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강씨성을 가진 분들이다. 한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난 예인이요, 또 한 사람은 현재 대단한 인기를 눌고 있는 연예인이다. 한 분은 제자들이 주는 용채까지 꼼꼼히 기록한 분이시고, 한 사람은 탈세의 용의자가 된 사람이다. 왜 강호동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돌아가신 강도근 명창의 생각이 나는 것일까?

강도근 명창. 남원이 마지막 판소리 보루라고 인정을 받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 시대에 수많은 기교를 부리는 많은 창자들이 있었다면, 강도근 명창은 그저 우직하게 판소리 본바탕을 그대로 이어 온 명창이다. 강도근은 농사꾼 아버지인 강원중과 어머니 이판녀 사이에서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18년 지금의 남원시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국악의 성지 이층 전시실에는 강도근 명창의 관련자료들이 전시가 되어 있다.


강도근의 호적명은 강맹근이다. 그의 집안에는 음악가들이 많았는데, 대금산조의 무형문화재 강백천(1898∼1982)이 그의 사촌형이고, 판소리와 창극으로 이름을 날렸던 강산홍과 가야금의 명인 강정열은 당질이며, 가야금산조로 남원과 진주에서 활동했던 강순영 또한 그와 사촌간이다.

만들어지는 소리를 거부한 강도근 명창

강도근 명창은 동편제 판소리 <흥보가>의 전통을 가장 충실하게 지킨 판소리 소리꾼이라고 한다. 그는 항상 ‘자작은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은 전통기법을 그대로 지켜간다는 이야기이다. 소리꾼들은 조금 소리를 익히면 나름대로의 목을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강도근 명창은 통성 위주의 목으로, 소리 끝을 짧게 끊어내는 대마디대장단을 충실하게 구사했다.



강도근 명창의 주변에는 늘 많은 전통예술인들이 있어, 명창의 학습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강도근 명창의 소리는 전형적인 동편제 판소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도근 명창의 목소리는 철성이다. 철성이란 쇳소리와 같이 조금은 탁한 듯한 소리로 웅장하고 남성적인 호탕함이 있다. 송만갑, 김정문으로 이어진 동편제 판소리의 특징적인 목이다.

현대 판소리 명창 중에서는 유일하게 강도근 명창만이 철성을 가졌다고 한다. 강도근 명창은 판소리가 쇠퇴기에 잡어 든 1970~80년대에 남원국악원의 창악 강사로, 후진들을 양성했다. 강도근 명창은 동편제 판소리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남원이 우리나라 판소리의 최후 보루라는 평가를 받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강도근 명창이 살아생전 정리한 수강료 납부장. 제자들이 주고 간 용채까지 일일이 기록을 해두었다.
아래편 출석부는 날마다 수기로 출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고 있다.


꼼꼼하게 수기로 적은 출석부, 눈물이 나다

남원시 운봉을 가면 ‘가왕’이란 칭호로 한 세대를 풍미한 명창 송흥록의 생가가 있다. 그리고 그 조금 아래에는 여류명창 박초월의 생가도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커다란 건물이 바로 ‘남원 국악의 성지’이다. 이 건물 안에는 전시관과 함께 남원시립국악단의 연습실 등이 자리하고 있다.

1층에는 사무실과 민속국악실 1관과, 판소리 전수관이 있고, 2층에는 민속국악실 2관과 공연장 등이 자리한다. 이 2층 전시실 한편으로는 남원국악원에서 창악강사로 후배들을 가르치던 강도근 명창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강도근 명창이 직접 수기로 쓴, 수강료 납부 장부와 출석부가 전시되어 있다. 수강료 장부에는 제자들이 강도근 명창을 찾아 용채를 쓰시라고 주고 간 돈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생각해서 준 돈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출석부에는 그날그날 출석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빼곡하게 적어 놓았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강도근 명창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온전히 판소리를 제대로 부르다가 가신 명창 한 분. 이 분이야말로 세상에 흐트러짐이 없이 살다간 진정한 예인(藝人)이 아닐까? 정말 좋아하는 연예인이었다. 그리고 우직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 온 그를 화면을 통해서 만나는 것을 무엇보다 즐겨했다.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언제가는 진위가 밝혀지겠지만. 그런데 그런 소문이 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이프다. 그런데 왜 명창의 그 수강료 납부장이 생각이 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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