우물천정으로 꾸몄으며, 불상 뒤쪽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가장 큰 백의관음보살상이 그려져 있다. 공예로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과 독창적인 장식물 등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 양식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목침으로 꾸민 내소사 대웅보전

 

이 보불로 지정이 된 내소사 대웅보전에는 전설이 전한다. 대웅보전 오른쪽 천장의 목침이 왼쪽의 것보다 하나가 부족한데, 그에 관해 전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소사가 퇴락해 가고 있을 때 창민대사는 날마다 내소사 일주문 앞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웅전을 짓기 위해 목수가 찾아왔다. 그 목수는 나무를 목침만한 크기로 잘라 다듬기를, 3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는데 그 동안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일만 계속하였다. 주지인 청민대사는 기다리기만 했다.

 

그 절에 상좌스님이 목수를 곯려주려고 목침 하나를 감췄다. 3년 동안 목수는 목침 다듬기를 다 마친 후 수북이 쌓아둔 목침을 세더니 눈물을 흘리며 청민대사를 찾아갔다. 목수는 목침 하나가 없어졌으니 대웅전을 지을 인연이 없다고 말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청민대사는 목침이 하나 없는 채로 법당을 짓도록 부탁을 했고, 목수는 그 목침을 이용해 순식간에 법당을 완성했다.

 

 

법당을 완성하자 청만대사는 화공을 불러와 단청을 그리도록 했다. 단청이 완성될 때까지 누구도 그 안을 들여다보아서는 안된다고 신신 당부를 했다. 법당 앞에는 항상 목수가 지키고 있었다. 상좌스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목수에게 대사가 찾는다고 거짓말을 하고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오색영롱한 작은 새가 부리에 붓을 물고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상좌스님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새가 날아가 버렸다. 법당 앞에는 큰 호랑이 한마리가 죽어 있었다. 커다란 호랑이가 죽어있는 모습을 본 청민대사는 대호선사여, 생사가 하나인데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이러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내소사의 대웅보전. 벌써 다녀온 지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하다. 올 봄 꽃이 필 때는 내소사를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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