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에 소재한 백제시대의 고찰인 성주사가 자리했던 절터. 성주사지를 찾은 6일 아침에는 서해 바닷가가 가까워서인가 바람이 차갑다. 그래도 성주사지를 찾은 것은 많은 문화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벌써 몇 년 째 찾아보지 못한 성주사지. 멀리서도 보이는 탑들의 상층부반 보아도 가슴이 뛴다.

 

성주사 터에는 국가와 충청남도에서 지정한 문화재들 말고도 많은 석조물들이 있다. 발굴을 마친 성주사지 여기저기에는 금당터 등 주초들이 남아있어, 옛 성주사지의 가람배치와 그 위용을 가늠하기란 어렵지가 않다.

 

 

붉은 말이 3일이나 울었다는 성주사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시대 사찰로, 백제멸망 직전에 붉은 말이 이 절에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면서 백제의 멸망을 미리 예시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왜 붉은 말이 하필이면 성주사를 돌면서 그렇게 울어댄 것일까?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왕자일 때인 599,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건립한 사찰이라고 전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것을 붉은 말이 알려주었다고 전하는 성주사. 이 무렵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궁중의 홰나무가 사람처럼 울었다든가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든가 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승자의 기록에서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에, 흉흉한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백제멸망의 당위성을 만들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신라말 <숭암사 성주사 사적>에 보면 성주사의 규모가 놀랍기만 하다. 불전 80, 행랑 800여 칸, 수고 7, 고사 50칸으로 거의 천여 칸의 거대한 규모를 가진 사찰이었다. 현재 발굴 후 잘 정비가 된 성주사지는 9천여 평의 대지를 낮은 석축 담으로 둘러싸고 있다. 성주사 절터에는 건물의 주춧돌을 포함한 많은 석물이 남아 있는데, 그 중 가장 눈길을 붙드는 것은 바로 성주사지석계단이다.

 

도난당한 사자상도 복원 해

 

성주사 금당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다. 백제에서 가장 웅장한 가람이었던 성주사에 신라는 왜 금당을 새롭게 조성한 것일까? 금당 터에 앉아 하염없이 고뇌에 빠져보지만, 시원한 답변을 얻을 수가 없다. 통일신라시대에 금당을 조성했다면, 금당터를 오르는 돌계단도 이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주사지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인 성주사지석계단(聖住寺址石階段)’이 있다. 계단은 잘 다듬은 널찍한 돌을 이용하여 5단으로 쌓아 올렸다. 금당 터 사면에는 금당을 오르는 계단이 있지만, 이 중앙오층석탑에서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남다르다. 정면이기 때문에 양쪽 소맷돌에 사장상을 조각해 앉혀놓았다. 이 사자상은 1986년에 도난을 당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석불좌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석조각예술

 

금당의 한 가운데는 석불좌가 남아있다. 넓게 석재를 이용해 2단으로 조성한 석불좌는 조형미기 뛰어나다. 큼지막하게 사각형으로 조성한 석불좌. 일반 석불좌처럼 높지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부분이 하층기단부이고, 위에는 상층기단부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좌는 장대석으로 네모나게 두르고 난 뒤, 그 위에 연꽃잎을 크게 조각한 앙련을 새긴 4장의 석재를 이용해 위 기단을 올렸다. 네 장의 석재를 가변부분을 둥그렇게 조형하였으며, 그 중심을 도드라지게 하였다. 아마도 이 부분에 상층기단인 좌대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남은 석불좌만 보아도 훌륭한 석조각임을 알 수가 있다.

 

남들은 그저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성주사지 금당 터. 하지만 이 석계단과 석불좌 하나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의 가운데에서 머리를 쥐어짜 보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난 뒤 이곳 성주사에 다시 금당을 조성하고 아름다운 석조각을 한 것일까라는 질문에는 시원한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무심한 바람만 지나치는 천년 고찰 터인 성주사지. 언제나 시원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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