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나 천연기념물 등을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일 년에도 한두 번 정도 만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지나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들려 자세하게 살펴보고는 한다. 이런 버릇은 언젠가 문화재가 갑자기 심하게 훼손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난 뒤부터이다. 그 다음부터 지나는 길에 문화재가 있으면 일부로라도 들려보고는 한다.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11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381호 반룡송. 신라 말 도선이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이다. 도선스님은 이천 백사면 도립리와 함께 함흥, 서울, 강원도, 계룡산에서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면서,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중 한 그루라고 한다. 영험한 나무로 전해지는 반룡송은 이 나무의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늘로 오르고 싶은 나무

 

반룡송은 이천 백사면 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약 1.7㎞ 떨어진 도립리 어산마을에서 자라고 있다. 이 나무를 반룡송이라는 부르는 이유는,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는 일 만년 이상 살아갈 ‘용송(龍松)’이라 하여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부른다.

 

 

 

반룡송의 높이는 4.25m, 가슴높이의 둘레는 1.83m이다. 높이 2m 정도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갈라져 넓게 퍼져 있으며, 하늘을 향한 가지는 마치 용트림하듯 기묘한 모습으로 비틀리면서 180°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용송이란 이름이 걸맞다는 생각을 한다. 한 가지는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나무이면서도 두 나무인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한편에 늘어진 가지는 땅에 끌릴 듯 휘어져 있다. 4월 26일 찾아간 반룡송. 벌써 6~7 차례난 만난 반룡송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으면서, 하늘을 향해 승천을 할 날을 기다리는가 보다.

 

 

 

 

많은 전설을 간직한 신비한 나무

 

이 반룡송에 전하는 이야기는 많다. 그만큼 인근마을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나무로 대우를 받고 있다.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거나, 반룡송 밑에 떨어진 솔잎을 긁어다가 땠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는 이야기 등이다. 반룡송은 그만큼 신비한 나무로 알려져 있어,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특히 반룡송의 나무 표피가 붉은 색을 띠우고 있어서, 이 표피를 마을에서는 ‘용비늘’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그 비늘을 건드리는 것도 화를 불러오는 짓이라고 하여, 가급적 나무 근처에서 나무에게 해를 입힐 만한 일들은 하지 않는다.

 

 

 

 

반룡송은 현재 이천 9경중에서 제6경으로 꼽히고 있다. 도선스님은 통일신라시대 승려로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에 태어나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 도선스님이 심었다고 한다면, 이 반룡송의 수령은 이미 1,100년 이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오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아직 푸른 기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반룡송. 아마 앞으로 만년을 살아 만년송으로의 이름을 갖기를 바란다. 혹 그 이전에 정말 승천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괜한 생각을 해본다. 반룡송을 뒤로하며 돌아본 나무 위로 봄날의 늦은 햇살이 아른거린다.

겨울에 가장 만나고 싶은 문화재들은 역시 천연기념물이다. 아무리 날이 춥다고 해도, 소나무 종류의 천연기념물들은 언제나 그 푸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이 춥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서인가 움직임이 영 둔하다. 이런 날 가만히 집안에만 있자면 갑갑증이 인다. 가까운 곳이라도 답사를 할 작정으로 길을 나섰다. 여주에서 이포대교를 지나 이천으로 가다 보면, 우측으로 '산수유마을'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천 백사면의 산수유마을은 수도권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한 곳이다. 봄이 되면 많은 인파가 노랗게 핀 산수유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다. 아마도 이제 머지않아 이 마을은 또 한 번 홍역을 치루어야 할 것만 같다.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백사면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는 산수유 마을로 들어가다가 보면, 좌측 밭 가운데 키가 낮은 소나무 한 그루가 옆으로 넓게 퍼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승천하고 싶은 소나무인가?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81호 반룡송. '반룡송(蟠龍松)'은 하늘을 오르기 전,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소나무를 일 만년 이상 살아갈 용송이라 하여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부른단다.

 

가까이 다가서 본다. 중앙에 본 가지가 있고, 그 위로 환상적인 가지들이 용틀임을 하고 있다. 180° 로 둥글게 말아가면서 퍼져나간 가지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을 할 것만 같다. 신라 말 도선스님이 함흥, 서울, 강원도, 계룡산과 이천 도립리에서 큰 인물이 날 것이라며 심었다고 한다. 마을에 전해지는 반룡송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거나, 반룡송 밑에 떨어진 솔잎을 긁어다가 땠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는 이야기 등이다. 반룡송은 그만큼 신비한 나무로 알려져 있어,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특히 나무의 표피가 붉은 색을 띠우고 있어서, 이 표피를 마을에서는 용비늘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그 비늘을 건드리는 것도 화를 불러오는 짓이라고.

 

신비함을 가득 담아낸 수령 1,100년이 지난 소나무

 

높이 4.25m, 가슴높이 둘레는 1.83m다. 높이 2m 정도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갈라졌다. 땅속에 묻혀 자란 또 다른 가지는 흡사 중앙에 머리를 둔, 꼬리처럼 보이기도 해 신비감을 더한다. 이 꼬리부분이 있어서 반룡송이 하늘로 승천을 해 버릴 것만 같다. 얼핏 보아도 단순한 소나무이기보다는, 무엇인가 신비한 힘을 가진 특별함이 있다.

 

 

찬 날씨도 잊어버리고 몇 번이고 주위를 돈다. 저녁 햇볕이 가지 틈 사이로 들어오니, 솔잎들이 황금빛으로 변한다. 그래서 일몰 전에 반룡송을 보면 승천을 하는 용을 볼 수 있다고 했는지. 금방이라도 햇볕 사이로 승천을 할 듯한 모습이다.

 

현재 이천 9경중에서 제6경으로 꼽는 백사 도립리의 반룡송. 도선스님은 통일신라시대 승려로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에 태어나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렇다면 이 반룡송의 수령은 이미 1100년 이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숱한 세월을 이곳을 지켜 온 반룡송. 앞으로 용송으로 만년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돌아보다가 보니 여기저기 마른 나뭇잎들이 보인다. 나이가 먹어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는 것인지, 아니면 생육상태가 나빠진 것인지 걱정스럽다. 반룡송을 떠나기 전, 돌아서면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아 승천을 할 것만 같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본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이 앞을 흐르는 남한강 상류의 푸른 물, 그리고 그 안에 냇돌을 지나 만나게 되는 소나무 숲. 우리가 흔히 ‘청령포’라고 하는 곳이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에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이 되었다. 숙부에게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상왕이 되었던 어린 조카 단종.

조선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물론 기록에는 양위라고 되어있겠지만 말이다. 그 후 1446년 성삼문,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격하되어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상류로 오르다가 이포에서 배를 내린다. 그리고 육로로 여주의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후, 고달사지를 지나 문막,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가 되었다.

오직 뱃길만이 접근이 가능한 ‘청령포’와 ‘관음송’

청령포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다. 삼면이 남한강 물줄기가 휘돌아드는 곳이며 물살이 거센 곳이다.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접근을 할 수도 없다, 그 어느 곳으로도 밖으로 출입을 할 수가 없는 곳이다. 마치 섬과 같은 이곳 청령포에는 단종의 슬픈 역사를 지켜 본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어수정'은 현재 골프장 안에 있다. 이 어수정은 단종이 유배를 가다가 목을 축였다는 곳이다


관음송(觀音松), 이 나무는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그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와는 많이 다르다. 수령이 600여년이나 되었다는 이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30m, 가슴높이 둘레가 5.2m 정도에, 가지 길이는 동·서쪽이 22m, 남·북쪽이 19.5m 정도이다.

단종은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후 이 고달사지를 지나 여주군 북내면으로 들어선다. 이곳에는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유배길에 오른 단종이 쉬어갔다는 바위와 '노림'이라고 부르는 숲이 있다. 일설에는 단종이 흥원창까지 갔다고도 하나, 여주지역의 많은 지명에서 여주를 거쳐 갔음을 알 수 있다 

 

지상에서 1.6m 정도 되는 곳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는, 단종이 유배시절 이 갈라진 곳에 앉아 소일을 했다는 것이다. 관음이라는 말도 단종과 연관이 있다. 즉 단종의 '슬픈 유배생활을 보았으며(=觀),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音)'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소리를 들은 것일까? 아니다, 그 구슬픈 소리는 이야기가 아닌 단종의 슬픈 울음이었을 것이다.

단종 임금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무엇을 했을까? 때로는 서북의 한양을 바라보고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짓기도 했을 테고, 때로는 동쪽의 흐르는 강물을 바라다보면서 이 좁은 곳에서 나가고도 싶었을 것이다. 어린 단종임금은 아마 어디를 보나 자신의 처지가 슬퍼 울음으로 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 슬픔을 묵묵히 바라다보며 함께 한 소나무는 그 후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껍질이 검게 변했다고 한다. 그리움에 속이 타버린 단종의 마음이 전해져 나라걱정을 하는가 보다.

단종이 이 갈라진 소나무에 앉아 슬피 울었다고. 이 나무는 단종의 이야기 소리를 보고 들었다고 하여 관음송이라고 하지만, 이야기가 아닌 울음소리 였을 것이다.


임은 떠나고 세월만 남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관음송을 보기 위해, 청령포를 찾아 영월 땅에 들어설 때마다 비가 내렸다. 세 번이나 찾았지만 그 때마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청령포를 들어가질 못했다. 아마 영월이라는 곳이 단종임금의 슬픈 사연이 많은 곳이다 보니, 갈 때마다 눈물이 되었는가 보다.

네 번째 찾았을 때 비로소 관음송을 볼 수 있었다. 주변에 나무들보다 유난히 높게 자란 관음송. 가지는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갈라진 나무줄기 위에 잔가지들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굴곡이 졌다. 마치 단종임금을 위로하기 위해, 나무가 스스로 춤을 추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이곳 고도와 같은 청령포에서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단종을 위해 관음송 스스로 춤을 추지는 않았을까?



그 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연신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은 저렇게 모든 것을 다 잊고 살아가는데. 관음송 한 그루만이 그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인지. 단종을 위로하느라 추던 춤을, 오늘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9월 4일, 전북 고창군 지역을 답사하는 날은 이상하게 나무만 둘러본 날이었다. 아마도 하루에 수령이 꽤 오랜 나무들을, 10여 그루는 보았을 것이다. 그 중 한 그루가 바로 고창군 대산면 중산리 313-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183호인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이다.

‘이팝나무’란 이름은 ‘이밥’ 즉 ‘쌀밥'과 같은 꽃이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즉 꽃이 필 때 나무 전체가 하얀 꽃으로 뒤덮이는 것이, 마치 쌀밥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설에는 여름이 시작될 때인 입하에,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立夏木)’이라 부르다가 이팝나무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천연기념물 이팝나무 중 작은 중산리 이팝나무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는 마을을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 넓은 공원과 같이 곳이 있고, 마을 입구 쪽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는 나무들을 심어놓았는데, 그 가운데는 작은 이팝나무들이 보인다. 중산리 이팝나무는 수령이 약 250살 정도로 보이며, 나무의 높이는 10.5m 정도에, 가슴높이의 둘레는 2.7m 정도이다.

중산리는 마을을 들어서는 도로보다 낮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그 중산리 마을 앞의 낮은 지대에 단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나무의 모습은 가지가 고루 퍼져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먼지 등으로 나무의 생육상태는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중산리 이팝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들 가운데, 작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저 나무에는 전설이 없어. 우리도 안타까워’

현재 우리나라에는 7그루 정도의 이팝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지방 기념물 6그루를 합해, 모두 13그루가 보호를 받고 있다. 이 이팝나무들 중에는 마을에서 전해지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36호인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85호인 김해 신천리 이팝나무는 한쪽 가지가 길 건너 우물을 덮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우물을 보호한다고 믿는다. 이런 이유로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2월 말에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리는데, 이곳의 말로 ‘용왕(龍王) 먹인다’라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214호인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는 모구 7그루가 지정이 되어있는데, 마령초등학교 담장 곁에 서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팝나무를 ‘이암나무’ 또는 ‘뻣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팝나무가 모여 자라는 곳은, 어린 아이의 시체를 묻었던 곳이라 하여 ‘아기사리’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이 오래된 나무들은 대개 그 마을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산리 이팝나무에는 그 어떤 전설도 전하지가 않는다. 마을 앞 정자에서 쉬고 계시는 어르신들께 중산리 이팝나무에 전해지는 어떤 이야기가 없는지, 말씀을 드려보았다.

“저 나무에는 아무런 전설도 없어”
“대개 천연기념물에는 무슨 전설 등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말여. 우리도 저 나무에 무슨 이야기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런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어. 우리들도 참 안타깝지”
“저 작은 나무들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가요?”
“글쎄, 사람들은 저 큰 나무 자식이라고 하는데, 딴 곳에서 갖다 심은 것 같아”

그 외의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가 없었다. 천연기념물을 만나 무엇인가 잔뜩 기대를 걸었는데, 아무런 이야기 하나 못 건지는 이런 날은 맥이 풀린다.


우리나라의 크고 오래된 이팝나무는 꽃이 많이 피고 적게 피는 것으로, 그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팝나무는 물이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에, 비의 양이 적당하면 꽃이 활짝 피고 부족하면 잘 피지 못한다. 벼농사를 지을 때는 강수가 필요하므로 이팝나무의 생육에 따라 풍, 흉년을 미리 점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마을 어르신들조차 전설 하나 간직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중산리 이팝나무. 그러나 그 나무의 학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면, 그만해도 마을의 자랑이 아닐까? 중산리를 떠나면서 나무가 오래도록 잘 자라기만을 기원한다.

답사를 하면서 만나는 많은 나무들. 그 중에는 천연기념물도 있고, 지방에서 지정된 기념물도 있다. 그런가하면 보호수도 있고, 아예 아무런 지정도 받지 못한 나무도 있다. 아직 나도 그 지정의 가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왜 천연기념물과 기념물로 나누이는지, 수령이 오랜데도 지정을 받지 못하는 것인지 등은 늘 궁금하다.

천연기념물이란 자연 가운데 학술, 자연사, 지리학적으로 중요하거나, 그것이 가진 희귀성, 고유성, 심미성 때문에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여 법률로 규정한 개체 창조물이나 특이 현상, 또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정한 구역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천연기념물 중에는 식물을 주체로 하는 것이 가장 많으며, 노거수가 124건으로 1그루씩 지정된 것이 대부분이다.


수많은 수종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종(樹種)으로는 은행나무가 가장 많은 19건이다. 이어 소나무종류가 처진소나무와 반송을 합해 18건이지만, 곰솔까지 포함을 한다면 24건으로 가장 많다. 그만큼 다양한 소나무가 지정을 받았다. 다음으로 느티나무 종류가 12건 등이며, 백송과 이팝나무, 향나무가 각 8건 정도이다.

귀한 몸으로 지정을 받은 나무의 종류는 다양하다. 회화나무와 털왕버들을 포함한 왕버들류, 비자나무, 푸조나무, 후박나무, 옴나무, 탱자나무, 팽나무, 망개나무, 측백, 갈참나무, 회향목, 올벗나무 등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외에도 특별한 것으로는 송악, 소태나무, 등나무, 배롱나무, 감탕나무, 생달나무 등의 조금은 생소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고창 수동리 팽나무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9월 4일, 전북 고창군 지역을 답사하는 날은 이상하게 나무들만 만났다. 답사를 며칠 나가야 거목 한 그루를 보는 것이 보통인데, 이날은 열 그루에 가까운 나무들을 만난 것이다. 그 중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446번지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멀리서 그 나무를 보는 순간 나는 그냥 얼어붙고 말았다.

천연기념물 제494호, 고창 수동리 팽나무. 멀리서 보이는 이 나무는 마치 우산을 쓴 모습이다. 나무의 생김새가 멀리서보아도 아름답다. 폭나무, 포구나무라고도 부른다는 팽나무 한 그루. 어딜 찾아보아도 이 나무가 도대체 몇 백년이나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아주 오래 묵었다는 것 밖에는.



한 걸음에 달려가 본다.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다. 팽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넘어질 뻔했다. 염소를 매어 놓은 줄에 걸린 것이다. 그 염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에 푹 빠져버렸다. 나무 가까이 기서 본다. 외과수술을 한 흔적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생육이 좋은 나무이다. 어떻게 이런 나무가 있을 수가 있나, 그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팽나무라 쓰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 읽는다.

수동리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에는 이곳이 바닷가였다고 한다. 간척지로 매립을 했다는 것이다. 이 나무에 배를 묶어두기도 했다니, 변해버린 주변 경관이 아쉽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었을까?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지고, 높지 않은 둔덕위에 팽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지금도 그림 같은 모습인데, 예전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수동리의 팽나무는 8월 보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당산제와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를 벌였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를 이 나무아래 모여 기원하던 당산나무라는 것이다. 오래도록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해온 수동리 팽나무.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팽나무들 중에서, 가슴높이의 둘레가 가장 크며 수형이 아름답다고 한다. 수세 역시 좋은 편이어서 팽나무 종을 대표할 만하다.

나무 주변을 돌아본다. 보면 볼수록 이 나무에 빠져든다. 한편으로는 멀리 산줄기를 바라보고, 예전 바닷물이 들던 곳은 가슴이 시원하게 터질 수 있는 들판이다. 나무는 얼마나 오래 묵은 것인지. 줄기 여기저기 이상한 형상으로 옹이가 뒤틀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밑동 움푹한 곳에는 나무 스스로가 이름 모를 버섯을 키우고 있다.

나무 밑동에 붉은 옷을 입고 서있는 사람이 키 180cm의 건장한 남자이다. 비교를 해보면 팽나무의 크기와 굵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동안 답사를 하면서 수많은 나무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수동리 팽나무를 보는 순간, 몇 날을 이야기를 해도 다 하지 못할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 난 이 나무를 그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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