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88번지 외암 민속마을 안에 자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95호 참판댁. 이 집의 건축연대는 19세기 말로 추정되며, 구한말 규장각 직학사와 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 공이 고종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집이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 이 집에서는 충남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아산 연엽주를 전통방식에 의해 제조하고 있다.

 

연엽주는 연잎을 곁들어 쌀과 찹쌀 누룩을 이용해 빚는 술로, 연꽃잎을 넣어 독특한 향기를 내므로 연엽주라고 한다. 연엽주는 외암리 마을에 살고 있는 예안 이씨 가문에서 익혀 내려온 양조기술에 의해서 제조된 술이다. 외암리마을 참판 이정렬의 4대조인 이원집(1829∼1879)이 쓴『치농(治農)』이라는 필사본에, 연엽주의 제조방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이 방법에 따라 술을 제조하고 있다.

 

 

큰집과 작은집으로 배치된 참판댁

 

이 집을 '참판댁'으로 부르는 이유는 집을 지은 이정렬이 참판을 지냈기 때문이다. 이 집은 큰집과 작은집으로 구분하여 배치되어 있다. 큰 집은 열 칸의 ㄱ자형 안채와, -자형으로 이뤄진 다섯 칸의 사랑채가 있다. 그리고 -자형 여덟 칸의 문간채가 사랑채 앞에 마주하고 자리를 하고 있다.

 

작은집은 여섯 칸으로 된 ㄱ자형 안채와, 일곱 칸으로 된 ㄱ자형 사랑채로 구성이 되어 있다. 큰집의 평면 구성은 대체적으로 중부방식을 따랐지만, 작은집 사랑채는 대청이 한쪽으로 배치되는 남도풍이 가미되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다섯 칸의 사랑채를 마주하고 있는 큰 집 대청 툇마루 위에 걸려있는 <퇴호거사>란 편액을 볼 수 있다. 퇴호 이정렬은 이사종의 11세손으로 그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인 관계로 명성황후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자 이정렬은 벼슬을 버리고 외암리로 낙향했고, 그 때 고종황제가 현재의 집을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퇴호(退湖)'란 호도 고종황제가 내린 아호임을 편액에는 적고 있다.

 

 

대문의 진입로에 돌담을 쌓은 참판댁

 

큰집 솟을대문의 대문간 앞으로는 양편에 돌담을 둘러쌓았다. 이 돌담이 솟을대문의 앙편 날개와 같이 비스듬히 펼쳐져 있으며, 이 돌담은 문간채의 끝을 향해 타원형으로 쌓여져 있다. 그리고 그 돌담 안에는 돌로 아래를 쌓고, 위를 옹기로 마감을 한 멋진 굴뚝이 서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돌담과 옹기굴뚝, 그리고 솟을대문이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멋진 공간을 연출한다.

 

사랑채를 보면서 우측 끝을 돌면 일각문으로 만든 중문이 있다. 중문에 붙여 낸 광채와 사랑채는 역 ㄴ자 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안채는 ㄱ자형으로 자리를 잡아 튼 ㅁ자 형의 구성을 이룬다. 막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지은 안채는 두 칸의 부엌과 안방이 있고, 윗방에서 꺾어 두 칸 대청이 있다. 그리고 건넌방을 두었는데, 앞으로는 툇마루를 꺾어놓아 연결을 하였다. 중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만들고 작은 화단을 꾸며 놓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탈하게 꾸며져 있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집이다.

 

 

종부에게만 전해지는 연엽주 제조법

 

참판댁의 종부로만 제조방법이 전해진다는 연엽주는 원래는 집안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가양주다. 이 술을 퇴호 이정렬이 고종황제에게 진상을 하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연엽주는 퇴호의 4대조인 이원집이 처음으로 재조를 한 이후, 종부에게로만 전승이 되어왔다고 한다. 가양주로 빚는 술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금기사항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술을 빚을 때는 목욕재계 후, 의복을 단정히 하고 수건으로 입과 머리를 감싸야 한다. 술독을 옮길 때도 손이 없는 방위를 택하는 등, 마을에서 제를 지낼 때 제관이 지켜야하는 금기사항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

 

연엽주를 가양주로 제조하는 외암마을 참판댁. 술이 익는 냄새라도 맡을까하여 부엌 앞까지 서성거렸지만, 굳게 닫힌 집안의 문은 열릴 기미가 없다. 집안을 한 바퀴 돌아 밖으로 나오면서 보는 솟을대문 앙 옆 돌담이, 이번 나들이 길에서는 더욱 정겨워 보인다.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강골마을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에는 정자이면서도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이 될 만큼 아름다운 열화당이 있다. 또 중요민속문화재 제157호인 이금재 가옥과 제159호인 이용욱 가옥도 찾아볼 수 있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 가장 아름답고, 오랜 기억에 남을 만한 집을 친다면 당연히 이용욱 가옥일 것이다.

 

집이 균형 있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도 그러하지만, 이용욱 가옥에는 담장에 '소리통'이라는 희한한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이다. 이 소리통이 주는 무한한 상상의 즐거움은, 그 어떤 것도 견줄 바가 아니다. 이용욱 가옥은 강골마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헌종 1년인 1835년 이진만이 지었다고 한다. 이용욱 가옥은 5칸의 솟을대문인 대문채(행랑채), 사랑채, 중간문채, 곳간채, 안채, 사당과 연못 등을 모두 갖추고 있다.  

 

사랑채 앞마당 담장에 난 소리통은 무엇?

 

이용욱 가옥을 돌아보면 '집이 참 이렇게 꾸며질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만큼 집의 전체적인 모양새가 반듯하다. 그러나 굳이 이 집의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것 보다는, 사랑채와 대문채의 사이에 있는 넓은 앞마당 담장에 있는 구멍 하나가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도대체 담장에 저 구멍은 무엇일까?

 


이 작은 구멍을 '소리통'이라고 한다. 이곳에 대고 무슨 소리라도 지른다는 것이 아니다. 이 소리통의 크기는 10cm × 20cm 정도이다. 사랑채에서 대문을 바라보면서 좌측담장 중간쯤의 사람 눈 높이에 이 구멍이 나 있다. 이 소리통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 담장 밖을 살펴보았다.

 

대문을 나서 좌측으로 돌면 옆집과의 담장사이에 길이 하나 나온다. 그저 좁은 골목길쯤으로 생각을 하면 될 만한 그런 길이다. 그런데 그 안으로 들어가니 이용욱 가옥의 담장이 조금 안으로 들어가고, 그 곳에 우물이 있다. 우리가 흔히 공동우물이라고 하는 곳이다. 이 소리통은 그 우물과 안마당을 막은 담장 가운데에 나 있는 것이다.

 

이용욱 가옥의 담장 밖에는 마을에서 가장 물 좋기로 소문난 공동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정보를 알 수 있는 소리통

 

이쯤 되면 이 소리통이 무슨 용도로 쓰였을 것이라고 답이 나오지 않을까? 우물이라는 곳은 마을의 아낙네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우물에 모인 아낙네들의 수다야, 이야기 하지 않아도 알만하다.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누구는 어떤 짓을 했는지. 누가 살기가 어려운지, 우물가에 모인 아낙네들의 수다는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 수다 가운데는 양반을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더러는 누구누구는 어떤 염문을 뿌렸는지도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런 우물가의 이야기가 소리통을 통해 안으로 그대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그저 벽에 귀를 갖다 대지 않고 근처만 가도 밖에서 하는 이야기가 다 들린다. 함께 답사에 동행한 일행에게 밖으로 나가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했다. 신경을 쓰고 들을 필요도 없다. 바로 귀에 대고 말을 하듯 그대로 다 들린다. 결국 담장 너머 우물가에서 수다를 떨면서 나온 마을의 모든 정보가, 이 소리통을 통해 하인들에게로 전해지고, 한발에 달려갈 수 있는 사랑채의 주인 어르신께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대문채와 마주한 사랑채. 넓은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이용욱 가옥의 대문은 처음에는 3칸이었다. 그러던 것을 이방희의 손자인 이진래가 5칸으로 개축을 했다

 

이용욱 가옥은 지방 사대부가를 대표하고 있는 집이다. 이 집에 사는 양반네들은 마을에서는 추앙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마을사람들에게서 대접을 받고 살기 위해서는, 마을사람들의 아픈 곳을 알아서 어루만져 주는 지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랫사람들이 양반집에 찾아가 '나 어디가 아프오'라는 말을 하지는 못한다. 이 소리통은 그런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마을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을의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교류의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양반들을 욕하는 자들도 더러는 있었을 테지만.

 

이 소리통이 하인들에게는 어떤 용도였을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소리통으로 바깥 우물 쪽을 내다보았다. 세상에, 우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밖으로 나가 우물에서 소리통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앞마당 밖에는 보이지를 않는다. 참 묘한 소리통이다. 사랑채와 대문채의 사이 담장에 자리를 잡은 소리통. 대문채는 하인들이 생활공간이다.

 

이용욱 가옥의 대문은 처음에는 3칸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이방희의 손자인 이진래가 5칸으로 개축을 했다는 것이다. 앞마당에서 보면 좌측에는 두 칸의 방이 있고, 우측에는 한 칸의 방이 있다. 왜 대문채를 넓히고 방을 더 드렸을까?

 

담장의 중간쯤에 소리통을 뚫어놓았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이 대문을 넓힌 이진래의 아랫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을 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 혼자 키들거린다. 여름철 하루 종일 밖에서 일을 하고 들어오면, 땀도 많이 나고 온몸이 꿉꿉하다. 그럴 때 시원한 찬물이라도 끼얹으면 날아갈 듯하다. 마을 사람들은 해가지고나면 하루 종일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이 우물에 와서 씻고는 했을 것이다. 이 우물은 물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으면, 더위도 가시지만 미용에도 좋다는 마을 분들의 이야기다.

 

젊은 하인들이 물소리를 들으면 잠이 올까? 아마 이 소리통을 통해서 담 너머에 있는 우물을 힐끗거렸을지도 모른다. 달이 으슥하면 남의 이목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을 테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결국 이 소리통은 집의 어르신은 정보를 수집하는 창구로, 대문채에 머문 머슴들은 야릇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은밀한 창으로 이용을 했을 것만 같다.

 


소리통 하나만 갖고도 무한한 상상을 할 수 있는 보성의 이용욱 가옥. 그래서 고택을 답사하는 길이 늘 힘든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어재 서울 경기지역에 첫 눈이 내렸다. 첫 눈이라고 하지만 눈이 온 표시도 나지 않게 조금 내리는가 싶더니 그쳐버렸다. 한 겨울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가급적이면 고택답사는 피하고 있다. 그것은 눈에 덮힌 고택의 정취는 아름답지만, 곳곳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오리 고가를 찾아 간 날은 눈이 발목까지 빠지게 쌓여있는 날이었다.

 

제천시 한수면 소재지에서 597번 도로를 따라 한수면에 있는 덕주사를 찾아가기 전, 좌측으로 보면 도로에서 조금 들어가 한송초등학교가 있다. 그 학교 교문 옆에는 초가 한 채와 기와 한 채가 나란히 보인다. 이 초가가 충북 민속문화재 제5호인 한수 명오리 고가이다. 이 명오리 고가는 초가로 꾸며졌으며, 원래는 한수면 명오리 303번지 풍무골에 있었던 것을,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눈밭에 집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아

 

명오리 고가를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세 번째 찾아가는 집이지만,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다. 대문 안으로 보면 슬리퍼 등도 보이고, 패널을 여기저기 쌓아 놓은 것이 사람이 사는 집 같은데 항상 문이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다. 이곳도 눈이 꽤나 내렸는지 집 뒤편으로 돌아가니, 밭에는 발목까지 빠지는 눈이 쌓여있고 담장의 초가위에도 눈이 쌓여있다. 할 수 없이 눈밭을 몇 바퀴를 돌면서, 집의 구석구석을 촬영하는 수밖에. 고가를 찾아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문이 잠겨 있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명오리 고가는 튼 ㅁ 자형의 집이다. 대문을 사랑채로 삼아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에는 두 칸 방을 드렸고, 대문을 지나 남쪽으로는 방과 외양간, 방앗간, 광으로 배열하였다. ㄴ 자형의 이 대문채는 사랑과 대문채를 겸한 집이다. 이 지역의 일반적인 민가의 형태를 갖고 있는 명오리 고가는 특별한 점은 없으나, 나름대로 중부지방 민가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고가이다.

 

 

건넌방에 낸 까치구멍의 용도는?

 

명오리 고가의 안채는 ㄱ 자 형으로 대문채와 마주하고 있다. 삼단의 돌로 쌓은 기단위에 지은 안채는, 안방을 기준으로 하여 정남향을 하고 있다. 안방의 좌측으로는 부엌이 있고, 우측으로는 윗방이 있다. 꺾인 부분에는 한 칸 대청과 건넌방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부엌 앞에는 누군가 패널을 가득 쌓아 놓아, 밖에서는 부엌문을 확인할 수가 없다.

 

밖을 몇 바퀴를 돌았지만, 안방이 있는 곳은 가려서 보이지를 않는다. 이럴 때는 할 수 없이 안방의 뒤편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고가를 답사하면서 생긴 나름대로의 답사방법이다. 이제는 웬만한 집은 밖에서 한 바퀴만 돌아보아도 집안 구조를 알 수 있으니, 그도 다행이랄 수밖에.

 

 

안채는 평범한 민가의 꾸밈이다. 그런데 안채의 건넌방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건넌방의 앞쪽에는 툇간으로 달아낸 한데 아궁이를 두었는데, 그 아궁이 우측에 까치구멍이 있다. 바람을 막으려고 종이로 발라 놓았지만, 이렇게 건넌방에 까치구멍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 까치구멍의 용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냥 작은 쪽문이라면 이 문을 통해 음식물 등을 들여보낼 수 있다고 하지만, 까치구멍이라니.

 

건넌방의 옆문 밖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다. 뒤로 돌아가니 대청의 뒤편에는 판자문이 있다. 옆과 뒷면을 보고나서야 이 까치구멍의 용도가 이해가 간다. 일반적으로 건넌방에도 뒷벽에 문을 하나정도 내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건넌방은 툇마루를 놓은 곳과, 대청에서 드나드는 곳 밖에 문이 없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작은 까치구멍을 한데 아궁이쪽에 하나 내어놓음으로써 환기를 원활하게 한 것이다. 작은 것 하나에서도 느낄 수 있는 지혜다.

 

 

판자굴뚝이 아름다운 집

 

명오리 고가는 굴뚝이 모두 판자굴뚝이다. 이 판자굴뚝이 이 초가집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판자굴뚝은 네모난 판자로 길게 사각의 연기통을 만들고, 그 중간에는 역시 나무로 움직이지 않게 고정을 시켰다. 그리고 맨 위에는 사방을 트이게 해, 위를 꺾은 판자로 마감을 하였다. 흡사 고깔을 쓴 것처럼 만들었는데, 모든 방의 뒤편에는 이 판자굴뚝이 서 있다. 이 판자굴뚝이 서 있어, 초가집이 더욱 여유 있게 보인다.

 

명오리 고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집은 전체적으로 크지 않지만, 이용을 잘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조금 흐트러진 사각형으로 쌓은 담 안에 집을 놓았는데, 대문채에서 북쪽 담 끄트머리에 측간을 두었다. 그리고 안채 부엌 밖에는 또 다른 한데 아궁이를 놓았다. 이렇게 전체적인 조형을 생각한 것이 명오리 고가의 특징이다. 비록 화려하지도 않고 남다를 것도 없는 초가이지만, 그 안에 한껏 여유를 부린 집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 조선 말기의 대학자이며, 의병장이기도 하다. 나라를 구하고자 살신성인 한 선생은 한 때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171에 소재한 모덕사 안에 자리한 고택에서 기거를 했다. ‘중화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고택은, 1990년 4월 선생이 경기도 포천에서 ‘호서 정산’으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던 집이다.

 

이제 113년이 된 이 한옥은 당시 선생이 일제에 의해 가택연금 중에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선생은 이 집에서 많은 사람들 모아놓고 강의를 하고,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이 집에서 선생이 사신 것은 고작 6년 여. 1906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왜헌병의 감시를 피하여 야간을 틈 타 떠나신 곳이다.

 

 

전국에 남아있는 선생의 사우

 

면암 최익현선생만큼 많은 사우와 유적 등에서 모시고 있는 분도 그리 흔치는 않다. 선생은 현재 청양 모덕사를 비롯하여, 경기도 포천의 채산사, 경기도 가평의 삼충단, 전북 군산의 현충단, 전북 진안의 이산묘, 진안 마령면의 영곡사, 전북 순창의 지산사, 전북 정읍의 시산사,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호남의병 창의지인 무성서원 등에 선생의 영정과 비 등이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전북 고창의 도동사, 광주 광산의 대산사, 전남 함평의 월악사, 전남 곡성의 오강사, 전남 구례의 봉산사, 전남 보성의 모충사, 전남 무안의 평산사, 전남 화순의 춘산사 등에도 선생의 영정과 위폐 등이 모셔져 있다. 전남 신안군에는 여기저기 선생의 흔적이 보인다.

 

 

경상도와 제주도, 일본, 강원도 등에도 선생의 유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경북 울진의 아산영당에 영정, 경남 하동의 운암영당에 영정이, 제주도에는 선생의 유적비 등이 있으며, 금강산에는 선생의 글씨가, 대마도에는 순국비가 있다.

 

일본의 쌀 한 톨,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아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이곳 중화당에서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경에 나포가 되어 대마도에 구금이 되었는데,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고 버선 발 속에 조국의 흙 한줌을 넣었다고 한다. 또한 물 한 동이를 갖고 배에 올랐는데, 일본 땅으로 끌려가서는 단 한 톨의 쌀도 입에 대지 않고 있다가, 1907년 단식 끝에 순국하셨다.

 

 

면암 선생은 일본 대마도에서 1906년 11월 마지막으로 임금께 글을 올렸다. ‘유소’라는 이 글에 보면 선생의 애국충정이 그대로 배어있다.

 

‘죽음에 이른 신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에 왜놈 경비대 안에서 서향 재배하고, 황제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신이 이곳에 온 이래 한술의 쌀도 한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지라, 차마 입과 배(먹는 것)로써 의를 더럽힐 수 없어 그대로 물리쳐 버리고 단식으로 지금 선왕의 의리에 따르고 있습니다.(중략)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일이 할 수 없이 이리 되었다고 속단마시고, 큰 뜻을 더욱 굳게 하여 과감하게 용진하여 원수 왜놈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새겨, 실속 없는 형식을 믿지 마시고, 놈들의 무도한 위협을 겁내지 마십시오. 또한 간사한 무리들의 아첨을 듣지 마시고, 힘써 자주체제를 마련하여, 길이 의뢰하는 마음을 버리고, 더욱 와신상담의 뜻을 굳게 하여 실력 양성에 힘써서 영재를 등용하고, 군민을 무양하여 사방의 정세를 보살펴서 일을 꾸미면, 백성들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것입니다.(하략)‘ - 자료출처 모덕사

 

 

이등박문과 원세개도 만사를 보내와

 

면암 최익현 선생은 1907년 1월 1일에 순국하시니, 제일 먼저 이등박문이 만사로 조문을 했다고 한다.

 

‘대한 왕께 절 올리며 임을 위해 곡 하올제

흐르는 눈물 바람에 날려 온 하늘에 비가 오네.

고국명산 그 어느 곳에 임의 유택 정하올가?

그 좌향 묻지 마라 백이의 서산에서 노중연의 동해여라‘-이등박문

 

 

7월 14일 장마비속에 찾아간 청양군. 선생이 살다 가신 중화당은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조상의 위폐를 모신 영모재로 구성되어있다. 중화당의 사랑채 앞에서 잠시 집을 바라다본다. 이 집을 한 바퀴 돌면서 집에 대해 곳곳을 소개한다는 것이 새삼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그저 이곳에서 살다가 타국땅에서 순국하신 선생의 뜻에 만분지일이라도 알고 간다면, 그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을.

 

사랑채 툇마루 앞에 걸린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충효전가(忠孝傳家)’, 충과 효를 대대로 물리는 집이라는 소리이다. 아마도 선생의 그 충정을 이 한 마디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세차게 퍼 붓던 장맛비가 잠시 멈추었다. 중화당 앞 연못가에 조성한 선생의 동상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선생이 사시던 집조차 돌아보기가 죄스럽기 때문이다.

 

충남 청양군 화성면 산당로 393-42(화암리 222)에 소재한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31호인 ‘청양 임동일가옥’. 19세기 말 송암 임용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연못 조성 시 소나무를 심었는데, 소나무가 옆으로 누운 듯 자라서 ‘와송정(臥松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7월 14일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와송정.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로 조성이 되어, 전체적으로는 ㄷ”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다. 이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우진각 지붕으로 된 문간채가 끼워져 있다.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문간채를 제외한 사랑채만을 답사하였다.

 

 

큰 정자 형태로 구성한 사랑채

 

임동일 가옥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바로 코앞이 보이지 않도록 쏟아지는 장대비로 인해, 좁은 시골 길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가다가 다시 마을 안으로 한참을 가서야 만나게 된 임동일 가옥의 사랑채인 와송정.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동일 가옥의 고택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랑채는, 정면 7칸 중 우측 2칸에 고택 앞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게 누마루를 올려놓았다. 사방이 훤히 트인 누마루는 그야말로 정자의 운치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조성했다. 누마루 위에 앉아있으면, 앞으로 펼쳐진 연못과 숲, 그리고 주변 경치까지 구경을 할 수 있다.

 

 

누마루 옆으로는 2칸의 사랑방을 들였고, 사랑방 옆에는 다시 1칸의 마루방을 들였는데, 이들 앞에는 반 칸씩의 툇마루가 달려있다. 사랑채 좌측면에 있는 하인들이 거처하던 방 좌단은 중도리와 종량사이에 45도 방향으로 ‘강다리’라고 부르는 독특한 부재를 걸쳐 결구하여 추녀를 받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는 규모가 크고 전통 목조건축 양식상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주변으로는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도록 조성해

 

사랑채인 와송정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물은 산에서 흐르는 물을 수로를 통해 연못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를 ‘와송정’이라고 부른 것은 이 사랑채가 정자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와송정 마르에 앉아 앞을 내다본다.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를 덩이식물이 타고 오른다.

 

 

지금은 앞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지만, 예전 이 사랑채를 지을 때만 해도 앞에 산 경치가 일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집을 지은 역사는 길지 않으나 어느 곳 한 곳도 흐트러짐이 없어 보인다. 이 집을 지은 주인의 섬세함이 그대로 배어있는 정자식 사랑채이다.

 

주인의 심성을 알 수 있는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본다. 그야말로 시야가 트여져 정자에 앉은 느낌 그대로이다. 이 사랑채를 지은 송암 임용주는 아랫사람들까지도 생각한 마음 씀씀이가 보인다. 바로 하인들이 사용하는 방 밖에 있는 반 칸의 툇마루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툇마루는 일자형의 마루바닥을 깔지만, 와송정의 하인 방 앞에 놓은 툇마루도 누마루로 깔았다.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임동일 가옥의 사랑체인 와송정. 기둥을 세운 초석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사랑방에서 올림 누마루를 내다볼 수 있도록 작은 문을 하나 내어놓았다. 아마 이 작은 문으로 바람이라도 받아들인 것일까? 닫혀져 있는 방문을 열 수가 없어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모처럼 찾아본 고택 답사였기에, 장대비도 막을 수가 없었나 보다. 와송정을 뒤로하고 돌아서려는데, 또 다시 장대비가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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