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난 ‘세월’이라는 말보다. ‘시간’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어째 세월이라고 표현을 하면, 앞으로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그에 비해 ‘시간’이라는 단어는. 앞으로도 수많은 시간들을, 내가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다.

 

벌써 추석 연휴라고 한다. 다음 뷰에 글을 보니 추석에 대한 음식이며, 글들이 부지기수로 눈에 띤다. 추석 때도 그렇고 설 때도 그렇다. 솔직히 난 이런 글들이 보이면 썩 기분이 좋지가 않다. 늘 혼자이고, 늘 방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절집을 찾아가 우울한 기분을 달래든지, 아니면 행사를 하는 곳을 돌아친다.

 

 

 

집 나오면 개고생, 정말 그랬소

 

‘명절’, 참 좋은 말이다. 오죽하면 명절이라고 했을 것인가?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나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고 난 뒤,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내가 ‘이다’리고 하지 않고 ‘일 것이다’라고 쓴 것은, 벌써 이런 모습을 잊고 산지가 20년 가까이 되었기 때문이다.

 

살다가 보니 어쨌든 가족들과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20년 세월을 길 위에서 보냈다. 명절 때만 되면 그저 산행을 하던지, 아니면 문화재 답사를 한답시고 며칠 씩 길을 떠나고는 했다. 아마도 그런 날이 길어지다 보니, 이젠 그런 명절이라는 말에 무덤덤해 진 듯도 하다.

 

몇 해 전인가보다. 그 때도 계절이 지금쯤 되었다. 명절 전날 길을 나섰다. 그냥 방안에 쭈그리고 있는 것이 싫어서이다. 호기있게 길을 나선 것 까지는 좋았다. 잘 곳이야 돈만 주면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배가 고파 무엇을 좀 먹으려고 나갔지만, 문을 연 곳이 한 곳도 없다는 것이다.

 

하긴 명절 아침에 누가 장사를 하겠다고 문을 열 것인가? 아마 오후 6시까지인가 물로 배를 채우면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을 한다는데, 그 말이 정말 명언이다. 문제는 이렇게 명절 때마다 배를 곯은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개고생을 벌써 20년 가까이 했지만, 아직도 개고생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니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을까 싶다.

 

 

그래도 살만하잖소?

 

엊그제인가, 지인들과 만나서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저녁이 되면 수원 지동 순대타운 안은 온통 인파로 넘치는 곳이다. 자리 하나 차지하기도 버거울 때가 있다. 더구나 명절 밑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인해 통로를 다니기도 힘들 지경이다. 밖에서 술을 마시다가 옆을 보니 무엇인가 꿈틀거린다. 비닐 안에 무엇이 들어있어서 처음에는 누가 무엇을 갖다 버린 줄로만 알았다.

 

한데 자세히 보니 비닐을 푹 뒤집어쓰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것이다. 노숙자가 추위를 피해 그렇게 비닐봉지 한 장을 머리서부터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 세상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다. 남들은 명절이라고 모두 들떠서 난리인데, 저렇게 오갈 데 없이 비닐 한 장으로 쌀쌀한 밤 날씨를 견뎌내고 있다니.

 

하긴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제가 게을러서 그렇다고. 하지만 이 분 초저녁에 그곳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미 등이 굽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연세가 70을 넘을 듯하다. 그런 어르신이 어디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편에서 들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도대체 어떤 마음이 들까?

 

비도 오는데 오늘 저녁엔 이 어르신 어디로 갈 것인지? 나가서 막걸리라도 한 잔 대접을 해야 할 듯하다. 사람 사는 것이 별거 아니잖은가? 즐거운 명절에 기분 언짢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이제 우리 주변에 쓸쓸하게 명절을 보내야 하는 이웃도 있다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즈음 불교계가 시끄럽다. 하긴 어떤 종교라고 시끄럽지 않은 것들은 없다. 그곳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어제(28일)가 불기 2556년 ‘부처님 오신 날’이다. 그 분은 이 땅에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시기 위해 스스로 영화를 버리고 수행을 하셨다.

 

난 수행자가 아니기 때문에 불교의 깊은 가르침은 알지 못한다. 다만 그저 요즈음은 나름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을 할 뿐이다. 예전 같으면 열을 펄펄 내고 생 나리를 쳤을 세속의 시끄러움도, 요즈음은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아마도 나이가 먹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어른들 틈에서 배운 마늘을 가는 것을 겨들고 있는 세 살배기 꼬마 여자아이 고아라


 

‘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의 진리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아이와 같이 살라고 하셨단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의 초심을 잃지 말라는 뜻인 듯하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있는 ‘고려암’을 찾아갔다. 아침 일찍 가까운 절집을 찾아갔다가 들려본 곳이다. 등을 달고 난 많은 사람들이 쌀에 촛불을 켜고 축원을 한다. 절집과는 또 다른 초파일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잡한 와중에 한 꼬마 아이가 눈길을 끈다. 어른들이 매운 마늘을 까고 있는데, 그 틈에 끼어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이제 겨우 뒤뚱거리며 걸음을 걷는 세 살짜리 여자아이이다. 웬만한 아이들 같으면 맵다고 울음이라도 울 것 같은데, 꿋꿋하게 곁을 지키고 있다. 그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소재 고려암의 전안에도 많은 등이 걸려있다. 아레는 쌀을 담은 그릇에 촛불을 켜 축원을 한다. 불교와는 또 다른 축원의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만 자지러지는 줄 알았다. 전안(무당들이 신령님들을 모신 곳을 전안이라고 부른다)에 들어간 이 꼬마 아이. 이른들 틈바구니에서 신나게 따라서 절을 한다. 그 전에도 이 아이가 인사를 하는 것을 한참이나 웃었다. 어른들만 보면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아이 때의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이 꼬마 여자아이 때문에 전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절을 따라 하는지, 그 모습이 너무 귀엽기 때문이다. 엉덩이를 하늘로 추켜올리고 절을 하는 모습에, 세상 사람들이 정말로 아이와 같은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세 살배기 여자아이 고아라가 어른들을 따라 절을 하고 있다


저 세 살배기 어린이가 무엇을 알 것인가? 그저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다. 난 그 모습에서 공부를 한다. 아이들을 키울 때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비록 세 살배기 어린 꼬마가 하는 짓이 귀엽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지만 그 안에는 큰 공부가 숨어있는 것이다.

 

아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아이들이 성장을 하면서 그대로 어른들의 흉내를 낸다는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 불화가 잦은 부모님들을 보고, 아이들은 결국 싸움 밖에는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 세 살배기 꼬마 아이(여, 고아라)에게서 배운 부처님의 지혜. 역시 어른의 스승은 아이라는 말이 맞는 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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