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번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서 있는 보물 제928호는, 조선 광해군 때 세워진 사리탑과 그 안에서 발견된 여러 사리장치들을 일괄 지정한 것이다. 사리탑 1기와 탑 안에서 발견이 된 6물 6점을 지정하였다. 이 사리탑은 영원히 우리 땅에서 볼 수 없었던 것 중 하나이다.

 

보물의 공식 지정 명칭은 ‘남양주 봉인사 부도암지 사리탑 및 사리장엄구’이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사리를 모셔 둔 탑으로, 광해군은 왕세자의 만수무강과 부처의 보호를 바라며 봉인사의 부도암이라는 암자에 사리탑을 세우게 하였다. 사리탑에는 승려의 사리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갔던 보물 사리탑

 

이 사리탑은 1620년경 봉인사 부도암(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송릉리 소재)에 세워졌던 것이다. 일제시대인 1927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고베로 반출되고 그 뒤 대판 시립미술관에 보관되었다가, 1987년 2월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봉인사 사리탑은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조선시대의 유물연구에 기초적인 자료가 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높이 3.08m의 사리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은 상·중·하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고, 그 위로 북처럼 둥근 탑 몸돌을 올려 사리를 모셔 두었다. 8각의 지붕돌을 그 위에 올린 뒤 꼭대기에는 길쭉한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보기에도 조선시대의 사리탑 중 걸작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 사리탑의 전형

 

이 탑의 뛰어난 조형은 기중돌인 중대석에 새겨진 구름과 당초문양, 꽃잎과 여의주무늬, 상대석 옆면 테두리 속의 당초무늬, 탑신부의 운룡무늬 등에서 새로운 조형적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경사가 급한 지붕에 처마 밑으로 서까래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거나, 윗면에 용머리를 새긴 수법 등은 기존의 사리탑과는 다른 형태이다.

 

상륜부가 길쭉하게 올라간 형태나 왕릉의 호석처럼 주위에 난간과 궁판석을 돌린 방식 등은 이 탑이 곧 조선 초기에 제작된 중원의 청룡사의 사리탑이나, 양주의 회암사의 사리탑을 모방하여 조선 초기 사리탑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작연대가 밝혀진 사리탑

 

이 탑의 발견 당시 외합 속에는 명주실과 비단, 향이 남아 있었으며, 은으로 만든 내합의 뚜껑에는 마름모형의 무늬를 볼록 눌러새김의 수법으로 낸 후 그 안에 역동적인 운룡무늬를 장식하고 금박을 입혔다. 그리고 이 합의 밑바닥에는 네 줄의 명기와 함께 '만력 48년 경신 5월(萬曆四十八年庚申五月)의 글귀가 새겨져, 이 유물이 광해군 12년인 1620년에 봉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사카시립미술관에 전시가 되어있던 이 사리탑은, 1987년 소유자인 이와다 센소의 자발적인 기증 반환으로 되돌아 오게 된 것이다. 이는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는 원소유국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유네스코 협약정신에 의해 돌아오게 된 것이다. 수많은 누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찬탈해 간 일본인 중에, 이런 양심적인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놀랍기만 하다.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의 문화유산들. 그 역사 속에서 찬연하게 빛을 발했던 문화재들이, 언제나 돌아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인지.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들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답답함만 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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