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에 소재한 선교장은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선교장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전주사람 이내번이 1703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이다. 99칸 집이라고 강릉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집을  ‘선교장(船橋莊)’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뱃머리와 같은 형태의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붙인 이름이다. 선교장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별당, 정자 등 상류민가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한다.


현 선교장의 건물가운데 1700년대 초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이 안채는 선교장의 건물들이 비교적 화려한데 비해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바깥주인이 사용하는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또한 담장 안에 자리한 열화당은 사랑채로, 순조 15년인 1815년에 이후가 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선교장


설을 며칠 앞둔 1월 30일에 찾아간 선교장. 연신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간 날씨가 강원도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래서인가 선교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10대 300년에 걸쳐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전통가옥. 선교장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각각의 건물들을 배치하고 있다. 각 건물들은 모두 떨어져 구성을 하였으며, 일각문이나 담 등으로 구분이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다 연결이 되어있는 듯하지만, 그 건물들은 각각 떨어져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선교장은 여러 대에 걸쳐서 보수가 되고 새로 증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건물들은 처음부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건물 하나를 지으면서도 기존의 건물을 염두에 두었다는 뜻이다.





“입장료 내고 들어왔는데 볼 것이 없네.”

“그러게 어디를 가나 다 볼 수 있잖아. 서울 가면 이런 집 천지인데”


선교장을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찍고 있던 사람들의 말이다. 볼게 없다는 말에 어이가 없다. 물론 서울에 가면 볼 수 있는 궁궐에 비교를 할 것인가? 하지만 우리 고택은 아무리 작은 집이라고 해도 그 집에서 느끼는 재미가 있다. 그런 점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둘러보아도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1703년 이내번이 제일먼저 지었다는 안채(위)와 공부장으로 사용한 서별당(가운데) 그리고 집안으로 들이는곡식을 받던 '받재마당'이 있는 연지당(아래)

‘이런 것을 모르면 재미없지’


‘문화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문화재를 볼 때는 미리 안내판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교장을 가면 먼저 이런 것을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우선은 미로처럼 길이 나 있는 선교장의 일각문은 모두 몇 개인가를 세어보는 재미이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일각문의 개수를 아이들과 함께 세어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이다.


선교장은 건물마다 그 쓰임새가 다르다. 그리고 선교장을 돌아보면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올린 건물과, 그 아래 있는 건물의 용도를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집 전체에 있는 굴뚝의 개수를 알아보는 것이나, 일각문을 사이로 각 건물들에 따른 아래채의 방의 개수, 그 방의 용도를 알아보는 것 등도 선교장의 둘러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선교장의 사랑채인 열화당(위)과 여운형 선생이 영어를 가르쳤던 영동지방 최초의 사립학교였던 동진학교로 사용이 되었던 곳간채

우리 문화재를 둘러보는 재미는, 그 어떤 것에도 비교를 할 수가 없다.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특히 고택 답사를 할 때는 그 집이 자리를 한 지형이나, 그 지역의 풍속 등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어디를 가나 다 있다’라는 말처럼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시는 없다. 고택구경, 아이들에게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를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강릉시 죽헌동 201번지에 소재한 오죽헌은 보물 제16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과 아들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지금은 5만 원 권의 인물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다. 신사임당은 모든 여성들의 근본이 되는 여인으로,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다. 사임당의 아들인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은 집이다. 규모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정면에서 오죽헌을 바라보면 왼쪽 두 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한 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보물 제165호로 지정이 된 강릉 오죽헌


조촐한 집에서 인물이 태어나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별당건물이다. 이 오죽헌의 오른쪽 방은 신사임당이 용이 문서리에 서려있는 꿈을 꾸고, 이율곡을 낳은 방이다. 방문 위에는 ‘몽룡실’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꿈에 용을 보았다는 것이다. 왼편에 있는 마루방은 율곡 이이가 6살 때까지 공부를 하던 방이다.


오죽헌은 정면 세 칸으로 지어진 집이다. 이단의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사용해 기둥을 세웠다. 왼편 두 칸 마루방 안에는 오죽헌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그만큼 오죽헌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려간 듯하다. 두 칸으로 된 측면을 돌아서면, 몽룡실 뒤편에는 마루가 놓여있다. 작은 별당이지만, 쓰임새를 생각해서 지은 집이다.




난 오죽헌에 가면 나무를 본다.


매년 한 번 이상은 들리는 오죽헌이다. 갈 때마다 그 분위기가 달라지는 오죽헌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오죽헌 안에는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백일홍이라고 부르는 ‘배롱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홍매화’이다. 이상하게 오죽헌을 들리는 시기가 늦은 가을부터 초봄 사이였으니, 아직 한 번도 이 나무들이 실하게 꽃을 피운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항상 오죽헌에 들려 돌아보는 이 세 가지의 나무는 각각 의미가 남다르다. 돌계단을 올라 오죽헌으로 들어가는 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배롱나무가 서 있다. ‘사임당 배롱나무’라고 명명하는 이 나무는 강릉시의 시화(市花)이기도 하다. 배롱나무는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100일간이나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 배롱나무라고 부르는 수령 600년의 백일홍과 율곡송(아래)

이 배롱나무의 원줄기는 고사했다. 현재의 나무는 원줄기에서 돋아 난 싹이 자란 것이다. 그 수령은 이미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 나무의 수령을 보니,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살았을 것이다. 아마 봄 날 공부를 하다가 나른해지면 이 배롱나무를 쳐다보면 기지개라도 켜지 않았을까?


천연기념물인 홍매화인 율곡매


오죽헌의 옆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48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매화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지났다. 1400년대 경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율곡매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직접 관리를 했다고 전해진다.  



오죽헌을 짓고 난 후 최치운이 심었다는 매화나무.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선생이 관리를 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매화나무를 잘 그렸다. 맏딸의 이름을 ‘매창(梅窓)’이라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 이 매화나무는 높이 7m, 땅위의 줄기둘레는 2m 가까이 되는 고목이다. 이 매화나무를 돌아보고 난 후, 끝으로 찾아본 것은 바로 ‘율곡송’이다. 이 세 나무를 돌아보는 즐거움은 오죽헌이라야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6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 자리에 서 있는 오죽헌. 그리고 수령 600년인 배롱나무와 매화나무. 그런 오랜 세월을 간직한 것들이 있어. 오죽헌의 나들이가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본명은 ‘초희’이며, 호는 ‘난설헌(蘭雪軒)’, 자는 ‘경번(景樊)’이다. 선조 22년인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난설헌은 명종 18년인 1563년에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인 초당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허난설헌은 그 재주가 비범하여 오빠가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얼마나 재능이 뛰어났는지 선조 3년인 1570년에는, 불과 나이가 8세 밖에 안 되었지만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을 지었다고 한다. 15세 때 안동 김씨인 김성립에게로 출가를 한 허난설헌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19세에는 딸을 잃고, 20세에는 아들 희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다. 이런데다가 아버지는 상주에서, 난설헌을 가장 아끼던 둘째 오빠 허봉은 금강산에서 객사를 한다.


목포시립무용단 정기공연 창작무용인 '허난설헌'에서 안무자 정란이 허난설헌의 삶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운의 여인, 그러나 풍류 속에서 살다간 여인

그런 주변의 아픔 때문일까? 허난설헌은 1589년인 선조 22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허난설헌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혀있다. 이러한 허난설헌이 죽음을 담보로 자유를 갈망한 조선의 여인으로 다시 조명이 되어 환생을 하였다. 당시의 기구한 삶과 오늘날의 슈퍼우먼을 요구하는 사회적인 풍조가, ‘워킹맘’이라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여인들의 기우뚱거림으로 이어진다.

지난 11월 11일(목) 목포시민문화체육센터 소공연장에서는 오후 7시 30분부터 목포시립무용단의 제28회 공연이 있었다. 1, 2부로 나누어진 이 공연은 창작과 전통이 만나는 그런 무대였다. 1부는 ‘풍류녀 허난설헌’이라는 제목으로 예술 감독인 안무자 정란의 안무로 무대에 올려졌다.



목포시립무용단의 창작무용 '허난설헌'
 
허난설헌의 슬픔이 가득한 일생이 몸으로 다시 환생을 하는 그런 무대였다. 모두 5장으로 나누어진 40분간의 무대는, 연신 바뀌어가는 허난설헌의 삶이 다시 그려지고 있었다. 숱한 군상들 속의 난설헌, 그리고 홀로 그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만 하는 길고 어두운 시간. 몸부림을 칠수록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삶. 멈추고 싶지도 않고, 멈추어지지도 않는 토해버리고 싶은 가슴속의 응어리.

그러한 허난설헌의 모든 것을 4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농축하여 보여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안무자 정란은 몇 년 전인가 이번 무대보다 짧은 ‘새하곡’이라는 춤을 갖고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그때도 보았지만, 무대에 오를 때는 이미 ‘정란’이 아닌 ‘허난설헌’ 이 되어 있었다.

정란은 이번 무대에서 ‘전폐, 희문’이라는 종묘제례악을 사용을 했다. 기존의 음악을 탈피해 허난설헌 일가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자식들의 죽음과 부모와 형제들의 죽음을 조금 더 승화시켰다. 그런 속에서 무대에 오른 정란은 허난설헌의 고통스런 일생을 풀어내 듯, 한풀이와 같은 춤을 춘다. 마치 살풀이를 현대화시킨 듯한 느낌이다.



목포시립무용단 '풍류녀 허난설헌'

춤은 몸을 필요로 한다. 몸은 마음의 춤이 있어야 함께 움직일 수가 있다.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 무대에 서면, 관객들도 그 몸짓에 동화를 할 수가 있다. 이번 무대에서 정란은 스스로 허난설헌이 되어 관객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몸을 빌려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더 보완을 해 허난설헌의 일대기를 무용극화 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 무대가 기대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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