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를 돌아보다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나혜석 생가터 앞에서 열린 10회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 - 인간 나혜석 세상 밖으로 나오다’. 행궁동(동장 손화종) 주민자치회(회장 한창석)와 나혜석 생가터 문화에술제 운영위원회(위원장 조이화)76일부터 3일간 행궁동 나혜석 생가터 앞 일원에서 열렸다.

 

생가터 앞 도로에 무대를 설치하고 열린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는 그동안 10회를 맞이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날 생가터 예술제에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하여 조명자 수원시의회 의장, 한상율 팔달구청장, 박흥식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 및 경기도의회 의원과 수원시의회 의원 등 300여명의 관객들이 함께했다.

 

개막식 행사는 박경현 무용단의 식전공연 하늘소리를 시작으로 개막선언, 내빈소개, 감사패 전달, 나혜석 연보낭송, 개막사, 염태영 수원시장 및 조명자 수원시의회 의장의 축사, 유선 시인의 헌시 등으로 이어졌고, 본 공연에서는 수원재현배우학교의 정월 나혜석연극, 김승란의 빈센트 등 노래, 수원시인협회(회장 박명두)의 제3회 나혜석 문학상 시상식, 금빛 합창단의 합창 순으로 진행됐다.

 

나혜석 생가터 문화에술제는 다양한 행사가 곳곳에서 열려 행궁동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생가터와 화령전, 행궁동 일원에서 열리는 행사는 한 달 동안 상설운영 프로그램이 열린다. 나혜석 문화예술제 10년 아카이브 역사전, 나혜석 10년 미술전, 나혜석 골목전 등이 나혜석 자료관과 행궁동 거리에서 열려 나혜석 생가터를 찾아 온 관람객들과 만났다.

 

 

독립운동을 한 나혜석을 기리는 작업 이어가야

 

정월 나혜석은 1986418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대의 작가, 시인,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화가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아명은 나아지, 나명순이며 아호는 정월이다. 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후,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했다.

 

경성으로 돌아 온 나혜석은 191931, 3,1만세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 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여 그를 따라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1927년에는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유럽여행을 한 여성이 되었다.

 

19232월 동명지에 첫 딸을 출산한 나혜석은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에게 행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한 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기고한 바 있다. 그녀는 출산과 자녀양육을 감동적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녀에 대한 맹목적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어미 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여기서 나혜석은 스스로 나는 할 일이 많다. 이제야 예술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이와 동시에 나는 어머니가 되어가고 있었다.’라는 말을 통해 모성은 본능이 아니다 라는 점을 지적한다.

 

나혜석의 모된 감상기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솟아오르는 정이라고들 한다. 그러면 아들이나 딸이나 평등으로 사랑할 것이다. 어찌하여 한 부모의 자식에게 대하여 출생시부터 사랑의 차별이 생기고, 조건이 생기도 요구가 생길까. 아들이니 귀엽고 딸이니 천하며, 여자보다 남자를, 약자보다 강자를, 패자보다 우자(優者), 이런 절대적 타산이 생기는 왠일인가. 이 사실을 보아서는 그들의 소위 솟는 정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

 

1922429일 큰딸 김나열의 1년 생일에 나혜석이 쓴 감상기 중 일부이다. 이 글에서 나혜석은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표현을 하기도 했다. 세인들은 항용 모친의 애라는 것은 처음부터 ()’된 자 마음속에 구비하여 있는 것 같이 말하나, 스스로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의 의식을 바꾼 선각자 나혜석

 

우리 조선여자를 위하여 일심전력하는 나혜석 여사는 금번 당지 팔번통 태성의원 내에 여자 야학을 설립하고 매주 3일간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열성으로 지도하여 입학지원자가 날로 많다더라’ 19223월경 신문에 난 기사의 일부이다.

 

1922년 남편 김우영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전보되자 나혜석은 그를 따라갔다. 안동현으로 남편 김우영을 따라간 나혜석은 19223월부터 안동현 태성의원(泰誠醫院) 내에 안동현 여자야학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나서는 한편, 부영사 부인의 직위를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또한 의열단 김원봉 등에게 거사 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약 6년간 안동에 정착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인사회를 보듬으면서 화가로서의 창작활동도 활발하게 이어나갔다. 나혜석은 안동의 생활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사회상으로 사업을 해본데도 여기요. 개인적으로 남을 도와본대도 여기요. 인심에 대한 짠맛 단맛을 본대도 여기요.”라고. 나혜석은 6년여 동안 안동에 거주하면서 여성의 몸으로 신교육사업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일을 감당했다.

 

사람들은 나혜석을 불륜녀, 혹은 이혼녀등으로 치부한다. 나혜석이 한 말 중 "정조는 취미다""자식은 악마다." 혹은 "결혼은 지옥이다" 라는 등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그러한 사회적 금기를 깨는 말로 인해 나혜석은 사회로 부터 완전히 소외된다. 그렇게 신여성으로 살아가던 나혜석은 말년에 들어 인간들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수원출신의 여성해방론자 나혜석

 

나혜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이다. 혹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화가요 문학가이며, 민족운동가에 여성해방론자라는 긴 수식어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혹자는 나혜석을 현대를 살아가는 개방적인 여성이라는 것에는 찬성을 하지만,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난해함을 지닌 여성이라는 것이다.

 

나혜석이 추구한 것은 시집살이라는 올무에 갇혀 음지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닌, 세상 밖으로 나와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살아가는 그런 여성을 추구했다. 인간으로, 그것도 당당한 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것이다.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세계여행을 1927~8년에 했다는 것은, 나혜석이 얼마나 신문물에 목말라 했는지 가늠이 간다.

 

결국 그러한 세계여행이나 그녀가 쓴 글들에서 치열하게 남들보다 앞장서서 세상을 살았던 나혜석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니혜석에 관한 각종 자료를 보면 나혜석이 얼마나 신문물에 목말라했고 여성들의 의식변화를 위해 노력했는가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목소리를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목소리는 단지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좀 더 진취적이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조선 남자들은 참 이상합니다. 자신들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자신의 부인에게는 정조 지키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나혜석의 이혼고백장, 1934년 삼천리)

 

이 한 구절의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조선의 남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성들을 자신들의 아래에 두고 비하시키는 그러한 사회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온 나혜석. 그녀는 오늘 나는 나혜석이다.”라고 절규를 하고 있다. 1896년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40세인 1935년 다시 수원으로 돌아 온 나혜석은 1937년 수덕사, 다솔사, 개심사, 해인사 등으로 돌아다녔다.

 

 

예산 수덕여관과 나혜석

 

예산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 기거하던 이응로 화백은 1923년 당시 경성부에서 유명한 서예가이자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 사군자, 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인 192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墨竹)’을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고, 1946년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하기도 했다.

 

이 수덕여관은 수원출신인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나혜석이 수덕사에서 3년간 머물렀다고 하지만, 수덕사 경내가 아닌 이 수덕여관에서 묵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 수덕여관이야말로 우리 미술사에 남녀 거장이 묵었던 곳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곳이다

 

정월 나혜석, 우리는 그녀를 흔히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나혜석의 생전 당시 그 어느 누구도 나혜석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여류화가요, 시인이다. 또한 여성의 권리신장을 주창한 신여성이기도 하다. 19481210일 당시 나이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혜석을 기리는 나혜석 생가 신축 필요하다

 

삶이 고단해지자 출가할 뜻을 가졌던 나헤석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돌다가 반신불수로 양로원 등지를 떠돌았다. 나혜석은 194612월 눈보라치던 날, 거리에서 한 행인에게 발견되어 시립자제원(지금의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분류된 채 생을 마감한다. 관보에는 그의 사망 연월일이 19491210일로 되어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나혜석이 사망시기가 1946, 1948년 등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나혜석의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라는 시이다. 하지만 나혜석은 꽃 한 송이 자녀들에게 받지 못한 체 그가 어디 묻혀있는지조차 알 길 없다. 행궁동 나혜석 문화예술제 개막식장에서 만난 행궁동 주민자치회 한창석 회장은 나혜석을 기릴 수 있는 생가가 복원돼야 합니다. 생가터 주변 건물을 매입해서라도 나혜석에 대한 모든 것을 이곳에서 볼 수 있도록 해야죠. 그리고 나혜석 거리도 행궁동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현재 인계동에 소재한 나혜석 거리로 인해 나혜석에 관한 올바른 평가를 받기 어렵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저희는 늘 나혜석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나혜석 생가터 비가 있는 골목을 막고 행사를 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나혜석 생가터라고 소개를 해도 엉뚱한 인계동 나혜석 거리를 찾아가기도 해요. 그래서 주민들이 불편을 느끼지만 생가터 앞에서 행사를 갖는 것이죠.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재대로 알릴 수 있으니까요

 

장맛비가 연일 계속되다가 모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난 지난 3일 오전. 팔달구 행궁동 문학인의 집 2층에 자리하고 있는 나혜석 기념자료관에서 만난 10회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조이화 운영위원장은, “정월 나혜석이라는 인간에 대해 새삼 많은 것을 느낀다고 하면서 그동안 정월 나혜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일부에서는 이혼녀 등으로 폄하까지 하는 등 우리 수원을 대표하는 신여성이면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헸다며 안타까워했다.

 

여성의 선구자라고 하는 정월 나혜석. 나혜석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혜석은 이 시대에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8, 인간으로써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나혜석.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 니혜석을 만날 수 있는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나혜석 생가터를 찾아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정월 나혜석을 만나보길 원한다.

특별취재.  수원복지신문 하주성, 한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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