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오랜만에 참으로 자유로운 여행을 즐겼습니다. 전주를 떠나 진해, 마산, 창원(그리고 보니 창원과 마산 등은 이미 통합이 되어 있더군요)을 지나 고성으로, 그리고 다음날은 울산을 거쳐 포항, 울진까지 쉬엄쉬엄 떠난 여정이었나 봅니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습니다. 아마 3일간 차를 탄 것만 해도 40시간이 넘었으니까요.

양산 홍륭사, 울산 반구대 암각화, 그리고 정자와 고택 등을 주로 답사일정을 잡았습니다. 지나는 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은행나무 두 그루까지, 소득이 꽤나 좋았다는 생각입니다. 답사는 늘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렙니다. 그러면서도 발길을 재촉하는 것은 한 가지라도 더 보겠다는 욕심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해지는 남해의 작은 포구에서 피곤한 다리를 쉬다.

차를 타고 이동을 하다가 보면, 갈아타는 시간이 항상 아깝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주변의 볼거리를 하나씩 살피다가 보면, 그 또한 즐거움일 수가 있습니다. 이번 답사 길에서는 남해의 일몰을 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 조금은 서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나름대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철 지난 포구는 왜 그리도 한가한지. 저녁의 햇볕이 비치는 포구에서 한참이나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하네요. 작은 배 한척이 물살이 이는대로 일렁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의 평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나그네의 피곤한 발길을 쉬게 한 한가로움이기도 합니다.



2박 3일의 여정. 그렇게 그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음을 기약하지만, 이번처럼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빈집을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인 전봉준. 전봉준은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그러나 정읍에서 태어났다는 일설과는 달리 또 한 곳의 전봉준 유적지가 고창에 남아있다. 바로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이다. 이곳에는 전봉준이 태어나 13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는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란 그 곳에서 태어났으나, 당시의 집이 남아있지 않고 그 터만 남아있는 곳을 말한다.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고창의 생가터

정리되지 않은 전봉준의 출생지

고창군을 답사하는 중에 생각지도 않은 이정표를 하나 보았다. ‘전봉준 생가터’라는. 의아하다. 전봉준의 고택은 정읍에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고, 그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럴 때 무지한 본인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다. 왜 좀 더 여러 곳의 기록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서다.



고창 생가터에 세워진 시비와 마굿간

전봉준(全琫準, 1854 ~ 1895년 3월 30일)은 조선의 교육자이자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다.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별명은 '녹두 장군'으로 키가 단구라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본관은 천안이다.(다음백과)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동학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선생이 태어난 옛집으로, 그는 1855년에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 해당한 이 집에서 아버지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태어난 이곳을 떠나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에서 살았을 때에는 세마지기의 전답을 가지고 있는 정도였고, 한때는 후일 동학의 지도자들이 된 김개남·송희옥과 함께 전주 봉상면 구미리에 살기도 하였다. 동학에는 30세 때에 입도하여 고부지방의 접주가 되고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폐정의 시정을 진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1,000여명의 군민(郡民)을 모아 고부군아를 습격했는데(일부에서는 4,000명이라고도 한다), 이로부터 동학혁명이 본격적인 시작을 보게 되었다.(문화재청 자료 일부 발췌)

일반적으로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현재 사적지로 지정이 된 고택이 있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창군의 당촌마을에 있는 이곳은 어떻게 전봉준 생가터가 되는 것일까? 마을에서는 고로들이 이곳이 전봉준 선생이 태어난 곳이 틀림이 없다고 하신다. 생가터를 들어가는 길의 명칭도 ‘전봉준로’ 명명하였다.


예전에는 서당과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학농민운동 때 다 타버리고 지금은 재현된 건물이 서 있다.

역사적인 인물의 기록조차 정리가 안 되다니.

정읍시 이평면인지 고창군 고창읍인지, 두 곳 중 한 곳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곳이 모두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한다면, 녹두장군 전봉준이 두 사람이라는 소리일까? 이런 역사의 인물조차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울화가 치민다. 오래된 인물도 아니고 근대의 인물에 대한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해명이 되질 않는다.

전봉준에 대해 이렇게 출생지서부터 일치가 되지 않은 것은, 많은 이주로 인해서 일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정읍 감곡면 계룡리, 전주, 김제 금산면 삼봉리, 태인 산외면 동곡리, 고부 양교리 등 많은 곳에서 전봉준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고창현 덕정면 당촌(현 고창읍 덕정리)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인물의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좀 더 책임있는 연구로 인해, 두 곳 중 어느 곳이 정확한 출생지인지 밝혀지고 올바른 기록을 남겨야 할 것이다.

요즈음 들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이는 고택만이 아니고, 각종 문화재나 먹거리, 심지어는 우리의 정서가 그대로 남아있는 길과 동, 식물 등 다양한 방면에서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이렇게 무궁한 소재를 갖고 있는 것 중에서, 아무래도 문화재라는 것은 약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해 있는 고택. 그것이 사적이던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던 간에, 그저 찾아가 보는 것보다는 이모저모를 따져보는 것이 한결 재미있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먼저 생각하고 그 집의 특징을 살펴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집이 눈앞에 그려지기도 한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소재한 경남유형문화재 제407호 오담 고택을 돌아보면서, 우리 고택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살펴본다.



함양 오담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깉은 형태로 구성이 되어있다. 건축물을 볼 때 그 형태를 보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그리고 주변의 대지(아래)를 살펴보면 과거 그 집의 가세를 판단 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저택인 오담 고택

오담 정환필(1798~1859) 선생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12대손이다. 선생은 종가에서 분가해 와 정여창 선생의 고택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종두리에 기록된 상량문을 보면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었으며, 자연석을 3~4단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오담 고택은 종가에서 분리해 온 영남 양반집의 전형적인 주택으로, 조선 후기 주거건축의 양식과 가구기법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오담 고택은 최근 복원과 보수를 한 듯한데, 이런 면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 고택이 좀 더 자세히 보인다.

1) 먼저 집의 전체적인 구조를 알아보자




집의 전체적은 구조란 와가인지 초가인지를 본다. 이런 형태야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와가에도 팔작지붕, 맞배지붕, 합각지붕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위 오담 고택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을 벽에 달아낸 형태로 자칫 팔작지붕으로 볼 수도 있다. 초가의 경우에도 그 이엉을 얶어 용마름을 앉는 방법이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는 그 집의 툇마루나 대청, 방의 꾸밈과 기단, 기둥 등을 자세히 살펴본다. 기단은 장대석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일반 부정형의 돌을 사용했는지를 본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인지, 팔각이나 사각,혹은 원형기둥인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집의 구성고 알아보아야 한다. 대개 고택에는 수 많은 집이 있다. 사랑채를 비롯해 안채, 행랑채, 대문채, 아래채, 광채, 별당채 등 그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2) 집의 뒤편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고택에는 많은 문들이 있다. 대문을 비롯해 중문, 협문, 쪽문 등 큰 집의 경우에는 집 안에 문에 10여 개가 되는 수도 있다. 하기에 그 문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느 용도로 사용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문의 경우에는 바깥 중문과 안 중문이 있고, 때로는 담에 쪽문을 내어 사용하기도 한다. 하기에 그 문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 쓰임새를 알아보아야 한다.


오담 고택에는 문이 그리 많지는 않다. 최근에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이는 사랑에서 안채로 통하는 협문은 나무로 꾸몄다. 대문의 경우에는 소슬대문 옆에 쪽문을 달아낸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은 대개 대문을 열지 않고, 집안의 식솔들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 고택은 문 하나라도 그냥 내는 것이 아니다. 문을 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거기에 따른 내적 사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집 뒤편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개는 정면을 많이 보는데, 집 뒤편에는 굴뚝을 비롯해 벽의 형태, 배수로 등 볼 것이 많다. 또한 굴뚝은 어떤 형태로 만들어 졌는지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3) 볼품 없는 작은 것 하나도 글이 된다.





고택을 둘러보면 가재도구가 있다. 실생활에 사용했을 이런 것들은 고택을 둘러보면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툇돌은 어떻게 놓았는지, 마르 밑의 공간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보아야 한다. 부엌은 창문을 어떻게 내었으며, 환기를 돕는 까치구멍은 어떤 형태인지도 살펴보자. 그리고 시렁은 어디에 놓았는지, 시렁 위에는 무엇을 올려 놓았는지도 빠트리지 말아야 한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널려있는 많은 가구들과 문짝의 형태, 또는 난간은 어떻게 꾸며졌는지도 보아야 하다. 그런 것을 하나하나 찾아보다가 보면, 집집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 제대로 꾸민 집인지를 알아보자



오담 고택을 돌아보면서도 그렇지만 복원을 하면서 정확하게 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복원이란 말 그대로 예전에 형태를 원형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복원이 되었다는 집을 찾아가 보면, 황당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오담 고택의 경우에 사랑채와 안채 중간 한편에 장독대를 마련하였다. 시멘트로 바른 것은 그렇다치고 장독대에 담장을 둘러 놓았다. 보기가 좋은 수도 있지만, 문화재란 항상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담장을 둘러 놓은 것도 보기가 껄끄러운데, 사랑채 뒷방을 보면 앞쪽 방보다 방바닥이 낮게 되어있다. 그리고 방의 층 간격이 넓어 오르내리기도 버겁게 보인다. 원래 이런 형태였는가를 알아보니, 복원을 하면서 형태가 달라졌다고 한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원형이 변형이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돌아보면서, 그 소중함을 먼저 깨우치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이런 문화재 답사는 단지 사진을 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를 알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쉽지 만은 않은 문화재 답사. 앞으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답사를 하시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나름 정해진 바가 있다. 좋은 집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칭찬을 하지만, 잘못된 것은 아낌없이 파헤친다는 생각이다. 이는 고택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재에 동일하게 적용시키는 나만의 답사 방법이기도 하다.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는 고택을 100채 이상을 돌아보았다. 그 중에는 정말 살고 싶은 집이 한두 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역시 이번 답사 길에 만난 함양군의 일두 정여창의 고택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인 이 고택의 사랑채는 미적 감각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다. 안주인의 위엄을 보이게 구성을 한 안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집에는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 좋다. 이 집의 주인과 같은 분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닐는지.



45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고택

우선 이집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일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집의 구성은 길에서 들어가면 만나는 솟을대문 위로 홍살문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5개의 효자와 충신의 정려패가 문 위에 걸려있어, 이 집의 범상치 않은 내력을 알게 한다.

집의 구성은 대문과 사랑채, 행랑채, 안사랑채, 중문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으로 꾸며져 있다. 조선 오현 중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의 고택으로, 정작 이 집은 선생의 사후인 선조 무렵인 1570년대에 지어진 집이다. 정여창 고택의 특징은 당시의 집의 구조뿐만 아니라 세간까지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깔아진 돌과 솟을 대문(가운데) 그리고 효자와 충신의 정려(아래)

뛰어난 사랑채의 멋스러움

골목길을 들어서면서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골목길의 바닥을 돌로 깔아 운치를 더했다. 이 돌길은 새롭게 조성한 것이 아니고 집을 처음 지을 때부터 놓여있었다고 하니, 당시에도 이 집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광채와 중문의 담으로 연결이 된 사랑채가 보인다.

장대석을 3단으로 놓고 그 위에 자리한 사랑채. 정말로 눈이 부시다고 해야 할까? 사랑채 하나만 갖고도 하루 종일 글을 써도 부족할 듯하다. ㄱ자로 꺾인 부분에 개방된 마루를 놓아 정자로 만들고, 그 밑은 물건을 넣어둘 수 있는 광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문채와 광채에도 이런 물건을 둘만한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채의 밑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은 아랫사람들의 동선구성을 신경을 썼다는 뜻이다.



사랑채는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놓았다. 꺾인부분은 판벽으로 마감을 하고 앞을 개방해
정자와 같은 기능을 갖는다(가운데), 개방마루 밑은 물건을 넣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사랑채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담 너머로 사랑채를 보니 커다란 노송과 어우러지는 광경이 그대로 그림이다. 어찌 이런 사랑채를 꾸밀 수가 있었을까? 모든 것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것일까?

안주인의 위엄을 보이는 안채의 구성

사랑채와 중문을 사이로 구별이 되는 안채는, 정여창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100년이 지난 후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다. 350년의 세월이 지난 안채는, 앞으로는 중문채를 놓고 우측으로는 아래채, 좌측으로는 사랑채의 뒤가 막고 있어 튼 ㅁ 자로 구성하였다. 사랑채의 대청은 집안의 대소사를 마련할 수 있도록 넓게 구성이 되었으며, 오른편에는 며느리의 방을 따로 마련한 것도 이 안채의 특징이다.

안채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적으로 안주인이 맡아서 할 수 있도록 집안의 동선을 꾸며 놓았다. 심지어는 결혼을 한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남자는 뜰아래채로 내려가 생활을 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 집의 엄한 가풍을 알만하다.



안채와 뜰아래채(위), 중문채(가운데)와 안채의 정원

아랫사람을 생각한 집 구조와 동선

정여창 고택의 백미는 역시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집주인의 배려가 곳곳에 묻어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집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아랫사람을 생각하고 집을 지은 것은 볼 수가 없었다. 왜 오현 중의 한 분으로 선생을 꼽았는지를 알 수 있다. 안채 앞뜰 우물곁에는 절구를 땅 속에 묻어놓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안채에서 여자들이 절구질을 할 때, 땅에 묻힌 절구가 힘을 덜 들이고도 작업을 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환기를 시키는 까치구멍 대신 벽에 창문을 내었다. 까치구멍은 사시사철 공간이 열려있어, 한 겨울이 되면 바람이 심하게 들어와 춥다. 하지만 까치구멍이 있어야 할 곳에 창문을 내어 열고 닫음으로써,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배려의 마음이다.


땅속에 파묻어 힘이 덜 들도록 한 절구(위)와 까치구멍 대신 창을 내어 추위를 막았다(아래)

정여창 고택만이 갖고 있는 마루측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중문채 밖으로는 사랑채의 뜰로 나가는 공간이 있다. 곳간을 두고 일각문으로 향하는데, 중문채 뒤편에 마루가 보인다. 그런데 그 마루의 한편이 판벽으로 막혀있다. 무엇인가 하여 다가가 보았더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판벽 안으로는 소의 여물통을 이용해 소변을 볼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중문채는 집안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다보면 제 시간에 소변조차 마음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준 마루측간. 이것이 바로 윗사람의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닐까? 정여창 고택을 최고의 집으로 꼽는 데는 한 치의 주저함도 필요치가 않았다. 어디 이런 윗분 없을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분 같은데.


일각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중문채의 바깥 툇마루가 있다.(위) 그 우측이 바로 마루측간이 있는 곳이다.
소의 여물통을 이용한 마루측간. 정여창 고택의 정점이다.


이 곳에는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2009년부터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던 300 여개의 기사를 옮겨놓는 것으로 시작하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적어가려고 합니다.

정자기행
'바람 정자 위에 불다'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정자들을 둘러보면서 적은 글입니다. 정자에 얽힌 이야기와 나그네가 정자를 보고 느낀 것들을 적는 곳입니다.

고택답사
'고택을 따라 나서다'는
중요민속자료, 문화재자료와 비지정인 옛 고택들을 둘러보면서 그 안에 내재된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고택답사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곳은 거의가 잠겨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은 마음대로 돌아볼 수가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애불답사
'천년 마애불의 미소'는
마애불을 따로 모았습니다. 마애불은 거대한 암벽 등에 조각한 불상을 말합니다. 대개는 선각이나 돋을새김을 하는 마애불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조들의 한 없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천년세월 그 자리에'는 천연기념물과  기념물, 고목 등을 모은 곳입니다. 답사를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천연기념물에 대한 생각이나 모습 등을 담았습니다.

유형문화재
'기억해야 할 것들이'는
석불, 석탑, 부도, 석교, 석실, 선돌, 고인돌, 동종 등 문화재 등을 다루는 곳입니다. 수많은 문화재들을 일일이 구분을 지을 수가 없어서 이 곳에 모았습니다. 

역사의 흔적
'걸어도 매번 그 자리'에는
절집, 사지, 향교, 서원, 성곽 등의 답사내용입니다. 때로는 그러한 것들 하나가 더욱 재미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어디를 가나 만날 수 있는 곳,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나를 봅니다.

풍물이야기
'이런 것도 있었다네'는
예전 우리 생활 속에 있던 사물을 현대에 새롭게 만나보는 것입니다. 아스라히 잊혀져 가는 정겨운 모습들입니다. 옛 풍물을 비롯해 장승, 당집, 살아가는데 필요했던 놀이나 도구 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사는 이야기
'사람이 사는 세상사'는
사람들을 만나서 보고 들은 것을 적는 곳입니다. 이 곳은 '여주 5일장' 책을 쓰기 위해 9개월 동안 여주장을 돌아보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는 곳입니다. 때로는 애환도 있고, 때로는 진한 고통이 있기도 하지만 사람사는 세상이 다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지역축제
'가보자 축제 한마당'은
지역의 축제를 돌아보면서 그 모습들을 올리는 곳입니다. 그저 즐거운 모습만이 아닌 지역축제의 문제점들을 함께 다룰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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