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임실군 오수면에는 고려 말인 1352경에 해경대사와 월산대사가 창건하였다 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해월암이라 부르는 암자가 있다. 그 암자를 오르는 길은 걷기에는 조금 가파른 산길이다. 그 산길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으로 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가 있다.

 

신포정. 앞으로는 오수면을 가르는 내가 흐르고 있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져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신포정에서 내려다보이는 개울에는 아직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아직은 이 내가 그래도 인간들로 인해 오염이 심하게 되지 않은 듯하다.

 

 

 

색다른 정자 신포정

 

개울가 벼랑위에 서 있는 신포정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정자와는 다르다. 정자의 출목에 돌출되어 있는 봉황의 조각이 세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일반 정자에서는 보기가 힘든 형태이다. 정자 안으로 들어가니 대들보 밑으로 청룡과 황룡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천정반자도 돌출되어 있어 특이하다. 그런데 황룡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청룡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신포정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정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어 아쉽다. 다만 정자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부재나 석물 등을 살펴볼 때 100여년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포정이라는 현판은 금산사의 현판을 쓴 사람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돌출된 천정반자를 보니 네 귀에 자라가 달려있다.

 

 

 

용과 자라가 주인인 신포정

 

물고기를 물고 있는 청룡, 그리고 반자에 달려있는 자라. 이것은 아마 이 앞을 흐르는 내가 예전에는 배가 드나들지는 않았을까? 누군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포구를 드나드는 배들과, 섬진강 줄기를 따라 오르내리는 수많은 뱃사람들의 사연을 즐겨 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외롭게 서 있는 정자 신포정.

 

여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피서를 한다는데, 나그네들은 이 신포정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 알고는 있을까? 정자의 형태나 여러 가지 조각기법, 그리고 앞으로 흐르는 내를 보아 이 신포정은 또 다른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야기조차 해 줄 수 있는 이웃을 만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주변에 물어보아도 신포정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없다. 그저 오래전부터 그곳에 서 있다는 것 외에는. 정자 밑을 흐르는 내를 보니, 예전에는 꽤 큰 물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외롭게 길가에 서 있는 신포정은 찾는 이들 조차 없이, 무심한 바람만이 골을 휘감아 돈다.

얼마 전 충격적인 소식을 하나 들었다. 경기도의 한 시에서 지역과 전혀 무관한 예능단체를 초청해, 걸판지게 굿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굿이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인물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인데, 전혀 지역과도 무관하고 그렇다고 내용이 맞지도 않는 굿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초청을 한 단체가 바로 지역문화를 책임지는 곳이었다니 아연할 수밖에.

 

요즈음 우리는 각처에서 열리는 많은 행사를 보면서 지역적 특성이 강한 우리 것이 너무나 홀대를 받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백리부동풍(百里不同風)’이라고 하여서 그 지역마다 각기 다른 풍속과 문화예술을 지니고 있다.

 

 

즉 살아가는 방법과 주위환경, 그리고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민속 창출의 요인으로 삼아, 각 처마다 다른 형태의 풍속을 보이고 있다. 하기에 우리는 적어도 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사람들이 딴 곳으로 이주를 하면, 3대 정도를 지나야 그 곳의 풍습을 익히고 그 지역의 토착 풍속과 동화된다고 한다.

 

전통문화는 지역에 따라 독창성이 있다

 

그 예로 판소리의 경우 전라도 사람의 성음이 틀리고, 경상도 사람의 성음이 틀리다. 또한 경기도 사람의 성음이 달라 각기 그 지역 나름의 창제(唱制)를 갖고 있다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풍물을 보더라도 기 지역에 따라 각기 처해진 바대로 다른 음악성향을 띠우고 있어 우리는 웃다리농악, 호남좌도농악, 우도농악, 삼천포농악(영남) 등 지역의 다른 색을 보이고 있는 농악을 볼 수가 있다.

 

춤 또한 지역적으로 각기 특색 있는 춤의 형태가 있고,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태가 다르다고 표현을 한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는 문화를 지켜가야 할 사람들의 문화를 망치는 행위를 보거나, 우리 것인지 남의 것인지, 우리 지역 것인지 남의 마을 것인지, 있었는지 만들어졌는지...구분도 되지 않는 그러한 것들을 너무나 흔히 접할 수가 있다.

 

전통예술은 그 지역에서 함께 그 행위를 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정서가, 그 안에 송두리째 담겨있는 것이다. 그런대도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지역의 정서가 사라진 전통예술이 마치 그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었거나, 혹은 전혀 다른 정서인데도 불구하고 그 지역의 것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역 전통문화를 폄하하는 행위는 매국적인 짓거리

 

전통이란 한 지역에 수 없이 오랜 시간동안 그 지역에 전해지면서, 자연적이고 순차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그 지역민의 정서를 내포하고 있는 아름다운 예술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지역의 정서도 없고 그 지역적 사고도 없는 예술은, 이미 그 지역의 전통이 아니다. 더욱 그런 것들 - 지역적 정서도 없고, 특성도 없으며, 현대적 냄새가 나는 그러한 것들 - 은 더 이상은 우리가 방관을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없애고, 민족적 자긍심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어찌 보면 매국적 행위라고 몰수도 있다. 민족적 자긍심을 죽이는 행위는, 그 자체가 바로 망국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미 일제에 의해서 수 없이 많은 전통문화예술이 훼파되고 얼마 남지 않은 부분을 지켜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이즈음, 지역을 벗어나 함부로 지역 정서를 망치는 행위나 지역적 근거도 없는 것을 지역의 것인 양 몰아가는 행위는 매국적 작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역 의식 없는 관리단체 있을 필요 없어

 

이제는 스스로에게 묻기를 원한다. 관리를 하는 행정부서의 담당자는 우리 것에 대해서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으며,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문화를 지켜가야 할 당사자들은 그 지역적 사고를 지닌 예술적 행위를 하고 있으며, 양심을 속이는 일은 없었는지. 타 지역의 정서를 갖고 있으면서도, 가장 그 지역사람인체 하고 나 몰라라 하는 행위는 하지 않고 있지는 않았는지.

 

 

 

지역의 전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전통인체 날조를 하고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내리길 바란다. 그리고 더 이상은 지역적 정서가 내포되어 있지 않고, 지역의 특성이 없는 그러한 지역불명의 문화를 내세우는 행위는 삼가 하기를 바란다. 그 길만이 지역문화를 지켜가야 할 사람들이 가져야할 올곧은 덕목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럴만한 자질이 없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인 서기586년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였다. 신라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고려에 패망한 뒤, 경순왕의 첫째 딸인 덕주공주가 이곳에 들어와,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불(보물406호)을 조성했다.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덕주공주가 일생을 마친 뒤로, 산 이름은 월악산으로 절 이름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주사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찾을 수 있다. 「덕주사는 월악산 밑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절을 창건했으므로 덕주사로 이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충주 산수조에 의하면「동으로 45리에 있어 청풍 경계를 이룬다. 상, 하덕주사가 있다.」 고 하여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라 하고, 이곳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지금의 덕주사를 예전에는 하덕주사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덕주사가 있는 곳을 ‘절골’이리 불렀다.

 

예전에는 하덕주사라 불렸던 현재의 덕주사를 절골이라 했고, 상덕주사인 마애불사지는 윗절이라 했다. 현 덕주사의 경내에는 남근석 3기가 서있다. 절 안에 이렇게 많은 남근석이 서 있는 곳은 매우 흐ㅟ귀한 현상이다. 그런데 왜 적주사에는 남아를 낳기를 기원한다는 남근석이 서 있는 것일까?

 

덕주사는 남아선호 신앙이 깃든 곳이다. 서쪽 언덕 산 밑에는 네 기의 부도와 장대석이 있다. 6.25 때 불탄 뒤로 1963년에 지암화상이 5칸인 법당을 중창하였으며, 1985년 성주화상이 현재의 법당을 다시 중창하였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고려시대에 조성 된 약사여래입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월악산은 명산 중 명산

 

산 정상을 ‘영봉’이라고 부르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밖에 없다. 그만큼 월악산은 명산으로 꼽힌다. 월악산을 수산리 쪽에서 바라보면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과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하기에 월악산은 여산신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소산에는 모두 산신이 있는데, 영험한 산인 지리산, 계룡산, 월악산 등이 여산신이다.

 

 

산의 명칭에 ‘악(岳)’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산은 ‘큰산’이요, 음기가 강한 산이라고 한다. 그러한 음기를 누르는 것이 바로 남근석이다. 덕주사 경내에 남근석이 많은 까닭은 바로 그런 음기를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한 음기가 강한 곳에 남근석을 세우고, 그곳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덕주사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이 음기를 누르는 남근석에 정성을 들여 득남을 기원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였을까? 덕주사 경내에 있는 남근석을 바라보면서 혹 이 남근석에는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이 남근석에 치성을 드려 많은 여인들이 아들을 낳아 강한 신라를 기대한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모셔온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충북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약사여래입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다. 대좌는 따로 만들었으며, 두발을 윗면에 조각하고 몸체를 얹었다. 옛 정금사 터라고 전하는 곳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명산 중 명산이라는 월악산에 자리하고 있는 덕주사. 그 경내에서 볼 수 있는 남근석들. 지금도 그 남근석에 비손을 하는 부인들이 상당수가 있다고 한다. 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덕주공주의 염원이 이루어지려는지. 속모를 새 한 마리 울며 날아간다.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번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서 있는 보물 제928호는, 조선 광해군 때 세워진 사리탑과 그 안에서 발견된 여러 사리장치들을 일괄 지정한 것이다. 사리탑 1기와 탑 안에서 발견이 된 6물 6점을 지정하였다. 이 사리탑은 영원히 우리 땅에서 볼 수 없었던 것 중 하나이다.

 

보물의 공식 지정 명칭은 ‘남양주 봉인사 부도암지 사리탑 및 사리장엄구’이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사리를 모셔 둔 탑으로, 광해군은 왕세자의 만수무강과 부처의 보호를 바라며 봉인사의 부도암이라는 암자에 사리탑을 세우게 하였다. 사리탑에는 승려의 사리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갔던 보물 사리탑

 

이 사리탑은 1620년경 봉인사 부도암(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송릉리 소재)에 세워졌던 것이다. 일제시대인 1927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고베로 반출되고 그 뒤 대판 시립미술관에 보관되었다가, 1987년 2월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봉인사 사리탑은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조선시대의 유물연구에 기초적인 자료가 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높이 3.08m의 사리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은 상·중·하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고, 그 위로 북처럼 둥근 탑 몸돌을 올려 사리를 모셔 두었다. 8각의 지붕돌을 그 위에 올린 뒤 꼭대기에는 길쭉한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보기에도 조선시대의 사리탑 중 걸작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 사리탑의 전형

 

이 탑의 뛰어난 조형은 기중돌인 중대석에 새겨진 구름과 당초문양, 꽃잎과 여의주무늬, 상대석 옆면 테두리 속의 당초무늬, 탑신부의 운룡무늬 등에서 새로운 조형적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경사가 급한 지붕에 처마 밑으로 서까래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거나, 윗면에 용머리를 새긴 수법 등은 기존의 사리탑과는 다른 형태이다.

 

상륜부가 길쭉하게 올라간 형태나 왕릉의 호석처럼 주위에 난간과 궁판석을 돌린 방식 등은 이 탑이 곧 조선 초기에 제작된 중원의 청룡사의 사리탑이나, 양주의 회암사의 사리탑을 모방하여 조선 초기 사리탑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작연대가 밝혀진 사리탑

 

이 탑의 발견 당시 외합 속에는 명주실과 비단, 향이 남아 있었으며, 은으로 만든 내합의 뚜껑에는 마름모형의 무늬를 볼록 눌러새김의 수법으로 낸 후 그 안에 역동적인 운룡무늬를 장식하고 금박을 입혔다. 그리고 이 합의 밑바닥에는 네 줄의 명기와 함께 '만력 48년 경신 5월(萬曆四十八年庚申五月)의 글귀가 새겨져, 이 유물이 광해군 12년인 1620년에 봉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사카시립미술관에 전시가 되어있던 이 사리탑은, 1987년 소유자인 이와다 센소의 자발적인 기증 반환으로 되돌아 오게 된 것이다. 이는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는 원소유국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유네스코 협약정신에 의해 돌아오게 된 것이다. 수많은 누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찬탈해 간 일본인 중에, 이런 양심적인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놀랍기만 하다.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의 문화유산들. 그 역사 속에서 찬연하게 빛을 발했던 문화재들이, 언제나 돌아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인지.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들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답답함만 더해간다.

사극 드라마 등에서 가끔 등장하는 여인들의 정절을 지켜내는 작은 칼이 있다. 장도라고 부르는 이 칼은 여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장도는 대개 옛 상류사회에서 애용해온 일종의 작은 칼로 패도와 낭도의 복합어로 실용을 겸한 장신구의 일종이다. 장도 가운데 허리에 차는 것은 패도라고 하고,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은 낭도라고 불렀다. 장도는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경주 황남대총 북분출토의 금제과대에는 장도와 흡사한 소도가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이미 장도와 같은 개념의 도 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도는 남자들은 허리띠나 옷고름, 혹은 포의 술띠 등에 차고 다녔다. 이와는 달리 여자들은 치마허리에 걸거나 옷고름(겉고름과 안고름)에 찬다.

 

 

여자의 경우에는 호신용의 구실도 하여 부녀자의 정절을 지켜주는 상징으로 쓰이기도 했다. 특히 임진왜란(1592) 이후부터는 사대부 양반가문의 부녀자들이 순결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장도를 휴대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장도가 신분을 상징하는 표시가 되기도 해, 장도의 장식이 점점 사치품으로 변하자 연산군과 중종 대에는 장도를 금제절목으로 삼아 서민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친 장도

 

장도는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남녀의 애용품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실생활에서도 사용했지만, 장식용과 호신용으로의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장도 중에서 은저가 달린 첨자도는 음식의 독을 분별하는데 사용하기도 했으니, 실생활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호신용으로 많이 애용되기도 했다.

 

 

전통장도는 그 재료에 따라, 금, 은, 동, 철, 흑단, 향나무, 대추나무, 흑각. 화각, 서각, 소뼈, 상아, 옥, 호박, 비취 등이 사용되었고, 공작석, 금강석 등도 사용되었다. 장도의 장인은 만난지가 벌써 꽤 오래되었다(2004년 9월 24일 취재). 풍기읍 동부리 507 거주하는 김일갑 장인은 장도를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 1990년 8월 9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을 받았다.

 

오직 전통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지켜 온 세월

 

어린 시절부터 금은패물공방에서 기능을 연마한 김일갑 장인은 우리 전통장도에 대해서는 남다른 식견을 지니면서 장도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김장인은 이들을 모두 다루기는 하지만 고급 호화품은 특별한 주문이 있지 않는 한, 대개 수요에 쫓아 소뼈나 먹감나무를 사용하여 대중성이 있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

 

김장인의 풍기장도는 원통형과 사각도, 육각도 등을 주로 생산한다. 장도의 모양새도 칼자루와 칼집의 머리를 바로 마무리하는 평맞배기, 대칭으로 꼬부리는 乙자맞배기, 칼집에 첨사를 끼우는 첨사도 등 세 종류가 있다. 칼집에도 남자의 경우는 누각, 운학, 박쥐, 용 등 장생문을 사용하고, 여성은 나비, 국화, 난, 매화 모양의 장식을 붙인다.

 

그리고 칼등 쪽에는 자신의 호가 들어있는 글자를 새겨 자신의 작품임을 나타낸다. 이는 자신이 만드는 장도 한 자루마다 생명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작품 하나마다 장인의 숨결이 배어있는 것이다.

 

이제는 마음의 장도를 품어야 할 때

 

장도 한 자루를 만드는 데는 모두 23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모든 공정에 전혀 기계를 쓰지 않고 거의 원시적인 공법으로 정성을 쏟고 있어, 대개 한 자루를 제작하는데 4, 5일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요즈음 들어 장도는 그저 ‘여인의 정절’을 상징하는 것으로 표현이 되고 있지만, 실은 실생활과 호신용, 그리고 장식용 등 다양하게 시용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여인의 정절을 지켜주던 의미로서의 장도가, 그저 장식용으로 사용이 될 뿐이다. 세상이 변하면서 정절에 대한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면서 장도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한 어르신은 이렇게 말한다.

 


“장도 한 자루에 무슨 정절이 지켜지겠습니까? 그것도 옛날 이야기죠. 지금은 마음의 장도를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참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난잡하게 변하겠죠. 모든 여성들이 마음의 장도를 품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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