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를 하다가보면 아주 가끔이지만, 주변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헤매는 수도 있다. 만일 그 문화재가 있는 곳이 산속 같다면, 이렇게 헤매다가는 날이 저물기 일쑤다. 그래서 답사를 나갈 때는 늘 비상용 손전등을 지참을 해야만 한다. 이번 원주 지역 답사는 비가 온 뒷날이라 힘도 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마애삼존불을 찾아 인근을 이 잡듯 뒤져야만 했다.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에는 고려 전기에 조형된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길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가 있다. 큰 길에서 마애불을 찾아 걷는, 비가 온 뒤의 시골길은 기분이 좋다. 물기가 축축하게 젖은 풀들이 가끔 발길을 붙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한 땀을 흘리지 않아도 좋기 때문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마애삼존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우측)

갑자기 사라진 이정표

큰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려준다. 몇 km 쯤이야 답사를 나가면 늘 걷는 길이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보니 마을이 끝나는 곳에 이정표가 서 있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상’이라는. 가슴이 뛴다. 답사를 하면서 늘 새로운 문화재를 만날 때는 이렇게 가슴이 벅차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은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길을 꺾어들어 작은 도로를 따라간다. 저수지가 보인다. 그런데 양 갈림길인 이곳에는 정작 이정표가 없다. 할 수 없이 앞으로 향하는데 길이 막혀있다. 원주시청에 전화를 걸어 길을 물어보고 다시 주변을 살핀다. 여기저기 한참 찾다가보니, 저 건너편 길 끝에 이정표가 보인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었다.


걷고 또 걸아야 하는 답사길. 과수원 길을 지나(위) 발이 빠지는 논둑길을 걸어 찾아갔다(아래)

젖은 길에 빠지며 찾아간 마애불


저수지를 끼고 논길을 따라 걷다가 보니 과수원이 나온다. 올해는 잦은 비로 과수농가가 피해를 많이 당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그래도 열매가 실하게 달려있는 것 같다.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100m 전방에 있다고 표시를 하였다. 그런데 마땅한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논둑 길을 올라서니 젖은 논둑은 발이 푹푹 빠진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빠지는 발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마애불 안내판이 서 있는 곳까지 들어갔다. 근처에는 큰 돌이 없는데, 이곳만 큰 바위가 모여 있다.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마애불이 눈에 뜨이지가 않는다. 한참을 주변을 돌다가 보니, 위쪽에 있는 바위에 선으로 죽죽 그은 것 같은 선각한 마애불이 보인다. 그저 얼핏 보아서는 누군가 바위에 날카로운 것으로 낙서를 한 것처럼 보인다.



마애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군과(위) 흐려서 찾기조차 힘든 마애불(가운데) 확대된 사진(아래)

형태를 알아볼 수조차 없는 마애삼존불

이 마애삼존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좌불상을 선각하고, 양편으로 보살상을 새겨 넣었다. 입상으로 처리된 불상의 좌측보살상은 알아보기도 힘들다. 아예 있었다는 자취를 찾기도 힘이 들 지경이다. 연화대 위에 좌정을 한 부처는 얼굴은 마모가 되었다. 아래쪽에 대좌를 그리고 그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손은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손은 아래로 오른손은 약간 위로 한 것으로 보아, 지권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의 형태이다.

불상의 우측에 서 있는 보살상도 얼굴의 형체는 알아보기가 힘들다. 굳이 이 마애불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강원도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삼존불이 선각으로 조성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심하게 마모가 되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법의를 나타낸 선이 유려하고,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아 뛰어난 마애불임을 알 수 있다.


중앙의 불상은 연화대 위에 앉아있고(위) 양편에는 보살입상이 선각되어 있다(아래)

걷고 또 걷고 한참을 헤매고 난 뒤에도, 발목까지 빠지는 길을 걸아 찾아간 마애삼존불. 비록 그 정확한 모습은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하나의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뛴다. 그런 가슴 벅찬 느낌이 좋아 답사를 계속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위군에는 풍화작용으로 인한 바위와(위) 마애불을 새겨 넣을만한 벽이 보인다.

 

비가 오는 날 답사란 반갑지가 않다. 우선은 장비가 빗물에 젖을까봐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바짓가랑이를 척척하게 감겨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루를 그냥 포기하고 일요일 일찍 길을 나섰지만, 지난 토요일 내린 비로 인해 걸음을 온전히 걸을 수가 없다. 무작정 걸어야 하는 문화재 답사란 늘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왜 문화재는 꼭 그렇게 산이나 골짜기에 있나?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하지만 숨은 듯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은, 스스로 내세우지 않기 위함이다. 석불이건 마애불이건 아니면 석탑이 되었든지, 장인 스스로가 남에게 자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숨을 죽이고, 하나의 대단한 작품을 완성을 하는 그런 겸손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요즈음처럼 내놓고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을 하지 않아서 좋다. 그것이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려니 한다.


부처님, 몸은 어디에 두시고

원주에서 횡성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소초면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다. 소초면 소재지를 지나 횡성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소초면 교항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길가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밑에 보면 자연 암석 위에 불두(佛頭)가 한기 모셔져 있다. 바위 위에 올려 진 석조 불두.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4호이다.

바위에는 이끼가 가득 끼어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높이 1.05m 정도나 되는 커다란 불두가 올려져 있다. 이 석조 불두는 원래 이곳의 자연 암석위에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바위에는 선각으로 옷 주름등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지만, 그 돌이 매몰되어 알 수가 없다. 왜 이렇게 자연 암석 위에 불두만 조각을 하여 올려놓은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천안시 삼태리마애불 등과 같이, 자연 바위 위로 머리 부분만 솟아나게 제작한 불상과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불상은 고려 시대의 형태로, 이 지역에서 보이는 거대석불과 같은 종류로 볼 수 있다.

이끼가 낀 자연 암석, 그리고 고목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 그 그늘아래 놓인 석조불두. 그저 예사롭지가 않다.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에 눈은 수평으로 굳게 그려져 있다. 코는 폭이 넓고 두터워 전체적인 얼굴의 형태에서 과하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입은 두툼하게 표현을 해 과묵한 형상이다. 머리 위는 평평하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서, 그 위에는 평평한 사각형의 판석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고려시대 석조불의 형태를 지녀

옆으로 돌아 귀를 보니, 두텁게 표현을 해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뒷면은 조각을 하지 않고 쪼아낸 그대로 놓아두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토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석조불두는, 고려 시대 이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거대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머리 위에 평평한 돌을 얹어두는 형태도 고려시대 석불의 특징이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석조불두만 자연암석 위에 올려 진 교항리 석조불두. 그러나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느티나무 곁으로 돌아가 불두를 본다. 그 모습이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꿈속에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이다. “몸조차 무거워 버리셨습니까?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석조불두의 귀에 대고 떠들어보지만, 굳게 다문 입이 열릴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세상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어느 장인이, 천 년 전 이미 이 시대를 보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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