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186-3에 소재하는 해우재. 화장실 문화공원이란 해우재는 미스터 토일렛이라 명명하는 심재덕 전 수원시장의 사가였다. 심재덕 전 수원시장은 외갓집 뒷간에서 출생을 하였다고 하여서, 어릴 적 아명이 개똥이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아름다운 화장실 문화운동의 선구자로, 국제무대에까지 그 운동을 확산시켜 세계화장실협회(WTA)를 창립했다.

 

사실 해우재란 이름을 빌려 온 해우소(解憂所)’는 절집에서 사용하는 화장실을 말한다. 이 해우소란 근심을 푸는 곳이라고 하여, 절집마다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다. 사찰의 해우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정집의 화장실과는 상당히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저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곳이기 보다는, 그 안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변기모양을 한 해우재(위)와 미스터 토일렛 심재덕 전 수원시장의 흉상(아래)

 

단 하나뿐인 화장실 문화공원

 

해우재는 지난해에 문화공간으로 자리를 잡아, 명실공이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에 단 하나뿐인 화장실을 주제로 한 테마공원으로 거듭났다. 지난 31일 찾아간 해우재. 그동안 몇 차례인가 찾아간 곳이다.

 

날이 쌀쌀해서인가, 공휴일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는 않았다. 해우재는 수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한 사람의 집념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화장실 운동에 대해 공감과 의아함을 함께 느낀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화장실 변기 모양을 한 집도 그렇거니와, 조금은 부끄러운 치부를 들어낸 조형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답사를 하고 있는 박사승 수원시 SNS팀장(위 좌측)과 온누리. 공원 안의 조형물(아래)

 

사가(私家)를 허물고 지은 변기집

 

심재덕 전 수원시장은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이 30여 년간 살던 집을 허물고 그곳에 변기를 닮은 집인 해우재를 지었다. 해우재는 20073월 건축가 고기웅의 설계를 토대로 공사하여, 그 해 1111일 완공을 하였다. 한 사람의 화장실문화에 대한 집념이 이루어 낸 일이었다.

 

심재덕 전 수원시장의 사후에 유족들은 그의 뜻을 받들어 20097월 수원시에 해우재를 기증하였다. 수원시에서는 그 뜻을 기리기 위해 해우재를 구조변경을 하여 수원시 화장실 문화전시관 해우재란 명칭으로 20101030일부터 일반에게 무료개방을 하고 있으며, 지난 해 74일 주변의 땅을 매입하여 문화공원으로 조성을 하고 개장식을 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수원시는 명실공이 세계화장실 문화를 선도하고, 화장실 문화를 꽃 피운 발상지이다. 오늘 개장을 하는 화장실 공원은 전 심재덕 수원시장의 화장실에 대한 집념 하나로 이루어졌다. 오늘 공원 가장에 앞서 해우재를 수원시에 기택해 주신 심 전 시장의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공원은 세계적인 명소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세식 변기인 신라시대 귀부인들의 노둣둘(위)와 왕이나 왕비가 사용하던 매화그릇(아래) 

 

더 많은 화장실 자료가 필요한 듯

 

해우재는 화장실문화공원이다 해우재 안에는 심 전 수원시장의 화장실에 대한 철학과 집념이 그대로 배어있다. 해우재 뒤로 마련한 화장실 공원은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우선 각 시대별 변기의 모습부터, 특별한 화장실의 모습을 재현시켰다. 거기다가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 변을 보는 모습들은 이곳이 얼마나 특이한 공원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뒤편 야외전시공간에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각종 변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임금이나 왕후기 사용하던 매화그릇과 매화틀, 백제시대의 변기인 동물을 형상화한 호자, 신라시대의 변기로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인 노둣돌, 똥을 퍼 마르던 똥지게와 똥장군, 그리고 각종 뒷간의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변을 보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형상물들도 보인다. 하지만 조금은 무엇인가가 부족한 듯도 하다. 해우재란 이름을 빌려 온 절집의 해우소 등에는 문화재로 지정이 된 곳도 있다. 그러한 해우재의 원 모습인 해우소 중에서 특징적인 것을 함께 조형을 했다면,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지난 해 1119일 수원 라마다 프라자 호텔에서 열린 제5차 세계화장실협회 이사회에서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세계화장실협회 차기 회장으로 추대하기로 결정을 한 바 있다. 한 사람의 집념으로 이루어 낸 독특한 문화공원인 해우재.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신개념 화장실 테마공원답게, 앞으로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올해 5월 경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열리는 총회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이 세계화장실협회 회장으로 취임을 하기 때문이다.

대보름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 큰 명절입니다. 설날과 추석, 동지와 함께 4대 명절로 정하기도 하죠. 그런 대보름에 기억나는 아름다운 행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이런 행사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에, 늘 마음이 허전하기도 합니다. 한 지역의 문화는 사실 그 지역의 지자체장에 의해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지자체장이 문화적인 마인드가 있으면 그 지역의 문화는 아름답게 꽃을 피울 수가 있지만, 지자체의 장이 문화를 잘 모른다거나 편협 된 사고를 갖고 있다면 그 지역의 문화는 그저 멍멍하니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아름다운 남한강 대보름 한 마당

 

벌써 한 3년이나 지났나봅니다. 4대강 정비인가 무엇인가를 한다고 아름다운 남한강을 공룡과 같은 중장비들이 한창 파헤치고 있을 때, 남한강 둔치에서는 대보름 한마당이 열렸습니다. 민예총 여주지부에서 준비를 한 대보름 한마당. 사람들은 그때까지 대보름의 많은 행사가 이렇게 아름답게 행해진다는 것을 모르고 참가를 했습니다.

 

여주 흔암리에서는 보름에 줄을 당기고 난 뒤, 그 줄을 얼어붙은 강에 갖다 놓습니다. 그것이 해동이 되면 남한강으로 떠내려가죠. 그런데 이 줄에는 액송기(厄送旗)’라는 것이 꽂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자신의 모든 액을 적은 작은 깃발이죠. 이 액송기를 꽂은 줄이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면, 자신의 우환 등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죠.

 

이렇게 아름다운 의식이 3년 전, 대보름날에 남한강 둔치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행사는 우리민족의 대보름 때 보이던 많은 놀이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행사였습니다. 날이 추웠지만 많은 사진작가들이 횡재를 했다고 즐거워 한 행사였죠. 두레싸움, 줄다리기, 장치기, 다리밟기, 액송의식, 강고사, 달집태우기 등, 우리민족의 대보름에 행해지던 놀이가 총 망라된 복합적인 놀이였기 때문입니다.

 

 

대보름의 놀이 중 압권은 액송 줄 띄워 보내기

 

그랬습니다.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탄성을 지르며 연신 셔터를 누른 것은, 바로 액송기를 꽂은 줄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의식이었습니다. 액송기에 이름과 나이, 그리고 자신에게서 사라졌으면 하는 나쁜 것을 적어 기에 꽂고, 그것을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의식이죠. 이런 아름다운 전통이 3년 전 대보름날에 남한강에서 행해진 뒤, 그 다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우리만의 대보름 놀이였지만, 어째서인지 이런 행사가 멈추어진 것이죠. 이런 아름다운 대보름의 놀이는 지자체에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도 일조를 합니다. 그런 대보름 놀이가 사라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죠. 대보름 놀이 자료를 정리하다가 찾은 자료입니다. 사진으로 설명을 해볼까요.

 

액송기를 꽂은 줄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줄다리기를 하고 난 후 줄은 남한강가로 옮겨집니다. 줄에 꽂힌 액송기들입니다

 

액송기를 꽂은 줄을 보내기 위해 살풀이 춤을.  

 

춤을 추다가 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대단한 퍼포먼스죠. 그 추운 정월 보름에 

 

액송을 하기 위해 작은 볏집에 불이 붙였습니다. 그리고 강물에 떠내려 보냅니다.

 

액송기를 꽂은 줄도 함께 강물에 띄워보냅니다.

서구화된 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조선조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의 강압적인 우리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해 수없이 사라져간 우리의 풍속들. 그 안에는 상원일이라고 하는 정월 대보름의 놀이들이 있었다. 공동체를 창출하고 마을과 마을 간의 단합을 일구어 낸 수많은 놀이들이, 단지 옛것이나 미신이라는 폄하로 인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실 정월 대보름은 우리민족에게는 4대 명절 증 하나였다. 설날, 추석, 동지와 함께 정월대보름을 큰 명절로 잡은 것이다. 이렇게 정월 대보름을 큰 명절로 잡은 이유는 정월 초사흘부터 시작한 각종 공동체놀이들이, 정월 대보름을 기해 마무리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월 초하루에 설을 쇤 사람들은 초이틀은 귀신 날이라고 해서 근신을 하다가, 하늘에서 평신(平神)이 하강한다는 초사흘부터 지신밟기 등 각종 놀이를 즐기기 시작한다.

 

두레싸움은 서로 상대마을의 두레기에 달려들어 꼭대기에 꽂힌 꿩장목을 빼앗는다

 

3일부터 시작하는 대동놀이들

 

음력 초3일되면 각 마을마다 두레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한다. 지신밟기는 마을마다 한 집도 빠짐없이 다니면서 고사덕담(告祀德談)’인 축원을 해주는데, 문굿서 부터 시작을 해 우물, 마구간, 부엌, 장독대 등을 돈 후 대청에 마련해 놓은 고사상 앞에서 덕담을 한다.

 

고사덕담은 그 집이 일 년 동안 안과태평하기를 바라는 축원굿으로 일 년 간의 액을 막아내는 홍수풀이부터,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농사풀이 등 창자의 능력을 따라 다양한 소리를 한다. 지신밟기를 마치면 대청에 마련한 술과 떡을 나누고 난 뒤, 고사상에 올려 진 쌀과 돈을 갖고 다음 집으로 향한다. 그 쌀과 돈은 마을의 기금으로 사용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먼저 지신밟기를 하기 위해 풍물패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고 하니, 우리민족은 정월에 하는 놀이가 풍농과 안과태평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만 같다. 이렇게 마을을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던 두레패들이 길에서 만나게 되면, 상대방에게 먼저 기를 숙여 인사를 하라고 소리를 친다. 그러다가 급기야 상대 두레기의 기의 상단에 꽂힌 꿩장목을 뽑게 되는데, 이것이 정월에 열리는 '두레싸움'이다.

 

두례싸움에서 먼저 꿩 장목을 빼앗긴 마을은, 상대방의 마을을 '형님마을'로 일년간 대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긴 마을에서는 빼앗은 꿩장목을 기에 함께 달고 다니기도 했다. 진 마을에서는 일 년 동안 장목이 없는 두레기를 들고 다녀야만 한다. 

 

수원 고색동 코잡이 놀이( 사진 / 이용창)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줄다리기 

 

음력 정월 14일 밤이나 보름날 마을에서는 줄다리기를 벌인다. 줄다리기는 풍농과 다산, 마을의 안녕 등을 기원하는 기원성 대동놀이이다. 이 줄다리기는 처음부터 큰 줄을 갖고 줄다리기를 하기도 하지만, 처음에는 마을마다 작은 새끼줄을 갖고 줄을 당기고, 진 마을의 줄을 이긴 마을 줄에다가 더하게 된다.

 

그 줄을 갖고 이웃의 이긴 마을끼리 서로 줄다리기를 하면 조금 굵은 줄이 된다. 그것이 또 다른 마을과 시합을 하면서 자꾸만 더해져, 나중에는 얌용과 숫용이라는 거대한 줄이 된다. 이 줄을 암용의 용두는 넓게 하고, 숫용은 가늘고 뾰족하게 제작한다. 이 숫용의 용두를 암룡의 용두에 밀어 넣어 비녀라고 부르는 장목으로 고정시킨다.

 

이렇게 제작된 용을 당기게 되는데, 줄을 당기게 되는 이유와 용도는 마을마다 차이가 난다. 어느 곳은 여자와 남자로 나누어 당기기도 하는데, 이 때는 여자가 이겨야 풍농이 든다고 한다. 다산과 풍농이 필요한 시기에 나타난 속설이다. 또 이 줄을 마을 입구에 놓아 액을 막거나, 줄을 이용해 보를 막기도 한다. 어느 곳에서는 이 줄에 액송기를 꽂고 물에 떠내려 보내, 모든 액을 막아내기도 했다.

 

우리고장 고색동에는 코잡이놀이라고 하여 줄다리기가 전해졌다. 한 때 중단되었던 고색동 줄다리기는 인근 12개 마을에서 풍물패가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삭전(索戰)이라고도 부르는 줄다리기의 기원은 아주 오래전에 기인한다. 고색동 줄다리기도 언제부터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무척 오래전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1796년 수원 화성의 축성 이후에는 양반과 평민이 나누어 줄을 당겼다고 전해지고 있는 고색동 줄다리기는, 일제 강점기는 1960년대 까지도 전승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의동 길마재줄다리기 역시 영통구 길마재와 용인시 수지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줄다리기를 하였다. 남자들은 동쪽 줄인 숫줄을 잡고 여자와 이이들은 서쪽 암줄을 당겼는데, 결과는 늘 암줄이 이겼다고 한다. 이는 여자들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장치기는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활달하게 하기 위한 놀이였다

 

한 겨울의 움츠려든 몸을 푸는 장치기

 

장치기는 마상유희인 격구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정조대왕 당시 펴낸 <무예도보통지>의 무예 24기에도 마상무예 중 격구가 포함되어 있다. 격구는 고려조에 들어서 여자들도 즐겼으나, 너무나 요란한 치장으로 인해 중지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한 격구가 민간놀이로 변하게 된 것이 장치기라고 본다.

 

장치기는 간단하게 공을 몰고 다니는 이라는 나무막대와, 소나무공이나 짚을 이용해 만든 얼레공만 가지면 누구나 즐길 수가 있다. ‘얼레공치기라고도 부르는 장치기는 수원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3121일자 <동아일보>는 서탄면 황구지천에서 전국의 32개 남여 팀이 참가한, '전 조선 얼레공대회'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사보 124일자부터 30일자까지에는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얼레공대회를 개최한다는 예고가 실렸으며, 참가할 각 팀의 선수는 5명으로 한다고 하였다.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열기로 한 전조선얼레공대회에, 구경꾼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장소를 서탄면 황구지천으로 이동을 했다는 것이다. 예전 수원은 장치기를 재현시켜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 겨울동안 움츠려들었던 몸을 풀고, 봄을 맞이하여 농사를 지을 힘을 비축하기 위한 놀이로도 많이 이용을 한 것이 장치기였다.

 

액송기를 꽂은 줄을 강물에 띄워보내는 액송의식 

 

그 외에 사라진 놀이

 

정월 열나흘이 되면 마을의 공터에 달집을 세운다. 대나무와 솔가지, 짚을 이용해 쌓은 달집은 보름을 맞아 농사를 짓기 전에 해충을 없애는 기능을 갖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해동(解冬=겨울을 녹인다)’의 뜻이 더 깊다. 쥐불놀이와 함께 대보름을 맞이하기 전에, 모든 재액을 태워버린다는 속설을 갖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라는 짚단으로 만든 것을 손에 들고 있다가, 달이 뜨기를 기다려 제일먼저 달이 뜬 것을 본 사람이, ‘망월(望月)이여를 외치면서 달집으로 달려가 불을 붙인다. 달맞이를 할 때는 임산부인 여자가 먼저 보면 남자아이를 낳고, 병자가 먼저 보면 병이 완쾌된다고도 한다. 처녀가 먼저 보면 시집을 가고, 총각이 먼저 보면 장가를 간다고도 한다.

 

달집태우기(사진 / 이용창)

 

이렇게 다양한 우리들의 상원일의 놀이는 이 외에도 마을과 마을이 벌이는 횃불싸움이나, 수원의 여러 마을에서 나타났던 석전(石戰=돌싸움), 그리고 일 년 동안 건강한 몸과 다리를 튼튼하게 한다는 다리밟기 등 많은 놀이가 전해지고 있었다.

 

정월 보름날 아침에는 연에다가 서원을 적거나, 집안의 애환을 적어 날려 보내는 액연날리기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정월 대보름의 놀이들은 모두가 풍농과 풍어, 마을의 안녕, 가내의 안과태평 등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민족은 그 안에서 공동체를 창출했으며, 놀이를 하면서 이웃과 하나가 되는 우리라는 단단한 결속력을 다졌던 것이다.

 

그러나 작금에 들어 재현이 되는 많은 놀이들을 보면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는 사라진 채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전시성민속이 되어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민족의 상원일의 놀이는 단순한 연희가 아닌, 그 내면에 깊은 사고를 지닌 놀이였기 때문이다.

이제 며칠 후면 정월 대보름이 된다. 정월 대보름은 우리민족에게는 절기 이상의 의미가 있는 날이다. 정초부터 시작한 정월의 각종 놀이가 이 날로 인해 대부분 끝이 나기 때문이다.예전에는 정월달에 각 마을에서 지신밟기 등을 하다가 서로 이웃의 기를 만나게 되면 힘을 겨루는 '두레싸움'을 하고는 했다. '

 

두레'란 농촌에서 농사일을 함에 있어서, 공동으로 같은 연배의 구성원끼리 공동작업으로 노동력의 배가를 위한 공동체 조직이다. 예전에는 이 두레마다 풍물패와 두레를 상징하는 기가 있었는데, 대개는 '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쓰고 두레명칭을 적는다.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러 나갈 때는, 이 두레기를 앞장세우고 풍장을 치면서 이동을 한다.

 


 

두레에 농기는 늘 있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풍장이 꼭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 두레 성원들이 자신들의 농사일을 마치고나면, 공동으로 두레 성원이 아닌 집의 농사일을 해주고, 그 삯으로 받은 돈을 이용해 풍장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레조직은 마을마다 있었으며, 그 두레조직을 상징하는 두레기는 각별한 위함을 받는다.

 

두레조직의 상징 두레기

 

막고 밀치면서 서로 먼저 장목을 뺏는 두레싸움

서로가 기를 뺏기위해 밀치다가 넘어지기도. 보는 사람들도 난리다.


두레기는 두레조직이 이동을 할 때는 반드시 앞에 세운다. 이 두레기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만일 마을에 지체가 높은 양반이 살고 있으면, 그 마을의 두레기를 만나면 가를 숙여 먼저 인사를 하기도 한다. '안성 남사당'의 농기에는 옥관자를 달고 다녔다. 이는 바우덕이 패가 경복궁을 중수 할 때 참가를 하여, 많은 노역자를 위한 즐거움을 주었다고 해서 대원군이 특별히 옥관자를 내린 것이다.

 

안성 남사당의 기를 '옥관자 기'라고 불렀으며, 모든 기는 안성 남사당 기를 만나면 먼저 기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했다. 두레기는 농사일을 할 때는 논두렁에 꽂아 놓는다. 만일 이 기를 쓰러트리면 마을이 불상사가 생긴다고 하여, 여간 조심을 하지 않았다. 두레기를 함붕로 다루거나 눕힌다던가 하는 일도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정월 곳곳에서 벌어지는 두레싸움

 

심하게 서로가 몸을 부딪기 때문에 때로는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정월이 되면 각 마을마다 두레기를 앞세우고, 풍장을 치고 나간다. 지신밟기며 정월 보름을 기해서 하는 많은 민속놀이에는 풍장을 곁들이게 되고, 그 풍물패의 앞에는 두레기가 서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두레기를 앞세우고 길놀이를 하던 마을의 풍장패들이 서로 만나면, 먼저 상대방에게 길을 비키고 기수를 숙이라고 난리를 피운다.

 

길을 먼저 비켜주고 자신들의 기를 먼저 숙이며 상대방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한 치의 양보가 없다. 이렇게 승강이를 하다가 급기야는 상대방의 두레기에 달려들어, 두레기의 맨 위에 달린 꿩 장목을 뺏는다. 장목은 두레기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이 장목을 뺏기면, 큰 수치로 안다. 한번 꿩 장목을 뺏기면 그 해 일 년 동안은, 장목을 뺏어간 마을기에 먼저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한강 둔치에서 재현된 두레싸움

 

보는 이들은 생동감이 있다. 두레기의 맨 위에 달린 장목을 뺏기면 일 년동안 뺏어간 기에 먼저 인사를 해야한다.


두레싸움을 할 때는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한다. 그것은 서로가 상대방의 기에 달라붙어 기를 쓰러트려야 하기 때문이다. 막는 자와 뺏으려는 자가 한바탕 난리를 치다가 보면, 부상자가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월 27일 오후 여주 남한강 둔치에서 열린 대보름 한마당. 이곳에서는 군인들이 시범을 보인 두레싸움이 벌어졌다.

 

양편에 황룡기와 흑룡기가 서고, 그 앞에 각 마을 20명의 군인들이 서로 상대방 기에 꽂힌 장목을 뺏기 위해 두레싸움을 벌인 것이다. 젊은 군인들이라 서로 상대방의 기에 쫒아가고 막는 두레싸움은 보는 사람들조차 함성을 지르고 난리를 편다. 다칠 것을 염려해 손은 뒷짐을 지고 어깨로만 상대방을 밀고 들어가도록 했으나, 서로 부대가 달라서인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보는 사람들까지 열광케 한다.

 

기를 지키려고 막다가 내동댕이쳐지는 병사. 얼른 쫒아가 장목을 뺏어 승리를 하겠다고 달려가다가 제풀에 미끄러지는 병사. 거기다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두레기마저 도망을 가는 바람에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젊은 병사들이 보여 준 우리 전통 민속 한마당으로 인해, 대보름 한마당은 흥이 최고조에 달했다.

 

정월이 되면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두레싸움. 이제는 그러한 아름다운 놀이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전통은 구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하면서 발전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많은 공동체의 모체가 되었던 놀이들. 이제는 새롭게 조명이 되어야 할 때이다.

여주군 가남면 본두2리는 '해촌 조기울'이라고 부른다. 조기울이란 본두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조선조에는 조개울면 또는 소개국면이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 때 본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본두 1리는 묘촌 조기울, 본두 2리는 해촌 조기울이라고 부른다. 해촌 조기울은 일제 때에 농촌의 식량증진을 위해 마을마다 농촌진흥회를 만들었는데, 이 마을에는 중앙에 괴목인 해나무가 있어서, 해촌진흥회라 한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을 위한 오래된 대보름 의식

 

28일 오후에 길을 나서 본두2리를 찾아 나섰다. 매년 이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낙화(落火)놀이'라는 의식을 보기 위해서다. 길을 잘못 들어 몇 번을 주변을 돌아서야 겨우 도착을 한 조기울 마을. 낙화놀이를 하는 논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논을 가로질러 줄을 매어 놓고 그 곳에는 등이 달려 있다. 등을 달아 맨 줄에는 길게 순대처럼 생긴 것들이 달려 있는데, 그것들이 연신 불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낙화놀이는 마을의 제의식이다. 딴 곳에서는 산신제나 목신제, 장승제, 서낭제 등을 지내는 것처럼, 이 본두리 마을에서는 낙화놀이라는 특별한 놀이를 통하여 마을의 안녕과 건강을 빌었던 것이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을 제관으로 선출해, 불꽃이 떨어지는 곳에 제물을 차려놓고 가정의 안녕과 만복이 깃들기를 빈다. 이 낙화놀이는 영동고속도로가 마을을 가르고 지나면서 조기울 마을이 갈라진 후에는, 홀수 해에는 본두 1리에서 지내고, 짝수 해에는 본두 2리에서 의식을 거행한다.

 

 

 

마을에서 전해진 전통방법으로 만들어지는 낙화 

  

낙화와 등을 매단 줄을 흔들고 계신 본두리 마을 신동유(남, 77세) 노인회장은 이 대보름 의식이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설명을 한다.

 

"우리 평산 신씨가 이 마을에서 살아 온 것이 벌써 14대인데, 마을에 정착하면서 이 낙화의식이 전해졌다고 하니까 500년은 족히 넘은 전통이지."

"낙화놀이는 왜 시작을 했을까요?"

"예전에는 마을에 병원도 없고 하니까 병이 들면 큰일이지. 그래서 정월 대보름에 이렇게 낙화놀이를 해서 병이 걸리지 않고, 자식들이 잘 크게 해달라고 정성을 드리는 것인데, 지금은 예전 같지가 않아. 예전에는 대단했지."

"낙화는 어떻게 만드세요?"

"낙화는 집집마다 정성을 드리려고 만드는 것인데, 소나무 껍질을 말려 숯가루와 함께 곱게 빻은 다음, 메밀짚 잿물에 담갔다가 말린 창호지에 잘 싸서 만들지"

 

연신 줄을 당기시면서 말씀을 하시는 신동유옹. 이렇게 전해지는 마을의 전통 대보름 의식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집집마다 만드는 등과 낙화

 

논을 가로질러 걸린 줄에 매달린 등은 30여 개가 조금 넘었다. 그런데 등의 모습이 제각각이다. 마침 등을 매단 곳에 계신 주민들이 있어 내용을 들어보았다.

 

"등은 집집마다 만드시나요?"

"그럼요, 정성인데요. 집집마다 만들어서 등에다가 이름과 소원을 적어 걸어요. 그래서 등이 못 생겼잖아요."

"파는 등을 사다가 하셔도 될 텐데."

"정성이잖아요. 매년 이렇게 정성을 다해 만들어야 일 년 동안 집안이 편안해지죠."

"마을 주민 전체가 다 등을 만들어 거나요?"

"전에는 집집마다 걸었는데 요즈음은 빠지는 집이 많아요."

 


낙화는 불이 폭포처럼 떨어지기 때문에 붙인 명칭이다. 숯가루가 불에 타면서 아름답게 불꽃을 일으키며 아래로 떨어진다. 바람이라도 불면 그 불꽃이 날려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는 바람이 없어 아래로만 떨어져 내린다. 마을을 못 찾아 헤매는 동안 많은 불꽃은 다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아름답기만 하다.

 

길이 30 ~ 40cm, 굵기가 5cm 정도인 낙화에서 아름답게 떨어지는 불. 정월에는 불을 놓아 액을 방지한다. 달집태우기나 횃불놀이 등도 다 불로써 일 년의 액을 태운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 불로써 액을 막는 정월 대보름의 놀이를, '낙화놀이'라는 본두리 마을 특유의 의식으로 바꾼 것이다. 단지 액을 막는 것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함께 창출해 낸 조기울 낙화놀이는 또 다른 대보름의 아름다움이다.

 

"기자양반 우리 마을 소개 좀 잘해서, 많은 사람들이 낙화놀이를 보러 올 수 있도록 해줘. 이렇게 아름다운 놀이가 자꾸 사라지는 것이 아쉽잖아."

 

본두리 마을을 떠나는 기자에게 당부를 하시는 노인회장의 말씀이다. 밤새 그렇게 불꽃이 떨어진다는 조기울 낙화놀이. 정월 대보름 액막이의 특별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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