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을 새기기에 적합하지도 않은 바위. 온통 울퉁불퉁하여 조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 들듯하다. 거기다가 마애불을 조성한 아래로는 가파른 수직에 가까운 비탈이다. 그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다. 어떻게 이런 곳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그것도 한 두 구가 아닌 30여구에 이르는 마애불을.

경남 유형문화재 제20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산청 도전리 마애불상군은,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 ‘부처덤’이라 불리는 구릉 남쪽의 자연석 암벽에 새겨진 것이다. 현재 약 29구가 남아 있으며, 이들은 울퉁불퉁한 암벽에 4층으로 줄을 지어 새겨놓았다. 1층 14구, 2층 9구, 3층 3구, 4층 3구 등으로 배치되었고 크기는 30㎝ 내외의 소불 형태이다.


뛰어난 조각술, 그 많은 것들을 어느 세월에

소불로 조각된 마애불군은 그 크기가 한자 남짓이다. 대개 연꽃이 새겨진 대좌위에 앉아 있는 소불군은, 선각으로 결가부좌를 한 좌불로 조각을 하였다. 마애불군의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지만, 눈, 코, 입의 마멸이 심하다. 아마도 오랫동안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된 듯하다. 전체적으로 몸은 사각형이면서도 단정하게 앉은 모습이다.



법의는 양 어깨를 가렸는데, 이런 형태는 신라말기와 고려 초에서 보이는 법의의 형태이다. 아마도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마애불이 조성된 시기도,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일 것으로 추정한다. 좌불들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법의의 모습이나 수인 등 세부표현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수인은 다양하여 선정인과 시무외인, 보주를 받쳐 든 손 등, 다양하게 표현을 하고 있다.

놀라운 모습의 마애불상군

비가 오는 날 찾아간 도전리 마애불상군. 8월 13일의 날씨는 한 마디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비가 내리 붓다가도 금방 햇볕에 따갑기도 했으니 말이다. 우산을 받치고 마애불이 자리한 곳으로 갔다. 나무 통로를 조성해, 마애불상군을 보기 좋게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마애불이 있을만한 바위가 보이지를 않는다.




통로 끝까지 가보니, 이럴 수가 있나. 울퉁불퉁한 바위 암벽에 작은 소불들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도저히 조각을 할 수 없을 듯한, 움푹 파인 곳에도 마애불을 조성하였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소불들을 조각을 하였을까? 그것도 조각을 하기에 적합하지도 않은 바위 면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서원불로 보이는 마애불상군

작은 마애불 옆에 글씨들이 보인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김○자’. '○○先生'이란 명문들이다. 이 명분들을 보면 각각 소불 옆에 적어 놓았는데, 이런 글이 과연 처음부터 적힌 것인지가 의아스럽다.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에 조각된 마애불상군이라면 이런 류의 이름이 보인다는 것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마애불상군을 발견한 누군가 이 소불군을 서원불로 삼아 후대에 이름을 음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여기저기 무엇인가 파려고 했던 흔적들도 보이는 듯하다. 전문적인 연구가 더 되어야만할 산청 도전리 마애불상군. 비가 오는데도 그 앞을 떠날 수가 없다. 선각으로 음각한 좌불 하나하나가, 모두 내 발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수령 450년의 매화나무. 수령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니고, 남명 조식 선생이 심은 나무라 해서 더 유명하다. ‘남명매(南冥梅)’ 조식(1501 ~ 1572) 선생이 심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 나무를 남명매라고 부른다. 산청의 오래 묵은 매화나무 두 그루 중 하나인 이 나무는, 선생이 61세에 심었다고 전한다.

선생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본관은 창녕으로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만 열중한 선생은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재주가 뛰어났다. 한 마디로 팔방미인인 선생은 명종과 선조 대에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다. 그러나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오직 제자를 기르는 데만 힘썼다.


비를 맞으며 산천재를 찾아가다

남명매는 조식 선생이 61세에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그 앞에 기념으로 심은 나무라고 한다. 8월 13일, 산천재에 도착했을 때는 장맛비처럼 비가 내리 쏟고 있었다. 우산을 들었다고 해도 바람까지 불어, 카메라가 비에 젖을까 봐 행동이 부자유스럽다.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남명매를 보러 안으로 들어갔다.

스스로 ‘산림처사’라고 자처한 선생은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지었다. 61세에 이 집을 짓고 명이 다할 때까지 이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한 것이다. 선생의 제자들은 늘 선생이 천왕봉과 같은 기개를 가져야 한다고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런 선생의 교육 때문에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에 모여 나라를 구할 것을 다짐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선생은 우리의 역사상 가장 성공을 거둔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힘든 모습이 보이지만, 그래도 당당한 매화나무

선생이 남은여생을 보냈다는 산천재. 그 앞마당에 심은 매화나무는 10여 년 동안 선생과 함께 생활을 했다.

朱點小梅下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을 찍다가
高聲讀帝堯 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窓明星斗近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江闊水雲遙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아마도 이 시를 지을 때는 매화나무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매화를 심은 지 10여 년 후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게 선생과 함께 한 매화나무는,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450년 세월을 묵묵히 천왕봉을 바라보며 산천재를 지키고 있다.



비록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여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래도 그 오랜 세월 선생의 기개처럼 당당히 서 있는 나무이다. 매화나무를 보고 난 후 옆 전각의 마루에 걸터앉는다.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매화나무 잎 하나가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다.

그 오랜 세월, 선생의 마음을 닮아 산 남명매. 앞으로 얼마나 더 선생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것인지. 그저 세세연년 그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 아침 6시부터 연락을 하고 떠난 답사길. 오늘 촬영을 위한 답사는 경남 산청으로 정했습니다. 산청군으로 정한 것은 지난 번 집중호우로 지리산 일대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부러 산청 쪽의 문화재가 피해는 입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비만 많이와도 문화재가 늘 걱정이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강 공사를 한답시고 보물급 문화재를 훼손하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일찍 산청으로 출발하여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위치한 덕양전과 구형왕릉입니다. 구형왕릉은 산비탈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돌을 쌓고, 그 위에 역시 돌로 봉분을 올린 곳이기에 어느 곳보다도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형왕릉서 부터 시작한 촬영은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빗 속에서 강행군이 되었습니다.

구형왕릉에서 촬영 모습 - 동행한 아우가 아이폰으로 찍었습니다. 이렇게 찍힌 것이 아마 두번 째 인 듯합니다.

빗속에서 강행한 촬영

평상시 답사 때는 그저 편한 등산복을 즐겨입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답사일정 중에 마애불이 들어있어 산을 오르기 편한 헐렁한 바지를 입었습니다. 물론 신발도 늘 편하게 신는 목이 긴 구두를 택했고요. 그렇게 시작한 답사는 구형왕능을 거쳐 덕양전과 지리산 대원사, 내원사로 이어졌습니다. 

지리산 대원사는 보물 제1112호인 다층석탑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 다층석탑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 안에 있습니다. 종무실을 찾아가 문화재 촬영을 하러 왔다고 말씀을 드린 후, 사진 몇 장을 찍고 얼른 나오라는 조건으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알다시피 대원사와 내원사 계곡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대원사 다층석탑 촬영현장

대원사의 계곡은 그런대로 많은 피해를 입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내원사로 오르는 계곡은 물이 길 위로까지 넘친 자국이 보입니다. 여기저기 길이 끊어지고 심지어는 내원사로 연결하는 다리도 한 곳이 동강이 나 있을 정도입니다. 

그나마 문화재는 피해가 없다고 하니 그만해도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죠. 점심을 먹고 난 후에도 비는 오락가락하면서 촬영을 어렵게 했습니다. 생비량면의 마애불상군은 들어가는 입구가 굳게 닫혀있어 애를 먹기도 했고, 신안면의 수월정은 안내판이 없어 정자 앞을 몇 번씩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자세 한 번 하고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마친 촬영. 숙소로 돌아와서도 촬영은 계속되고, 눈까지 아파 겨우 일정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문화재 답사를 함께 한 PD님과 운전을 해준 아우. 이 두분은 먼 죄로 그 고생을 한 것인지. 그저 고맙고 또 고마을 뿐입니다.

빈 집을 들려 안부를 남겨주신 분들도 모두 고맙습니다.
주말과 휴일, 그리고 3일간의 연휴까지 행복한 시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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