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무정면 면소재지에서 무정초등학교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 안으로 들어가면 봉안리 슬지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높이가 33m 에 수령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마을 가운데 서 있다. 봉안리 1043~3번지에 소재한 이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82호이다.

담양 봉안리 은행나무로 명명된 이 은행나무는, 가슴 높이의 둘레는 8.5m 가 넘는 거대한 나무로, 마을 외곽 네 방위에 있는 느티나무들과 함께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로 여겨진다. 봉안리 은행나무는 밑 부분에서 2개의 줄기가 자라고 있는데, 작은 줄기는 근원부에서 발생해 생장한 것으로 보이며, 큰 줄기는 지상 2m 부위에서 11개의 줄기로 갈라져서 무더기로 자라고 있다.

산 위에서 바라본 슬지마을과 마을 한 가운데 서 있는 천연기념물인 봉안리 은행나무 


겉모습만으로도 당당한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확장된 수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대단히 장엄하게 보인다. 당당한 풍채의 수형을 자랑하고 있는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가을철이 되면 나무 밑에 떨어진 은행이 상당량이 쌓인다고 한다. 실제로 6월 18일 오후에 찾아간 은행나무의 주위에는, 지난 해 떨어져 마른 은행열매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은행나무 밑 그늘에는 마을 여자 분들이 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인사를 하고 은행나무에 대해 질문을 해보았다.

“은행나무 밑에 금줄이 쳐져 있네요.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나요?”
“예,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냅니다.”
“제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나요?”
“당산제라고 하죠. 여긴 추석 때도 행사를 해요. 구경 와요”


수령 500년이 지난 봉안리 은행나무와 지난 해 떨어져 나무주변에 수북히 쌓인 은행


“이 나무 죽으면 안된 당께”

나무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마을 분들은 묻는 대로 대답을 해주신다. 이중의 원형단을 쌓아 은행나무를 보호하고 있는 봉안리 은행나무. 한 분이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큰일이라고 하신다.

“이 나무 이제 죽은 나무에 제사 지내게 생겼어”
“왜요? 나무가 500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왜 죽어요?”
"나무가 죽어가고 있다고 사람들이 그래요. 그래서 위에서 무슨 약을 뿌리더라고“
“약이 아니고 나무에 주는 영양제에요. 죽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딴 나무에 비해 잎이 무성히 달리지는 않은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생육상태는 좋은 듯한데, 위편의 은행잎이 충실치 못한 듯도 하다. 아마도 나무가 오랜 고목이 되다보니, 위편 가지에 생육이 조금 부실한가 보다. 나무의 밑동은 뿌리가 땅 위로 솟아날 만큼 세월의 연륜을 느끼는 고목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벌들도 공생하는 신령한 나무

봉안리 은행나무는 신령한 나무로 소문이 나 있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한일합병과 8,15 광복, 한국전쟁 등, 나라에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 나무가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마을 주민들은 이 은행나무를 상당히 신령하게 여기고 있다. 이 나무가 있어 마을에 지금까지 도적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무를 한 바퀴 돌아가 보니 어디선가 벌들이 날아온다. 가만히 보니 나무줄기가 갈라진 틈에 벌들이 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벌들이 그 틈에 집을 지은 것이다.

“은행나무에 벌들이 집을 지었네요.”
“오래되었어요. 꿀이 많을 때는 밖으로 흘러내리기도 하는데”
“한봉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하던데요”
“은행나무 당산님이 벌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은행나무의 갈라진 틈새에 벌들이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다.


발들에게 속을 내줄 만큼 속이 넓은 천연기념물. 그래서 오래 묵은 나무는 그 안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어르신들은 이야기를 하시는가 보다. 듣는 소리마다 신기하다. 500년 넘는 세월을 봉안리 슬지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 온 은행나무. 부디 탈 없이 잘 자라기를 바란다. 아마도 마을 주민들의 간절함이 있어. 절대도 별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나무가 있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나무의 수령이 600년이 지났으며, 전하는 말에 의해 이성계가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공을 들일 때, 심었다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788번지, 한재 초등학교 교정에 자리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28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느티나무는 멀리서 보기만 해도 그 위용에 압도당할 만하다. 나무의 높이가 34m, 가슴높이의 둘레가 8.78m나 거목으로 생육의 발달이 좋다. 현재는 대치리가 평지로 변하고 한재초등학교의 교정이 되었지만, 이곳의 옛 지명이 ‘한재골’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산의 골짜기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조 태조는 왜 이 나무를 심은 것일까?

마을에 전하는 바로는 기도를 마친 이성계가 기념으로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때도 기념식수를 심는 버릇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많은 옛 사람들이 심었다는 나무들을 만날 수가 있다. 아마도 꼭 그런 일화가 아니라고 해도, 이성계와 연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느티나무는 보존가치가 상당히 높다.

우선 나무의 크기나 생육이 발달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당당한 위용이 사람을 압도한다. 6월 18일 오후에 찾아간 ‘대치리 느티나무’. 멀리서 보기에도 그 나무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학교 교정에는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공놀이며 각종 놀이를 하느라 소리를 치고 있다. 그런 어린 아이들에게 이 나무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성계 할아버지가 심었다는 대요”

아이들이 나무 밑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일부러 카메라 앞으로 돌아다니는 녀석들이 있다. 우리도 예전에 저랬다. 소풍이라도 가서 누가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괜히 그 주변을 맴돌다가 앞으로 뛰쳐나가고는 했으니까.

“애들아 이 나무 누가 심었는지 알아?”
“그 나무요 이성계 할아버지가 심었대요.”
“어떻게 알아?”
“거기 적혀있어요. 그렇게요. 그리고 선생님이 알려 주셨어요. 이 나무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요”




입을 모아 떠드는 녀석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 나무는 높기도 하지만, 동서로 뻗은 가지들은 땅에 닿을 듯 늘어져 있다. 버팀기둥을 받쳐 놓았는데도 늘어진 가지가 보기에도 멋들어져 보인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조선. 그러나 이 나무는 그 숱한 역사의 아픔을 보듬고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천연기념물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몰지각한 사람들

학교 문 안으로 들어가다가 보니, 천연기념물인 나무 옆에 차가 한 대 서 있다. 좀 빼달라고 부탁을 하려고 보니,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 그것도 초등학생들이 주변에 가득한 교정 내에서 말이다. 예전 같으면 벌써 한 마디 했겠지만, 날도 덥고 그럴 생각이 없다. 일일이 그렇게 역정을 내다가보니 이젠 내가 지쳐가는 듯해서이다. 아무리 나무 아래 평상을 만들고 쉴 공간이라고 해도, 아이들도 있는데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아이들에게 무엇을 잘하라고 이야기 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느티나무를 찬찬히 돌아본다. 세월의 연륜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밑동 쪽에 혹처럼 불어난 것들이며, 마치 거북 등짝같이 두텁고 거칠어 보이는 표피가 그러하다. 하긴 말이 600년이지 그 숱한 세월을 바람과 눈 비, 폭염에도 이렇게 버티고 있지 않은가? 이 느티나무를 보면서 갑자기 민초들이 생각이 난다.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이 나무처럼만 버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을 먹고 산 것만 같은 천연기념물 제284호 대치리 느티나무. 그 웅장한 모습처럼 앞으로 더 많은 세월을 살아갈 수 있을까?


6월 18일 토요일, 아침 일찍 남원을 출발하여 전북 순창과 전남 담양의 문화재 답사에 나섰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서부터 공사중이라 헛걸음을 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려운 답사. 길도 없는 산길을 몇 번이고 올라야 했던 답사 길. 오늘처럼 힘들게 답사를 한 날은 아마도 없었던 것만 같다.

순창이나 담양은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담양의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찾아간 보물 제111호 개선사지 석등.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소재한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석등이다. 이 석등을 담양에서 찾아가려면 광주호를 끼고 돌기 때문에, 광주광역시를 거쳐야만 찾아갈 수가 있다.


진성여왕이 공주였을 때 주관을 하다

일제시대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報)』에 보면, 이 석등의 간주석 부분까지 묻힌 채로 있었다. 1960년에 간행된 『국보도록(國寶圖錄)』에는 이미 지대석 부근까지 드러나 있고, 그 후 1965년에 주변을 정리하면서 석등의 묻혔던 부분을 파내고, 이를 노출시켰다고 한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문화재관리국의 고증을 받아 지대석과 하대석, 간주석 일부를 새로운 석재로 교체하는 복원공사를 하였다.

이 개선사지 석등은 고복형 석등이다. 간주석이 장고통 형태로 제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팔각형을 기본으로 삼는 개선사지 석등의 높이는 3.5m이다. 넓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 팔각하대석을 올렸는데, 이는 1992년에 새로운 석재로 교체하였다. 그 위의 상대석의 복련은 복판팔엽의 양련으로 새겨 넣어 하대석의 복련과 대칭을 이룬다.




상대갑석 위에는 둥그런 굄을 마련하였고, 팔각으로 된 화사석은 각 면에 장방형의 화창을 내어놓았다. 화사석의 간주 양쪽을 이용하여 석등을 만들게 된 내력을 적은 ’조등기’를 음각하였다. 이 조등기에 보면 경문왕과 그 왕비, 공주(뒤의 진성여왕)가 주관하여 이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등기의 기록으로 제작 년대를 알 수 있는 석등

개산사지 석등은 그 세운 년대가 신라 때로 확실하다는 점과, 그 석등을 세우게 된 내력을 간주에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소중한 문화재로 평가를 받고 있다. 팔각지붕의 마루 끝에 귀꽃을 장식하였으나, 현재는 대부분 깨져버리고 한 면의 귀꽃만 남아있다. 옥개석 정상은 상륜 받침을 놓고 앙화, 보륜, 보주 등의 상륜부를 차례로 놓았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이 개산사지 석등의 조등기는, 한 기둥에 각기 두 줄씩 기록되어 있다. 1행부터 6행까지는 경문왕과 왕비, 공주가 석등을 만들기를 주관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7행부터 10행까지의 내용은 이 사찰의 승려가 주관하여 석등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그 토지의 위치에 관한 기록을 적어 놓았다.

이 ’조등기’에는 연호가 기록되어 있어 석등의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데 1행에서 6행까지는 함통 9년인 868년이, 7행부터 10행까지는 용기 3년인 891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조등기’는 총 10행 136자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景文大王主 ② 文懿皇后主大郞主願石燈 ③ 炷唐咸通九年戊子中春夕 ④ 繼月光前國子監卿沙干金 ⑤ 中庸途上油糧業租三百碩 ⑥ 僧靈(判 ?) 建立石燈 ⑦ 龍紀三年辛亥十月日僧入雲京租 ⑧ 一百碩烏乎比所里公書俊休二人 ⑨ 常買其分石保坪大業渚沓四結 五畦 ⑩ 東令行土北同 奧沓十結 八 東令行土西北同 上南池宅土西川 畦 上南池宅土

「경문대왕과 문의황후, 그리고 큰 공주님(후에 진성여왕)께서는 불을 밝힐 석등을 세우기를 바라셨다. 함통 9년(경문왕 7년, 868) 무자해 음력 2월 저녁에 달빛을 잇고자 전임 국자감경인 사간 김중용이 (등을 밝힐) 기름의 경비로 3백 석을 날라 오니, 승려 영판(?)이 석등을 건립하였다. 용기 3년(실은 대순(大順) 2년, 진성여왕 5년(891) 신해년 10월 어느 날 승려 입운은 서울에서 보내준 조 1백 석으로 오호비소리의 공서와 준휴에게서 그 몫의 석보평대업에 있는 물가에 있는 논 4결과 물가로부터 멀리 있는 논 10결을 영구히 샀다.」

송강 정철(1536 ~1593)은 담양 어디를 가나 그 흔적이 보인다. 정철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정치가이다. 송강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훈민가』 등 많은 가사와 한시, 단가 등을 남겼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 - 1 에는 명승 제5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식영정 일원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는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고 쓴 비가 보이고, 정자와 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명승의 좌측 낮은 동산 위에는 크지 않은 정자가 서 있다. 바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이 되었다가, 2009년 9월 국가지정 명승으로 승격이 된 식영정이다.

국가지정 명승 제57호로 지정이 된 식영정 일원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김성원은 이 식영정 옆에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는 아름다운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최근에 복원을 하였다. 정자의 주인 석천 임억령은 이곳에서 '식영정 20영'을 지었으며,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제자들이 운차를 하였으며, 이 네 사람을 합해 <식영정사선>이라고 일컬었다.



굽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운치를 살린 식영정의 대들보

송강문학의 산실 식영정

식영정
은 이곳을 중심으로 성산별곡 등을 지어 <송강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지어졌다. 한편에는 한 칸의 방을, 그리고 그 남은 부분은 누마루를 깔아 시원하게 조성을 하였다. 온돌방과 마루가 반씩 차지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동편 중앙에 방을 들이고, 방 앞뒤에는 툇마루 형태의 마루가 있어 공간적 여유를 보인다.

『서하당유고』에 따르면 이 식영정은 명종 15년인 1560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지금부터 450년 전에 이 정자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식영정 위에 오르니 앞쪽으로는 광주호가 펼쳐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광주호가 있어, 식영정의 아름다움을 한층 배가 시킨다.

앞으로는 넓은 광주호가 자리를 잡아 아름다움을 더한다.
 
노송과 어우러진 식영정은 가히 명승이로세

마루에는 각종 싯귀가 적힌 게판들이 걸려있고, 옆으로는 노송 두어 그루가 서 있다. 노송과 어우러진 식영정은 신선이라도 머물만한 절경이다. 이 식영정을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서하당 김성원은 얼마나 많은 곳을 찾아다녔을까? 아마 담양 곳곳을 누비면서 이만한 장소를 찾아 정자를 지었다고 생각을 하니, 새삼 식영정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은 연신 식영정에 오른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 내려가는 사람들. 도대체 우리들은 이만한 경치에, 이 정자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오르기가 무섭게 우르르 몰려 사진 몇 장을 찍어대고는 내려가 버린다. 아무도 이곳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지 않는다.



  
450년이란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이 땅의 문학의 산실로 자리를 잡은 식영정. 푸른 나무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한 마리 이름모를 새가 고요함을 깬다. 아마 저 새도 식영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은 아닐까? 멋 없이 사진 몇 장을 남기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을 곳인데도, 아무것도 모르는지. 세월의 무상함이란 그래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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