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곡사 동부도,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 조상님들의 예술혼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동부도를 보고 그 위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북부도가 있다. 국보 제54호인 북부도는 또 다른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런 부도를 만든 조상님들께 정말로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북부도, 산길에 호젓하게 서 있는 북부도의 주인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북부도는, 동부도와 비슷한 모양으로 조성이 되었다. 아마 동부도를 따라 북부도를 조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부도 보다는 조금 뒤떨어지기는 하지만, 나름 특징을 갖고 있는 북부도. 국보와 보물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걸작품이다.


팔각형의 탑신, 그 아름다움

네모꼴의 지대석 위에 구름무늬가 조각된 탑신을 놓은 연곡사 북부도. 중대석은 연꽃의 결이 그대로 표현을 하였다. 거기다가 아름다운 귀꽃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팔각면에는 천상의 새라는 가릉빈가를 조각하였다. 그런데 이 가릉빈가는 동부도와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동부도의 가릉빈가가 몸체에 비해 날개가 작은 것에 비해, 북부도의 가릉빈가는 큰 날개를 갖고 있어 체형의 균형이 잡혀 있다.

몸은 작고 날개가 크게 표현이 되어 있어 안정적이다. 그 위에 올린 팔각의 몸돌 문비에는 문짝, 향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불집(화사석)은 창이 없으며 그 위에 옥개석인 지붕돌은 나무로 만든 지붕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한편이 약간 파손된 것을 빼고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지붕돌은, 기왓골 등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표현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부연과 처마 등이 우리가 흔히 보는 한옥의 모습을, 작은 소형의 모양으로 축소를 해 놓은 듯하다. 어떻게 이렇게 세세하게 하나하나 표현을 하였는지, 그 모양에 넋을 잃을 정도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북부도, 국보는 남다른 점이 있다.

동부도가 섬세하고 여성적이라면 북부도는 조금은 거친 듯한 남성적이다. 그래서 연곡사의 동부도와 북부도는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으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동부도보다 조금 더 거친 듯한 북부도. 머리 위에 올린 노반과 복발, 보개와 보주는 동부도에 비해 조금은 단순하게 표현이 된 듯하다. 동부도에서 보이는 사방에 새를 북부도에도 그대로 만들었지만, 동부도와 마찬가지로 파손이 되어있다.




동부도와 북부도의 보개에 조각을 한 새들이 왜 모두 파손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 새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사방에 조각이 된 새를 모두 파손을 했을 때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만 같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 새의 머리가 잘려진 것이 기자신앙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나로서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기자신앙에서는 새의 머리를 이렇게 잘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굳이 이 새의 머리를 잘라간 것이 기자신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 아무리 기자신앙이라고 해도 우리의 정서에는 머리를 통째로 잘라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부도에 비해 더 깊이 잘려나간 북부도. 그 앞에 서서 부도를 떠나지 못함은, 이 새의 잘려나간 머리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시작한지 어언 20여년이 지났다. 숱한 문화재를 보고 다녔지만, 연곡사 동부도와 북부도와 같은 아름다움을 본 적은 흔하지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파손된 이 부도의 상처가 더 마음이 아프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연곡사에서, 마음속의 눈물을 흘리고 뒤돌아서는 것을 저 부도는 알고 있을까?

부도란 예전 스님들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부도의 꾸밈은 석탑과 같이, 기단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단부와 탑신, 그리고 머릿돌로 조형이 된다. 머릿돌은 지붕을 얹고 그 위에 연꽃모양으로 만든 보주를 얹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런 일반적인 부도와는 다른 아름다운 부도가 눈길을 끈다.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 돌 위에 세워진 국보 제53호 연곡사 동부도는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인 진평왕 6년인 54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연곡사는, 고려 초기까지도 스님들이 선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인가 연곡사에는 이 외에도 보물 제154호인 서부도로 불리는 소요대사부도와 국보 제54호 북부도가 있다.


천상의 반인반조인 가릉빈가를 새겨

동부도의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그리고 위 받침돌을 차례로 올렸다. 이단으로 꾸며진 아래받침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드는 팔부중상을 새겨 넣었다.

위받침돌은 밑면을 둥글게 하여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둥근 테를 두른 안에 불교의 낙원인 극락에 산다는 전설 속의 새인 ‘가릉빈가’를 새겨 넣은 점이 독특하다. 가릉빈가는 전설속의 극락조로 하반신은 새이고, 상반신은 사람인 점이 특이한 모습이다.



자태가 아름답고 소리가 묘하다는 가릉빈가는 불가의 호법신장의 일종으로 볼 수가 있다. 일찍 고구려 안악고분 등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그림이 보인다. 가릉빈가는 결국 부도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호법의 기능과, 부처님을 덕을 찬양하기 위한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극락조로 불리는 가릉빈가는 반인반조의 몸으로 호법과 찬양의 기능을 갖고 있다.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인 동부도

탑신인 몸돌에는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수호신장인 사천왕상과 향로 등을 새겨 넣었다. 돋을새김을 한 사천왕상은 지금보아도 당장 호령을 하고 뛰쳐나올 듯한 기개를 보인다. 팔각으로 정교하게 마련한 지붕돌은 돌 위에 새겼다고는 볼 수 없게 화려함을 보이고 있다. 서까래와 기와의 골은 물론, 부연과 막새기와까지 표현을 할 정도로 뛰어나다.



머리장식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사방에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봉황을 두고, 연꽃무늬를 아래위로 새겨놓았다. 일설에는 도선국사의 부도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이 부도의 아름다움에 반한 일제는 동부도를 동경대학으로 옮겨가려고 하였다는 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안타까운 것은 머리장식에 새긴 네 마리 봉황의 머리가 다 잘려나갔다는 점이다.



사방에 날개를 펼친 봉황의 머리는 모두 잘려나갔다

느낌이 일부러 그렇게 잘라버린 듯 해 씁쓸하다. 한 마리도 아니고 어떻게 네 마리의 머리가 하나도 남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봉황의 모습이 더욱 궁금하다. 아마 머리 위에는 또 다른 장식은 없었는지. 그리고 그 머리를 잘라낸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영원한 미궁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슴 아픈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어느 곳은 안내판이 다 지워져 글을 알아보기 힘든 것도 있고, 아예 안내판조차 서 있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문화재의 훼손과 온통 문화재에 낙서로 도배를 한 곳들도 보인다. 주변은 잡풀이 우거지고 길이 없어진 곳도 여러 곳 보았다.

이렇게 문화재에 대해 수많은 훼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종교적인 괴리에서 오는 것도 있겠으나 관리 소홀도 묵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문화재란 그것이 어느 부류에 속하든 간에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세계적으로 문화 상품을 개발하여 막대한 소득창출을 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추세이다. 그런데 있는 것조차도 이용을 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소중한 보물 앞에 세운 안내비석이 쪼개져 있다.

쪼개진 안내비석, 누구의 소행일까?

구례 연곡사는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국보와 보물을 소유한 사찰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연곡사 답사를 하면서 이것저것 촬영을 하다가, 보물 제154호인 소요대사부도를 보려고 앞으로 갔다. 대개 문화재에는 안내판 외에 돌로 만든 안내비석을 하나 세워 놓는다. 앞에는 국보나 보물인지 등 문화재의 명칭을 적고, 뒷면에는 국보나 보물 등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이라 적는다.

대한민국이라는 붉은 글씨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란 생각이 든다.

지방 문화재인 경우에는 전라북도 지정은 뒷면에 당연히 ‘전라북도(全羅北道)’라고 붉은 글씨로 음각을 하고, 경기도에서는 ‘경기도(京畿道)’라고 음각을 해서 세워 놓는다. 물론 설명을 한 안내판은 따로 세워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소요대사 부도 앞에 세운 비석이 동강이가 난체 나뒹굴고 있다. 비석의 아래가 절단이 되어 나뒹굴고 있는 안내비석. 도대체 누가 어떤 것으로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깨져서 땅에 널브러진 비석에는 붉은 글씨로 쓴 ‘대한민국’이란 글씨가 보인다. 그것을 보는 순간 울화가 치민다.

국가에서 지정한 소중한 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비석을 무슨 이유로 이렇게 동강이를 내었을까? 자빠져 있는 비석의 글씨가 우리 문화재의 현실을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강 개발을 한다고 소중한 마애불에 구멍을 내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는데 또 이런 참담한 몰골을 보아야만 하다니.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일까?

도대체 이 나라의 사람들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부족한 것일까? 자빠져 있는 대한민국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이 단단한 돌이 저절로 쪼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 서 있는 부도의 안내비석을 훼손을 할 사람이라면 문화재인들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쪼개지고 자빠진 대한민국, 어쩌면 이것이 우리 문화재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사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이 시대에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앉고 반성들을 해보자.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가면 중요민속자료 제5호인 운조루가 자리한다. 이 집은 조선 영조 때 심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세운, 조선시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집 중 한곳이다. 원래 ‘운조루’란 현판이 사랑채에 걸려있던 것으로 보아. 사랑채의 누정명칭을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3대 길지의 한곳에 지은 집이라고 하는 운조루는, '금환락지'의 명당이라고 한다. 금환락질한 지리사의 선녀가 섬진강 물에 머리를 감다가 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빠트린 형상이라는 말이란다. 이 마을은 용두마을이라고 부르는데, 지리산의 지맥이 마을로 뻗어내려 그 기운이 이 마을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운조루에 가면 꼭 눈여겨보아야 할 것들.

1. 솟을대문에 걸린 호랑이 뼈

운조루를 찾아가면 정말 ‘이런 집도 있었나.’하고 감탄을 하게 된다. 그저 휑하니 둘러보고 나올 집이 아니다. 솟을대문을 가운데 놓은 행랑은 동, 서로 길게 뻗어 있다. 그 솟을대문의 살창에 보면 양편으로 짐승의 뼈 같은 것이 걸려있다. 바로 호랑이 뼈이다. 아마 이집의 가세를 알리는 이유도 있겠으나, 호랑이 뼈를 대문에 걸어 액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2. 3개월간 시신을 안치하는 가빈터

예전에 가풍이 있는 집들을 보면 99일장을 지내기도 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장례를 치루는 집들은 대개 초분을 마련한다. 운조루의 서행랑 끝에 보면 광과 같은 두 칸이 있다. 바로 ‘가빈터’ 혹은 ‘초빈’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사람이 운명 후 3일이 지나면 입관을 한 후, 이곳에 석 달 동안 안치하였다가 출상을 하는 곳이다. 안치 기간 중에는 아침에 상식을 올리고, 삭망에는 제례를 지낸다.



3. 경사가 진 곳에 놓은 널마루

운조루의 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사랑채와 부엌으로 연결을 하여 꺾인 작은 사랑채가 보인다. 이 작은 사랑채의 방문 앞에는 넓적한 널판 두 개를 놓았다. 나무를 말리고 있는 듯한, 이 널판이 사실은 방문 앞에 놓은 툇마루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널판은 경사가 진 건물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건물 끝의 툇마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운조루에서 만 볼 수 있는 여유의 멋이다.


4. 나눔의 아름다움 ‘타인능해(他人能解)’

지금은 사랑채의 부엌에 큰 뒤주와 함께 놓인 이 목독은 사실은 구제를 하기 위한 도구였다. 둥근 나무를 속을 파내고 만든 나무 독은, 쌀이 두 가마 반이나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 밑에는 구멍이 나 있는데 마개가 닫혀있다. 이 마개를 빼면 통 안에 들어있는 쌀이 쏟아져 나온다. 가난한 이웃사람들이 쌀을 가져다가 굶주리지 않게 한 장치이다. 나눔의 아름다움을 실천한 이 집의 가풍을 엿볼 수가 있다.


5. 나무로 만든 툇돌

마루나 방문 앞에 놓는 툇돌은 대개 돌로 만든다. 그러나 온조루의 안채를 들어가면 툇돌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두터운 나무를 흔들이지 않도록 괴어, 그 위에 시발을 벗어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돌이 없어서 그랬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돌로 만든 툇돌은 오래가기는 하지만, 겨울철에는 신발을 더 차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철에는 비라도 내리면 돌은 미끄러진다. 하지만 나무는 그런 것이 없으니, 나무를 사용하여 툇돌대신으로 한 것 같다.


6. 그 외에 운조루에서 눈여겨 볼 것

현재 사랑의 뒤편에는 별당채가 있었다. 지금은 안채로 들어가는 후원이 되어있지만, 이 별당채의 자리를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또 사랑채 누정의 마루밑에는 옛날에 사용하던 우마차의 바퀴가 놓여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나무로 만든 우마차의 바퀴와 멍석등도 아이들에게 옛 풍습을 알려줄 수가 있다.

안채의 기단 위에는 돌로 만든 구조물이 하나 보인다. 아래편에는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것은 바로 돌로 만든 대야이다. 손을 씻거나 세수를 한 다음, 구멍의 마개를 열면 물이 빠져나간다.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운조루는 대가답게 여기저기 숨은 재미가 많은 곳이다. 여행길에 이곳을 지나게 되면 한 번 들려보면 좋을 듯하다. 아이들에게는 우리 역사와 함께, 아름다운 나눔의 마음을 알려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문화재 중에서 가장 그 가치가 뛰어나서 지정을 하는 국보, 이 국보와 국보가 만나면 그 아름다움이 과연 배가가 될까? 아마 이렇게 국보와 국보가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국보의 숫자도 적으려니와, 야외에서 한 자리에 두 점의 국보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구례 화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가,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는 3천여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화엄사 경내에 세워진 국보 각황전과 국보 석등

자장율사로 인해 신라 때 절로 알려져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신, 사사자 삼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각황전 뒤편에 세웠다. 원효대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를 거쳐 원효, 의상 등의 스님들이 화엄사에 중창을 하였으므로, 화엄사가 신라시대 절이라고 하는가보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국보 제67호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조선 숙종 28년인 1702년에, 이층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전각의 명칭을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국보 각황전, 밖에서 보면 2층의 전각이지만, 안으로는 퉁층으로 꾸며져 있다.

각황전 앞에 감히 서질 못하다.

각황전 앞에 서면 사람이 압도당한다.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의 기단석 위에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전각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각황전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되어있으며, 세분의 여래불과 네 분의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일까? 쉬지 않고 예를 올리는 여인에게.

밖에서 보면 이층인 전각으로 꾸며졌으나, 안을 보면 단층이다. 워낙 전각의 규모가 크다보니 중간에 기둥을 세워 받쳐놓았다. 그 안의 공포의 장식 등이 화려하다. 각황전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각황전 동편 출입구 앞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다. 누군가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예불을 올린다. 걷기도 더운 날에 저리 온 마음을 다한다면, 여래불과 보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듯하다.

최대의 석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였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이라고도 부른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를 하였다. 통일신라 때인 헌안왕 4년인 860년에서, 경문왕 13년인 873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팔각의 지대석 위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배가 불룩한 장고 모양의 기둥을 세웠다. 이런 배가 부른 기둥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형태이다.



국보 석등은 아름답다. 기단석과 중간의 장고형 기둥

배가 부른 기둥 위로는 돋을새김을 한 연꽃무늬를 조각한, 위 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팔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큼직한 창을 뚫어 놓았다. 팔각의 지붕돌은 귀꽃이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며,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석등과 국보 각황전. 이 두 점의 국보가 만들어내는 정경은 말로 형용하기가 힘들다. 어디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려나. 해가 짧아진 오후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쉽게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모습에 취했음이다. 저녁나절 국보와 국보가 만나며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쉽게 만나지 못할 멋진 모습이다.


화사석에는 네 곳의 창을 내고, 머리 위에는 귀꽃이 아름다운 머릿돌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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