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공이 그릇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 것일까? 요즈음은 세라믹이라는 그릇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조금은 실용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우리의 전통 장작가마에서 불을 때 만든 도자기에 대한 진가를 모르는 듯도 하다. 세라믹이란 고온에서 구워만든 비금속 무기질의 고체들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생활자기라는 그릇들은 장작가마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며칠 휴가를 여주에서 보내면서, 찻사발과 다기를 만들고 있는 아우의 그릇만드는 과정을 볼 수가 있었다. 전에서 부터 자주 보아왔던 터라 신경을 쓰지 읺았는데, 며칠 눈여겨 보니 그 공정이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찌는 듯 더운 여름 날 불을 땐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진을 빼는 일인가도 느꼈다. 땀은 금방 옷을 적시고 어디든 흐를 수 있는 곳이라면 흘러내리는 데도 묵묵히 작업을 하는 아우.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형이 땀을 흘리는 것이 안스럽다고, 선풍기를 선뜻 갖다가 틀어주는 마음까지 갖고 있다. 바로 장인의 마음이다.

옷이 다 땀으로 젖었으면서도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여유는 무엇일까?

그 작업을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면, 이해를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 모습은 어느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불현듯 자기 일에 빠져 이 찌는 듯한 더위에 땀으로 목욕을 하면서도 일을 하고 있는, 저리 멋진 모습 하나를 안 남겨놓으면 두고두고 후회 할 것만 같다.

"형은 하이에나 같아요"

"무슨 말이야"
"글 소재가 된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덤벼드니,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죠"
"직업이 그래서 그런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은 아우의 그 모습이 그리 아름답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지우재'라는 아주 오래 묵은 한옥의 전시관을 갖고 있는 아우는, 미술을 전공했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로 내려와 벌써 17년이 지난 세월을 도자기와 씨름을 하고 있다. 고집스럼게 장작가마에서 불을 때기 때문에, 한번 가마에 불을 붙일 때마다 적지 않은 경비가 들어간다.   

아우의 작업하는 과정을 대충 사진으로 넘겨보자. 물론 이 작업이 다는 아니다. 아니 그 전 과정의 극히 일부분에 해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작업의 과정에서 흘리는 땀의 의미는 충분히 알 수 있을 듯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는 것일까?


도자기를 빚을 점토가 보인다. 흙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요즈음은 그나마 조금 나아진 것이 예전처럼 흙을 거르고 발로 밟지를 않는다. 


물레질을 하고나서 남은 흙이다. 하나하나 물레질을 하고 그것을 그릇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한다. 
 

모형이 완성되면 그것을 말리는 공정을 거친다. 그것이 말라야 초볼구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벌구이는 대개 1,000도 정도의 불에서 구원낸다.

초벌구이는 전 과정의 20% 정도  

초벌구이를 마치면 그릇 하나씩을 일일이 손질을 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한다. 유약을 묻혀 바람에 말린다음 다시 두벌구이를 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모두 세번을 구워내는 도자기의 공정은 불을 땔 때도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야 그릇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는 도자기. 그 공정에서 흘리는 땀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감히 잡히지가 않는다.


초벌구이를 한 찻그릇을 꺼내 정리를 하는 아우의 등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하나하나 다듬고 닦아내면서 땀을 닦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만큼 작업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릇을 바라보는 눈빛이 다르다. 그 하나하나에 들이는 정성은 자식을 키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초벌구이를 하고나서도 몇 번의 공정이 더 기다리고 있다. 땀을 흘리면서 그 땀으로 빚어지는 것이 도자기라고 한다. 그래서 생명을 얻게되는 것일까?

아우의 아픔이 널려있는 가마

초벌구이를 한 그릇을 손질하는 아우를 두고 가마로 향한다. 가마 주변에는 아우의 아픔이 널려있다. 땀과 불, 바람과 흙이 어우러져야 만들어진다는 도자기. 그러나 1,000도가 넘는 가마 안에서 생성되는 그릇을 알 수는 없다. 불을 끄고 하루, 이틀이 지나 가마 안에서 끄집어 내기 전에는 누구도 모른다. 그 속에서 잘못된 그릇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바로 아우의 아픔이다.
 





수없이 많은 땀을 흘리고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는 표현으로 대신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있기 까지에는 장인의 고통이 함께 한다는 것을 모른다. 나 역시 며칠간 아우와 함께 편하게 휴가를 보내면서 새삼 느낀 것이니 말이다. 아우에게서 받은 마음의 선물인 도자 몇 점.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남다를 의미를 가진 그릇이 되었다.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251 - 12에 자리한 필경사. 충남지정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이 된 이 집은,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상록수의 저자 심훈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필경사는 심훈(1901~1936)이 서울에서 내려와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다. 심훈은 이 집을 1934년에 직접 설계하여 짓고, 필경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필경사란 이름은 1930년 선생이 ‘그날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다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내지 못했는데, 그 시집 원고 중에 있는 <필경>이란 제목을 딴 것이라고 한다. 심훈은 민족의식과 계급적 저항의식을 지닌 소설가이자, 시인, 영화인으로 필경사에서 1935년 농촌 계몽운동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록수』를 썼다.

심훈선생이 소살 상록수를 집필한 당진 필경사

농촌계몽을 하기 위한 노력

심훈의 본관은 청송이며 본명은 대섭이다. 어릴 적에는 ‘삼준’이나 ‘삼보’로 불렸으며, 호는 해풍(海風)이다. 심훈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퇴학을 당하여 1920년부터 3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망명기간 중에는 베이징, 상하이, 난징[南京]에서 활동을 했다. 이 기간 동안 항저우에 있는 지강(=즈강)대학에 입학을 했다. 귀국을 한 후 연극을 하던 심훈은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1931년에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와 창작활동에 힘을 쏟았다. 1935년에는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 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록수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당시 부곡리에는 경성농업학교 출신인 조카 심재영이 주동하는 <공동경작회> 회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그때의 생활을 소재로 한 장편이 바로 ‘상록수’였다. 당시의 상록수는 동아일보에 1935. 9. 10 ~ 1936. 2. 15까지 연재가 되었다.

상록수는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한 한국농촌의 참상을 보여주고, 농촌계몽운동을 실천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심훈의 뒤를 이어 필경사에서 생활을 하던 조카 심재영은 상록수의 남자 주인공인 동혁의 모델이기도 하다.



필경사 경내의 전시관과 '그날이 오면' 시비 심훈선생 상

「상록수에서 영신과 동혁은 신문사 주최의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학업을 마치고 동혁은 한곡리로, 영신은 청석골로 내려가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한다.
 
동혁은 ‘농우회’를 조직하고 회관 건립과 마을 개량 사업을 추진하나, 지주인 강도사의 아들 강기천과 당국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는다. 한편 청석골로 내려간 채영신도 예배당을 빌려서 농촌 아이들에게 한글 강습을 실시하는 한편, 기부금을 모아 새 건물을 지을 계획을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괴로워한다. 갖은 어려움 끝에 영신은 과로와 맹장염으로 학원 낙성식 날 졸도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동혁이 영신에게 문병을 와 있는 동안 강기천은 농우회원을 매수하여 명칭을 진흥회로 바꾸고 회장이 된다.

이에 분노한 동혁의 동생이 회관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자, 동혁이 대신 수감된다. 출옥한 동혁이 청석골로 갔을 때 영신은 이미 죽어 있었다. 동혁은 영신을 장례지내고 산을 내려오면서 상록수들을 보며 농촌을 위해 평생 몸 바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상록수는 끝을 맺는다.」


한진항과 한진 앞바다. 멀리 서해대교가 보인다.

그동안 몇 번인가 찾아갔던 필경사였다. 오랜만에 들린 필경사는 낯설게만 느껴진다. 처음으로 필경사를 찾은 것은 1995년 인가였다. 그 당시에는 심훈의 조카인 상록수의 모델인 심재영 옹이 묵고 있었기 때문에 따듯한 온기가 있었는데, 그런 온기가 사라졌기 때문인가 보다. 당시에 심재영 옹에게서 상록수가 만들어진 배경과, 심훈선생이 한진항을 통하여 인천으로 오가며 집필을 했던 이야기 등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민족의식이 남달리 강한 심훈선생은 농촌계몽운동을 벌여, 농촌이 잘 살고 농민들이 배워야한다고 늘 주장을 폈다고 한다.

“선생님은 늘 우리 농촌이 먼저 잘 살아야 한다고 역설을 하셨죠. 농민들이 먼저 잘 살지 않으면 민심이 바로 설 수가 없고, 그러면 나라가 바로 설 수가 없다는 것이죠”

생전에 심재영 옹이 하신 말씀이다. 어디 농민들뿐이랴, 서민들이 마음 편하게 두 다리를 뻗고 잘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바로 선 나라가 아닐까? 어디를 가나 주변이 바뀌면서 예전의 정감어린 모습이 자꾸 변해가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처음 필경사를 찾았을 때는 뒤편이 숲으로 뒤덮여 운치가 있었다. 마루방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심재영 옹과 담소를 나눌 때도 그윽한 차향과 함께 숲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정리를 한다고 말끔해진 주변이 오히려 낯이 설다. 방안에 있는 때 묻은 고가구나 여기저기 걸린 소품들도 딱히 정겹지가 않다. 그저 처음 본디 모습 그대로가 때로는 더 정겨울 수도 있는데. 저 멀리 한진항 앞에 정박한 고깃배들이 일몰직전 한가롭게 조는 모습이, 그저 무슨 또 다른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하다.


문수스님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소식을 접한 것은 5월 31일 오후 4시께였다.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밤 10시 쯤 전주를 출발해 군위 삼성병원에 도착한 것은 6월 1일 새벽 한 시께. 스님 몇 분과 신도 몇 사람이 빈소를 지키고 있다.

 

스님을 처음 뵌 것은 아마 한 15년 전인가 보다. 항상 말씀이 없으시고 과묵하신 스님은, 언제나 뵐 때마다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는 하셨다. 그렇게 강직하던 분이셨는데, 이렇게 빈청에 마련된 영정을 보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지금이라도 '세상은 그저 강직하게 살아야만 해요. 세상에 나왔으면 할 일은 하고 가야지'라고 말씀을 하실 것만 같다.

 

문수 스님, 지난해부터 많은 고민 해와

 

"스님께서는 지난해부터 말이 없어지셨어요. 원래 과묵하신 분이신데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깊은 생각만 하고 계셨습니다. 3년 전부터는 공양도 하루에 한 끼 밖에는 들지 않으시고요.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죄스럽다고 하시면서. 어제까지도 저와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소신공양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문수 스님과 지보사에서 함께 생활을 해 오셨다는 스님의 이야기다. 부여에서 먼 길을 달려오신 한 도반스님은,        

 

"문수 스님은 말씀이 없으신 분이죠. 그래도 가끔은 농담조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스님이 되어서 법랍 30년이면 살기가 편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날이 갈수록 어렵다고 하셨죠.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치던 것이 이제는 발걸음 하나도 마음대로 뗄 수가 없다고요. 발 밑에 개미라도 한 마리 있으면 어쩌느냐는 것이죠. 그리고 지난해 부터는 4대강 개발을 두고 많이 고민을 하셨습니다. 스님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처럼 싸울 수도 없고, 차라리 한 몸을 불살라 소신공양이라도 하고 싶다고요."

 

▲ 유서 문수스님이 자필로 쓴 유서. 4대강 개발 중지와 부정부패 척결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아마 스님께서는 이미 작정을 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강직한 성격 탓에 불의와는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스님이셨다. 언제나 말을 앞세우는 것을 싫어하시던 그 마음이 소신공양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하셨나보다.

 

서민들의 고통을 멈출 수만 있다면

 

"스님의 또 한 가지 고민은 바로 서민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국가가 정책을 잘 펴서 없는 사람들이 편해야 하는데, 어떻게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느냐고 늘 노엽게 생각하셨죠. 소신공양 이야기 하실 때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신다'고 했는데도, 결국 이렇게 소신공양으로 세상을 떠나셨네요. 스님의 소신공양은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스님이 자필로 쓴 유서에는 4대강 개발 중지와 부정부패의 척결 그리고 서민생활을 위한 정책을 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친필로 쓴 유서는 수첩에다가 쓴 것이다. 그리고 스님이 평소 입으시던 삼베 법복에도 유서와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늘 강직하시던 문수 스님. 오늘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군위 삼성병원 문수 스님의 빈소에서 말을 잃었다. 그저 하릴없이 스님의 영정만 바라보고 있는데 한 남자분이 이야기를 한다.

 

▲ 법복에 쓴 유서 명주로 지은 법복에 쓴 유서.

 

"문수스님의 법구를 보고 놀랐습니다. 스님의 법력이 대단하시다고 느꼈죠. 사람이나 짐승이나 불에 타면 신체가 오그라드는데, 스님께서는 일자로 꼿꼿이 숨지셨습니다. 가슴께로 두 손을 모으신 채로요. 몸이 타는데도 정신을 잃지 않으셨다는 것이죠."

 

이야기를 들으면서 억장이 미어지는 듯하다. 4대강은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지만, 그 많은 생명들은 다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시던 문수 스님. 소신공양으로 인해 스님의 그 큰 뜻이 이루어질 수만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6, 1)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청소를 하는 사람. '환경미화원'이라고 부르지만, 쉽게 이야기를 하면 청소부다. 새벽 2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손에서 빗자루가 놓이지를 않는다. 잠시 쉬는 시간에는 제대로 분리가 안 된 재활용품을, 종류별로 분리하는 손길이 바쁘다. 여주군청 소속 환경미화원 김기성(45, 남)씨. 눈이 잔뜩 쌓인 쓰레기봉투를 들어다가 수레에 싣기 바쁘다.

 

눈이 오면 힘들어요

 

눈이 오는 날이면 딴 때보다 더 바쁘다고 한다. 눈을 치우랴 밀린 쓰레기도 정리하랴,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눈이 오면 시장 중앙통을 다 치워주어야 하는데, 정말 힘들어요."

"시장 사람들이 치우지 않나요."

"눈을 쓸어내기는 하지만 쌓인 것은 우리들이 치워야 하거든요"

"몇 시서부터 시작을 하나요?"

"새벽 두 시부터 나와야 해요"

 

하루에 15시간 반을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금방 쓰레기가 쌓인다니, 쓰레기가 어지간히 많이도 나오는가 보다. 하기야 시장통의 쓰레기니 주택가보다는 많을 것이다.

 

"군청 앞 중앙통 눈도 치워야 하고 시장통도 치워야 하는데, 남들은 눈이 와서 좋을 줄 몰라도 저희들은 정말 싫어요."

"그렇겠네요."

"남들이 즐거울 때 저희들은 하루 종일 그것을 치워야하니, 그것도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죠"

 

요즈음은 나름대로 자부심도 가져

 

▲ 쓰레기 치우기 수레가득 쓰레기봉투를 싣고 있는 김기성씨

 

환경미화원을 하기 전에는 양평 양수리에서 목욕탕에 근무를 했다고 하는 김기성씨. 그러나 힘이 들어도 요즈음이 한결 좋아졌다고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쉴 수가 있으니, 자신의 시간도 생겼다는 것.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름대로 일정한 수입이 생겨 생활을 하는 데는 안정적인 것이 가장 행복하단다.

 

"요즈음은 환경미화원의 인기가 높아요. 많이들 하는 이야기지만 정말로 채용공고가 나면,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도 많이 오고요."

"시험이 어렵나요?"

"모래주머니를 들고 운동장 돌기 등 나름대로 어렵죠."

 

그래서 늘 새벽에 일어나 집을 나설 때는 조금은 귀찮기도 하지만, 수입이 안정이 되니 그것이 제일 좋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연신 쓰레기봉투를 수레에 싣느라 힘을 쓴다. 일을 하는 것을 자세히 보니 몸이 조금은 불편한 듯도 하다. 그래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한다고 주변 사람들은 이야기를 한다.

 

분리수거 좀 잘했으면

 

▲ 쓰레기 치우기 눈이 쌓여 물이 흐르는 쓰레기봉투를 옮기는 김기성씨

 

일을 하면서 힘든 점은 없느냐고 물으니, 힘이야 들지만 자신의 직업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릴 때 재활용품을 제대로 분리를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내다 놓을 때 분리가 제대로 되어 있으면, 이중으로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잖아요."

"분리수거가 제대로 안 되나요?"

"예, 깡통은 깡통대로 병은 병대로 해주면 좋은데, 그저 한꺼번에 봉지에 넣어서 내다놓기가 일쑤죠. 그럼 결국 또 한 번 분리를 해야 하거든요."

 

아무 생각 없이 분리를 해놓지 않고 내다 놓는 사람들로 인해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에 시간을 뺏기게 되면, 그만큼 쓰레기를 치우는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단다. 결국 그 피해는 분리수거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이고.

 

"눈이 또 오는데 힘드시겠네요?"

"늘 힘이야 들지만 즐겁게 일을 합니다."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연기를 내뿜는 김기성씨의 표정에는 행복함이 배어있다. 큼지막한 쓰레기봉투를 안아 수레에 가득 쌓으면서도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을 하든지, 자신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눈이 그만 그쳤으면 좋겠다. 날 추운 날 물기가 묻은 쓰레기봉투를 옮기느라 옷이 젖지 않도록.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11)


2월 5일, 며칠 안남은 설 대목을 준비하고 있는 여주 5일장.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장을 찾았다. 아무래도 설이 10여 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꼭 장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저것 알아보려는 사람들로 더욱 붐빈다. 양평, 이천 등 가까운 곳에서 온 사람들까지, 모처럼 활기를 띠는 여주장이다.

 

여주 전통 5일장은 경기도에서는 성남 모란장 다음으로 큰 장으로 손꼽힌다. 5일장 날이 되면 장 주변의 주차장은 물론, 인도에까지 난전이 서는 바람에 통행이 조금은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5일장의 북적이는 재미 중의 하나이다. 고함치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심지어는 작은 스피커까지 들고 나온 판이니 소음도 만만치가 않지만, 사람들은 그런 북적임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하다.

 

5일장의 아름다운 부부장꾼

 

▲ 족발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족발이 군침을 돌게한다. 두 사람의 정성이 있어서 인지, 더욱 맛이 좋다고 한다.
 

 

여주 5일장 한 복판에 족발을 파는 난전이 있다. 두 사람의 남녀가 열심히 족발을 썰고, 그릇에 담아낸다. 벌써 여주 장에서만 3년 넘게 한 자리에서 족발을 팔고 있는 오재현(남, 46세), 방영심(여, 42세) 부부. 여주 5일장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이들 부부의 금슬을 늘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했죠, 누구나 다 그런 실패 한 번쯤은 하는 것 아닙니까? 그대로 무너질 수가 없어서, 족발 장사를 시작을 한 것이 벌써 6년째네요. 여주 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것은 올해로 3년이 되었고요."

 

말을 하면서도 연신 족발 썰기를 멈추지 않는 오재현씨.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부부가 함께 장에 나와 장사를 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여주 장을 돌아다니면서 몇 번을 보았지만,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저 늘 웃는 모습으로 손님들을 대한다.

 

"5일장을 돌면서 보면 지난해보다 많이 힘들다는 것을 피부로 느껴져요. 하지만 열심히 하다가보면, 그 또한 힘이 들어도 보람이 있으니까요. 5일장을 돌면서 하루 종일 서 있다는 것이 여간 힘이 들지가 않아요. 그래서 4일은 장을 돌고, 하루는 쉬고 있죠. 그렇지 않으면 체력이 달려서 할 수가 없어요."

 

네 곳의 장을 돌고, 하루는 쉬어

 

▲ 썰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연신 족발을 썰고 있다.

▲ 족발 여주장이 다니는 5일장 중에서 단골이 가장 많다고 한다.


오재현씨 부부는 여주 5일장을 비롯해, 충북 단양의 매포장, 충남 천안의 성환장, 그리고 충북 괴산 등 4곳의 5일 장에서 장사를 한단다. 현재 충주에 거주하면서 이 네 곳을 4일 동안 돌고, 하루를 쉬어 다시 장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하루에 70 ~ 80개 정도를 파는데, 하루 종일 쉴 수가 없어요. 다음 장은 대목장이라 아무래도 수량을 좀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요즈음은 그래도 단골이 많이 생겨서 많이 좋아진 편이죠"

 

주변의 상인들은 이들 두 사람의 부부가 정말 열심히 산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부부가 다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저는 네 곳을 모두 돌지는 못해요. 집안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여주장과 괴산장만 돌고, 매포와 성환은 장이 좀 작다보니 아이들 아빠가 혼자 다녀요."

 

그렇게 혼자 남편을 장으로 보내고 나면, 늘 마음이 편치가 않다고 한다. 남편이 썰어 놓은 족발을 포장을 하면서 방영심씨가 하는 말이다. 힘이 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힘이 들기는 하지만 같이 다니니 오히려 즐겁다고 웃음을 짓는다. 언제나 손님이 오면 웃음으로 대하기 때문에, 5일장을 함께 나오는 장꾼 중에서는 소문이 자자하다.

 

5일장의 장꾼들은 끈끈한 정이 있어

 

▲ 대담 장사를 마칠 시간이 오후 7시. 오재현, 방영심 부부와 대담을 하는 기자.

 

"5일장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끼리 모이고 있어요. 이렇게 난전을 하고 있지만, 이분들과 만나면 오히려 점포를 지니고 계신 분들보다 더 정이 깊어요. 아무래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힘이 들어 더욱 정을 느끼는 것 같아요."

 

주변의 난전을 하는 상인들과 속 깊은 우대관계를 갖고 있다는 오재현씨. 그래서 장에 나온다는 것이 단지 물건을 팔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함께 장사를 하는 분들이 보이지를 않으면, 내색은 하지 않아도 걱정이 많이 된다고 한다.

 

"저 부부를 보면 참 부지런도 하지만, 어째 저렇게 금슬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3년 넘게 보아왔지만 힘이 들기도 할 텐데, 한 번도 낯을 붉히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우리 5일장의 보배죠."

 

장마다 나온다는 한 할머니의 칭찬이다. 앞으로 이 부부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모처럼 여주 5일장에서 아름다운 부부를 만나,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 역시 웃으면서 산다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고, 주변이 모든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 같다. 오후 7시가 넘어 어둠이 깔린 장터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아름디운 부부.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 아름다운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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