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성이었던 공주 공산성 안에 보면 성안의 딴 건물들과는 다른 누각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왕들의 연희장소였던 임류각(臨流閣)이다. 임류각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2년 조에 의하면 궁궐의 임류각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높이가 5장(약 15m 정도)이나 되는 건물이었다고 한다.

임류각은 서기 500년인 동성왕 22년에 지은 건물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공산성을 정비하던 1980년에 임류각 터를 발견하고 1993년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 및 현실의 벽돌에 있는 무늬를 많이 활용하였다.


동성왕은 왜 이렇게 화려한 누각을 지었을까?

복원을 한 임류각은 상당히 호화롭다. 물론 단청이나 문양 등이 그 당시에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무령왕릉의 밝혀진 문양과 채색을 사용하였다면,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마루를 올렸으며, 양편에 계단을 만들어 누각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임류각은 정면 6칸에 측면 2칸 정도로 지어졌다. 누각 위에 오르면 금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백제의 왕은 이곳에서 어떤 연희를 베풀었을까? 누각 위에도 양편에 기둥이 서 있어 이 누각은 색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견고하게 지어진 누각이다. 많은 신하를 거느린 백제의 왕들은 이곳의 주인으로 당당한 세력을 과시했을 것이다.



백제의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는 임류각. 누각 위의 기둥과 누각을 받치고 있는 기둥(중) 그리고 지붕

임류각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문제는 이 자리가 과연 예전에 임류각이 서 있었던 자리일까 하는 점이다. 백제본기에 보면 임류각은 궁궐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성 안에 궁궐이 있던 자리는 쌍수정을 오르는 길목 앞이다. 궁궐터에서 보면 이 임류각이 있는 자리가 동편에 해당한다. 그러나 혹자는 임류각이 중국 산동성에 있었고, 임류각을 지은 동성왕도 산동성에 또 다른 궁궐과 호화로운 임류각을 지었다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임류각은 정자에 해당하는 누각이다. 그리고 궁궐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백제본기에 기록하고 있듯 임류각은 궁궐의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기에 현재의 임류각의 자리는 서기 500년 당시 동성왕이 지었던 임류각이 맞을 것이란 생각이다.



임류각의 현판과 단청(중) 그리고 무렬왕릉의 문양을 본뜬 천정의 문양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은 동성왕 3년인 491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동성왕 6년인 484년에 중국 남조의 유송에게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적 수완도 뛰어났던 왕으로 가록이 되고 있다.

동성왕은 왜 이렇게 호화로운 임류각을 지은 것일까? 아마 고구려와 말갈 등의 침공 등을 막아내고, 백제의 위상을 한결 높였다. 그리고 함께 동맹을 한 신라와 가야 등에게도 백제의 강성함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신하들에게 자신의 큰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임류각을 짓게 한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누각에 올라 금강을 내려다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누각에서 연희를 베푼 동성왕. 이 임류각을 짓고 난 다음 해인 501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호화로운 임류각을 남겨 놓은 채. 그런 사실을 알고 나면 세상은 더욱 무상한 것이 아닌지.

공주 공산성 안에 들어가면 '쌍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사방에 모두 훤히 트여 주변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개방형 정자이다. 이 곳 주변에는 유난히 큰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 쌍수정이란 정자의 명칭도, 주변에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붙여진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쌍수정은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정자는 영조 10년인 1734년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인조 2년인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인조가 공산성에 머물르고 있을 때,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 밑에서 반란의 진압소식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있던 자리에 세운 정자

'이괄의 난'이 평정이 되고 인조가 난 후, 인조는 이 나무에 정삼품인 통훈대부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아마 답답한 마음을 함께 풀어준 나무가 고맙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의 이름도 쌍수성이라고 부를 것을 명하였다. 영조 때에 관찰사 이수항이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정자를 지어 '삼가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정자가 바로 지금의 쌍수정이라고 한다.

이 쌍수정과 공주에는 재미난 설화가 전한다. 바로 인절미에 관한 이야기다. 인절미는 찹쌀떡에 고물을 묻힌 떡이다. 네모나게 만든 인절미는 차지기 때문에, 몇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이 인절미가 인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공주를 '인절미의 고장'이라 부르는 것은 왜일까?




인조의 배를 불려준 인절미

인조 2년인 162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인 이괄이 난을 일으켜, 당시 한양까지 밀고 내려왔다. 인조는 피난 길에 올라 공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황급히 떠난 피난 길에 먹을 것이 제대로 준비될 리가 없다. 피난 길에 공주 우성면 목천리 근방을 지나게 될 때, 근처의 임씨 댁에서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왕에게 진상을 하였다.

시장기가 돌았던 왕이 보자기를 열고보니, 콩고물을 가득 묻힌 떡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인조는 이 떡을 한 입 베어물었다. 배가 고픈차에 먹었으니 그 맛이 얼마나 좋았으랴. 몇 개를 먹고 난 인조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떡 이름이 무엇이냐. 참 맛이 있구나"
"...."
"아니 이 떡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단 말이냐. 그럼 이 떡을 누가 가져왔느냐"
"예! 임씨댁에서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 이 절미의 떡을 임씨댁에서 만들어왔단 말이지. 그럼 이 떡을 오늘부터 임절미라고 불러라"

임씨댁에서 만든 맛있떡이라 하여 '임절미'라고 부르던 것이 후에 인절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쌍수정을 오르는 계단 앞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있다. 공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노라면 시장끼도 드는데, 이럴 때 인절미라도 파는 곳이 있다면, 더욱 인절미에 대한 추억이 남다를 텐데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쌍수정 위에 올라 더운 날씨에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앉아있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찾아든다. 문화해설사가 인솔을 해수정에 오른 아이들은 연신 설명을 들으면서 무엇인가를 적고 있다. 현장학습이라도 나온 것일까? 저렇게 우리 문화재에 대한 열심인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화재를 찾아 다닌지가 벌써 25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그 많은 문화재가 다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훼손이 된 문화재가 마음을 아프게도 하다. 하지만 저 아이들을 보니 괜한 우려였나보다. 저런 마음을 가진 아이들은 우리 문화에 대해서 남다른 마음을 갖고 있을 테니.



인절미도 그 엣날 인조대왕이 애절하게 소식을 기다리던 커다란 나무도 사라졌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남아 전해지고 있는 쌍수정. 그래서 나그네의 발길은 또 다른 길을 찾아 떠나는가 보다. 문화와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 기다리고 있기에.   

우리나라의 수많은 불교 석탑 중에서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탑은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일제에 의해 수난을 당하다가 복원이 된 개성 인근의 경천사 십층석탑, 그리고 공주 마곡사의 오층석탑 등이다.

보물 제799호로 지정이 된 마곡사 오층석탑은 고려 말기의 세워진 석탑으로, 당시 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라마교는 티베트에서 발생하여 중국 원에서 크게 융성한 불교의 한 종파이다. 이 탑의 상륜부에는 라마탑에서 보이는 풍마동 장식을 두어 특이하다.


훼손이 심한 마곡사 오층석탑

마곡사 오층석탑은 대광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이라 고찰을 찾은 사람들도 그늘을 찾아든다. 나뭇가지도 늘어져간다는 삼복더위에 찾아간 마곡사다. 그래도 마음을 먹고 찾아간 곳이니 뙤약볕이라도 찬찬히 훑어볼 수밖에. 첫눈에 보기에도 여기저기 많이 훼손이 되었다. 이 탑이 이렇게 훼손이 된 것은, 석탑 뒤편에 자리 잡은 보물인 대광보전이 불이 났을 때 많이 훼손이 되었다고 한다.



풍마동 높은 기단부와 탑머리에 장식한 풍마동은 라마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층으로 된 기단부는 일반적으로 보이는 기단부보다 월등히 높다. 그리고 그 위로 오층의 탑신이 있는데, 지붕돌의 변화가 없어 불안정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많이 보이는 고려 석탑들보다 안정감이 떨어져 보이는 것도 상륜부에 있는 풍마동의 무거움 때문은 아닌가 모르겠다.

몸돌에 새겨진 사방불은 백미

탑 주위를 돌아보니 기단석과 몸돌, 지붕돌 등이 많이 훼손이 되었다. 아무리 석탑이라고 해도 불에는 견디기가 어려웠나보다. 그래도 오랜 세월 이렇게 마곡사 경내에 자리잡고 있는 석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낀다. 1972년도에 해체 수리를 하였고, 1974년도에 이 자리로 옮겨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보다.

마곡사는 처음에 세워진 년대가 정확하지는 않다. 신라 선덕여왕 9년인 640년에 자장율사가 창건을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643년에 세웠다고도 한다. 또한 그보다 200년이나 뒤인 840년에 보조 체징스님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사방불 이층 몸돌에 새겨진 사방불은 이 탑의 백미로 꼽힌다

천년고찰 마곡사 대웅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 그 이층 몸돌에 보면 사방에 좌불을 새겨 넣었다. 부처와 보살 등을 몸돌 사면을 파내면서 돋을새김으로 윤곽을 주었다.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으며, 연화대와 법의 등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천년 세월을 그 모습 그대로 좌정을 하고 있는 사방불. 그 아름다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탑이 훼손이 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가치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적인 풍화에 의해서 훼손되는 것만도 가슴이 아픈데, 인위적인 훼손까지 더해 망가져 가고 있는 수많은 문화재들. 오늘 우리가 반성해야할 일들이 아니던가.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것도 그러한 죄스러움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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