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는 의병대장인 ‘신돌석장군’의 생가지가 있다. 이 생가지에는 작은 초가 한 동이 서 있는데, 이 집이 바로 신돌석장군이 태어난 집과 같이 지어진 집이다. 집은 고택과 생가, 가옥 등으로 구분한다. 이 중에서 생가는 태어난 곳이고, 가옥은 현재 사람이 거주하는 집을 말한다.

생가지란 그 사람이 태어났으나 현재의 집은 태어날 당시의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덕에 있는 신돌석장군의 집도 태어난 곳이기는 하나, 그 당시의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기에 그 집터에 지은 집일뿐이다. 하지만 옛 기억을 더듬어 그대로 지었으니, 전혀 무관하다고는 볼 수가 없다.


의병장 신돌석은 누구인가?

신돌석(申乭石, 1878 ~ 1908년)은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당시의 의병장들이 대개는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므로, 신돌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평민의병장이 된다. 영덕 축산면의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난 신돌석은 본명은 신태호이다. 19세의 어린 나이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이 되자, 동생 신우경과 함께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신돌석장군은 울진 등에서 일본 선박을 여러 척 침몰시켰다. 그리고 강원도 동해안과 경상북도의 내륙지방, 지금의 원주까지 넘나들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일본군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별명은 ‘태백산 호랑이’로 불릴 정도였다.

신돌석장군의 이강년의 의병과 순흥(영주시)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여러 곳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펴면서 활약을 하였다. 경기도 여주 출신 이인영의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자, 영남지방을 담당하는 교남창의대장이 되기도 했다.




신돌석장군에 대한 설화 한 토막

이렇게 전국적으로 전공을 세운 신돌석장군은 설화가 많기로 유명하다. 어려서 고래산에 나무를 하러 간 신돌석은 ‘천서(天書)’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힘이 장사였으며 달리기를 잘해, 하룻밤 사이에도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힘이 센 신돌석은 도둑을 잘 잡기도 했고, 호랑이와 싸워 물리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출귀몰한 신돌석장군이 죽은 것은 왜군들의 치졸한 방법 때문이었다고 한다. 총을 쏘아도 죽지를 않는다고 전해지자, 왜병은 신돌석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런 왜병의 속임수에 넘어간 김상렬이 형제인 김상태, 김상호와 함께 집에 찾아 온 신돌석장군에게 독주를 먹인 후 도끼로 살해를 했다고 한다. 이 삼형제는 신돌석장군의 머리를 잘라 왜병에게 가져갔으나, 산채로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상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출한 네 칸의 초가에서 영웅이 태어나

신돌석장군의 생가지에는 현재 네 칸짜리 초가가 한 채 있다. 1940년에는 일본군이 독립의지를 꺾는다는 핑계로 불을 질러 태워버린 것을, 1942년에 기와로 복원을 하였으며, 1995년 8월 19일에 생가지 정비를 하면서 원래의 형태로 복원을 했다고 한다. 집은 동편에 부엌을 두고 방 한 칸과 대청, 그리고 건넌방을 두었다.

집은 단출하며 부엌만 앞으로 돌출을 시켰고, 방과 마루는 앞으로 처마를 빼고 뒤로 물려서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하였다.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대청에는 마주보고 문을 내어 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독은 부엌 뒤편에 놓았으며, 앞마당에 돌우물을 있다. 평범한 농민의 집인 이곳에서 왜병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신돌석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보면 13도 총 의병대장이었던 이인영장군의 집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왜 의병장들의 생가는 이리 초라한 것인지.



400년이 나 된 집이 있다면, 먼저 어떻게 아직도 그런 집이 보존이 되어 있을까하고 궁금해 할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겠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집이 신라 때는 절터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또한 집안에 잇는 석물들도 신라 때의 것이 아직도 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경주시 탑동 633번지에 소재하는 중요민속자료 제34호인 ‘김호장군 고택’은 장군이 태어났다는 집이다. 이 집은 개인의 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김호장군은 임진왜란 때 부산첨사로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생각 밖으로 조촐한 가옥

중요민속자료라고 하면 우선은 그 규모가 상당하리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김호장군의 고택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안채가 있고, 그 우측으로는 뒤편에 사당이 자리한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초가로 마련한 아래채가 서 있을 뿐이다. 그저 평범한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으로 마련한 가옥이다.

안채도 그리 크지가 않다. 임진왜란 당시의 첨사면 이보다는 더 큰 집에 살 것이란 생각을 하고 들어간 것이 내 한계였다. 집을 들어보는 순간 ‘참으로 조촐한 집이로구나’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큰 집일 것이란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움을 먼저 느낀다. 장군의 단아한 심성을 보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솟을대문과 안채의 부엌(가운데) 그리고 초가로 된 아래채(아래)

5칸의 안채는 마루조차 없어

안채는 솟을대문과 마주하고 있는 - 자형의 구조이다. 모두 5칸으로 구성이 된 안채는 측면도 한 칸으로 지어졌다. 서쪽부터 부엌과 방, 대청과 방으로 꾸며진 단출한 집이다. 건물은 옛 남부지방 가옥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으며, 대청에도 문을 달았다. 현재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조금은 안으로 손을 본 듯하다.

장군의 집을 찾아들어 갔을 때는, 마침 무슨 모임이라도 있는 날인가 보다. 집을 좀 촬영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들이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안채가 이렇게 단순한데 그 외에 건물이라고 특별한 것이 있을까 싶다. 부엌을 뺀 안채는 모두 4칸으로 툇간조차 달지 않았다.



안채 동편과 안방, 장독대

솟을대문은 후에 다시 복원을 하였는지, 양 옆으로는 한 칸씩을 달아냈다. 한편은 곳간으로 사용하고 한 편은 방을 드렸다.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한 칸으로 초가집이다. 두 개의 방을 드리고, 안채 쪽에 한 칸의 부엌을 달아냈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음식을 준비하는 듯 분주하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 이상은 돌아다니기가 미안스럽다.


우물과 사당(아래)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물

이 집안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바로 우물이다. 아주 오래된 것 인양 고풍스럽다. 돌로 주변을 놓고, 가운데를 좁게 오므려 놓은 특이한 우물이다. 안에는 맑은 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이 집에서 원래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이 집이 신라 때의 절터였다고 하면, 저 우물의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된 것일까?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데도, 마치 비어있는 집인 듯 조용하다. 집안에 모인 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다과를 들고 있는 듯하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담장이 특이하다. 돌로 만든 담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참으로 조촐하고, 운치 있는 집을 보았다는 생각이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는데, 장군의 절제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운치가 있는 돌담


흔히 너와집이라고 하면, 먼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집이 생각난다. 그것은 그 집의 분위기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와가나 초가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가면 너와집이 몇 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중 김진호 가옥을 찾아 너와집의 이모저모를 알아본다.

우선 너와집이란 그 지붕의 재료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너와’란 널판으로 만든 기와로 풀이를 할 수 있다. 산간지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소나무나 전나무 등을 길이 40~70cm, 혹은 80~110cm 정도로 자르고, 그것을 폭 30cm, 두께는 3~5cm 정더러 자른다. 그렇게 자른 널빤지 형태가 바로 너와가 되는 것이다.



150년 전에 지어진 김진호 가옥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 정도인 김진호 가옥은 150년 전에 지어진 집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지만, 집은 말끔하게 수리가 되었다.(올 초에 답사를 했을 때는 낡은 곳이 보였다) 너와집은 방의 담벼락을 뺀 나머지 벽은 모두가 나무로 만든 판벽이다. 아마 이곳의 땅들이 돌이 많다보니 흙보다는 오히려 나무를 채취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인 듯하다.

지붕은 안에서 보면 하늘이 드러나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나무를 이리저리 맞물려 놓아 큰 비가 아니면 그렇게 새지는 않는다고 한다. 또한 굴피나무 껍질을 벗겨 그 안에 덥기 때문에 비가 새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붕은 너와를 이은 다음 긴 나무를 얹어 고정을 시킨다. 기와 아래는 역시 둥근 통나무로 서까래를 사용한다.



지붕을 올린 모습(위), 지붕 밑의 서까래(가운데) 그리고 집안에서 올려다 본 지붕
 
실내는 보기보다 온기가 돌아

밖으로는 대문 옆에 화장실이 있다. 돌출된 이 화장실 안으로는 외양간이 자리한다. 대문은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데, 문은 좁은 편이다. 바람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문을 작게 만든 듯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는 외양간이 있고, 우측으로는 부엌이 있다. 부엌은 별도의 문이 없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부엌으로 출입을 할 수가 있다.



대문 옆에 자리한 화장싱(위) 대문, 그리고 집안에 있는 옛 기물(아래)

방은 모두 세 개로 들어서면서 좌측에는 사랑방이 있고, 별도의 판마루가 깔려있다. 가운데는 샛방이 있다. 부엌 뒤편으로 안방이 있으며, 그 앞에 마루를 놓았다. 판자벽에는 사방에 문을 내어 습기가 차는 것을 막았다. 이 집에는 과거에 사용을 하던 싸리로 역은 후 방충효과를 위해 쇠똥을 발라 곡식을 저장하는 채독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피나무 속을 파내 나무통을 만들어 무나 배추를 저장하는 김치통이 있다.

실내에 들어가면 밖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아늑함이 있다. 아마 불씨를 보관하는 ‘화터’기 아궁이 옆에 있기 때문인가 보다. 밖으로 나 있는 문은 대개 조그맣게 내었는데, 이것은 산간지방의 매서운 겨울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에는 일부러 너와집을 찾아 민박을 하고, 너와집의 체험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예전 이곳에서 실생활을 하던 분들은 불편했을 것도 같다. 우리의 전통가옥의 한 형태인 너와집. 중요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너와집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가면 중요민속자료 제5호인 운조루가 자리한다. 이 집은 조선 영조 때 심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세운, 조선시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집 중 한곳이다. 원래 ‘운조루’란 현판이 사랑채에 걸려있던 것으로 보아. 사랑채의 누정명칭을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3대 길지의 한곳에 지은 집이라고 하는 운조루는, '금환락지'의 명당이라고 한다. 금환락질한 지리사의 선녀가 섬진강 물에 머리를 감다가 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빠트린 형상이라는 말이란다. 이 마을은 용두마을이라고 부르는데, 지리산의 지맥이 마을로 뻗어내려 그 기운이 이 마을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운조루에 가면 꼭 눈여겨보아야 할 것들.

1. 솟을대문에 걸린 호랑이 뼈

운조루를 찾아가면 정말 ‘이런 집도 있었나.’하고 감탄을 하게 된다. 그저 휑하니 둘러보고 나올 집이 아니다. 솟을대문을 가운데 놓은 행랑은 동, 서로 길게 뻗어 있다. 그 솟을대문의 살창에 보면 양편으로 짐승의 뼈 같은 것이 걸려있다. 바로 호랑이 뼈이다. 아마 이집의 가세를 알리는 이유도 있겠으나, 호랑이 뼈를 대문에 걸어 액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2. 3개월간 시신을 안치하는 가빈터

예전에 가풍이 있는 집들을 보면 99일장을 지내기도 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장례를 치루는 집들은 대개 초분을 마련한다. 운조루의 서행랑 끝에 보면 광과 같은 두 칸이 있다. 바로 ‘가빈터’ 혹은 ‘초빈’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사람이 운명 후 3일이 지나면 입관을 한 후, 이곳에 석 달 동안 안치하였다가 출상을 하는 곳이다. 안치 기간 중에는 아침에 상식을 올리고, 삭망에는 제례를 지낸다.



3. 경사가 진 곳에 놓은 널마루

운조루의 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사랑채와 부엌으로 연결을 하여 꺾인 작은 사랑채가 보인다. 이 작은 사랑채의 방문 앞에는 넓적한 널판 두 개를 놓았다. 나무를 말리고 있는 듯한, 이 널판이 사실은 방문 앞에 놓은 툇마루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널판은 경사가 진 건물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건물 끝의 툇마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운조루에서 만 볼 수 있는 여유의 멋이다.


4. 나눔의 아름다움 ‘타인능해(他人能解)’

지금은 사랑채의 부엌에 큰 뒤주와 함께 놓인 이 목독은 사실은 구제를 하기 위한 도구였다. 둥근 나무를 속을 파내고 만든 나무 독은, 쌀이 두 가마 반이나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 밑에는 구멍이 나 있는데 마개가 닫혀있다. 이 마개를 빼면 통 안에 들어있는 쌀이 쏟아져 나온다. 가난한 이웃사람들이 쌀을 가져다가 굶주리지 않게 한 장치이다. 나눔의 아름다움을 실천한 이 집의 가풍을 엿볼 수가 있다.


5. 나무로 만든 툇돌

마루나 방문 앞에 놓는 툇돌은 대개 돌로 만든다. 그러나 온조루의 안채를 들어가면 툇돌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두터운 나무를 흔들이지 않도록 괴어, 그 위에 시발을 벗어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돌이 없어서 그랬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돌로 만든 툇돌은 오래가기는 하지만, 겨울철에는 신발을 더 차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철에는 비라도 내리면 돌은 미끄러진다. 하지만 나무는 그런 것이 없으니, 나무를 사용하여 툇돌대신으로 한 것 같다.


6. 그 외에 운조루에서 눈여겨 볼 것

현재 사랑의 뒤편에는 별당채가 있었다. 지금은 안채로 들어가는 후원이 되어있지만, 이 별당채의 자리를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또 사랑채 누정의 마루밑에는 옛날에 사용하던 우마차의 바퀴가 놓여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나무로 만든 우마차의 바퀴와 멍석등도 아이들에게 옛 풍습을 알려줄 수가 있다.

안채의 기단 위에는 돌로 만든 구조물이 하나 보인다. 아래편에는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것은 바로 돌로 만든 대야이다. 손을 씻거나 세수를 한 다음, 구멍의 마개를 열면 물이 빠져나간다.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운조루는 대가답게 여기저기 숨은 재미가 많은 곳이다. 여행길에 이곳을 지나게 되면 한 번 들려보면 좋을 듯하다. 아이들에게는 우리 역사와 함께, 아름다운 나눔의 마음을 알려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인 전봉준. 전봉준은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그러나 정읍에서 태어났다는 일설과는 달리 또 한 곳의 전봉준 유적지가 고창에 남아있다. 바로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이다. 이곳에는 전봉준이 태어나 13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는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란 그 곳에서 태어났으나, 당시의 집이 남아있지 않고 그 터만 남아있는 곳을 말한다.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고창의 생가터

정리되지 않은 전봉준의 출생지

고창군을 답사하는 중에 생각지도 않은 이정표를 하나 보았다. ‘전봉준 생가터’라는. 의아하다. 전봉준의 고택은 정읍에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고, 그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럴 때 무지한 본인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다. 왜 좀 더 여러 곳의 기록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서다.



고창 생가터에 세워진 시비와 마굿간

전봉준(全琫準, 1854 ~ 1895년 3월 30일)은 조선의 교육자이자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다.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별명은 '녹두 장군'으로 키가 단구라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본관은 천안이다.(다음백과)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동학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선생이 태어난 옛집으로, 그는 1855년에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 해당한 이 집에서 아버지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태어난 이곳을 떠나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에서 살았을 때에는 세마지기의 전답을 가지고 있는 정도였고, 한때는 후일 동학의 지도자들이 된 김개남·송희옥과 함께 전주 봉상면 구미리에 살기도 하였다. 동학에는 30세 때에 입도하여 고부지방의 접주가 되고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폐정의 시정을 진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1,000여명의 군민(郡民)을 모아 고부군아를 습격했는데(일부에서는 4,000명이라고도 한다), 이로부터 동학혁명이 본격적인 시작을 보게 되었다.(문화재청 자료 일부 발췌)

일반적으로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현재 사적지로 지정이 된 고택이 있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창군의 당촌마을에 있는 이곳은 어떻게 전봉준 생가터가 되는 것일까? 마을에서는 고로들이 이곳이 전봉준 선생이 태어난 곳이 틀림이 없다고 하신다. 생가터를 들어가는 길의 명칭도 ‘전봉준로’ 명명하였다.


예전에는 서당과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학농민운동 때 다 타버리고 지금은 재현된 건물이 서 있다.

역사적인 인물의 기록조차 정리가 안 되다니.

정읍시 이평면인지 고창군 고창읍인지, 두 곳 중 한 곳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곳이 모두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한다면, 녹두장군 전봉준이 두 사람이라는 소리일까? 이런 역사의 인물조차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울화가 치민다. 오래된 인물도 아니고 근대의 인물에 대한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해명이 되질 않는다.

전봉준에 대해 이렇게 출생지서부터 일치가 되지 않은 것은, 많은 이주로 인해서 일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정읍 감곡면 계룡리, 전주, 김제 금산면 삼봉리, 태인 산외면 동곡리, 고부 양교리 등 많은 곳에서 전봉준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고창현 덕정면 당촌(현 고창읍 덕정리)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인물의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좀 더 책임있는 연구로 인해, 두 곳 중 어느 곳이 정확한 출생지인지 밝혀지고 올바른 기록을 남겨야 할 것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