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것은 제각각이다. 어느 누구는 치부를 자랑으로 사는가 하면, 어느 누구는 청빈한 삶을 살기도 한다. 명성을 찾는 이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할 일만 죽어라 하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인생이 성공을 했는가는 후세의 사가들이 기록을 한다고 하니, 사람마다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녹녹치가 않다는 생각이다.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는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1420 ~ 1489)의 생가가 있다. 단종의 폐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이곳에 내려와 은거를 하면서 살았던 집이었을 것이다. 건물이 그 때에 지은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지만, 아마도 그 집 자리에서 몇 번은 보수를 한 듯하다.


청빈한 생활 그대로

울안에는 수령 500년의 보호수가 한 그루 서 있다. 어계 조려선생이 이곳으로 낙향한 시기와 흡사하다. 아마 집을 짓고 난 뒤, 이 은행나무를 심었는지도 모르겠다. 높이 20m에 둘레가 3,4m나 되는 적지 않은 나무이다. 단종이 영월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뒤, 그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룬 분이 바로 어계 선생이다.

당시 사약을 받고 청령포에 시신을 버렸다고 일설에 전하고 있다. 그 시신을 수습하고 위폐를 동학사에 모신 후 이곳으로 내려왔다. 낙향한 어계선생은 일체 좋은 음식을 먹지를 않고, 고사리와 풀만 먹었다고 전한다. 수양산으로 들어간 백이, 숙제와 같은 생활을 한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 뒤편 산의 명칭도 백이산이라고 한다.




어계선생의 생가는 단출하다. 당시 벼슬을 한 사람들의 집이 고래등 같은데 비하면, 기와집이라고는 하지만 초막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재 전하는 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집은 대문채와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원북재, 그리고 뒤편에 있는 사당으로 구성되어졌다.

대문 위에 걸린 충신지려

어계생가를 들어가려고 솟을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대문 위에 현판이 걸려있다. 충신지려이다. <충신 증 이조참판 조려지려>라 적혀있다. 생육신의 한분이었으니, 충신이었음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대문을 들어서면 원북재라는 편액이 보인다. 이 원북재를 재실로 보고 있다. 살림집이 아닌 재실로 보는 까닭은 부엌 등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실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양편에 한 칸씩의 방을 드리고, 가운데는 두 칸 대청을 놓았다. 별난 것도 없는 검소한 고옥이다. 이 원북재는 사랑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두 단의 축대 위에 지은 원북재. 그 집에서 조려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조금의 화려함도 찾아볼 수가 없는 집이다.

원북재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대나무 숲을 뒤로 한 사당이다. 사당은 세 칸으로 되어있으며, 주변을 돌담으로 둘렀다. 사당에서는 조려선생과 부인의 항례가 행해진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사당에서 제를 올리기 위한 집이기에, 원북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담장에 붙어있는 집, 안채가 아닐까?

조려선생 생가 곁에는 또 한 채의 집이 있다. 따로 담장을 쌓고 문을 내었는데, 주추 등으로 보아 조려선생 생가와 년대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집에 대해서는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이 집은 네 칸으로 지어진 팔작집이다. 기단은 시멘트로 발라놓아 정확한 모습을 알기는 어렵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이 집은 우측 한 칸을 내달았다.

집을 바라다보면서 부엌방과 안방, 한 칸의 대청, 그리고 높임마루를 둔 건넌방이 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부엌이 딸린 방 벽 밑에는 창불을 때는 아궁이가 보인다. 주추도 마름모꼴로 조성을 하였다. 여느 일반집 같지는 않다. 아마도 조려선생 생가의 안채는 아니었을까? 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려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어계 조려선생의 생가는 일반적인 집 구조와는 다르다. 선생의 평소에 청빈한 삶이 그대로 배어있다. 아마도 사랑채가 없는 것은, 바람 부는 청풍대를 사랑채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따라 어계선생에게 죄스런 마음이 든다. 날마다 커져가는 집들을 자랑하는 세상사가.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도로변에 자리한 괴헌 고택.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6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설 연휴 전인 1월 29일에 찾아간 괴헌 고택. 구제역으로 인해 영주의 여기저기 도로가 막혀있다. 특히 이산면 방향은 축산농가가 많아서 그런지 중간 중간 도로를 폐쇄한 곳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행히 괴헌 고택까지는 도로폐쇄가 되지는 않았다.

영주 괴헌 고택은 연안 김씨 영주 입향조인 김세형의 8세손인 덕산공 김경집(1715~1794)이 정조 3년인 1779년에 지은 집이다. 이 집은 낮은 비탈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넓은 평지가 조성되었다. 괴헌 고택은 외풍을 막아주고, 바람이 불면 낙엽을 쓸어 모아 준다는 ‘소쿠리형’, ‘삼태기형’의 명당 터라는 것이다. 김경집은 아들 김영(1789~1868)이 분가할 때 이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구분

읍면동

개소수

시작지점

폐쇄일자

폐 쇄

설치물

종 류

노선번호

합계

2개

읍면동

7개소

 

 

 

1

이산면

(5개소)

이산면 지동1리덧재

2010.12.08

모래

리도207호

2

이산면 지동3리장수골

2010.12.12

모래

리도202호

3

이산면 신암1리배진기

2010.12.18

 

 

4

이산면 신암2리우금

2011.01.02

 

5

이산면 원리 솔고개

2011.02.06

나무

 

6

봉현면

(2개소)

봉현면 하촌1리한티재

2010.12.06

경운기

리도207호

7

봉현면 하촌3리 제방

2010.12.13

경운기

하천제방

답사 당일 영주시에 통행이 제한 된 마을들. 굵은 글씨는 답사시 막혔던 곳이다. 이산면에 집중적으로 길이 막혀있다




회화나무가 많아 당호를 ‘괴헌’으로 짓다

김영은 이 집에 ‘괴헌’이란 당호를 붙였다. 그것은 집 주위에 회화나무가 많아서였다고 한다. 현재 이 괴헌 고택은 고종 8년인 1871년 선생의 증손인 김복연이 일부를 중수하였다고 하는데, 그 당시 가옥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가 ㅁ 자 형으로 집이 구성되어 있다. 뒤편에는 동편 높은 곳에 사당이 자리한다.

괴헌 고택의 특징은 사랑마당과 안마당, 그리고 사당으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사랑채 우측에 두었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수납공간과 쪽마루, 그리고 고방 등을 여기저기 펼쳐놓아 집안에 많은 기물들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원래 정침의 앞에는 ‘월은정’이라는 정자와 행랑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1972년 수해시에 유실이 되었다고 한다.



날아갈 듯한 사랑채의 처마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막돌로 쌓은 축대위에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모두 세 칸으로 지었으며, 동편 한 칸은 마루방으로 꾸몄다. 문간채는 바깥담을 판자벽으로 둘러놓아, 전체적인 집안 분위기를 대문간부터 부드럽게 했다. 사랑채는 툇마루 앞에 난간을 둘러놓았는데, 툇마루는 사랑 동편까지 이어진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사랑채는 집 전체가 날아갈 듯하다. 그만큼 사랑채를 꾸미는데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사랑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에는 중문이 나 있다. 중문 위에는 ‘괴헌고택’이란 편액이 걸려있으며, 안으로는 사랑에 불을 때는 아궁이와 고방을 마련했다. 중문 앞에 쌓여있는 장작더미가 정겹다.

중문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광채가 자리하고, 맞은편에 안채가 조금 높게 막돌로 쌓은 축대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안채는 앞으로 툇마루를 놓아 공간을 이용하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으로는 쪽마루를 놓고 바람벽으로 막았다. 이 쪽마루를 이용해 중문을 통하지 않고도 바로 안채로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쪽마루의 출입처는 사랑채 동편에 붙은 날개채에도 나 있다. 괴헌 고택에는 안방에 피난다락과 사랑방의 뒷벽에 은신처가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쪽마루가 그런 대피수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정리 안되는 문화재청 자료

답사를 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대개는 그 지역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문화관광 편을 찾아보거나, 문화재청의 문화재 설명을 참고한다. 그런데 괴헌 고택의 자료를 찾다가 보니, 영주시청 홈페이지에는 괴헌 고택이 중요민속자료 제262호로 나와 있다. 2009년 10월 30일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자료에는 괴헌 고택이 중요민속자료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5호 두 곳에 소개가 되어있다. 처음에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5호였다가, 2009년 10월 30일자로 중요민속자료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 2년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승급이 된 괴헌 고택이, 문화재청 자료에는 아직도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소개가 된 것이 남아있어 혼란을 야기한다.


위는 괴헌고택이 경북 문화재자료라고 남아있는 문화재청 문화재 검색창, 아래는 영주시 문화관광 창

우리의 문화재를 총괄하고 있는 문화재청에서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것인지. 이런 것 하나 제대로 관리가 안되는 문화재청에서, 과연 우리 문화재를 올바로 관리를 할 수가 있을는지. 그저 문화재를 사랑하고 찾아다니는 사람으로서 답답할 뿐이다.


강릉시 운정동에 가면 초당두부집들이 줄지어 있다. 그 곳에는 보물 제183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자인 ‘해운정’이 자리 잡고 있어, 정자의 풍취를 느끼게 해준다. 그 해운정과 낮은 담을 사이로 두고 집이 한 채 자리하고 있다. 바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9호인 강릉 심상진 가옥이다. 이 집은 17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당은 조선 광해군 때 강릉지역에 삼척부사로 역임한 허엽(1517~1580)의 호이다. 허엽은 허난설헌과 허균의 부친이다. 초당 허엽은 집 옆의 맛 좋은 샘물로 콩을 가공하고, 경포호의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추어 두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두부의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자,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허엽은 두부에 자신의 호인 ‘초당(草堂)’을 붙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보물 해운정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가옥

초당 허엽이 초당두부를 처음 만든 것은 500년 전의 일이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뒤 운정동에 있는 심상진 가옥의 주인도 초당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1월 30일 강릉지역을 답사하다가 오랜만에 해운정에 들렸다. 강릉을 갈 때마다 해운정에 들리는 이유는, 정자로서의 남다른 품위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해운정을 돌아보다가 시간을 보니 점심을 먹을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다. 답사를 하다가보면 언제나 때를 놓치기 일쑤다. 그래도 이렇게 바로 옆에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초당두부야 언제나 입맛을 즐겁게 한다. 더욱 해운정 바로 옆 심상진 가옥에서 하는 초당두부는 딴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그러니 어찌 이곳을 마다하고 길을 나설 것인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답사를 한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더구나 밥 때를 앞에 두었다면 더할 것이다. 그래도 이왕 이것을 왔으니, 심상진 가옥부터 찬찬히 둘러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담장이 없는 ㅁ 자 형태의 집

심상진 가옥은 담장이 없다. 아마도 이런 풍광에 집을 짓는다면, 굳이 담장을 둘러야 할 필요가 없을 것도 같다. 담장이 없는 ㅁ 자 형태의 집이면서도, 나름 고택의 정취를 잘 간직한 집이다. 집 앞에는 ‘400년 전통’ 운운하는 현수막이 높다랗게 걸려있다. 심상진 가옥 바로 옆에 초당두부집은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직도 살고 있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심상진 가옥. 앞으로는 세 칸의 사랑채가 장대석 축대 위에 자리한다. 이 사랑채는 바로 옆에 있는 해운정과 더불어 정자와 같은 느낌을 받게 만든다. 세 칸의 사랑은 바라보면서 좌측 두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 한 칸은 대청으로 드렸다. 강릉 지방의 대청은 일반적으로 문을 달았는데, 그것은 아마 해풍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퇴청 마루를 놓고, 뒤편으로는 수직으로 두 칸의 온돌방을 드렸다. 사랑채는 ㄴ 자형의 평면 팔작집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앞으로 보이는 풍광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을 한 사랑채. 특별한 꾸밈은 없지만, 나름 넓게 펼쳐진 경포호를 감상하기에는 적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통 건축미를 볼 수 있는 집

사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는 중문은 굴곡이 있는 문턱을 달아내었다. 넓지 않은 집이면서도 멋을 부릴 만큼 부린 집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의 아궁이가 있고, 바람벽을 판자로 달아내었다. 그러나 그 바람벽조차 꽁꽁 싸매지 않았다. 심상진 가옥의 여유는 이런 것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안채는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이다. 바로 옆 해운정이 중종 25년인 1530년에 강원도 관찰사인 심언광이 지었다는 것을 볼 때, 이 집은 심언광의 후손이 뒤늦게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기에 옆 해운정의 풍취를 넘어서지 않도록 지었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담을 두지 않은 것도, 해운정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안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부엌과 두 칸의 방을 두고, 그 옆에는 대청을 두었다. 대청 옆에는 한 칸의 방을 마련했는데, 이 방은 툇마루에 난간을 둘렀다. 아마도 이 방을 안사랑으로 이용한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에서 꺾어진 방 사이에는 일각문을 두어, 바깥출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주변 경관을 해하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 있어

안채에서 달아 낸 곳간채는 중문과 연결이 되어, 전체적으로는 막힌 ㅁ 자의 집이다. 안채와 달아낸 곳간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내어, 집안에는 중문을 포함해 모두 3개의 문이 있다. 집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동선을 최대한 편리하도록 꾸민 집이다. 안채의 앞으로는 넓지 않은 툇마루를 연결한 것도, 동선의 구성을 가장 편리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상진 가옥은 안채를 먼저 짓고 난 후 사랑채를 지었다고 한다. 옆에 두부집을 운영하면서 이 집에서 사람들이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집안에는 온기가 배어 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 후 맛보는 초당순두부. 그 담백한 맛은 기분 좋게 집을 둘러보았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답사를 하면서 가장 좋을 때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둘러 본 후,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을 때가 아닐 런지. 그래서 난 아직도 속물이란 표현을 마다하지 않는다.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에 소재한 선교장은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선교장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전주사람 이내번이 1703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이다. 99칸 집이라고 강릉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집을  ‘선교장(船橋莊)’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뱃머리와 같은 형태의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붙인 이름이다. 선교장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별당, 정자 등 상류민가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한다.


현 선교장의 건물가운데 1700년대 초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이 안채는 선교장의 건물들이 비교적 화려한데 비해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바깥주인이 사용하는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또한 담장 안에 자리한 열화당은 사랑채로, 순조 15년인 1815년에 이후가 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선교장


설을 며칠 앞둔 1월 30일에 찾아간 선교장. 연신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간 날씨가 강원도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래서인가 선교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10대 300년에 걸쳐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전통가옥. 선교장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각각의 건물들을 배치하고 있다. 각 건물들은 모두 떨어져 구성을 하였으며, 일각문이나 담 등으로 구분이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다 연결이 되어있는 듯하지만, 그 건물들은 각각 떨어져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선교장은 여러 대에 걸쳐서 보수가 되고 새로 증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건물들은 처음부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건물 하나를 지으면서도 기존의 건물을 염두에 두었다는 뜻이다.





“입장료 내고 들어왔는데 볼 것이 없네.”

“그러게 어디를 가나 다 볼 수 있잖아. 서울 가면 이런 집 천지인데”


선교장을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찍고 있던 사람들의 말이다. 볼게 없다는 말에 어이가 없다. 물론 서울에 가면 볼 수 있는 궁궐에 비교를 할 것인가? 하지만 우리 고택은 아무리 작은 집이라고 해도 그 집에서 느끼는 재미가 있다. 그런 점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둘러보아도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1703년 이내번이 제일먼저 지었다는 안채(위)와 공부장으로 사용한 서별당(가운데) 그리고 집안으로 들이는곡식을 받던 '받재마당'이 있는 연지당(아래)

‘이런 것을 모르면 재미없지’


‘문화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문화재를 볼 때는 미리 안내판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교장을 가면 먼저 이런 것을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우선은 미로처럼 길이 나 있는 선교장의 일각문은 모두 몇 개인가를 세어보는 재미이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일각문의 개수를 아이들과 함께 세어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이다.


선교장은 건물마다 그 쓰임새가 다르다. 그리고 선교장을 돌아보면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올린 건물과, 그 아래 있는 건물의 용도를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집 전체에 있는 굴뚝의 개수를 알아보는 것이나, 일각문을 사이로 각 건물들에 따른 아래채의 방의 개수, 그 방의 용도를 알아보는 것 등도 선교장의 둘러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선교장의 사랑채인 열화당(위)과 여운형 선생이 영어를 가르쳤던 영동지방 최초의 사립학교였던 동진학교로 사용이 되었던 곳간채

우리 문화재를 둘러보는 재미는, 그 어떤 것에도 비교를 할 수가 없다.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특히 고택 답사를 할 때는 그 집이 자리를 한 지형이나, 그 지역의 풍속 등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어디를 가나 다 있다’라는 말처럼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시는 없다. 고택구경, 아이들에게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를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강릉시 죽헌동 201번지에 소재한 오죽헌은 보물 제16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과 아들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지금은 5만 원 권의 인물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다. 신사임당은 모든 여성들의 근본이 되는 여인으로,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다. 사임당의 아들인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은 집이다. 규모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정면에서 오죽헌을 바라보면 왼쪽 두 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한 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보물 제165호로 지정이 된 강릉 오죽헌


조촐한 집에서 인물이 태어나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별당건물이다. 이 오죽헌의 오른쪽 방은 신사임당이 용이 문서리에 서려있는 꿈을 꾸고, 이율곡을 낳은 방이다. 방문 위에는 ‘몽룡실’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꿈에 용을 보았다는 것이다. 왼편에 있는 마루방은 율곡 이이가 6살 때까지 공부를 하던 방이다.


오죽헌은 정면 세 칸으로 지어진 집이다. 이단의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사용해 기둥을 세웠다. 왼편 두 칸 마루방 안에는 오죽헌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그만큼 오죽헌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려간 듯하다. 두 칸으로 된 측면을 돌아서면, 몽룡실 뒤편에는 마루가 놓여있다. 작은 별당이지만, 쓰임새를 생각해서 지은 집이다.




난 오죽헌에 가면 나무를 본다.


매년 한 번 이상은 들리는 오죽헌이다. 갈 때마다 그 분위기가 달라지는 오죽헌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오죽헌 안에는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백일홍이라고 부르는 ‘배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홍매화’이다. 이상하게 오죽헌을 들리는 시기가 늦은 가을부터 초봄 사이였으니, 아직 한 번도 이 나무들이 실하게 꽃을 피운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항상 오죽헌에 들려 돌아보는 이 세 가지의 나무는 각각 의미가 남다르다. 돌계단을 올라 오죽헌으로 들어가는 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배롱나무가 서 있다. ‘사임당 배롱나무’라고 명명하는 이 나무는 강릉시의 시화(市花)이기도 하다. 배롱나무는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100일간이나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 배롱나무라고 부르는 수령 600년의 백일홍과 율곡송(아래)

이 배롱나무의 원줄기는 고사했다. 현재의 나무는 원줄기에서 돋아 난 싹이 자란 것이다. 그 수령은 이미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 나무의 수령을 보니,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살았을 것이다. 아마 봄 날 공부를 하다가 나른해지면 이 배롱나무를 쳐다보면 기지개라도 켜지 않았을까?


천연기념물인 홍매화인 율곡매


오죽헌의 옆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48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매화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지났다. 1400년대 경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율곡매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직접 관리를 했다고 전해진다.  



오죽헌을 짓고 난 후 최치운이 심었다는 매화나무.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선생이 관리를 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매화나무를 잘 그렸다. 맏딸의 이름을 ‘매창(梅窓)’이라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 이 매화나무는 높이 7m, 땅위의 줄기둘레는 2m 가까이 되는 고목이다. 이 매화나무를 돌아보고 난 후, 끝으로 찾아본 것은 바로 ‘율곡송’이다. 이 세 나무를 돌아보는 즐거움은 오죽헌이라야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6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 자리에 서 있는 오죽헌. 그리고 수령 600년인 배롱나무와 매화나무. 그런 오랜 세월을 간직한 것들이 있어. 오죽헌의 나들이가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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